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봄호 2025년 3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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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될 거야… 잘 되어 가고 있잖아요… 지금 회복하고 있는 중이야… 더 별일은 없을 거야….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참으로 놀랍도록 긍정적이다.
흔히 한국 사람들이 냉정하다고 하지만 친절하지 않다고 무뚝뚝하다고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근본적인 과다 친절함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지금 현재 다치고 아프고 절망적인데 모두 그 근본을 피해 그 건너편에 있는 희망을 덥썩 가져와 말해 주는 것이다.
너무 지나쳐서 현실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 친절도 있다.
“별 거 아니야.
나도 그런 적 있어.
곧 걸어 다니니 걱정 말아.”
“별 거 아니라니까! ”
“한가하게 며칠 쉬어!
쉬라고 그랬나 봐, 맘 편히 가져.”
며칠 전 낙상(落傷)을 하고 입원한 친구를 몇 명이 면회를 갔다.
모두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니까… 그것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맘 편히 가져….
우리는 친절한 위로이며 가까운 사람에게 주는 선물로 말하고 있다.
아니 다친 사람에게는 당연한 말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하고 있는 것이다.
면회가 끝나고 병원 밖으로 나와 찻집에 앉았는데 모두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쟤, 오래 고생하겠어.
의사도 걱정하는 수준이래잖아.”
“그러게.
걷지 못하면 어쩌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니? ”
그렇게 말하다가 서로 눈을 맞추며 다시 원형으로 돌아간다.
조금 잔인하다고 느낀 것일까 한 사람이 말한다.
“그래도 다행이야, 다행.”
“그럼, 그 정도니 다행이지.”
한국 사람들의 또 하나의 강력한 희망 잡기는 바로 이 다행(多幸)으로 출발한다.
다행은 행복이 많은 것이 아니라 더 다칠 수 있는 것은 막아준 것을 말한다.
다리를 다쳤는데 뇌를 안 다쳤으니 다행이고 이렇게 다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살아났으니 다행이라고 말한다.
죽을 수도 있는데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다 보면 정말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다친 사실은 잊고 이 정도로 다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하다고 기도한다.
조금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한국인들은 불안전에 자족하는 경향이 많다.
분명 아닌데 이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이어도 그 불편과 옳지 않은 의식을 더불어 견디며 살아가려 애쓴다.
팔자라고 하거나 운명으로 돌리면서 불안전을 자기 생으로 수용하더라는 것이다.
다리를 다친 친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큰소리를 하고 나와서는 현실파악을 하는 마음으로 그를 현실대로 걱정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진심은 늘 그 대상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지극한 친절”은 우리 한국의 표현 행동으로 한국인의 피에 섞여 있다.
미국사람이 보면 원시적인 느낌을 주는 과다한 친절이 있었다.
할머니가 밥을 잘게 씹어 어린 손주에게 먹이는 일이 허다했었다.
“심알을 잇는다”하여 할머니와 손자간의 심핵(心核)을 잇는 사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핏줄의 맥이다.
아마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비위생적이라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지금은 손주에게 그런 행동하다가 며느리에게 쫓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사랑에 미온적이라고 말해 왔다.
“님이 왔는데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했던 한국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님이 왔으면 부등켜 안기라도 해야 하는데 입만 방긋한 것은 순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보면 한국의 사랑은“접촉”이 매우 강한 표현으로 익숙하다.
모순적일 수 있다.
미국은 아이를 낳으면 엄마와 아이 침대가 다르다.
한국은 엄마 옆에 아이는 언제나 가장 가깝게 있다.
울 때마다 젖을 준다.
미국 엄마는 시간이 되어야 젖을 준다.
운다고 시간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한국 엄마는 주로 살을 맞대고 껴안고 산다.
일할 때도 등에 업고 일했다.
오랜 관습이다.
나는 아직도 유모차라는 것을 보면 낯설다.
아이는 안거나 업어야 제 맛이고 또한 그것밖에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접촉에 관습화되면서“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고”의 관계를 자녀에서 찾으려 하다가 상처를 받는 부모가 많지 않았는가.
부모는 그 접촉을 정으로 쌓고 자녀는 핏줄의 기둥으로 세우는 관계가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한국은 사랑과 정(情)이 다르다.
사랑은 어느 나라에도 있는 것이지만 한국은 사랑보다 정이 더 강세다.
요즘 세대들은 정을 알지 못하고 사랑이란 낱말에 익숙하지만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인간관계의 마음 온도는 정이라는 점에서 탁월한 지표가 된다.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지만 정은 쌓이는 것이다.
모든 결핍과 패악을 견디며 사는 시간 동안 마음이라는 공간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정이 결을 다지고 있는 것이다.
정은 나무의 화음과 같은 것이다.
나무의 뿌리가 가지는 수분을 혼자 가지지 않고 위로 가지와 잎으로 끌어 올리고 가지와 잎이 받는 햇살을 혼자 가지지 않고 뿌리로 내리며 생명을 키워 가는 사이 한 생명으로 운명을 같이 하는 것처럼 사람의 정도 그렇게 질겨진다.
사랑은 출발점에서 일어나는 감정이지만 정은 마지막 부분에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일이 묘하다.
프랑스 노벨 수상자 르 끌레지오는 우리나라에 제법 살았다.
그가 떠나면서 한 말이 인상적이다.
“한국에서 아주 귀한 것은 정이라는 겁니다.
어느 나라 말로도 번역이 되지 않는 정이라는 말은 정말 정이 들게 합니다.”
가능성 긍정 위안 용기 이해 사랑 화합 그리고 정은 우리가 현실적 아픔을 뛰어 넘을 때 먹던 밥이었다.
우리의 현실은 지금 억세게 슬프고 아프다.
그러니 우리 모두“괜찮아 좋아질 거야”“이 정도면 다행이야”, 서로 손을 잡으며 이 아름다운 정의 나라 대한민국을 힘을 합쳐 깨끗하게 얼굴을 씻겨야 할 것 같다.
수백 번 기도했는데 왜 이루어지지 않느냐구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기다려요 더불어 노력해요.
안정이라는 차를 마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