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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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두고 오래오래 기념이 될 혼수품을 장만하고 싶었다.
조금 서툰 솜씨이긴 해도 손자수를 놓은 병풍이 좋을 것 같았다.
까만 공단 바닥에 서로 다른 도자기 그림을 열두 폭에 새기기로 했다.
인쇄된 도자기 그림을 구해 와 채색된 명주실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며 공간을 채워 나갔다.
완성된 손자수가 새겨진 앞면과 좋은 글귀를 담은, 서예가의 글씨체를 받은 뒷면을 붙여 단단하게 표구한 첫 작품이다.
그때의 성취감과 희열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귀하던 1970년대, 흔치 않은 혼수품으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목단 액자까지 장만하였으니‘손끝이 맵다’며 시댁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남편은‘우리 집 보물 1호’라고 이름을 지어줄 만큼 자랑이 늘어졌었다.
병풍은 열약한 신혼집에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벽이 되었고, 아이들의 장난감이며 온갖 잡동사니로 어지러운 곳들을 가리는 우아한 갤러리가 되었다.
집 근처에 수예점이 있었다.
명주실로 병풍과 액자에 자수를 넣고 불란스 자수로 소품을 만들며 십자수로 삼베이불에 수를 새기는 작업을 가르쳐주었다.
그곳은 그쪽 방면에 까막눈이었던 나를 미적 감각에 눈뜨게 해주었다.
아이들이 크면서 삶의 터전을 따라 이사를 많이도 다녔다.
요즘같이 포장이사도 없던 시절, 화물차에 가재도구를 가득 싣고 밧줄을 매어 이사를 하다 보면 갑자기 눈, 비가 오는 날은 아끼던 물건도 속수무책이다.
비에 젖어 얼룩이 지고 탈색도 되고 찢어지기도 하였다.
1980년대 초반쯤, 서문시장 포목부에서 장사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은근슬쩍 그 마음을 내비쳤더니 남편이 극구 말린다.
자기가 안정된 직업을 가졌는데 뭣 하러 모험을 걸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당시는 신부의 결혼 예복으로 치마폭에 미싱자수를 새겨 화려함을 더해 주는 파티복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병풍의 자수를 떠올리며 망설임 없이 그 품목을 선택하였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손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가내공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하지만 장사의 폭이 커지면서 야릇하고 짜릿한 쾌감은 중국에까지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중국과의 교역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인연과 시간이 잘 맞아떨어지면 삶에서 큰 이변을 일으킬 수 있다.
남편이 전공한 음악 교육이 중국 교류와 맞물리면서 한족과 조선족과의 친분이 두터워졌다.
일행과 함께 태호에 가서 손자수 새기는 광경을 목격한 남편은 나의 병풍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면서“아하! 이것이다.”맞장구를 쳤다는 것이다.
손자수의 본고장인 소주에 들른 남편은 중국의 손자수를 견본으로 가져왔다.
투박한 미싱자수만으로도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파티복은 한복 시장을 장악하며 유행이 되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본 손자수였던가.
상업으로는 상상도 못 할 손자수를 본 순간 나는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남편을 앞세우고 서둘러 중국으로 갔다.
그곳에는 본,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손자수를 새기고 있는 모습은 내게 충격이었다.
겨울에 손이 터져 피가 원단에 묻을까 봐 붕대를 칭칭 감고도 재바른 손길로 새기는 중국 손자수의 장인들이었다.
그 당시 발 빠른 일본인들은 이미 기모노에 손자수를 새기고 있었다.
기계가 새기는 것도 아닌데 그 많은 수요를 손자수로 충당할 수 있을까?
수없는 질문에 열 번이라도 같은 대답을 한다.
“커이다.”‘할 수 있다’는 긍정의 말이다.
진정성이 보이는 한족의 대답에 조선족 통역을 앞세우고 관리들을 만났고, 손자수가 성행하는 면 단위에 공장을 세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몇 번을 거친 교섭 끝에 자금을 준비하여 <동저 진> 관리들과 30년 계약을 맺었다.
조선족 통역에게 한국의 파티복 재단과 도안을 글로 써주고 수없이 말을 하여 손자수 견본이 나왔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은 멀었다.
중국과 한국 색(色)의 국민 정서와 재단법이 달랐다.
서툰 언어로 개선은 시켰지만 많은 실패작으로 물건들을 버려야 하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실패로 인한 금전적 손실과 무너지는 마음을 붙들어준 건 처음 병풍을 수놓을 때 느꼈던 설렘과 희열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하였던가.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여 10여 년을 넘게 한복 시장과 침구, 공예까지 섭렵한 손자수로 민족의 긍지를 드높인 쾌감은 아직도 나의 뿌듯한 자존감으로 남아 있다.
그때 당시 많이 입히고 쓰이던 것이‘유행’이란 단어이다.
결혼식장에서 혼주며 하객들이 손자수 한복을 입었는가 하면, 봄날 화전놀이 갈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른 버스나 승합차에서 소복하게 내리는 아낙들이 손자수 한복을 펄럭이던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그때의 정경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몇 해 전, 오래 가업으로 이어 온 우수업체에 선정되어 중소밴처기업부에서 가게 벽에‘백년소공인’패를 직접 달아주었다.
손자수를 운영하는 공장을 중국에 최초로 설립하여 국민 정서를 풍요롭게 하였다는 공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 패가 무척 자랑스럽긴 하지만, 아무려면 내게는 우리 집 보물 1호 병풍이 더 소중하다.
열두 폭을 접은 반듯한 직사각형은 마치 선정에 든 석불처럼 더위에도 추위에도 내가 놓아둔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남편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
남편이 사랑했던 병풍은 제삿날 열두 폭 날개를 펴고 그의 영정을 안은 듯 감싸주며 조곤조곤 그간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정성이 담긴 나의 열정과 손길로 새겨진 손자수 병풍은 내 삶의 비망록처럼 나와 함께 늙어간다.
그것은 단지 가려주고 경계를 지우는 역할만 하는 병풍을 넘어 내 삶의 역사가 되고 남편과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