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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의 힘

한국문인협회 로고 한은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3월 6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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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를 보던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에 간 예은이의 귀가 시간이 평소보다 이십여 분이나 늦어지고 있었다.

예은이는 늘 같은 시각에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는 아이였다.

“무슨 일이 있나?”

할아버지는 겉옷을 챙겨 입었다.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봐야 할 것 같았다.

신을 찾아 신고 있을 때 도어록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예은이가 들어왔다.

예은이는 달려와 할아버지 품에 쏘옥 안겼다.

“할아버지!”

그제야 마음이 놓인 할아버지가 예은이 등을 쓰다듬었다.

“아이고, 이 녀석! 내가 걱정돼서 혼났다.”

“헤헷, 그러실 줄 알았어요.”

소파로 가서 앉은 할아버지가 티브이를 켜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예은이가 옆으로 앉았다.

“학교서 무슨 일 있었어?”

예은이 볼이 살짝 붉어졌다.

마치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어색해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뇨, 학교에서 늦은 게 아니고요.

사실은….”

할아버지 이마에 굵은 주름살이 만들어졌다.

할아버지는 티브이를 끄고 예은이 쪽으로 돌아앉았다.

“사실은…?”

“전에 살던 집에 갔다 왔어요.

이사 온 걸 깜빡하고요.”

예은이네는 열흘 전에 이사를 왔다.

할아버지가 8층에 사시고 예은이네는 10층에 산다.

전에는 같은 아파트 101동에 살았는데, 지금은 할아버지가 사시는 103동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예은이 부모님이 맞벌이 부부에 주말부부라, 하교 이후에 예은이를 돌봐줄 할아버지가 사시는 아파트로 이사 온 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예은이가 유치원을 마치고 일 학년이 되면서 101동으로 이사를 왔었다.

할아버지가 사시는 103동의 같은 라인에 빈집이 나면 옮길 작정으로 우선 입주를 했던 거였는데, 좀처럼 집이 나지 않아 기다리는 동안 예은이가 오 학년이 되었고, 드디어 이사를 올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예은이 엄마의 아버지, 외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가 눈을 크게 떴다.

“어이쿠, 어쩌다가!”

예은이가 쑥스러운지 싱긋이 웃었다.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그 집에 가서 비밀번호를 아무리 눌러도 문이 안 열리잖아요.

‘이상하다!’ 그러는데 모르는 할머니가 나오시더라고요.”

할머니는 예은이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더니 일단 들어와 놀란 가슴이나 가라앉히고 가라고 했단다.

예은이가 살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실내 인테리어를 둘러보고 주스와 과일을 먹다 보니 조금 늦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 참! 너도 놀랐겠지만 그 어르신도 이게 무슨 일인가 했겠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야.

사람이 무슨 생각엔가 깊이 빠져들면 그런 일이 생길 수 있거든.”

며칠 뒤, 숙제를 끝내고 간식을 먹으러 거실로 나온 예은이는 할아버지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는 티브이도 켜지 않은 채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빠져 예은이가 다가가도 몰랐다.

생전 처음 보는 할아버지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꿈에서 방금 빠져나온 듯한 표정으로 예은이를 봤다.

“응, 예은이구나.”

“무슨 일 있으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할아버지가 부리나케 겉옷을 입으며 말했다.

“예은아,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차가 없지 뭐냐.”

“차요?”

“응, 내 차 말이다.

분명히 우리 라인 화단 앞에 세워뒀는데 아까 보니 그게 안 보이는 거야.

이게 도무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예은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올려다봤다.

“혹시 지하 주차장에 갖다 놓으신 거 아녜요?

아니면 텃밭에….”

할아버지는 아파트 뒷산 자락 아래에 있는 농장 텃밭을 분양받아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은퇴하면서 시작한 일이니 벌써 십여 년이 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허전했던 마음을 다잡아준 공간이라 할아버지에게는 소중한 일터였다.

그때 할아버지 휴대폰 벨이 울렸다.

“네 엄마 전화네.

하도 답답해 내가 전화를 했었거든.

그런데 안 하는 게 좋을 뻔했다.

괜히 일하는 사람 신경 쓰게 만들어 놨어.”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전화를 받았다.

예은이 엄마가 혹시 차를 찾았느냐고 물었는지 할아버지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못 찾았어.

지하 주차장, 텃밭, 등산로 일대까지 몇 번씩 가봤다니까.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차가 분실된 거 같아.

안 그러고는 왜 그게 없겠어, 안 그러냐?

하여간 넌 신경 쓰지 말고 일해.

난 한 번만 더 나가보련다.”

어느새 휴대폰 가방을 메고 나온 예은이가 할아버지 팔짱을 꼈다.

“나도 같이 가 볼래요.”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너도 좀 도와다오.”

화단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할아버지와 예은이가 내리고 있을 때였다.

직장에서 조퇴한 예은이 엄마가 103동 공동 현관을 막 들어서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왔다.

“찾았네요.

차가 어디에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계면쩍게 웃으며 되물었다.

“어디 있었을 거 같으냐?”

“글쎄요.”

“내 참, 이 차가 101동 앞에 주차돼 있지 뭐냐.

난 생각도 못 했어.

그래서 온 천지를 다녀도 거긴 한 번도 안 가봤거든.

그런데 예은이가 자기도 그랬으니까 속는 셈 치고 가 보자고 해서 가봤더니 거기에 있더라고.”

예은이 엄마가 풋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니, 진짜 예은이도 얼마 전에 그랬잖아요.

그런데 아빠도 그랬다는 거네요.

세상에 어떻게 조손간에….”

할아버지는 멋쩍어하며 어깨를 한 번 들썩해 보였다.

“그게 말이다.

예은이가 그랬다고 했을 때는 그저 허허, 하고 웃고 치웠는데 나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날 내가 아주 정신이 없긴 없었어.

그러다 보니 아주 깜빡 내 머릿속에서 그 사실이 지워진 거 같아.”

요즘은 갈수기여서 할아버지는 이틀에 한 번씩은 말통 몇 개에 물을 가득 채워 차에 싣고서 텃밭으로 나갔다.

농장에는 급수시설이 없어 갈수기마다 텃밭 농사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물을 가져갈 때 말고는 걸어서 다녔다.

어제도 할아버지는 말통 네 개에 물을 담아 밭으로 가서 뿌려주고 잡초를 뽑고 농사일을 마친 다음에, 예은이 귀가 전에 예은이네로 가려고 서둘러 101동 앞으로 가 주차를 했다.

습관대로, 오랜 시간 하던 대로 했고 별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차에서 내릴 때 다급한 전화만 안 왔더라면 ‘아차!’ 하고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거였다.

그러나 하필 그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텃밭 바로 옆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다.

방금 발견했는데 할아버지 밭에서 두더지 흔적을 봤다며 빨리 와보라고 했단다.

두더지는 야행성 동물이라 빨리 조치를 취하는 게 좋다, 함께 잡자, 안 그러면 자신의 밭에까지 넘어올 거라면서.

할아버지는 허둥지둥 밭으로 갔다.

그 사람과 함께 이런저런 조치를 해놓고 난 할아버지는 이제 103동으로 곧장 와 학교 갔다 오는 예은이를 맞이했다.

그러고 나서 함께 저녁을 먹고는 예은이 엄마가 귀가하자 8층으로 내려갔던 것이었다.

예은이 엄마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정말 습관의 힘이란 건 무섭네요.”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습관이란 건 대단한 거야.”

예은이 엄마가 예은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럼 차를 찾은 기념에다가 내가 오랜만에 평일에 일찍 집에 온 기념으로 이 차를 타고 다 함께 마트에나 가 볼까요?

소고기를 푸짐하게 사다가 구워 먹고 모두 힘을 내는 게 좋겠어요.”

할아버지가 손을 홰홰 내저었다.

“아니다, 아냐.

오늘은 식당에 가서 먹자.

소고기 구이집에 가서 먹는 거야.

내가 낼 거니까 너희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돼.”

예은이가 폴짝폴짝 뛰면서 할아버지 팔짱을 꼈다.

“우와, 진짜요?”

할아버지가 차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암, 진짜고 말고.

타라, 가자!”

예은이와 엄마가 차를 탔다.

예은이가 신나서 소리쳤다.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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