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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지옥까지 - 그림자 춤·14

한국문인협회 로고 윤중리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봄호 2025년 3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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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뵈니 더 젊어지셨어요. 두 분 다."

영숙 씨가 코리아노 석 잔을 탁자 위에다 내려놓으면서 수인사를 건넨다.

"헛말인 줄 알면서도 듣기 좋은 건 젊다는 말이죠. 그만치 젊음이 소중하고 보배롭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아쉽고 안타까워도 이미 가버린 청춘. 이제 와서 안타까워한들 무슨 소용 있겠어요?"

영숙 씨의 인사에 상수가 화답하고, 이어서 내가 추임새를 넣는다.

오늘의 이 모임, 영숙 씨의 카페 '다리'에서 세 사람이 함께 만난 것은 영숙 씨의 인사마따나 오랜만의 일이다. 지난해 여름 제헌절 물난리 때, 태극기 사건 때문에 흥분했던 그 모임 이후엔. 내가 상수의 가야산 농장을 방문한 적도 있고, 둘이 만나 곡주사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고, 또 지난 4월엔 나와 영숙 씨가 함께 운문사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며칠 전 우리 카톡 대화방 '다리'에 영숙 씨가 글을 올렸다. 나와 상수는 쓸데없는 농담도,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온갖 소문들도 자주 올리지만, 영숙 씨는 열어보기나 하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뜸하다. 그런데 그날 아침엔 반갑게도 글을 올렸다. 11월 11일. 빼빼로데이. 빼빼로 과자를 세 통 사 놨다고 와서 먹자는 것이었다. 그런 건 늙은이들과는 무관한 것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영숙 씨의 제안을 받고 보니 관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꼭 과자가 먹고 싶다기보다는 그런 핑계 대고 얼굴 한번 보자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상수가 가야산 농장의 가을배추를 실러 오겠다는 약속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며칠 늦어진 것이다.

북서쪽으로 난 큰 창문으로 저녁 햇살이 들고, 햇살 따라왔는지 바람 따라왔는지 한껏 곱게 화장을 한 벚나무 낙엽이 한 장 날아들어 탁자 위에 내려앉는다. 그 파랗던 잎이 또 저리 빨갛게 변장을 하기도 하는구나 싶은 생각, 내가 우리 아파트 곁에 붙은 공원을 산책하면서 자주 하던 생각을 다시 한다.

"전에도 그런 생각 안 한 건 아닌데요, 요즘은 낙엽이 곱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돼요."

"그래서 낙엽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옛사람도 노래했다더군. 김 선생이 전에 그랬잖아? 누구의 시던가? 한시 말야."

영숙의 말에 상수가 응답을 하면서 나를 끌어들인다.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라는 시가 있어. 서리맞은 나뭇잎 봄 꽃보다 더 곱다. 뭐 그런 거야. 번역을 하자면."

"하하하. 연세 드신 두 분 어른이 젊은 저보다 더 아름답다, 그런 뜻이군요. 긴 인생 사시면서 온갖 일 다 겪으시는 동안 마음이 곱게 익어갔다, 그런 뜻?"

"하하하, 여기 황진이보다 더한 여류 시인 한 사람 났네. 그건 그렇고 준다던 빼빼로 과자는 어디 있어요. 커피하고 함께 먹으면 더 맛있지 싶은데?"

"과잣값이 좀 비쌉니다. 얼마 전에 세상 떠들썩하게 했던 그 신발장수 신 씨 얘기 있잖아요? 그 얘기 좀 해주셔요. 두 분 다 그 사람 아는 사이라고 하셨죠?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하고는 물론 느낌이 다르겠죠? 뭐라고 할까? 뒤에 숨은 진실 같은 걸 알고 싶다고나 할까?"

"그러지 뭐. 김 선생이 해라. 얘기라면 아무래도 공돌이 출신 농부보다는 국어 선생 출신 김 선생이 나을 거니까. 좀 실감나게."

지난 4월 중순, 그러니까 총선이 끝나고 내가 영숙 씨하고 운문사 여행을 다녀온 직후의 일이다. 함께 가지 못한 상수가 전화를 해서는 재미있었느냐, 부럽고 섭섭하다 뭐 그런 농담들을 한참 늘어놓다가 갑자기 그 신발장수 신 씨 얘기를 꺼낸 것이다. 자기가 전에 직물공장 할 때, 그 옆에서 야심차게 개업을 했던 공장의 사장이, 이름을 신재영이라고 하는데, 의욕이 넘쳐서 무리한 경영을 하다가 결국 오래 끌지 못하고 공장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그는 성격이 호방하고 박상수와는 바로 이웃이라 호형호제하면서 지낸 사이였단다. 그런데 오래 소식 두절이던 그가 반월당 지하상가에다 신발가게를 열었다고 한번 놀러 오라는 연락이 왔더란다. 체면치레하느라고 한번 가 봤는데, 선입견으로 생각했던 신발가게와는 많이 다르더란다. 우선 가게가 넓고, 신발의 수가 많아서 가게 안에도 천장까지 쌓여 있는 데다가 가게 앞 통로까지 점하고 있더란다. 나더러도 반월당 나가는 기회 있으면 구경 한번 하라면서, 정작 중요한 상호는 안 가르쳐 준다. 특이한 이름이어서 가 보면 금방 그 집임을 알게 될 거라면서. 또 나의 궁금증을 자극해 놓아야 가 볼 것 아니냐면서.

며칠 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안에 있는 교회사연구소에서 회의가 있어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상수가 얘기하던 그 신발가게를 찾아보기로 했다. 걸음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추면서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다. 반월당 지하상가에는 여러 가지 점포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특히 옷집이 많다. 그다음으로 많다 싶은 것이 약국이다. 신발 가게도 버금간다. 그런데 자주 보던 가게 외에 새로운 가게, 상호가 특별해서 금방 알아볼 것이라고 상수가 얘기했던 그런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승강장으로 내려가려고 에스컬레이터까지 갔다가 내친김에 좀 더 찾아보기로 하고 만남의 광장 동쪽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건 거기 있었다. 온 골목을 다 밝힐 것 같은 안팎의 조명. 그런데 역시 내 눈길을 확 끄는 것은 상호였다. '걸어서 하늘까지.' 아니, 신발가게 이름이 뭐 이래? 밝은 네온으로 된 상호 간판 바로 아래 적힌 문구는 '좋은 신발 한 켤레로 하늘 가자.' 나는 간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서 있었다. '걸어서 하늘까지'라? 이건 죽은 내 친구 박해수 시인의 시집 이름이다. 물론 표제시의 제목이기도 하고. 나는 순간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윤회? 생명은 돌고 돈다는 생각? 죽은 시인 박해수가 여기 신발가게 간판으로 다시 살아났구나 하는 생각.

내가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안에서 주인인 듯한 사내가 나왔다. 키가 훤칠한 이 남자는 이마가 약간 벗어지고, 나이는 좀 들어 보이지만 우리 나이보다는 많이 아래이지 싶었다.

"한 켤레 골라 보시죠. 싸게 드릴게요."

"아, 예. 사장님이시군요. 지나가다가 상호가 특이해서."

"아, 그래요?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다른 가게와는 차별화가 되죠?"

"명함이나 한 장 주셔요. 다음에 필요하면 연락드릴게요."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다시 꺼내어 본 그 명함에는 가게 이름 아래에 주인 이름이 상호만큼이나 큰 글씨로 씌어 있었다. 신재영. 괄호를 해서 한자로도 적어 놓았다. 申財榮. 좋은 이름인데? 돈 많이 벌 이름이군.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돌아왔다.

집에 와서 나는 책장을 뒤져서 박해수 시집 『걸어서 하늘까지』를 찾아냈다. 작은 판형의 얇은 시집인데, 문학세계사에서 나온 현대시선집 76번으로 되어 있다. 책 이름 위에 적힌 지은이 박해수(朴海水)의 이름도 오늘은 유난히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해수(海水). 바닷물이라? 혹시 본명이 아니고 필명으로 쓰던 이름인가? 언젠가 그런 질문을 했고, 시인은 아니라고, 본명이 맞다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바닷물 시인 박해수. 초기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시는 「저 바다에 누워」란 제목의 작품이다. 마치 자기 이름을 소재로 한 듯한 이 시는 전국 대학생가요제에서 1등을 한 노래의 가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 가수가 작사자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나중에 문제가 되자 부산에서 대구까지 찾아와서 박 시인에게 사죄를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건이 박 시인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는 나중에 대구문인협회 회장도 지내고, 시골 역 연작시, 대구지하철역 이름 연작시 등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병원에서 먹은 약이 기도로 넘어가는 사고로 갑자기 저승으로 가버렸다. 걸어서도 하늘 가는 사람이니 천당 갔을 거라며 우리는 섭섭함을 달랬었다.

나는 책을 뒤져서 표제 시 「걸어서 하늘까지」를 찾았다.

무릎 꿇어 갈 수 있을까

멀리 멀리

걸어가면 아득하리라

우러러 하늘을

하늘을 보면

정말 걸어서 갈 수 있을까

등나무 줄기를 타고

저승꽃처럼

쇠별꽃처럼 피어서

아무렇게나 홀로 걸어서

하늘까지 갈 수 있을까

저녁해 바라보며

삶꽃 피우고

하늘 가는 길은

저녁놀에 파묻혀

별들도 쉬어간다는

저 하늘 위

걸어서 걸어서 하늘까지

걸어서 갈 수 있을까

‘시여 말하라. 아픔과 고통이 영혼의 노래가 되게 하라’(시집 머리말) 하고 절규하던 시인 박해수는 가고, 여기 이렇게, 먼지 쌓인 책장 구석에 한 권의 퇴색한 시집으로 그는 살아 있구나.

그날 저녁에 나는 소주 두 병으로 박해수와 대화하다가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근 한 달 됐지 싶은데, 상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이, 김 선생. 그 신재영이 신발가게 상호가 김 선생 친구 시인 시집 제목이라고 했었잖아? 내가 그 얘길 신재영이한테 했더니, 막걸리 한 사발 사겠다면서 만나자는데?”

“하하, 그래? 공술이라면 사양할 내가 아니지. 그래, 언제 만나는데?”

“김 선생 얘기 먼저 듣고 약속하려고 아직 정하진 않았는데, 내 그 사람한테 전화해 보고 다시 연락할게.”

그렇게 돼서 이틀인가 후에 세 사람이 곡주사에서 막걸리 병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먼저 곡주사라는 이 집 상호의 유래 얘기가 나오고, 이어서 신발가게 이름 얘기가 나왔다. 자기도 젊은 시절엔 문학청년이었다며, 선배 한 사람을 통해서 박해수 시인을 만났는데, 그날 시집 한 권을 선물로 받았고, 그게 바로 『걸어서 하늘까지』라고 했다. 박 시인을 좋아했고, 그 시도 좋아해서, 신발장사 시작하면서 걷는 건 신발과 관계가 있다 싶어서 자기 딴엔 기발한 발상이라고 생각하고 간판을 달았단다.

섬유공장 사장이 어떻게 신발장사할 생각을 하게 됐느냐는 상수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을 한다. 공장 싸구려로 넘기고, 융자 갚고 나니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았다. 무슨 새로운 사업을 해 볼까 탐색을 해 봤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섬유공장은 말아먹은 상황이고, 다른 업종은 경험도 지식도 없는 데다가 담보가 마땅치 않으니 융자도 안 되더란다. 하도 답답해서 타로라는, 요즘 유행하는 신식 점집엘 찾아갔단다. 거기서 손뼉을 쳤다. 용한 점괘가 나온 것이다. 성이 신 씨이고, 이름이 재물 많아 영화롭게 산다는 뜻이니, 신발장사를 하면 대박 난다는 것이었다. 한편 기발하다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돈 많이 벌었어? 자기도 첨엔 허황하다 싶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란다. 이 현대 과학 문명의 시대에 점을 쳐서 먹고산다면? 이런 대도시 한복판에서? 그렇다면 점이란 것 속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비밀이, 우리가 이해 못 하는 어떤 신비스런 힘이 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길이 없다면 한번 해 보자. 혹시 아나? 이 점쟁이 예언이 맞을지.

그래서 폼나게 ‘걸어서 하늘까지’라는 멋진 이름표도 내걸고, 중국산 값싼 신발 한 차 실어다 진열해 놓고 개업식이란 것도 하고 시끌벅적하게 시작했던 신발장사.

그러면 장사가 잘돼야 할 것 아냐? 상수가 느긋하게 기다리지를 못하고 또 신 씨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형님.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잘 되긴커녕 가게 월세도 감당하기 힘들어요. 하루에 한 켤레도 못 파는 날도 있다니까요. 마누라한테는 완전히 죄인이 되고 말았지 뭐요. 점괘 믿고 장사 시작하는 바보가 이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도 있는가? 하면서 펄펄 뛰는 걸, 조금 더 기다려 보자. 혹시 아나? 조상이 돌아볼랑가? 하면서 달래고 있다니까요.

신 씨의 넋두리는 길어지고, 비례해서 식탁 위의 빈 병 수도 늘어났다. 거기다가 소주까지 섞었더니 취기가 짙어졌다.

이번엔 술기운에 용기를 얻어서 내가 끼어들었다.

어이, 신 사장님. 상호를 잘못 붙였어요. 능력 없는 인간은 이름 덕으로 먹고산다, 그런 말 들어 보셨죠? 아무리 좋은 이름이라도 그 주체한테 안 맞으면 소용없어요. 옷도 몸에 맞아야 태가 나는 법이죠.

아니, 김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

신 사장이 정색을 하고 내 얼굴을 쳐다본다.

생각해 보쇼. 하늘나라 가는 사람이 우리나라 인구 중에서 몇 퍼센트나 될 것 같아요? 더구나 하늘나라 가는 데는 신발을 안 신어도 돼요. 폭신한 뭉게구름 딛고 가는데 무슨 신발이 필요하겠어요? 오히려 맨발이 더 낫지. 상호를 바꾸세요. ‘걸어서 지옥까지’ 이렇게요. 요즘은 지옥이 만원이라서 입국 사양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생각해 보쇼. 하느님이 그렇다고 지옥 갈 놈에게 천당 문 열어주시겠어요? 어림없죠. 방마다 정원 초과를 하는 일이 있어도 지옥 갈 놈은 지옥으로 보낸다 이 말씀. 더구나 지옥 가는 길은 험해요, 가시밭길도 있고, 자갈밭도 있고, 달구어진 쇠길도 있고, 바위산도 넘어야 하고, 독충이 우글거리는 골짜기도 지나야 하고 그러니 신발 안 신고는 어림없죠. 사람마다 두어 켤레씩은 준비해야 할거요. 아마도 대박 날 거예요.

상수가 내 말에다 양념을 섞는다.

어이, 신 사장. 이 친구는 말야. 작명에는 알아주는 사람이야. 옛날 교편 잡을 때 제자가 귀한 첫아들이라고 아무한테나 맡길 수 없다며 작명을 부탁해서 지어 줬지. 서점에 나와 있는 작명법 책은 모조리 사서 읽고 도통한 거야. 그때 그 아이가 자라서 미국 어느 주립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하바드 로스쿨까지 나왔다잖아. 지금 미국서 변호사 한다고 했지? 김 선생?

갑작스런 기후변화에 놀란 듯, 신 사장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다.

그 뒤 어느날 저녁, 내가 외출에서 돌아왔더니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내가 히히히 웃으면서 “세상엔 웃기는 일도 많아. 저것 좀 보세요” 하면서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고 영감을 맞이한다. “뭐가 그리도 웃기는데? 하늘 같은 남편 들어오시는데 돌아다보지도 않아?” 나는 옷도 안 갈아입고 소파에 가서 마누라 곁에 앉았다. 어느 종편 채널에서 방영하는 ‘세상만사’라는 프로인데, 변호사, 국회의원, 대학 교수, 언론인 들이 패널로 나와서 여러 가지 이슈들을 놓고 좌담과 토론을 하는 프로다. 오늘은 국회의원 여야 한 사람씩, 어느 신문사 논설위원이란 사람, 그리고 낯익은 여자 변호사 한 사람, 진행자 포함 다섯 사람이 토론을 벌이고 있다. 진행자도 자주 보던 얼굴이다.

나는 한참 뒤에야 상황 파악이 됐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서, 과장을 좀 섞으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세상에. 거기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신발가게 ‘걸어서 지옥까지’ 이야기가 아닌가.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스토리가 대강 재구성이 되었다.

발단은 신재영의 신발가게 이름이었다. ‘걸어서 하늘까지’가 어느날 갑자기 ‘걸어서 지옥까지’로 바뀌었으니, 먼저 주변 가게 사람들 사이에서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 소문은 서울까지 퍼졌고, 신기한 얘기들을 모아서 인기를 얻고 있는, 구독자가 몇십만 명이라는 어느 유튜브 방송이 먹이 냄새 맡은 하이에나처럼 달려왔다. 가게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주인 신 씨와 인터뷰도 했다. 상호를 바꾸게 된 계기와 의미를 비롯해서 생각지도 못한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특히 상호 바로 아래에 붙어 있는 ‘신발 없어서 지옥 못 가는 나쁜 사람에게는 반값으로 제공합니다’하는 문구에다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인기 먹고 사는 이 유튜브 방송에서 이걸 살짝 뜯어고치고,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 조작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지옥 못 가는 나쁜 사람’을 ‘지옥 못 가는 정치인’으로 둔갑을 시켰다. 재고 신발의 수도 인터뷰 때는 분명히 500켤레라고 했는데, 그것도 600켤레라고 바꾸어 놓고는, 그 숫자는 바로 국회의원 일인당 두 켤레로 계산한 것이라고, 지옥 가는 길은 험해서 신발 한 켤레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해 놓은 것이다. 그러고는 이걸 무슨 특종이라고 여기저기 방송사에다 뿌린 것이다.

대강 이런 스토리인데, 이걸 두고 패널들 사이에선 여러 가지 법률적 지식까지 동원해 가면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얘기가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있었고, 어쩌면 국정감사 때 신재영을 증인으로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상호를 바꾼 데 있다. 그러므로 새 상호를 제안했다는 사람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그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신재영은 아마 내 이름을 밝히지 않은 모양이지만 토론자들은 일개 신발장수의 아이디어는 아닌 것 같다면서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했고, 야당 국회의원은 그 배후가 혹시 여당 측 정치인 아닐까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소설 쓰고 있네’ 하면서도 씁쓸한 생각이 든다. 이거 잘못하다가는 국정감사 증언대에 설 수도 있겠구나 싶은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설마 이런 일로 나 같은 시골 영감을 그러지야 않겠지. 그러나 개도 돼지도 증언대에 세울 수 있는 무소불위의 국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야당 국회의원의 이 발언에 여당 국회의원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모양이군요?” 하면서 반론을 편다.

한 사람이 500이란 숫자가 600으로 둔갑한 이면에도 불순한 의도가 있음에 틀림없다고 열을 올리니, 신문사 논설위원이란 사람이 그보다는 ‘나쁜 사람’을 ‘나쁜 정치인’으로 고친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면서, 누군가 한국 정치에 혐오감을 드러낸 것인 바, 이는 곧 국민의 정치 불신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신재영을 탄핵하거나 특검을 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는데, 여자 변호사가 일개 신발장수한테 탄핵은 어불성설이고 특검은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자 다른 사람은 탄핵도 탄핵 만능 국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면서 여자 변호사의 의견에 반대를 표하고, 특검은 특검 만능주의 국회니까 국회 모독죄로 검찰에 고발을 한 다음에 특검법을 발의할 가능성은 있다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여자 변호사의 편을 든다.

이날 저녁의 ‘세상만사’ 토론 프로는 밤 11시에야 끝이 났다. 모임에서 한잔 걸친 술기운은 어디론가 다 달아났었는데, 토론이 끝나고 텔레비전을 끄자 갑자기 피로가 확 밀려왔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렇게 1회 방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방송국마다 그 많고 많은 프로그램에서, 어쩌면 얘깃거리 부족 때문이지 싶은데, 찔끔찔끔 언급을 했고, 종이신문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인터넷 신문에서도 곳곳에 기사가 나왔다. 대부분은 짤막한 기사였으나 어느 한 신문에서는 이 문제를 제법 무게 있게 다룬 곳도 있었다. 그래서 대구 반월당 골목의 이 신발장수 이야기는 온 나라에 퍼져서 사람들을 웃겼고, 신재영은 어떤 의미로 일약 유명 인사가 됐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처음에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한 줌의 위로가 되는 말이다, 신재영의 신발가게 이야기도 그렇게 지나갔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고, 국정감사나 청문회에서도 그냥 흘러갔다. 물론 검찰 고발이나 탄핵, 특검 같은 문제도 없었다. 정치적 소득이 별로 없는 시시한 이슈에 불과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란 게 내 생각이었다. 세상사는 다 그렇게 지나가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얘기 다 했으니, 빼빼로 가져와요. 커피잔 바닥나기 전에.”

상수가 조금 남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면서 영숙 씨를 돌아본다. 영숙 씨는 과자 가지러 갈 생각은 안 하고 또 다른 주문을 한다.

“그런데 말예요. 그 뒷얘기도 좀 들려주셔요. 이건 박 사장님이 해야 하지 싶은데요? 안 하시면 과자는 김 선생님만 드릴 겁니다.”

내가 또 추임새를 넣는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어느 놈이 먹는단 말이 있지. 얘기는 내가 다 했는데, 박 사장이 나와 똑같은 양의 과자를 받을 수는 없지. 세상은 공평해야 해. 공평하지 못하면 불만이 생기고, 불만이 생기면 다툼이 생기고 그렇지.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 대개 불공평, 불평등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지. 그래 박 사장도 텔레비전에 안 나온 이야기, 후일담이랄까 신식 말로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것 좀 해 봐. 들어보고 기분 합격점 받으면 내가 과자도 똑같이 주고, 바리스타 영숙 씨 커피보다 더 맛 좋은 어부의 오두막 소주를 한잔 쏠게.”

“비하인드 스토리? 김 선생은 모르고 나만 아는 그런 스토리는 없어. 신재영이는 장사는 망치고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됐다고, 재수 없어서 더는 못 해먹겠다면서 장사 접었어. 신발값을 들여놓은 가격의 50퍼센트로 땡처리하려고 해도 가져갈 사람이 없어. 결국엔 공짜에 가까운 값으로 땡처리 전문점에다 쓸어다 주고는 가게 문 닫았다고 하데. 그게 비하인드 스토리라면 스토리이고.”

“박 사장. 비하인드 스토리 그게 다야? 박 마담. 얘기 끝났으니 과자나 주소. 옛날에 먹어본 적은 있는데, 옛날 그 맛일랑가?”

“빼빼로라는 이름도 신기하지? 어찌 들으면 외국말 같기도 하고 우리말 같은 외국말도 있고, 외국말 같은 우리말도 있고. 그렇더라고. 저 아파트 이름들 좀 봐. 왜 아파트 이름을 이리 어렵게 짓느냐니까, 글쎄, 시어머니 못 찾아오게 그런다는 것 아냐?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이번엔 시누이까지 데리고 와서 작전 실패했다는, 웃기는 얘기도 다 있더라고.”

“빼빼한 모양의 과자라는 뜻일 텐데, 그게 빼빼로데이 바람을 타고 신바람 나게 팔린다는군. 외국에서도 인기라던데? 장사들의 상술에 정신도 없이 놀아나는 거지 뭐.”

나와 상수가 헛소리로 떠들고 있는 동안, 영숙 씨는 과자를 가져와서 한 상자씩 나누어 준다, 얇직하고 조그만 종이 상자에 가늘고 길쭉한 막대 모양의 과자. 그 끝에 갈색의 초코렛을 묻혀 놓은 그림이 먼저 눈길을 끈다.

“장사술에 놀아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삭막한 일상에서 그런 거라도 기분 전환하고, 또 기업은 그 덕도 보고. 상부상조라고나 할까?”

나와 상수의 대화에 과자를 나누어 준 영숙 씨가 참견하고 나선다.

“그렇지요. 과유불급이라고나 할까. 전번의 그 할로윈데이인가 그때 같은 일만 없다면 말이지.”

“그 일은 참 안타까운 건 맞는데, 그것도 정부 탓으로 돌리고, 관리들을 살인자 취급한 건 너무했더라. 생각해 보면 저희 술 마시고 놀다가 난 사고인데. 질서만 좀 지켜 주었으면 아무 일 없이 즐거운 밤이 됐을 건데 말야.”

“그건 그래. 죽은 사람한테 책임을 못 물으니 애매한 정부가 살인 누명을 뒤집어쓴 거지. 젊은 목숨 죽은 거야 안타깝지만.”

“그래서 정치가 어려운 것 아닐까? 포괄적 책임을 지게 되니까. 그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 아냐? 대통령이 사고 나라고 했나, 죽으라고 했나, 그건 하나의 교통사고 아닌가? 죽은 사람이 너무 많긴 하지만. 그런데 대통령한테 책임 다 뒤집어씌웠지.”

“어이, 박 마담. 텔레비전 좀 켜 봐요. 오늘이 그 사람 선고일이지?”

상수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서는 영숙 씨를 재촉한다.

“그 사람이라니, 누구 말야? 아하, 야당 대표 얘기구나. 나도 아침 뉴스에서 들었어.”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하단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란 문자가 떠 있고, 선고받은 당사자인 야당 대표가 웅변을 하고 있다. ‘이 판결은 정치적 보복이고, 오늘은 현대사의 한 장면이며, 역사의 법정에서는 무죄’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옆과 뒤로는 같은 당 국회의원들과 지지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다. 하단의 글자는 그대로 있고, 화면은 장면이 계속 바뀐다. 법정에 들어갈 때 같은 당 국회의원들이 줄을 서서 인사하는 장면, 재판관을 비방하는 야당 지지자들이 법원 앞에서 시위하는 장면, 이어서 거대 야당의 탄핵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해 준 재판관을 대한민국의 한 줄기 희망이라면서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다음 장면에서는 국민 핑계 대면서 당리당략에 몰두하는 방탄정당이라면서 야당을 비판하는 여당 지도부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장면이 바뀌자, 시민, 정치인 등 여러 사람이 나와서 한마디씩 한다. 벌금 80만 원 정도를 예상했는데 예상 밖의 중형이라는 사람, 당선 무효형이라도 벌금형일 줄 알았다는 사람, 징역 1년은 당연하고 집행유예는 야당 대표라고 봐준 것 같다는 사람, 야당이 저렇게 목을 매는 이유는 돈 때문이라는 사람, 앞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재판에 큰 영향을 주어서 가벼운 형을 선고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람, 사람 수만큼이나 의견들도 가지가지다.

“집행유예라는 것도 실형에 속하나요?”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영숙 씨가 침묵을 깨면서 나를 돌아본다.

“난 법을 잘 몰라요. 그렇지 싶긴 한데. 평생 법 없이 살아온 선량한 사람에게는 그런 지식은 필요가 없는 법이지, 하하하.”

“김 선생은 소피스트의 후예인가? 전에도 궤변을 잘하더구먼. 예. 맞아요. 그것도 실형입니다. 집행을 유예해 주기는 하지만 판결의 내용은 징역 1년이니까요.”

나의 유체이탈 답변에 상수가 보충을 해준다. 그렇다. 생각하면 법치주의 나라에 산다면서 내가 가진 법 지식은 너무나 형편없다. 죄 안 지으면 그만이지 법 지식이 뭐 필요해. 법은 변호사, 판사, 검사 들만 알아도 나라 굴러가는 데는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일반인이 법 자꾸 따지는 사람은 어디 구린 구석이 있는 사람이지. 늘 그런 생각으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의 법이란 우리 생활 주변의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 봐도 비슷한 내용들이다.

“어이, 박 마담. 이제 텔레비전 꺼요. 과자 맛, 커피 맛 다 떨어진다. 나라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는지, 나 원 참.”

상수의 시선은 다시 탁자 위의 커피잔으로 돌아온다.

“어이 박 사장. ‘정부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에 정비례한다’, 그런 말 들어 봤지? 자꾸 파고들어가 보면 결국 국민한테로 귀착하게 된다고. 수원수구(誰怨誰咎)리오? 다 내 탓인 것을.”

“어따, 여기 성인군자 한 사람 나왔네. 조금 전의 소피스트가 금방 성인군자로 변신하네. 허 참.”

“저런 정치인 누가 뽑았어? 우리가 뽑았잖아?”

“진실과 양심과 정의에 입각해서 국리민복, 국태민안을 위해 일하라고 뽑아준 거지 누가 저러라고 표 줬나? 김 선생 같은 골샌님이 많을수록 저 사람들은 기고만장, 온갖 불법 다 저지른다고.”

“그 많던 양심가, 그 넘쳐나던 지성인들 다 어디 갔어? 왜 이 난국에 말 한마디 없이 숨어 있는데? 그들이 목소리만 좀 높여줬어도 이 지경은 안됐을 것 아냐? 뭐 이제는 허위사실공표죄도 없애는 법 만들 거라면서? 그러면 거짓말 잘하는 사람일수록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되고 그런 날 올 거라고도 하데. 국민이나 정치인이나 할 것 없이 나라가 총체적 개판이야. 지성인이란 결국 비겁자의 대명사인가? 어떨 때는 나 혼자라도 나서고 싶어. 그러나 속수무책.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이 초라해질 뿐.”

나와 상수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영숙 씨가 당황한 듯 사이를 막아선다.

“하하, 두 분 어르신이 아이처럼 싸우시는 모습이 신선한 느낌인데요. 그 다툼의 틈새로 우정과 신뢰의 액체가 흘러나오는 느낌? 하하, 자, 참으시고 빼빼로 잡수셔요. 해결 못할 일 때문에 속 상하는 것보다는 내 손 안의 과자 한 개가 위안이 됩니다. 커피 한 잔씩 더 가져올까요?”

우리는 영숙 씨의 중재로 금방 분위기를 원상회복시킨다.

“이것도 다 광대의 그림자 춤인가? 저승의 경석이가 통탄하겠구먼.”

“일찍 죽어 고향에 묻힌 놈은 복 받은 놈이지. 이런 꼬라지 안 봐도 되고. 걸어서 지옥까지 가자면 신발이 필요할 텐데, 신발장수는 폐업했다니, 설마 죄지은 사람들 다 맨발로 지옥가는 건 아니겠지? 우리는 그 신발 신는 일은 없을 거고. 생각해 보면 가난한 접장 생활 희비애락 많았지만, 지옥 갈 죄는 안 지었지 싶어. 하하.”

“그런 판단은 김 선생이 하는 게 아니야. 하느님 몫이지.”

“박 사장, 오늘 이걸론 안 되겠어. 소주 한잔 걸치러 가자. 내가 쏠게.”

“그러자. 이런 걸 유식한 말로 뭐라는지 알아?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하하하. 전에 갔던 그 집, 어부의 오두막인가? 초라해도 운치가 있던데? 할아버지 동태탕 맛도 괜찮고.”

“박 마담도 같이 가시지. 막걸리 가끔 한 잔씩 한다며?”

영숙 씨는 고개를 저으며 반대편 구석을 눈길로 가리킨다. 거기에는 아가씨 한 사람이 노트북 컴퓨터를 켜 놓고 들여다보고 앉아 있다. 아까 우리가 들어올 때부터 그러고 있었는데, 전에도 한두 번 본 그 아가씨 같다.

나와 상수는 영숙 씨한테, 갔다가 다시 올 거라면서, 맛 좋은 코리아노 준비해 두라고 하고서는 카페 ‘다리’의 문을 나섰다. 바깥세상은 어둠의 장막이 내려 덮였는데, 안심교 너머 안심습지 저쪽 끝에서 붉고 둥근 달이 떠오르고 있다. 내가 영숙 씨와 처음으로 함께 외출하던 그날 저녁에 떠오르던 그 달이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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