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56
0
굶주린 하이에나는 결코 먹이를 놓치는 법이 없지. 우리 반 남자애들치고 철주에게 당하지 않은 애들이 없어. 철주가 나를 괴
롭히지 않는 건, 내가 키가 크고 태권도를 배워서일 거야.
“안녕, 난 이철주야.”
철주가 능글맞게 인사하며 전학 온 내 짝 민우를 살폈어. 민우의 가냘픈 몸집과 작은 키, 꾀죄죄한 모습을 본 녀석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어.
다음 날 철주는 민우의 연필심을 모조리 부러뜨렸어. 민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하얘진 얼굴로 필통을 덮을 뿐이야.
“자, 이거 빌려줄게.”
철주가 돌아가자 나는 민우에게 내 샤프를 건넸어. 민우는 별로 고마워하는 기색도 없어.
민우의 옷은 재활용 수거함에서 뒹구는 옷처럼 낡았어. 입가에 항상 김칫국물 같은 것을 묻히고 다녔고 수업 시간의 대부분은 엎드려 있어.
오늘도 녀석들은 민우에게 집적거렸어. 철주와 철주를 따라다니는 시우와 태석이야. 녀석들이 민우에게 다가오는 걸 보고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어.
화장실을 다녀와보니 민우의 연습장에 낙서가 잔뜩 그려져 있어. 철주의 짓이겠지.
“너는 화나지도 않아? ”
내가 민우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어.
“달리아 왕국에는 저런 말썽꾸러기들만 모아 놓은 곳이 있어. 뉘우치지 않으면 노예로 팔려 가게 되지. 그런데 두고 보면 알 걸. 쟤는 사실 착한 애야.”
민우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렸어. 나는 민우가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어.
미술시간, 흘끗 민우가 그린 그림을 보았어. 아이들이 날개 달린 강아지를 타고 하늘을 날거나, 고양이가 무도회에 춤을 추는 우스꽝스러운 그림이야.
“선생님이 풍경화 그리라고 했잖아. 너 대체 뭘 그린 거야? ”
“풍경화 맞아. 여긴 우주 밖에 있는 달리아 왕국이야. 지구와는 좀 다르지.”
“네가 전에도 말한 그 왕국? 그게 뭔데? ”
“음, 하늘나라로 떠난 착한 어린이들만 가는 멋진 왕국이야.”
민우의 두 눈에 맑은 빛이 가득 찬 것 같았어. 나는 자리에 일어나서 창가로 갔어. 나도 모르게 구슬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거든.
쉬는 시간이 되자 철주 패거리들이 또 거들먹거리며 다가왔어.
“이건 웬 괴상한 그림이냐? 용진아, 안 그래? ”
철주가 나를 돌아보며 내 어깨를 가볍게 쳤어. 나는 비굴한 웃음을 짓고 복도로 나갔어. 돌아와 보니 민우는 엎드려 있고 바닥에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널브러져 있었어.
그날 밤 난 잠이 잘 오지 않았어. 민우의 물기 어린 눈동자가 계속 떠올랐어.
나는 벌떡 일어나 벽에 걸려있는 나의 전국 어린이 태권도 대회 우승 사진을 쳐다봤어.
‘아, 몰라. 내 일도 아닌데! ’
난 다시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어.
‘형아. 나 이, 이것 좀 해 줘.’
늘 말을 더듬거리며 뭔가 부탁하던 동생의 눈동자가 떠올랐어. 착한 아이들의 눈빛, 민우의 눈과 비슷했어. 내 귓가로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어.
체육 시간이 끝나고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고 있을 때야. 어디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 맨 끝의 좌변기 칸에서 나오는 소리야. 문이 반쯤 열려있어. 민우가 앉아서 울고 있는 게 보여. 민우 눈에 퍼런 멍이 또렸했어.
문득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울면서 집에 돌아왔던 내 동생 얼굴이 떠올랐어. 마음의 불꽃이 화르르 일었어. 나는 곧바로 교실로 돌아 왔어. 민우의 책상 위에 철주가 엉덩이를 깔고 앉아 졸개들과 히덕거리고 있었어.
순간, 나는 철주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어. ‘억’철주가 얼굴을 감쌌어.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마구 주먹을 휘둘렀어. 아이들이 말릴 때까지.
철주의 얼굴에 코피가 흘렀어. 녀석은 수탉처럼 허세만 가득했을 뿐이야. 선생님이 달려와 엉엉 우는 철주를 보건실로 데려갔어.
잠시 뒤 교무실에 철주 엄마가 왔다고 애들이 수군거렸어.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렀어.
“아이들에게 얘기 들었어. 철주 어머니가 교양 있는 분이더라. 철주 아빠와 이혼한 뒤 저렇게 비뚤어졌다고 오히려 미안해하시더구나. 그래도 싸우는 건 안 돼. 앞으로 그런 일 있으면 선생님에게 먼저 말해.”
나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어.
“너 내가 방심했어. 컨디션이 안 좋았거든. 나 엄마 때문에 너랑 안 싸우는 거야.”
철주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지만 그 뒤로 나와 민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여름방학이 다가올 무렵이야. 민우는 내 연습장을 가져가더니 끄적거렸어.
‘나는 사실 달리아 왕국의 귀족이다. 너에게도 관직과 영지를 내릴 것이다.’
나는 민우를 뚫어지게 쳐다봤어. 민우는 얼굴에 뿌듯한 미소를 띤 채 내게 물었어.
“너 어제 별똥별 뉴스 봤지? ”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몇십 년 만에 무슨 별똥별이 쏟아졌다고 뉴스에 나왔거든.
“그게 올가을에 돌아오라고 나한테 보내는 신호야. 내가 잠시 왕에게 대들어 쫓겨났었지. 넌 이다음에 천천히 놀러 와. 내가 우리 왕국으로 초대할게.”
나는 수업이 끝난 뒤 선생님을 찾아가 민우의 행동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렸어. 선생님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조용히 내 손을 잡았어.
“민우가 어릴 때 큰 병을 앓아서 마음이 좀 아프단다. 민우 아버지가 졸업 후에 특수학교에 보낸다고 말씀하셨어. 용진아, 너도 그냥 당분간 모른 척하고 잘 대해줘.”
나는 그제야 모든 궁금증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허물어졌어.
세상이 온통 단풍으로 곱게 물든 오후였어. 집에서 뒹굴고 있는데 엄마가 급히 나를 불러.
“선생님이 지금 너 데리러 집으로 오신대. 민우라는 애가 교통사고를 당했나 봐. 어쩌면 오늘 밤 넘기기 힘들대. 너한테 꼭 할 말 있다고 찾나 봐. 아니, 어떻게 그런 어린애가….”
엄마가 소리 내어 흐느꼈어. 엄마가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나는 알아.
병원에 가보니 뜻밖에 철주도 와 있었어. 민우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산소 호흡기를 꽂고 자고 있었지.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벌게진 민우 아빠가 곁에 있었어.
“선생님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네가 용진이? 고맙다. 민우가 네 얘기 많이 했어.”
민우 아빠가 투박한 손으로 내 손을 꼬옥 잡았어.
“선생님, 세상에 민우가 말이에요. 아까 철주 귀에 대고 힘겹게 속삭이더라고요. 미안해하지 말래요. 자기는 이제 원래 떠날 때가 되었대요. 엄마 없이 키우느라 내가 먹이기를 잘 먹였나, 입히기를 잘 했나. 흐흑….”
민우 아빠는 벽에 기대 한동안 서럽게 울었어. 민우가 다시 수술실에 들어가고 우리는 복도 휴게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기다렸어.
밤이 이슥해지자 선생님과 철주는 꾸벅꾸벅 졸고 나도 눈꺼풀이 감겼어. 얼핏 창밖에 희미한 빛이 보였어. 나는 창가로 다가갔어. 아! 푸른빛의 2층 집 같은 커다란 우주선이 병원 뒤뜰에 서 있었어. 잠시 뒤 병원에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 나와. 세상에, 민우였어. 우주tjs 문이 열리더니 또 한 아이가 보여. 그 아이는 민우에게 빨강 망토를 씌워주더니 둘이 다정하게 손잡고 우주선 안으로 들어갔어. 아이의 얼굴을 보고 나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 푸른 우주선은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밤하늘 저편으로 사라졌어.
“아이고, 민우야! ”
그때, 민우 아빠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어. 민우는 열두 살 나이에 그렇게 지구를 떠났어.
민우에게 빨강 망토를 씌우며 손잡던 애는 작년에 병으로 떠난 내 동생이었어. 아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어! 민우는 때가 되니 우주 밖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간 것뿐이야.
나는 어릴 때부터 내 동생과 별로 놀아준 적이 없어. 다운증후군 아이가 내 동생이라는 게 창피했거든. 내 동생도 이제 나를 다 용서했겠지?
민우와 내 동생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지금쯤 귀족처럼 살고 있을 거야. 나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어. 민우는 이다음에 나를 초대한다고 했지. 짜식, 기다려라!
별빛이 수놓은 밤하늘을 바라보면 난 늘 기분이 설레. 저 푸른 우주 너머에 어딘가에는 또 다른 왕국이 있어. 언젠가 너무 보고 싶은 착한 내 동생과 민우도 함께하는 신나는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