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봄호 2025년 3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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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극의 체르노빌
프리페트강이 벨로루시 평원을 거쳐 우크라이나 국경에 접어드는 곳에 체르노빌이 나타난다. 체르노빌은 원래 리(里) 소재지 정도였으나, 소련이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원전이 들어서면서 조상 대대로 이 바닥에 살던 원주민인 코사크족의 후예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일부는 남아 조상의 땅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원전이 어떤 위험을 안고 있는지도 몰랐으며, 그저 전기를 만들어 내는 발전소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원전 측이 주변을 잘 가꾸어 놓아 겉모습은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프리페트강 둑을 따라 조금만 더 내려가면 북부의 대평원을 굽이쳐온 드네프로강과 합류하여 거대한 수역을 이루는 키브스케가 나타난다. 강이자 호수인 이 거대한 수역은 경치가 좋기로 유명했다. 봄이 오면 우크라이나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련에서 온 과학자와 그 가족들도 갖가지 꽃으로 화려하게 물든 강변에서 보트놀이를 즐긴다. 드네프로강을 따라 130km 정도 내려가면 수도 키예프가 나온다. 우크라이나의 지난한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드네프로강은 우크라이나를 남북으로 굽이쳐 흑해로 흘러 들어간다.
체르노빌에는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때 초원을 호령하던 일부 코사크족의 후예들을 제외하면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경비와 소수의 당직자를 비롯해 소방대원과 가족들이 주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체르노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가정사는 물론이고 어느 집 포크와 스푼이 몇 개인지, 어느 집 침대가 며칠 밤마다 삐걱거리는지도 서로 알 정도로 흉허물없이 지냈다.
체르노빌 인근에는 인구 5만 규모의 프리퍄티라는 제법 큰 첨단도시가 있다. 프리퍄티에는 학교며 시장이며 극장을 비롯해 각종 문화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엔지니어들은 주로 이곳에서 체르노빌로 출퇴근했다. 체르노빌 사람들은 프리퍄티를 동경했고, 예술 공연을 핑계 삼아 자주 들렀다. 특히 젊은이들은 주말 데이트를 프리퍄티에서 하곤 했다.
4월 26일 오전 11시에 시청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이반(Ivan)과 소냐(Sonia)는 최종 리허설을 점검하고 흥분에 겨워 시청을 나섰다. 4월 마지막 주말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커플은 이들 외에도 20여 쌍이 있었다. 이제 하룻밤만 지나면 부부가 되는 이들은 이 밤이 길게만 느껴졌다.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해가 짧았다. 거리엔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결혼식을 마치면 곧장 수도 키예프를 거쳐 우크라이나 최대의 휴양도시인 얄타에서 삼박사일 간 허니문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소냐는 이반의 팔짱을 끼며 이반의 어깨에 살포시 젖가슴을 갖다 대었다.
“우리 토요일에 결혼식 하기로 한 거 정말 잘 한 거지? 어서 이 밤이 갔으면 좋겠다.”
소냐는 이번에는 이반을 약올리기로 작정한 듯 더더욱 젖무덤을 갖다 대었다. 소냐의 젖무덤이 어깨에 닿자 고압전기에 감전된 듯 온몸이 짜릿했다. 성욕이 겉잡을 수없이 치솟아 소냐가 눈치라도 챌까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곤혹스런 행복, 어쩌면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 아닌가 싶었다.
이반은 애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소냐를 바라다보았다. 두 사람의 결혼 성사가 순탄치 않았던 것은 이반의 직업이 도무지 소냐 아버지의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반은 소방수였고, 그 아버지 표도르 이바노비치 씨는 소방대장이었다. 이것이 소냐 아버지이자 원자력 박사인 세르게이 드라고노프 씨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소냐가 대졸인데 반해 이반은 고졸인 것도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세르게이 박사는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소냐의 마음을 돌려놓진 못했다.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른 것은 서로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였다.
“이대로 헤어지기 싫어, 우리 오늘 밤 같이 있으면 안 돼?”
이반은 투정을 부리는 소냐에게 입맞춤을 하고 체르노빌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드는 소냐의 눈망울이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체르노빌에 되돌아온 이반은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이 시각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4호기에서는 중요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과거에도 정상조업이 끝나고 더러 새로운 안전실험을 하곤 했었다. 이번에는 터빈발전기의 관성력을 이용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 원자로 출력을 1/3 정도로 낮추는 실험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수동식 안전시스템 실험이다. 공교롭게도 체르노빌 원자력단지 내에는 운전요원 188명과 5, 6호기의 신축작업에 동원된 현장인부 256명을 포함해 모두 총 444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실험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펑! 새벽 4시경,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리고 4호기의 천장이 하늘로 치솟았다. 파편과 먼지가 비 오듯 쏟아졌다. 통제력을 잃은 반응도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수소폭발을 일으켰다. 안전요원들이 4호기 현장에 도착했을 때 현장은 이미 지옥으로 변한 뒤였다. 현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아, 신이여!”
저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폭발은 또 다른 폭발을 불러일으켰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방사능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현장 책임자 카르넨코는 즉시 상부에 보고하고 곧바로 소방서에 연락해 일단 불길을 잡도록 했다.
왱 왱 왱 왜앵∼! 엄청난 폭발음에 이어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이바노비치 부자는 본능적으로 일어났다. 부자는 비번이었지만 즉시 출동했다.
“세상에,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체르노빌은 연옥의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40년을 소방관으로 근무해온 표도르 소방대장은 망연자실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해 진두지휘했다. 소방관들은 방사선 유출에 대비할 겨를도 없이 소방복만 입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곧이어 프리퍄티를 비롯한 가까운 인근 도시에서 소방대가 급파되었다. 지상에서는 수십 개의 소방호스가 물을 뿜어내고, 헬리콥터는 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 분주히 호수와 현장을 오갔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요란하게 밤하늘을 울렸다.
길고 긴 밤이 지나고 아침 8시가 되자 다행히 불길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이때쯤 수십 대의 헬리콥터가 파괴된 원자로 위에 석회와 모래, 납 등을 퍼부어 원자로 무덤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침 10시가 되자 다른 도시의 소방대원이 몰려오고 잠시 임무교대 할 시간이 주어졌다. 임무교대로 잠시 뒤로 물러난 소방대원과 헬기 조종사들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보다 힘들었던 사람은 세르게이 박사였다. 박사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쓰러지기 직전의 그의 어깨를 붙드는 손이 있었다. 이반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포옹했다. 장인은 한동안 이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네 근무조도 아닌데 여기서 뭣하는 건가? 어서 소냐와 가족을 데리고 키예프로 피신하게. 알다시피 난 이 배의 선장이야. 난 여기를 떠날 수 없네. 그렇게 전하게.”
이반은 세르게이 박사의 얼굴에서 결연한 의지를 읽고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메스꺼운 속을 달래며 집에 돌아온 이반은 어머니를 모시고 급히 프리퍄티로 갔다.
“싫어, 난 안 갈 테야. 아버지하고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도망가는 건 싫어.”
“어서 가. 장인어른 부탁이야. 우린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갈 테니까.”
소냐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이반의 가슴에 파묻고 몸부림쳤다. 플랫폼엔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반은 떼를 쓰는 소냐를 달래고 어른 끝에 어머니와 함께 키예프행 열차에 태워 보냈다. 열차가 어둠 시선에서 사라지자 이반은 다시 체르노빌로 달려갔다.
사고 발생 사흘째 접어들자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이던 나이 든 소방대원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아버지도 장인도 모두 지쳐 쓰러졌다. 병원으로 실려간 동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당국은 5월 3일 사고지점으로부터 반경 10km 이내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대피시켰고, 5월 7일 반경 30km 이내의 주민들도 마저 대피시켰다. 도시는 텅 비었다. 관공서도, 학교도, 시장도, 아이들의 놀이터도 텅 빈 유령의 도시로 변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놀이터엔 외로운 그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고 발생 석 달 후 세르게이 박사와 은퇴를 4개월 앞둔 표도르 이바노비치 소방대장은 심한 방사성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아직은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8월 하순 이반과 소냐는 두 분 아버지를 고향에서 가까운 드네프르 강변 언덕 위에 묻었다. 이날은 아침부터 종일토록 가랑비가 내렸다.
태평양전쟁을 종식시킨 원자폭탄보다 수백 배나 많은 죽음의 재를 뿌린 이 사고로 방사성 구름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중 일부는 바람과 해류를 타고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을 거쳐 아시아로 퍼져나갔다. 1986년 5월 26일 이른 아침, 한국 서해안 바닷가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평소 해안가 자갈밭에는 자갈보다도 더 많은 바퀴벌레가 떼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퀴벌레가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 점을 이상하게 여긴 어부들이 어촌계장 박씨에게 연락을 하고 어촌계장은 해당 관청에 연락했다. 해당 관청은 다시 상급기관에 연락하고 몇몇 기관이 즉각 역학조사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문제의 원인은 지난 4월 26일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유출된 방사성 낙진 때문으로 밝혀졌다.
기생충과 숙주
2013년 한국은 크게 인간사회와 바퀴벌레인간사회로 양분되어 있었다. 두 집단은 표면적으로는 공존할 수밖에 없는 집단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듯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서로를 멸종시키기 위해 갖은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바퀴벌레인간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공포에 휩싸였다. 밤 12시가 되면 격심한 통증이 오고, 통증이 끝나면 끔찍한 바퀴벌레로 변해 있었다. 의식의 저편에 자신이 바퀴벌레가 아닌 인간이었다는 아련한 기억이 있을 뿐, 몸은 바퀴벌레의 본능에 이끌렸다. 온갖 병균이 우글대는 하수도에 들어서면 이상하리만치 안도감을 느꼈다.
2013년 8월 28일 오전 6시 서울의 영등포구의 모 오피스텔의 29층에 변장을 한 중년남자가 나타났다. 변장남은 자신의 은신처에 나타난 낯선 사내들을 멀리서 보고 자신을 잡으러 온 공안요원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저쪽은 아직 이쪽을 몰라보는 듯했다. 변장남은 슬그머니 현장에서 빠져나와 그야말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수사팀들조차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그때 등을 돌리고 있던 심혁수 검사만은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이 등 뒤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술 고단자인 심 검사는 빼어난 직관력으로 사건을 해결해내기로 이름이 높았다. 뒤통수에 눈 달린 남자로 불렸다.
“방금 어떤 중년남이 지나가지 않았어? 콧수염을 붙이고 등산모를 쓴 사람 말이야?”
심 검사가 젊은 수사관들에게 물었다. 젊은 수사관들은 당혹감에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예, 방금 그런 사람이 지나갔습니다만. 제비족같이 생긴 야시시한 놈이라….”
젊은 수사관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때야 변장남이 자기들이 찾던 인물임을 파악한 수사팀은 득달같이 뒤쫓아 갔다.
“저 새끼 잡아라. 저 새끼가 인민당 요색희 의원이다. 빨리 엘리베이터를 장악해.”
요색희를 뒤쫓는 수사팀의 발자욱 소리가 요란스럽게 복도를 울렸다. 수사팀들의 엘리베이터가 거의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는 요색희는 이미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현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동안 김일성·김정일의 주구(走狗)로 종북활동을 일삼던 요색희는 섬뜩한 칼날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녀. 이건 절대 위기가 아녀. 그려, 기회여! 남한이 적화되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고, 설령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해도 사법부에 널려 있는 우들끼리 판사들에 의해 곧 풀려날 것이고, 때가 되면 대권주자로 떠오를 것이고, 그러다 청와대 열쇠도 거머쥐는 것 아니겠어?’
마인드컨트롤을 하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요색희는 세운상가로 향했다.
수사팀은 요색희의 집, 국회의원회관 사무실, 부친의 집까지 압수수색을 했지만 요색희의 신병은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확이 없지 않았다. 이날 오후 사당동에 있는 요색희의 자택을 수사하던 심 수사관은 신발장에서 1억 4천만 원짜리 현금다발을 발견했다. 그중에는 소액이기는 하지만 달러와 러시아의 루블화도 섞여 있었다.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저 같잖은 것들이 대체 어떻게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된 거여?”
인민당이 뭐하는 건지도 모르고 그저 없는 사람 편들어 주는 좋은 사람인 줄 알던 밑바닥 서민들도 실체를 알고 나자 험한 말을 내뱉었다. 이날 방송은 종일토록 요 의원 이야기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인민당은 수사관이 당 관계자들을 체포하고 압수수색에 나서자 거의 시간마다 기자회견을 열며 ‘명백한 용공조작극이며 우리는 절대로 수사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며 거품을 물었다. 때맞춰 별의별 반체제인사들이 모여 ‘내란음모조작과 공안탄압 규탄대책위원회’를 발족한다고 하늘에 주먹질을 해댔다.
강화도의 외진 바닷가, 갈매기 소리도 잦아들고 파도소리만 속절없이 들려왔다. 어스름 달빛 아래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저 멀리 사찰의 불빛이 보였다. 평소에 무심코 보이던 사찰의 불빛이 이날 따라 한없이 정겹게 보였다. 요색희가 구태여 강화도로 온 것은 NL의 대부 김배역이 지난 1991년 북에서 보낸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한 곳이기 때문이다. 숲속에 자리를 잡고 세운상가에서 산 무전기로 즉시 평양에 무전을 보냈다.
“여기는 진달래 38번, 일이 급박하게 되었다. 즉시 잠수정을 보내주기 바란다. 장소는 강화도 전등사 밑 해안가 지점 9시 방향. 암호는 뻐꾸기와 철새.”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15분이 지났다.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입에선 단내가 나고 똥줄이 탔다. 이십 여분 후 북에서 지령이 왔다.
“도와줄 수 없다. 스스로 도생하라. 우리는 동지의 능력을 믿는다.”
조국(북한)의 무전을 받아든 요색희는 저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이런 개새끼들, 내가 그동안 지들을 위해 얼마나 충성을 바쳤는데 날 외면해. 확 그냥, 전향해버려? 아녀 지금 전향하면 죽도 밥도 안 돼. 고통스럽더라도 버텨야 해. 그래야 청와대에 들어가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요색희는 차라리 떳떳이 국회를 찾아가 체포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요색희가 떠나고 세 시간이 지난 뒤 심 검사는 팀을 이끌고 강화도에 도착했다. 과거 땡벌 김배역이 북한공작원과 접선했던 바로 그 자리에 몸을 숨기고 요색희를 기다렸다. 요색희가 서울에서 사라졌다면 같은 자리에서 북한으로 밀입북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심 검사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요색희의 공부 IQ는 80이지만, 범죄 IQ는 300이라는 사실이다.
인기척 하나 없는 야산엔 모기 떼가 극성을 부렸다. 수사관들은 밤새도록 모기에 시달리며 밤이슬에 젖도록 기다렸으나 요색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심 검사는 다음 날 오전 6시가 되자 팀을 이끌고 현장에서 철수했다.
하루 동안 종적을 감추었던 요색희는 다음날 스스로 의원회관 사무실에 나타났다. 요색희가 나타나자 종북 똘마니들은 ‘기쁘다 수(首)가 오셨네, 만 동지 맞으랴∼’며 만세를 부르고 난리를 쳤다.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난 요색희는 ‘공안기관의 중상모략이며 철저한 소설’이라고 거품을 물었다.
요색희의 날조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하조직의 비밀회의 녹취록 5,000쪽이 전격적으로 언론에 공개되었다. 지난 5월 12일 마장동 모 종교시설에서 가진 조직원 130명과의 모임에서 있었던 요의 훈시는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한마디로 폭력혁명으로 세상을 뒤집어엎자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전 남한의 좌익들이 부르짖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 5월 초, 북괴가 개성공단마저 철수시키고 거의 전쟁 직전의 분위기로 몰고 가자 지능지수가 낮은 요색희는 전쟁 상황이 임박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인민당은 미친년 오줌 싸듯이 매 30분마다 기자회견을 열며 ‘날조다’ ‘그런 모임 자체가 없었어라’ ‘있긴 있었는데, 전쟁을 막자’는 뜻이었다고 마구 갖다 붙였다. 심지어 우리나라를 남측 정부라 부르던 미세스 죠스도 농담도 못 하냐며 알라뷰를 외쳤다.
인민당원들의 결사항전에도 불구하고 요색희는 수원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인민당 대변인은 대공수사기관을 아예 깡패집단에 비유하면서 ‘이제, 이 땅의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하는 짓이 영락없는 조선중앙방송 아나운서였다.
깨갱, 깽 깽! 어디서 똥개가 짓고 있었다. 하늘엔 휘영청 보름달이 떴다. 명절날 당직을 서는 교도관들은 늘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이날 별관 당직을 서던 최익준 교도관은 추석특집프로그램을 시청하며 간간이 범털들이 모여 있는 감방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어느덧 밤 12시가 되었다. 본능이랄까, 이상한 느낌이 든 최 교도관이 CCTV에 비치는 요색희의 감방에 눈을 돌렸다. 요색희의 방이 텅 비어 있었다. 혼비백산해 다시 한번 면밀히 살펴보았지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봤으나, 꿈이 아니었다.
“큰일 났습니다. 요색희가 CCTV에서 사라졌습니다.”
최 교도관은 다급한 목소리로 상급자에게 보고했다. 상급자는 즉시 염대웅 소장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염 소장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만일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날이면 모가지가 날아갈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여기 명단에 어젯밤 7시까지 감방에 있었다는 기록이 이렇게 있는데 갑자기 사라져? 지가 연기야? 아님 방귀야? 이 새끼들, 당장 안 찾아내면 다 죽여 버릴 거야.”
염 소장은 노발대발하며 부하들을 닦달했다. 온 국민이 주시하는 초미의 관심사이니만큼 목이 날아가는 것은 차치하고 당장 구속감이었다. 일단 베테랑 교도관들을 소집해 CCTV를 다시 정밀 분석해 보았다. 그때 장익서 교도관이 뭔가를 발견해내었다.
“잠깐 화면 뒤로 돌려보세요. 소장님, 저기 까마귀만 한 바퀴벌레가 창살을 빠져나가지 않습니까? 저렇게 큰 바퀴벌레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말에 모두들 놀라 눈에 불을 켜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바퀴벌레가 유유히 창살을 빠져나와 하늘을 날아가는 게 보였다. 녹화 필름을 더 앞당겨 보았다. 자는 듯이 누워 있던 요색희의 담요가 스르르 꺼지더니 머리와 팔다리가 사라졌다. 일행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더니 모포가 꿈틀거리고 발끝으로 까마귀만 한 바퀴벌레가 스물, 스물 기어 나오더니 벽에 날아가 척 달라붙는 게 아닌가. 놈은 촉수를 더듬거리며 한참 동안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히 창살을 빠져나갔다. 전 과정을 지켜본 일행은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그, 그렇다면 요색희가 바퀴벌레로 변했단 말이야?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평소 염라대왕하고 같은 종씨라고 큰소리치던 염 소장도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 말까지 더듬거렸다. 곁에 있던 권 집사는 연신 ‘하나님’을 찾았고, 절에 다니는 박 과장은 연신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다. 나중 일을 생각하면 똥줄이 탔지만, 지금으로서는 상부에 보고할 수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 잘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일단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들은 뜬 눈으로 추석 밤을 새웠다.
중천에 떴던 보름달이 서쪽 하늘로 기울 무렵 시계는 어느듯 아침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들의 간절한 바람이 통했던 것일까? 여명이 동터 올 무렵 요색희는 다시 CCTV 화면에 나타났다.
“소 소장님, 다 다시 나타났습니다. 요 요새끼가 다시 나타났어요.”
누군가 소리치자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일행은 벌떡 일어나 CCTV 앞으로 몰려들었다. 화면을 보니 요색희가 이불 속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녹화 필름을 되돌려보았다. 거대한 바퀴벌레가 요색희의 모포 속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가더니 모포가 풍선 부풀듯 부풀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람의 머리가 나타나고 팔다리가 나타났다.
“아이고 세상에, 진짜로 말세가 왔는가 보네. 말세가 왔는가벼.”
CCTV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혼이 달아난 양 망연자실했다. 이후 구치소 간수들은 밤에는 아예 요색희의 방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영어(囹圄)의 몸이 된 민주투사 요색희는 집필에 착수했다. 이름하여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옥중수기였다. 반미를 슬로건으로 내걸던 요색희의 아들은 뜻밖에 미국에서 마리화나를 빨고 있었다. 판매책이라나 뭐라나.
머저리들의 합창
체르노빌에서 실려온 방사성오염으로 한국 서해안에서 바퀴벌레들이 떼죽음을 당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과학자들은 어딘가에 살아남았을 돌연변이 바퀴벌레 때문에 전전긍긍했다. 과학자들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거대한 바퀴벌레들의 가공할 해악과 생태계 교란을 여간 걱정하지 않았다.
돌연변이 바퀴벌레는 1980년대 중반 한국사회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학생들의 가방마다 바퀴벌레를 죽이는 살충제가 들어 있었다. 살충력도 기존의 것보다 열 배나 세었다. 돌바퀴를 보았다는 소문은 남부에서 북부로 바람처럼 전해졌다.
어제는 경기도 용인에서 이른 아침 산에 올랐던 등산객이 교미 붙은 돌바퀴 한 쌍을 발견하고 놀라 허둥대다 바위에서 미끄러져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제보가 잇따랐다. 밤늦게 숲속에 들어가 못된 짓을 하려던 가출청소년들이 한 쌍의 돌바퀴를 목격하고 혼비백산 튀어나왔다.
“영화 프레데터에 나오는 괴물 같았어요. 오르가즘에 오른 것 같았어요. 붙은 몸을 못 떼던데요. 근데 두 놈이 찰싹 붙어 우리 쪽을 노려보는데 꼭 비웃는 것 같았어요. 기분 좃나게 나빴어요.”
카메라에 비친 가출 청소년들의 눈은 여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제 돌바퀴는 공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지 그들만의 세월을 보내는 집단이 있었다. 대학가였다. 군부가 재집권한 이래 단 하루도 시위가 그칠 날이 없었다. 최루탄의 메케한 냄새가 온 캠퍼스에 자욱했다.
이 무렵 운동권에는 지각변동이 있었다. 그동안 주류를 이루던 민중민주주의계열의 PD파가 북한을 섬기는 비주류인 민족해방계열의 NL파에게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 중심에는 김배역의 ‘땡벌서신’이 있었다. 그는 땡벌라는 필명으로 공산국가에서조차 왕따를 당하던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소개해 운동권을 평정했다. 세상은 때로는 10원짜리가 100만원짜리를 밀어내기도 한다. 주체사상은 뭔가 미칠 거리를 찾던 학생들의 여린 심성을 파고들었다. 이때부터 대학가에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이니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이니 하는 괴상한 주문을 왜대는 지진아들이 날뛰고 다녔다.
그들은 가짜 김일성인 김성주를 민족사의 정통으로 내세웠으나, 김성주가 일으킨 한국전쟁으로 한반도는 폐허가 되었고, 한국전쟁 특수로 태평양전쟁의 패전으로 빈사상태에 빠져있던 일본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기사회생했다. 그들은 그런 기본적인 역사 인식도 없었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꿀단지’ 아니면 ‘동굴초’였다면 알쪼지!
경기도 용인, 역관(譯官)대 용인분교가 들어선 이래 학교 주변은 대학촌으로 변했다.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연수 중인 심혁수는 친구 동생이자 애인인 설은숙을 만나기 위해 주말이면 용인캠퍼스를 찾곤 했다. 설은숙은 영어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좀처럼 오기 힘든 곳이지만, 소박하고 정감 있는 이곳의 캠퍼스가 좋았다. 학생들이 면학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공부와는 담쌓고 사는 또 다른 부류가 있었다. 소위 운동권이었다. 사이비교 교주가 신도들에게 선민의식을 심어주어 얼을 빼놓듯이, 운동권 선배들도 후배들에게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바꿀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하면 뿅갔다.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돌바퀴들은 숙주를 찾아 수도권으로 잠입했다. 돌바퀴들은 자기들과 궁합이 잘 맞는 인간이 수도권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먼저 김배역과 하소경 등 명문대의 주사파 리더들을 주시했으나, 지능지수가 높은 놈들은 변절할 가능성이 엿보여 실격시켰다. 그들보다는 분별력이 모자라 쉽게 맹신하고 그러면서도 탐욕스러운 인물들을 수배했다.
오랜 수배 끝에 자기들하고 DNA가 맞는 인물들이 용인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의 레이더망에 걸려든 인물이 요색희(妖色氣), 염색경(艶色輕), 김저연(金猪年), 장행주(張行酒), 여원성(呂怨聲), 위요원(危要員) 등이었다. 돌바퀴들은 이들 몸에 자신들의 염색체를 주입하고자 고심하기 시작했다.
5월 중순이 되자 대학가는 축제 무드에 흠뻑 빠져들었다. 라일락 향기가 코를 찌르고, 담벼락의 넝쿨장미가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흐느적거렸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던 학구파들도 축제 기간만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흐트러졌다.
설은숙과 심혁수는 소피아 로렌, 마르체로 마스트로얀니 주연의 영화 <해바라기>를 보고 막 극장 문을 나섰다. 해바라기 꽃이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우크라이나 대평원의 잔영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축제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솜사탕을 먹으며 산보를 하던 심혁수는 저도 모르게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인 한 청년에 눈이 갔다. 훤한 신수가 돋보였다.
“누구야? 저 친구?”
심혁수는 미래의 아내 설은숙의 어깨를 살포시 껴안으며 물었다.
“요색희라고 유명한 사람이야. 내막을 알면 오빠가 싫어할 사람이야. 주사파의 리더야. 정신이 똑바로 박힌 애들은 멀리하는데, 좋아하는 애들도 있어. 있잖아, 리더니 뭐니 하면 푹 빠지는 애들.”
주사파 떨거지들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는 심혁수의 성격을 아는 설은숙은 행여 불상사가 생길 새라 애인의 어깨에 살포시 젖가슴을 갖다 대었다.
요색희는 수도권에서 밀려난 상실감에 빠져있던 학생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었다. 요는 이들 중 반골기질이 있는 사람만 선발해 운동권에 끌어들였다. 이들의 수법이 워낙 주도면밀해 한번 찍히면 그들의 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요는 이들에게 세뇌교육을 철저히 시켰다. 세뇌교육이라고 해야 운동권의 계보와 김일성의 주체사상이었다. 영어 실력이 딸려 영문으로 되어 있는 마르크스-레닌사상은 펼쳐볼 엄두도 못 냈지만,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한글로 되어 있어서 어지간한 둔치들도 쉽게 숙지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이념교육이 끝나면 설악산으로 가 재차 정신무장을 시킨 후, 마지막 코스로 이른바 성전의식(性戰儀式)에 들어갔다.
‘부조리로 가득 찬 사회를 바로잡을 사람은 너밖에 없어. 오빠 믿지? 나 이런 맘 처음이야! 나 진짜 진짜 너 좋아해!’
사이비 목사가 여신도의 신앙심을 매개로 성욕을 채우듯이 ‘빤스를 내리면 동지요, 안 내리면 미제앞잡이’로 낙인찍었다. 세뇌된 여학생들은 통관의례로 여기고 주저 없이 빤스를 내렸다.
소위 운동권 떨거지 중에는 ‘공짜 빠구리’ 꼬임에 넘어가 고난의 길을 걷는 놈들 많았다.
요색희는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로 얼빠진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구태여 운동권을 들먹이지 않아도 요색희의 조건이면 당일치기 빠구리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들뜰 대로 들떠 있는 축제기간이다.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 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빵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야 손 치워 손….”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이게 또 주제넘게 남도창 한 소절을 할 줄 알았다. 이 무렵 여학생들 사이에는 아무개가 거시기에 ‘다마’밖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남학생들은 예쁜 여학생들을 보면 아무개의 몇 번째 첩이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했다.
5월 이 아름다운 달에 취하지 않는다면 청춘이 아니었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여관으로 간다고 해서 흉볼 사람도 없었다. 요색희는 사흘째 되던 날 점찍어 두었던 후배 경아와 여관으로 직행했다. 아다라시냐 아니냐를 두고 친구와 내기를 해두었기에 이만저만 궁금한 게 아니었다. 경아는 아다라시였다.
퍽, 퍽, 퍽….
아, 아, 아!
골반 부딪치는 소리와 남자의 거친 숨소리, 여자의 교성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방 안에는 술병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머리맡에는 휴지가 뒹굴고 있었다. 벌써 세 번이나 질펀하게 살을 섞었지만, 이 정도에서 멈추기엔 젊음이 허락지 않았다. 길고 긴 육체의 향연이 끝나고 두 혁명전사들은 그대로 코를 골고 잠에 떨어졌다.
이때 창밖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검은 눈이 있었다. 거대한 바퀴벌레였다. 바퀴벌레는 스스로 창문을 열고 슬며시 들어와 벽에 붙어 한동안 두 전사를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바닥으로 내려와 방 안에 놓인 주전자에 얼른 알을 산란했다. 한꺼번에 수백 개의 바퀴 알이 이 물속에 스며들었다. 산란을 마친 돌바퀴는 유유히 창문을 빠져나와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이른 아침 한차례의 격정적인 혁명과업을 마친 두 전사는 주전자의 물을 벌컥, 벌컥 들이켰다.
“물맛이 왜 이렇게 좋지? 뭔가 미세한 알 같은 것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기분? 꼭 최음제를 마신 기분인데?”
주전자의 물을 다 비우고 그들은 여관을 나서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이해 용인에 있는 대학가에 약 백만 개의 돌바퀴 알이 전사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이틀 후 요색희를 비롯한 전사들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나타났다. 갑자기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에는 예외 없이 끔찍한 악몽이 이어졌다. 꿈속에서 흉측한 바퀴벌레로 변해 하수도 구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엔 가볍게 여겼으나 하루가 지나도 신열과 악몽은 여전했다. 젊음으로 무장한 이들은 그만한 일로 병원을 찾지는 않았지만, 신열과 악몽이 계속되자 할 수 없이 병원을 찾아 해열제를 처방받았다. 다행히 신열은 차츰 가라앉았다. 전사들은 이 이상한 경험을 애써 잊었다. 골치 아픈 문제에 매달리기엔 그들은 너무 젊었다. 한데 보름달이 뜨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꿈에서 겪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밤 12시가 되자 자신도 모르게 하수구에서 흉측한 바퀴벌레로 변해 있었다.
“으아악, 이건 꿈이야. 절대 현실일 리가 없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실신하는 이도 많았다. ‘하필 바퀴벌레라니?’ 더러 자살을 시도한 이도 있었지만 성공한 이는 없었다. 어떤 절대적인 힘이 그들의 죽음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특이한 좀비였다. 몇 번의 악몽이 되풀이되자 전사들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또 하나의 분신을 받아들였다.
“끼이익 끼익(너무 슬퍼들 마라). 끽 끼익 끼이익 끽(지구에 종말이 와도 우리는 안 죽어). 끽 끼이익 끽(그러니까 새끼들을 많이 치더라고).”
돌바퀴들은 가공할 번식력으로 세력을 넓혀 갔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정유재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숱한 참화를 당하고도 돌아서면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 민족은 다시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반체제인사로 이름을 알린 요색희는 타고난 상술로 돈을 모으자 지하에서 암약하는 대신 정치권에 진입하기로 궤도를 수정했다. 그 대안으로 친북좌파정권과 제휴하여 공을 세운 후 꿈에 그리던 금배지를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