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봄호 2025년 3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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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내가 사랑스러워.
돈이 떨어져 13시간 동안이나 굶은 담배의 첫 모금 맛과 함께 문득 그걸 깨달아. 아직 벌어지지 않은 앞 대문니 사이로 뛰쳐나가지도 않는 침을 입가로 질질 흘리며 생각하면 어떤 때는 귀여워 죽겠어. 어쨌거나 세상 사내들은 내게 제법 많은 것을 가져다주니까. 엄마 아빠가 죽었다 깨어나도 해주지 못할 것을 그들은 거저 주었으니까.
내 나이 열하고도 셋. 이미 세상을 다 살아버린 느낌이야. 그래도 코발트 가로등 불빛보다 더 큰 해가 하늘에서 헛발질을 일삼을 때 나를 아는 사람들이 한 마디씩 던지는 말을 제외하곤 세상이 그다지 나쁘지 않아. "연아, 너 왜 학교 안 가니." 젠장, 이보다 더 지겨운 말은 없을 거야. 도대체 나와 학교라는 머리 쥐나게 하는 세상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학교라는 데는 비가 너무 오거나 큰바람이 겁나게 몰아칠 때 동네 사람들 피신시킬 때를 제외하곤 도대체 쓸모라곤 없는 곳이거든. 거기선 내게 수돗물 외에 밥 한 공기 주지도 않았어. 그런 델 내가 왜 가야 하냔 말이야. 나는 학교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아. 전철의 가랑이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다리 아래도 좋고 짓다 만 무허가 건물의 어두운 공간도 맛 들이기 나름이지. 나는 그런 데서 주로 내가 필요한 것들을 얻어. 귀여운 내 사내들로부터.
그러고 보니 내겐 집이란 게 없어. 집이 없다는 것은 잘 곳이 없다는 말로 통한다지. 하지만 그건 걔네들 생각일 뿐이지 나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아. 왜냐면 이 드넓은 세상이 다 내가 잘 집이기 때문이지. 자, 이쯤이면 가족이 어떻게 되냐고 묻고 싶겠지. 물론 나 역시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애가 아니니까 가족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야. 엄마는 아빠가 다리를 다쳐 일용직에서 실직한 지 3년이 지나니까 인내심을 휴지처럼 구겨 거리에 내팽개치더군. 하긴 그건 엄마 탓도 아니지 뭐. 사흘 굶어 도둑 안 되는 인간 없다잖아. 어디서 그런 말 배웠냐고 묻지 마. 뭐 그 정도야 상식이지. 요즘 사람들 우리 또래 애들을 너무 몰라. 그게 서글프기도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엄마는 집을 나가버렸어. 들리는 말로는 어디 노래방인가 뭔가 하는 데서 시간 치기 일하고 있다고 해. 적당히 아랫도리 재미도 보면서 말이야. 아무도 엄마를 비난하지 못해. 그러지 않으면 뭘 하겠어.
아빠? 아빠는 집이 철거되기 한 달 전에 차력하는 남자가 불을 내뿜듯이 피를 뿜으며 숨쉬기를 멈췄지. 아빠의 배는 맹꽁이의 배와 흡사했어. 남자도 임신을 하나.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아빠의 움직임이 멎을 때까지 벽에 등을 붙이고 다리를 뻗은 채 잎사귀를 못 씹은 새끼 기린처럼 아빠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어. 이상하게도 슬프지가 않았어. 눈물은 길을 가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까닭 없이 뒤통수라도 맞았을 때나 나오는 거야. 사람도 짐승처럼 저렇게 처참한 몰골로 죽는구나, 했어. 나는 어떻게 할 방도를 몰랐지. 그것으로 끝이었어. 그 뒤로 아빠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어. 내게 듣기 싫은 말만 골라 하는 동네 사람들 중 한 명이 지나가는 말로 썩은 내가 동네를 삼켜버릴 지경이었다고 해. 구청 공무원 아저씨들이 아빠를 무연고 묘지에 임시로 묻었다고 하자, "아니야 화장해서 시립 납골당에 안치했어." 하고 다른 사람이 말했어. 어떤 방식이든 나에겐 상관없었지.
사실 따지고 보면 아빠는 내 첫 남자야. 내가 아홉 살 되던 해 아빠는 내 처녀를 가져갔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멍청하게도 나는 모르고 있었지. 조금만 더 일찍 PC방을 알았더라면, 그래서 P2P 방식으로 갖가지 성인 동영상을 다운 받아서 보았더라면 아빠에게 악다구니라도 내질렀을 거야. "아빠는 지금 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바로 성 착취 야동을 찍고 있는 거라구." 하긴 이렇게 외쳤어도 꿈쩍도 않을 아빠이긴 하지만.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빠의 입에서 나는 냄새였어. 생선 썩는 냄새보다 더 지독했거든. 아빠는 왜 그런 더러운 입으로 내가 숨도 못 쉬도록 내 입을 막았는지 몰라.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아빠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생각에 치를 떨었지. 당시를 떠올리면 빌어먹을, 엄마 뱃속에라도 다시 기어들어 가고 싶어.
어땠는지 알아. 갑자기 천장이 부옇게 흐려졌었어. 담배 연기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구름 같기도 한. 좌우간 내 시야는 분명하지 못했어. 쇠창살을 뜯고 몇 마리 비둘기 종류의 새들이 푸드덕거리고 방으로 뛰어들더군. 새들은 붉은 부리로 제 깃털을 피가 나도록 뜯어냈어. 깃털은 내 얼굴 위로 목화 꽃송이처럼 떨어져 내렸고 그 무렵 세상의 어느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금니를 무는 일뿐이었지. 그래도 아픔보다 내 비명은 훨씬 더 자비로운 편이었지. 눈을 감았는지 희멀겋게 떴는지 기억하지는 못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내 몸에다 알콜을 쏟아부었다는 느낌이 들더라구.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어. 삭정이 같은 반쪽을 일으켜 다리 쪽의 풍경을 힐끗거리고는 나는 이내 뒤로 나동그라졌어. 강이 아니라 그것은 바다였지 싶어. 검게 그을린 붉은 바다. 바다에선 퍼덕거리는 물고기 냄새가 났어. 그리고 나는 그대로 뻗어버렸지.
눈을 뜨니 병실이었어. 간호사 언니는 내 아랫도리를 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어. 의사 아저씨는 누가 이런 짓을 했냐고 혀를 끌끌 차더군. 나는 병원으로 데려다준 이웃집 아줌마의 눈치만 살폈지. 아줌마는 눈을 자끈동 감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 어린 생각에도 정말 대책없었어.
아빠는 그 일로 경찰에 붙잡혀갔어. 이웃집 아줌마가 신고해서였지. 나는 아빠를 가둬서는 안 된다고 경찰 아저씨들에게 그악스럽게 굴었어. 아버지가 없으면 나는 당장 굶어 죽을 거라고 경찰서 바닥에 나뒹굴었어. 경찰 아저씨는 내 말에 모두 걸레 씹은 표정이었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저씨들은 숱이 적은 머리만 긁어대더군. 신고한 아줌마의 미간도 졸아 들었어. "허허 이거 나 원,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 형사 아저씨는 프린터로 뽑은 아빠의 진술서를 힘없이 책상에 탁 내리쳤지. "어이 김 형사, 검찰 지휘 받아 처리해. 골치 아픈 건 그게 제일 속 편해." 저쪽 책상에 앉은 김 형사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경찰이 말했어. 어쨌든 그 일로 아빠가 구속되는 일은 면했지. 집행유예라는 어려운 말로 풀어준 것 같아. 지금이야 어림없지만 그때는 그랬어. 얼핏 보아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꽤나 복잡한 사건이었던 모양이야. 아빠는 가해자이면서 미성년자인 나의 친권자이기도 했던 게 감옥에 가지 않은 이유였던 것 같아. 그게 세상 이치였어. 우습지. 물론 신고한 이웃집 아줌마에게 아빠를 풀어달라고, 동네 사람들의 탄원서인가 뭔가를 써달라고 내가 조른 것도 큰 힘이 되었더랬어.
경찰에서 풀려난 아빠는 내 몸에 손을 대지 않는 대신 술병을 놓지 않았어. 물론 엄마가 집을 나간 뒤부터 조금씩 술병을 들이키긴 했어요. 그 뒤론 지금까지 하루라도 거르는 날이 없었어. 어떤 날은 밥 대신 술로 끼니를 대신했지. 불쌍한 우리 아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런 아빠를 벽에 기대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바라보고만 있는 거였어. 짙게 쌍꺼풀이 진 아빠는 술기운에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내 눈길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커허헝, 하는 이상한 괴성과 함께 술병을 치켜세웠지. "연아, 내가 죽일 놈이야. 이 아빠는 말이다, 빨리 죽어야 한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 아빠를 빨리 죽일 것인지 아닌지는 하느님만이 할 일이었거든. 그러나 내가 그 날짜를 세어보기도 전에 하느님은 재빨리 아빠를 데리고 갔어. 빌어먹을 하느님. 내가 PC방을 드나들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을 거야.
내가 어른들이 바라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 모두 세상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세상에 대해서 별로 원하는 것이 없는 거 같아.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재빨리 체념해버리면 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내 눈빛은 맑아졌어. 겨울 하늘 위로 잇닿은 연줄처럼 끊어지지 않고 내 열세 살 삶은 앞으로 팽팽하게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지. 나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였던 거야. 그 나이에 뭘 알겠느냐고 비웃는다면 나는 그를 향해 가장 긴 손가락을 치켜세울지도 몰라.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 준 것이 없는 인간들은 내게 욕할 자격이 없어.
나는 오늘도 내게 욕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 나는 머리도 새로이 붉은 빛이 돌게 염색을 했고 화장도 어른스럽게 했어. 이런 걸 두고 뭐라더라, 일취…월장이라고 하던가. 모두 PC방에서 배운 것들이지 뭐. 늘 걸치는 분홍색 덕다운 점퍼는 추위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거구.
고마운 해는 때를 잊지 않고 서쪽 산 너머로 고개를 꺾지. 나에게 가장 슬픈 시각이던 땅거미진 하늘이 이제는 편안한 시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축복이야. 내가 보고 또 보는 영화의 모든 주인공들 덕분이지. 주인공들은 해가 지면 행동을 개시하거든. 특히 여자 주인공들 말이야. 그중에서 마틸다, 그래 마틸다야. 내가 비디오방에서 본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나를 흡족하게 한 것은 역시 <레옹>이었지. 주인공 레옹 아저씨의 꺼칠한 수염, 아무렇게나 눌러쓴 뜨게 모자. 둥근 테 선글라스. 창자를 뒤흔들고 나오는 것 같은 낮은 음성. 나는 그 영화를 족히 스무 번은 봤을 거야. 그즈음 나는 이미‘마틸다’가 되어가고 있었어. 거울을 보며 그 아이를 떠올리며 표정을 짓고 또 지었지. 그녀의 몸과 마음 전부를 짓누르는 듯한 단발 생머리. 그건 내가 건너야 할 첫 걸림돌이었어.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 주었지. 물론 나의 귀여운 사내들 가운데 하나가, 돈 대신 생머리 가발을 사달라는 나를 이해하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뭘 알겠어. 난 단시일 내로‘마틸다’가 되어버린 거야. 특히 그 애의 차갑고도 흐트러지지 않는 슬픈 얼굴을 내 기본 표정으로 삼았지. 기본이라는 것은 거기에도 변화를 주겠다는 뜻이야. 늘 마틸다로 살아간다면 난 사내들을 만나지 못할 게 분명해. 그들은 변화무쌍하지 않은 무덤덤한 아이들을 제일 꺼려하니까.
물기 빠진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불행한 표정으로 떨어지고 있어.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 담당 형사 아저씨에게는 비밀로 한 곳이야. 미성년자인 나를 풀어주며 형사 아저씨는 내가 자주 가는 곳을 틀림없이 알려줘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어. 순진한 형사 아저씨. 내가 제 밥그릇을 차버릴 만큼 멍청한 줄 아세요. 그렇게 쏘아주고 싶었어. 그래도 아저씨는 나 때문에 미성년자 성폭행범을 셀 수 없이 잡아들였지. 나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는 사내들 앞에서 나는 태연히 내 고객들이 한 짓을 그대로 재현해 보였고 그리고는 "미안해, 아저씨." 하고 울음을 터뜨렸지. 나의 완벽한 연기에 취재 온 기자 아저씨와 청소년 선도 어쩌고 하는 데에 있는 아줌마들이 한숨을 길게 내뿜었어. 아마 어쩌면 세상이 어쩌려고 이 모양이냐고 탄식했을지도 몰라. 나는 속으로 그들을 향해 계속 감자를 먹였지. 그땐 신났었어 정말.
마침내 저쪽 어디에서 어둠을 빨아들이며 한 남자가 다가와. 털갈이하지 않은 하이에나처럼. 다리 위론 청량리행 전철이 맥 빠진 속력으로 천천히 지나가고 나는 태연히 다른 곳을 보며 신발 바닥으로 땅에다 새벽질을 하듯 흙을 문질러. 별로 생각이 한 곳에 머물지 않을 때 나오는 내 버릇이야.
"마틸다." 남자가 암호를 외치듯 말하지.
"용털아범?" 나 역시 암호에 화답하듯 말하고. 아이디라는 게 그렇게 쓸모가 있더군. 좋은 세상이란 이렇게 다양한 이름이 통하는 걸 거야. 그는 어둠을 다시 토해내기라도 하듯 깊은 눈길로 나를 쏘아보지. 나는 짐짓 늑대 앞의 토끼처럼 애처로운 표정으로 꾸며.
"정말 나왔네. 누구 보는 사람 없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 사내는 알 듯 모를 듯 귀엽게 웃음을 흘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나는 몰라. 하긴 기분 나쁠 것도 없지 뭐. 용털아범은 내게 정말 스무 살이냐고 물어봐.
"스무 살이 아니면 보내주게요."
내 당돌한 대거리에 용털아범은 썩은 호박 껍데기 같은 미소를 지어. 세상 끝에 다다른 사람들만 짓는 그런 싸구려 웃음.
"너 진드기 같은 건 달고 다니지 않지."
나는 잠시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시선이 허공에 휘날리다 곧 웃음을 지어내. 내 생각에 이 사내는 진드기를 불량기 많은 오빠나 경찰 끄나풀 정도로 말하는 것 같아. 불량한 오빠라면 우리 뒤를 밟아 현장을 덮친 뒤 미성년자 성추행범으로 몰아 돈을 뜯기 위해 협박할 건 뻔하지. 경찰이라면 나를 미끼로 미성년자 성추행범 검거 실적을 올릴 것이고.
나는 내 고객이면서 귀여운 원조족인 용털아범에 눈을 매달아. 쉰은 족히 돼 보이는 얼굴에 비루먹은 동물의 표정이 걸려 있어. 나는 예의 질문 공세를 펴.
"아저씨는 두렵지 않아요?"
"뭐가."
"신상이 공개되는 거."
용털아범은 세상이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그러고는 태연히 말해.
"두려워. 세상 모든 게 두려워. 아침에 눈 뜨는 것도 두렵고 통장 들여다보는 것도, 차를 타는 것도, 아내와 다투는 것도 두렵지. 이렇게 만사가 두려우니 이제는 무뎌질 때도 됐는데도 말이야."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문득 나는 용털아범이란 사내가 갑자기 가여워져. 나는 길을 걸으며 그의 손을 잡아. 그는 놀란 듯 나를 내려다보지만 내 시선은 딴 곳에 가 있어.
우리는 정해진 곳으로 결국 들어가지. 나를 알아보는 프론트 아저씨는 싱긋 눈웃음을 지어 봬. 203호. 우리는 2층 이상은 올라가지 않아. 고객들이 싫어하니까. 다급할 때 뛰어내릴 수 있는 높이라야 안심이 된대. 고객의 심기를 거역하는 비즈니스는 없는 법이지.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옷을 벗으며 생각해. 모든 사내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어. 남자들뿐 아니라 세상 만물이 무서움에 떨고 있어. 공원의 비둘기는 무서움 때문에 작은 머리를 부산하게 움직이며 빨간 눈을 한 곳에 잠시 던져두지 못해. 구름은 태양이 무서워 제각기 모양으로 뭉치고 흩어지며 나무들은 바람도 불지 않는데 으스스 제 몸을 떨어대. 지구라는 푸른 행성은 제 몸을 뒤척여 어둠을 빚어내 등어리 어느 부분엔가 무서움을 키워. 밤하늘의 별들. 왜 그들은 한시도 가만히 불을 밝히지 못할까. 그들도 깜깜한 하늘 어디에선가 무서움에 허덕이고 있을 테지. 이윽고 용털아범은 씻지도 않은 식은 몸을 밀고 들어오지. 내 동공이 커지고 빨래판 같은 입천장이 드러나도록 나는 고개를 위로 꺾어. 두려움은 잠시 내 미간 사이에 머물다 이내 허공으로 흩어져.
몇 방울 안 되는 점액을 쏟아낸 용털아범은 담배를 피워물며 말하지.
"마틸다가 누구야."
"나야."
"아이디가 아니구."
"내가 마틸다야." 어느새 반말로 변한 내 말투에 기막혀하며,
"아이디잖아 그건."
"아이디가 나구 내가 마틸다야."
용털아범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꺼. "말장난하냐 임마." 하고 쏘아주고 싶은 모양이야. 하지만 그도 영화를 많이 봤는지 내게 팔베개를 만들어줘. 희멀건 석회질 토양 위에 검붉은 돌부리처럼 돋아난 젖꼭지를 올려다보며 문득 나는 레옹의 한 장면이 떠올라. 비디오 방에서 정말이지 지겹도록 반복해서 본 영화 <레옹>. 천장에서 내려다보면 영화를 찍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무연히 고개를 돌려. "나는 마틸다이구, 당신은 레옹." 그렇게 속삭여. 영화와 현실 사이는 멀고도 멀지만.
며칠이 지나 경찰서 여성 소년계의 내 담당 형사로부터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어. 휴대폰 화면을 보면 단박에 알지. ‘내 이름은 레옹이에요’하며 털북숭이 사내가 방긋방긋 웃으며 까불어. 내가 귀여운 이모티콘으로 꾸며놓았지. 처음엔 강력계에 있었는데 조폭 행동대들하고 싸우다 회 뜨는 칼로 옆구리 한 방 먹은 다음 여성 소년계로 왔대. 아저씨 첫인상이 꼭 레옹에 나오는 그 아저씨 닮았다고 하니까 씨익 웃었어. 아저씨도 그다지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아저씨 영화를 보지 않았더군. 영화 본 지가 아줌마랑 데이트할 때 한 번 보고는 그걸로 끝이었대. 그런데 왜 내 말에 웃었는지 몰라. 나중에 하도 레옹, 레옹, 사람들이 노래하니까 자신과 닮은 고양이가 있나 보다 했다나. 참 웃기는 아저씨야. 그 유명한 영화를 아직도 안 봤다니. 아무튼 내 담당이니까 가보지 않을 수 없었지.
"어이구 마틸다 왔구나. 레옹 어디 갔냐."
입구에서 처음 만난 강력계 아저씨는 늘 이렇게 너스레를 떨어. 경찰서라는 곳은 늘 터미널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려. PC 단말기 앞에는 익숙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사람들. 그 옆에서 손가락질을 해대는 사람들. 서로 멱살을 쥐고 발돋움질하는 사이에서 뜯어말리느라 정신이 없는 의경 오빠들. 단말기를 두드리다 말고 조아린 머리 위로 몇 번이고 손바닥을 치켜드는 형사 아저씨들. 그것은 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여러 장면의 연극 무대와도 같아. 차라리 내가 본 영화 속의 풍경이라고 해두지.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어. 그래서 나는 가끔 발랄한 생각을 해봐. 형사계, 조사계의 지저분한 책상 사이를 누비면서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줄리 앤드류스 아줌마와 아이들이 춤을 추며 노래한다고 상상해 봐. 처음엔 이 무슨 해괴망칙한 시츄에이션이냐고 표정을 일그러뜨릴 형사 아저씨들도 나중엔 손과 손을 맞잡고 줄지어 책상 사이를 누빌 거야. 그들은 흩뿌릴 오색 종이 조각이 없으면 더러운 범죄기록으로 얼룩진 조사 서류라도 허공에 던져 올릴 거야. 기쁨에 넘쳐서. 이내 알루미늄 컵이 날아오르고, 피의자를 위해 시켜온 곰탕 질그릇도 솟아오르고, 범인의 뒤통수를 갈기던 형사 수첩도 희멀건 내장을 드러내며 하늘로 뛰어오를 거야. 줄리 아줌마의 선창에 답하며 피의자 오빠는 어쩌면 멋들어진 브레이크 댄스라도 출지도 몰라. 선창, 후창, 답창이 이어지면서 어느새 그들은 합창으로 피날레를 향해 달음질칠 거야. 경찰서는 이미 뮤지컬 무대로 변모해버린 지 오래지. 그리고 마침내 피의자 식사를 배달하는 살집 좋은 아줌마의 ‘가랑이 찢어 주저앉기’로 열광의 풍광은 끝이나. 모두들 환호에 뒤덮이지. ‘쇼만큼 즐거운 인생은 없다.’ 너무 오래된 영화라 내용은 별루 끌리는 데가 없었지만 제목 하나는 맘에 들었어. 왜 경찰서 안은 쇼처럼 살지 않는지 몰라.
"연아, 인사해라. 오늘부터 네 후견인이 돼주실 김 목사 내외분이시다."
후견인. 그게 뭐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알 수 없었어. 가방끈이 워낙 짧으니까. 레옹 아저씨 뒤에 아니나 다를까 마음 좋게 생긴 부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눈이 초승달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러기도 쉽지 않게 생겨 먹었어.
"반갑다. 연이라고? 네 얘긴 형사님으로부터 많이 들었다. 오늘부턴 우리가 널 보살펴주마."
오 마이 갓. 그러고 보니 내게 팔자에도 없는 양부모가 생긴 셈이란 말이야? 이 무슨 황당한 경우야. 내게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레옹 아저씨는 이래서 간혹 날 미치게 한다니까.
"후견인, 난 그런 거 필요 없거든요. 레옹 아저씨 이러면 나 레옹 아저씨 안 볼 거예요."
영화 속의 마틸다처럼 나는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멋지게 뒤돌아섰어. 어른들의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나를 레옹 아저씨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따라와. 이쯤이면 우리에게 마침내 감독의 ‘레디 고’사인이 떨어졌다고 봐야 해. 나는 슬픈 표정을 짓고 레옹은 난감한 얼굴로 내 뒤통수를 노려봐. 아차, 오늘은 화분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어. 아냐, 그것은 진짜 영화 속의 일이지 현실은 갈색곰 인형이지. 곰 인형은 내 기분을 알고 이미 축 늘어진 시늉을 해.
"연아, 나랑 얘기 좀 하자."
"아저씨, 자꾸 연아, 연아 하지 마요. 내 이름은 마틸다란 말이에요. 레옹 아저씨도 알잖아요."
"그래, 미안하다 마틸다."
노련한 감독은 아직 컷 소리를 지르지 않았어. 우리는 마침내 빵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어. 카메라는 빵집 통유리 문을 통해 비스듬히 앵글이 돌아가고 있고.
"마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널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아." "레옹 아저씨,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요. 보시다시피 난 잘해 나가고 있잖아요." 나의 이 당찬 말에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어. 영화 속의 진짜 레옹처럼.
"너 용털아범 알지."
나는 레옹 아저씨의 이 말에 까무러칠 뻔했어. 아니, 레옹 아저씨가 용털아범을 어떻게.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여.
"네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부서에서 꼬리를 붙였던 모양이야. 일이 자꾸 이렇게 되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아, 그래서 나에게 후견인을 붙이겠다. 젠장 맞을. 독 안에 든 쥐였군. 그들은 나를 한 시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던 거야. 멍청이 마틸다는 그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이 정도면 진짜 마틸다처럼 두 손을 들어야 해. 하긴 그 때문에 영화는 더욱 성공적이었지." 나는 꽤 오랜 시간 고민 끝에 선언하듯 말해.
"좋아요, 아저씨. 단, 조건이 있어요."
"말해."
"후견인이 생긴 이상 더는 내게 꼬리 달지 않기."
레옹 아저씨의 얼굴에 오만가지 형상이 다 지나가.
"그건 내 소관이 아니야. 서장님께 일단 건의해보지. 하지만 그것도 네가 하기에 달렸어."
어른들은 늘 이런 식이야. ‘네가 하기에 달렸어.’ 이건 숫제 협상을 하지 말자는 것과 꼭 같아. 이런 화법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 삶을 절망에 빠뜨렸는지 어른들은 알기나 할까. 어쨌든 난 그 어쭙잖은 후견인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야. 나는 이제 내 삶의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셈이지. 하지만 뭐 어쩌겠어. 소는 뿔로 받게 돼 있고 말은 뒷발질을 하게 돼 있잖아.
나는 풀죽은 마틸다의 기본 표정으로 레옹 아저씨와 헤어졌어. 한풀 꺾인 내 모습이 어둠 속에서 멀어져갈 즈음 감독의 컷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울리더군.
단연코 말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적극적으로 지배해왔다고 믿고 있어. 그것이 옳든 그르든 내 삶보다 한발 먼저 내 행동과 의지가 나아가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겠지. 어른들 방식으로 말했지만 쉽게 말해 나는 내 삶에 떠밀려 살진 않았고 또 살지 않겠다는 거야. 그건 쉽게 변하지 않는 원칙 같은 거지. 원칙은 인생을 깨달아갈수록 더 느는 법이야.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세상이 가르친 만큼만 학습하는 거지. 거기엔 이런 것도 포함해. 어떤 얄팍한 동정에도 물렁해지지 않기. 거대한 공룡도 단번에 쓰러뜨릴 만한 독기를 품기, 내가 저지른 행동이나 혹은 내가 당한 어떤 일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기. 내가 본 또 한 편의 영화에서 내 또래의 주인공 레올로는 내게 가르쳤어. ‘나는 꿈을 꾼다. 꿈을 꾸고 있는 한,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내겐 꿈 따위는 없지만 내 삶에 원칙 같은 것이 있는 한,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닌 거야. 물론 나를 에워싸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도 생각해야만 해. 어떨 땐 원칙은 그런 곳에서 흔들려. 이를테면 후견인 목사님 부부의 존재와 그분들이 마련해준 새로운 거처. 비록 소녀 가장의 집이었지만 내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따뜻한 영상과도 같았어. 소녀 가장은 여든이 훌쩍 넘은 할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 주었어. 어떻게 부족한 사람들일수록 마음이 그렇게 넉넉한지 알 수 없는 일이야. 그건 내겐 놀라운 사실이었어. 여태껏 나는 궁핍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나처럼 나쁜 짓을 일삼는 줄로만 생각했거든. 세상의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안다는 건 어느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어리석음의 증거이기도 했지.
소녀 가장의 할머니는 내가 뼈를 갈아서 갚아도 다 하지 못하는 사랑을 짧은 시간 동안 베풀었어. 나는 그들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또 한 사람, 내 사랑 레옹. 좀 뭣하지만 나는 갑자기 사랑에 빠져 버렸어. 느낌은 모래밭에 물이 스미듯 그렇게 예고 없이 빠져드는 거야. 자꾸 보채면 나는 다 털어놓을 수밖에 없어. 내가 얼마나 빨리 웃자랐는지는 알지? 코웃음쳐도 할 수 없어. 실상은 보잘것없지만. 우리는 가끔 성마른 감독의 목소리를 귀로 삭이며 얘기를 나누었어. 우리 둘은 너무 가까이도 그렇다고 너무 멀어져서도 안 된다는 감독의 주문에 이를 갈면서도 한동안 각자 본분에 충실해야 했지. 이를테면 오랫동안 보지 못해 서운해 있던 차에 우리는 어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만났어.
"연이야, 아니 마틸다. 잘 지내고 있지?"
"그럼요, 레옹 아저씨 실망시키는 데에도 왕짜증이 났거든요."
"그래, 후견인 사모님을 통해서 네 근황은 잘 듣고 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러. 생각에 거치적거리는 일은 없니?"
"웬 결정. 물고기를 바다에 푸느냐 아직 양식장에 가둬놓느냐 하는 결정?"
나는 레옹 아저씨의 의중을 알아. 내 오랜 고객들과의 비즈니스를 청산하는 일에 방해되는 것은 없냐는 뜻인 걸 잘 알아. 나는 선뜻 내 안의 풍경을 말했지. 수채화처럼 맑고 깨끗하다고. 붓끝에 매달려 나오는 물상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고. 레옹 아저씨가 늘 좋은 붓과 파레트, 그리고 물감들을 준비해주지 않느냐고. 가증스러운 말이었지만 달리 다른 표현이 없었어. 그러고는 의식 없이 아이스크림을 물었어. 순간 레옹 아저씨의 손등이 내 볼에 와 닿아 있는 거야.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얼음같이 찬 아이스크림이 순간 따뜻한 솜사탕으로 내 입에 녹아드는 거 있지. 나는 내 감각을 믿을 수 없었어. 아니 어떻게 차디찬 얼음 알갱이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더운 내 입김을 헤치고 목 안으로 날아들 수 있는지. 나는 울컥 내게 일어나는 가장 생소한 경험을 맛보았어. 감독은 분명 ‘NG’를 선언하고 불호령을 날렸겠지. 나는 영화 <레옹>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어.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는 마틸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어. 나는 레옹 아저씨에게 영화 속의 마틸다와는 달리 내 속내를 말하고 싶어졌어.
"아저씨, 아빠가 보고 싶어요."
바보 같은 나는 그렇게 말하고 말았어.
"그래, 연이야. 넌 마틸다보다 연이라는 예쁜 이름이 더 잘 어울려."
"아뇨. 그건 아저씨랑 생각과 달라요. 난 여전히 마틸다거든요."
그래도 레옹은 웃지 않았어. 망할. 나는 아빠 대신 레옹을 말해야 했어.
레옹과 같이 있고 싶다고 말했어야 했어.
우리는 헤어지면서 다음에 또 만날 기약 같은 건 하지 않았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몫이니까. 다만 언제이고 다시 만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 비록 다시는 못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것 역시 우리 뜻과는 상관없잖아.
나는 그날 비로소 레옹 앞에 ‘사랑’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내 사랑 레옹은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내게 악수를 청하고는 가발이 벗겨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 그것은 어쩌면 내게 가장 성스럽고 위대한 의식이었을 지도 몰라. 웬만하면 울먹거릴 법도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나는 더없이 쿨한 마틸다였던 거지. 그런데 돌아서서 몇 걸음 옮기면서 무심코 분홍빛 점퍼에 손을 찔렀지. 문득 만져지는 게 있었어. 아아, 내 사랑 레옹. 그는 내게 얼마간의 바른 생활을 위한 보증, 그게 뭔지 알거야. 신사임당 몇 분을 찔러 넣어줬던 거야. 나는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누를 수 없었어. 그리고 이내 뒤를 돌아보았지. 내 사랑 레옹은 역시 주인공답게 재빨리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어.
그래서 내 삶이 달라졌다는 게 아냐. 다시 말하지만 난 연이가 아니고 마틸다잖아. 쿨한 마틸다는 여간해선 달라지지 않아. 그래도 얼마간은 바른 생활 소녀로 살았지. 하긴 그래 봐야 PC방과 비디오 방 그리고 편의점을 오가는 정도지. 목사님 부인은 내가 학교로 돌아갔으면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 사모님은 나처럼 끈질긴 스타일은 아니거든. 제풀에 지치면 더는 얘기 안 할 거라고 믿었는데 의외로 그게 빨리 닥치더군.
"나는요 학교보다 사회에서 몇 배나 더 많이 배웠거든요. 그게 더 쓸모가 있어요." 쓸쓸해진 사모님은 입술을 가늘게 늘이셨어. 웃음기 같기도 하고 배신감을 다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다짐을 굳히는 것 같기도 했어. 나는 알고 있었어. 내 처지와 형편이 얼마나 다른가를. 그들과 얼마나 어울리지 못하는가를.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받아낼 그릇은 이미 깨져버린 지 오래라는 것을.
마틸다가 결코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줄 날은 머지않아 왔어. 신사임당 아줌마가 나를 버렸던 거야. 그날은 내가 비로소 여자가 된 날이기도 해. 첫 생리치곤 제법 많았어. 언젠가 방 안에서 본 것처럼. 나는 내가 여자라는 걸 누구에겐가 알리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어. 예전에는 없던 관자놀이 부근의 야릇한 미열도 느꼈어.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들은 그 사실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리던 장면이 떠올랐어. 어딘지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 발가락 끝이 간질간질하며 재채기라도 하고 싶은 느낌이라고 말하며 여주인공들은 눈을 지그시 감았었지. 나는 가슴이 뛰었어. 나는 PC방에 앉아 전원을 넣기 전에 처음으로 먼저 전화를 했지. 레옹 아저씨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휴대폰 속의 여자는 자꾸 메시지를 남겨달라고 안달이었어. 내가 필요할 땐 없는 아저씨. 영화 속의 레옹도 그랬어. 하는 수 없이 나는 내 홈피를 열었어. 때 지난 메일들이 잔뜩 쌓여 있었어. 철갑상어. 두동가리. 얼짱이. 처음 보는 아이디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더군. 나는 그들 중 하나에게 메신저로 쪽지를 날렸어. "오늘 처음 여자로 태어났어. 네가 날 여자로 만들어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이 금방 왔어. "어디로 가면 돼?"
나는 점점 의식이 흐려지고 있어. 강한 충격이 있었거든. 나는 곧 정신을 잃을 거야. 아니 어쩌면 숨이 멎을지도 몰라.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되돌리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 어쩌겠어. 나는 그래 봐야 열세 살인 걸. 그 나이에 무슨 세상을 알겠어. 그래도 기억은 해야 해.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아무튼 그쯤 되는 오빠였어. 모텔 방에 들어오자마자 닭을 쫓더군. 나는 먼저 손을 내밀었지. 가쁜 숨을 가누지 못해 헐떡이는 목소리로, 끝나고 나서 어쩌고 했어. 여태껏 비즈니스를 그렇게 해오지는 않았다고 했지. 그 아이는 이미 정신을 팔아먹었더군. 내가 고객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어. 하지만 때는 늦었지. 거부하는 몸짓은 그에겐 웃기는 일로 보였던 게지. 나는 그동안 보았던 영화 속의 모든 욕지거리를 쏟아부었어. 어땠는지 알아. 그 아이는 꽤나 충격을 받았나 봐. 잠시 정적이 찾아온 거야. 무서운 순간이었어. 태평양의 어느 바다 속에 있다는 해연보다도 더 깊고 어두운 고요. 그 숨길을 옥죄는 듯한 고요가 칼끝이 되어 나를 천천히 찔렀어. 아이의 웃음기에 곧이어 세상의 모든 빛을 거둬 가버리는 충격이 머리를 덮쳤어. 몸이 가벼울 수밖에 없는 나는 천천히 그리고 완만하게 침대 옆 바닥으로 휘어졌어. 감독이라면 이 장면은 고속 촬영으로 극적 효과를 냈을 법해. 이어서 일어난 일은 말 안 해도 짐작하겠지. 선불 무시한 몸 날치기. 그 와중에도 나는 얼핏 기억해. …너 처녀니, 라고 묻는 말. 그게 기억에 남는 걸 보니 그 아이의 몸짓이 절정으로 치달은 때였던 것 같아. 몰아대는 우김질과 익숙한 열기에 나는 잠깐 정신이 든 것 같아. 그때를 놓칠 순 없지. 내가 말했어. "오빠,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마틸다야." 마틸다는 비즈니스가 정확해. 순간 그 아이는 미쳐 날뛰었지. 귀를 움켜쥐고는 방 안을 들짐승처럼 휘젓고 돌아다녔어. 정말 가관이었지. 그러다 다시 날아든 감내하지 못할 머리 격통. 나는 마침내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어. 응고된 눈매와 널브러진 작은 내 몸피. 그리고 내 입안에는 붉은 핏덩이로 응결된 작은 살점 하나가 남았고.
모텔의 천장에 붙은 거울을 통해 한 아이가 스러져가는 숨길을 붙잡고 붉은 도화지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게 보여. 그게 마치 세상의 마지막 풍경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쓸쓸해. 하지만 나는 슬퍼하지는 않아. 그건 내 주제가 아니거든.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알 거야. 내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은 잠시 대사를 멎고 화면 밖의 나를 향해 말했어. "연이야, 이 세상은 영화가 아니란다. 하지만 영화는 네게 꿈과 힘을 줄 거야." <천국의 아이들>에 나오는 알리, <시네마 천국>의 토토, 그리고 누구보다도 <레옹>의 마틸다가 내게 그렇게 말했어.
나는 일어날 거야. 나는 어떤 경우에도 떠밀려 살진 않아. 그게 내 원칙이거든. 갑자기 레옹이 보고 싶어. 그리고 짜장면이 먹고 싶어. 나는 어쩔 수 없이 열세 살이니까. 나는… 마틸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