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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자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3월 6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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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산에 올랐다가 느긋하게 내려온다. 어느덧 바람이 바뀌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꽃샘바람이다. 그야말로 봄바람이다.

바람치고는 이놈의 봄바람이 조금 묘하다.

괜히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봄과 바람은 엄연히 다른 의미의 명사다.

그러나 이걸 붙여서 합성어를 만들어 놓으면 그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사실 우리말에 바람이 들어가면 왠지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느껴진다.

돈바람이 그렇고 치맛바람이 또한 그렇다.

술바람에 일을 저지르면 일시에 쌓은 공덕이 무너질 수도 있다.

또 허황된 짓을 하는 경우를 비꼬는 말로‘바람 먹고 구름 똥 싼다’,‘바람세 맞추어 돛을 단다’등 바람에 관한 좋지 못한 속담도 수다하다.

그중에 그래도 듣기 좋은 바람이 바로 봄바람이다.

기나긴 겨울이 가고 산천초목이 눈을 뜨는 계절이니 오죽 반갑지 않으랴.

내 나이 이순을 넘었건만 아직도 봄바람이 불면 가슴이 설렌다.

봄이 주는 이미지는 낭만과 쓸쓸함이 함께한다.

봄은 그만큼 여린 감정의 선을 잔잔하게 흔든다.

우리 조상들은 봄을 한 해가 시작되는 계절로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계절을 말할 때‘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한다.

이걸 헷갈려서‘가을, 겨울, 봄, 여름’이라고 말하면 맛이 간 인간처럼 보인다.

봄이 오기 전, 겨울은 음울하다.

벗은 나뭇가지에 눈을 뒤집어쓴 나목들은 그림 같은 풍경이라기보다는 삭막하기 그지없다.

심산유곡의 동물들은 겨울잠에 들어가고 사람들도 나가기를 꺼려 잔뜩 웅크리고 산다.

우수, 경칩이 지나면 이런 천지에 봄바람이 분다.

봄바람이 부는 것은 겨우내 잠들었던 나무와 동물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함이다.

어찌 산천초목에만 봄바람이 불겠는가.

꽃샘바람이 불면 사람들도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겨우내 품고 있던 긴장이 슬슬 풀린다.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

봄을 맞아 이승을 떠나는 노인 소식이 유독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가출하는 청소년도 봄에 많이 생긴다.

봄바람이 가슴을 헤집으니 부쩍 마음이 달아오른다.

괜히 어딘가로 떠나가고 싶다.

꿈에 본 그 임이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마당에 있는 똥개도 봄바람엔 개구멍 드나드는 일이 바쁘다.

겨울 동안 조신하게 집을 지키던 생과부도 봄을 조심해야 한다.

겨우내 안 보이던 낯선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때문이다.

마을 앞 신작로에 엿장수가 등장하는 것도 봄이고,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오는 것도 이때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데는 많은 방물장수도 해동이 되면 마을을 찾아온다.

방물장수는 꼭 저물녘에 찾아든다.

그리고 조금 여유가 있을 만한 집을 찾아 밥도 얻어먹고 잠도 청한다.

그래도 거절하는 집이 드물었다.

방물장수가 팔도강산을 떠돌며 들었던 온갖 소식을 다 늘어놓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엔 신문도 방송도 없으니, 세상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호롱불 밑에서 방물장수가 들려주는 낯선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곤 했다.

어느 마을에 갔더니 처녀가 애를 뱄다느니, 과부가 눈 맞은 선머슴과 야반도주를 했다느니, 들을수록 신기하고 별난 이야기로 밤 가는 줄을 몰랐다.

이제는 그런 추억들이 지나간 전설처럼 들린다.

문명의 기기들이 그들을 대신하게 됐다.

시골에 가면 오일장도 사라져 간다.

사람이 죽으면 꽃상여 대신 검은 장의차가 들어온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도 변하였다.

더불어 자연도 옛날 그 모습이 아니다.

환경이 바뀌었다.

그러니 요새 아이들에겐 그때 그 시절‘봄바람 이야기’는 동화 속 얘기처럼 들릴 것이다.

거기다가 예전 이맘때면 하늘을 날던 종다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난데없이 황사라는 먼지 기운이 천지를 뒤덮는다.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남극 빙하가 녹아내린다더니, 사람 가까이 사는 짐승들조차 변했다.

옛날엔 광우병이니 조류인플루엔자 같은 소릴 들어 보았는가?

문명이 발달하면서 편리해진 것도 있고, 우환을 끼고 들어선 것들도 있다.

어쨌든 참 많이들 변했다.

그중에서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제일 많이 변했다.

합천 골짝에서 서울로 발을 디딘 지도 4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먹고 산다고 한참 퍼덕거리더니, 어느새 인생 황혼에 머리털이 희끗희끗해졌다.

거칠어진 얼굴엔 주름살이 고랑처럼 파이고, 팽팽하던 거죽은 무서리에 녹은 배춧잎처럼 축 처져서 활기를 잃었다.

허허, 인생사 무상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봄은 봄이로되 봄 같지가 않다더니….

그게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겠다.

불현듯 눈시울이 붉어 오고 콧잔등이 시려온다.

아직은 바람이 차갑다.

그러나 겨드랑이에 파고드는 이 바람기는 분명 봄바람이다.

봄바람이 부니 나도 슬슬 여행이라도 떠나볼까.

나는 봄바람을 안고 허우적허우적 산에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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