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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란(作亂)

한국문인협회 로고 신경옥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3월 6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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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현대, 초겨울  
무대: 무대는 좌우로 나누어 어느 가정집 자취방과 거실, 주방, 파출소로 활용한다. 필요한 소도구들도 적당한 자리에 있다. 연극의 장치는 연극의 전개와 발전에 따라 가변적이다.  

나오는 사람들: 동규(35세)|어린 동규(7세)|어린 동현(5세)|박두식(동규의 아버지)|공락희(동규의 어머니)|도씨(상간남)|한길(동규 친구)|경찰 1, 2|남자|여자  

 

1장: 만나서 물어보고 싶어  
무대 밝아지면, 동규의 자취방. 새 양복이 걸려 있다. 좁은 방 안, 앉은뱅이 탁자에 맥주 캔과 감자깡, 땅콩 안주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동규: (기지개를 켜며) 나도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 이제부터 마음잡고 새로 시작할 거야. (주먹을 쥐며) 이런 날이 오다니. 하늘은 날 버리지 않았어.  
한길: 헤헤, 동규야! 축하해. 네가 취직해서 너무 좋아. 멋진 자식! (맥주캔을 부딪치며) 자자, 마시자. 한 잔 쭉 마셔.  
동규: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미소 지으며) 우리 짠 하자.  
한길: 축하, 축하! 짜아식,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  
동규: (목이 메어) 고맙다, 친구야! 짠! (맥주캔을 부딪치며) 우리의 내일을 위하여!  
한길: (큰 소리로) 위하여! (걸려 있는 양복을 보며) 오, 간지 좔좔. 그런데 동규야, 회사에 제출할 서류는 다 준비했니?  
동규: 응, 서류발급은 다 받았어. 휴∼. (길게 한숨을 쉰다)  
한길: 와, 무슨 일 있나?  
동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이 가족관계증명서를 보니 미칠 것 같아….  
한길: 와, 그라노? 동규야, 뭔 일 있나?  
동규: (말없이 인상 쓰며 고통스럽게) 으흐흐∼.  
한길: 와, 무슨 일이고? 와 이라는데. 나한테 말해 보그라.  
동규: (말 없이 가만히 있다가) 햐, 세상 정말 엿같아.  
한길: 말해 봐. 널 괴롭히는 놈들 내가 단디 혼내주꾸마.  
동규: (한숨을 쉬며) 사실은 월드메르디봉 아파트에 엄마가 살고 있어.  
한길: 뭐라고? 엄마가 살아계신 거야? 거긴 고급 아파트인데…. 단 한 번도 엄마 얘긴 한 적이 없잖아. 그래서 니네 엄마 돌아가신 줄 알았었는데…. 살아계셨다고?  
동규: 응.  
한길: 근데 왜? 널 찾…지…. (얼버무린다)  
동규: 아주 어릴 때 나를 버리고 떠난 엄마가 살고 있대. 이거 봐, 한길아! 강남 월드메르디봉 아파트에 살고 있어. 단 한 번도 날 찾지 않던….  
한길: 헐, 그게 정말이야. 대박!  
동규: 기가 막혀.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 (허공을 응시하며) 미치도록 보고 싶은 엄마가 (가족관계증명서를 흔들며) 여기, 이렇게 눈 시퍼렇게 뜨고 강남에서 아주 잘살고 있다고. 흐흐!  
한길: 살아계셨구나. 니네 엄마….  
동규: 엄마를 만나서 물어보고 싶어. 도대체 왜 우리를 버렸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우리를 잊지는 않았을까? 그래도 내가 보고 싶은 적도 있었겠지? (얼이 빠진 듯) <방백> 엄마, 이름만 불러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죠! 엄마 생각만 해도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요? (암전)  

평범한 다가구 주택 주방, 식탁에 음식이 차려져 있다. 계란말이와 소시지 볶음이 보인다.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차리는 락희.  

공락희: 똥규야, (사랑이 가득한 목소리로) 어서 와서 밥 먹어. 엄마가 똥규가 좋아하는 계란말이 했어.  
동현: 쳇, 엄마아, 혀니는 소시지볶음이 좋은데….  
동규: (엄지를 치켜세우고) 엄마 최고야.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공락희: (접시 들고 동현을 보며) 엄마가 우리 혀니 것도 만들었지. 자, 소시지볶음 여기 있잖아.  
동현: (포크로 소시지볶음을 찍어서 들고 해맑게 웃으며) 와, 소시지볶음! 좋아, 쪼아, 정말 맛있겠다.  
공락희: (기분이 좋아서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며) 여보, 오늘은 당신도 한잔 하세요.  
동규: 아유, 맛있어. 엄마가 만든 계란말이 (오물거리며) 똥규가 정말 좋아해. 엄마가 최고야. 헤헤헤.  
박두식: (동태탕을 후루룩 마시며) 카, 시원하다. 오늘은 유난히 맛이 있네. (소주를 마시며 눈을 찡긋한다) 기대해, 오늘 밤, 흐흐! 당신 내가 죽여줄게. 아주 홍콩으로 보내줄 테니. 흐흐흐.  
공락희: (두식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아잉, 아이들 보는데…. (윙크)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집 안에 가득 울려 퍼지며 암전.  

 

2장: 작란(作亂), 그 순간  
공락희의 아파트, 면접 보려고 준비한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어머니가 살고 있는 아파트 문을 노크하는 동규.  

공락희: (문을 열며) 누구세요?  
동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엄마, 나야 아들. 엄마 아들이라고.  
공락희: (화들짝 놀라서) 누구라고?  
동규: (한 자씩 또박또박 말한다) 박. 동. 규.  
공락희: 뭐라꼬, 너 시방 뭐라 했나?  
동규: (천천히) 나야, 똥규…. 어 엄, 마, 맞네.  
공락희: 동규라꼬? 네가 똥규란 말이가?  
동규: 나야. 엄마! 엄마가 똥규라고 부르던 그 똥규야! <방백> 드디어 당신을 만났죠. 엄마를 만나자마자 눈물이 나요. 기뻐서 그런 건지 슬퍼서 그런 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네요. 오늘을 정말 기다려 왔어요. 엄마, 엄마는 그거 알아? 스웨덴으로 입양 간 내 동생 동현이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매일 울어서 나를 슬프게 했어.  
공락희: 니가, 니가 똥규라꼬? 여긴 어떻게… (멈칫한 뒤 말을 얼버무리며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동규를 낯설게 훑어본다.)  
동규: 어, 어, 엄마!  
공락희: 이기, 무슨 일이고? 휴∼. (긴 한숨)  
동규: 엄마….  
공락희: 이기 을매 만인가? 어서 들어온나. 내캉 술이나 한잔 하자. (동규의 손을 덥석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동규: <방백> (소파에 앉으며) 엄마는 잘살고 있나 봐. 엄마 떠나고 아빤 술독에 빠져서 폐인이 되었어. 매일 술독에 빠져서 “바람나서 집 나간 죽일 년”이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엄마를 욕하다가, 그립다며 엉엉 울다가, 또 어느 날은 나쁜 년이라고 엄마 욕을 하며 물건을 마구 집어 던졌어. 어린 우리를 돌보기는커녕 삶을 턱 놓아 버렸지. 그러다가 5년도 못 버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어. 막다른 선택을 한 아버지 때문에 또 얼마나 괴로웠는지 엄마는 모르지? 동현이와 나는 보육원에서 냉대받으며 고통 속에서 살았는데 우리 생각은 안 했어? 한 번도 우리를 찾지 않은 이유가 뭔지 묻고 싶었어! 사실은 바람나서 자식 버리고 가정을 내팽개친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기도 싫었어. 그런데 엄마를 보니…. 내 아픔이 지워지고 있나? 머릿속이 아주 텅 빈 것처럼 멍해.  

창밖에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28년 만에 만난 동규와 락희,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모습. 탁자 위에 소주병 2개가 널브러져 있다. 취한 듯 어수선한 분위기. 노을이 머물다 시간 흐른 뒤 살짝 어두워지는.  

공락희: (소주를 동규 잔에 따르며) 자, 마셔. 쭉 들이켜.  
동규: (잠시 마음이 풀린 듯) 네! (한 번에 다 마신다) 캭, 커 어어.  
공락희: (취해서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자알 마시네.  
동규: (만취해서 주정을 하며) 엄마, 엄만 왜 나를 버린 거야. 왜 우릴 왜 버렸어? 엄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배배 꼬였어. (흉내를 내며) 얼마나 힘들었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단한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인지? 왜 나한테 이렇게 가혹한 형벌이 내렸는지 엄마는 알아? (목이 메어) 아냐고? 에이, 씨이발! 말해 봐. 말해 보라고?  
공락희: <소리> (동규의 상상/ 허공에 소리만) 미안하다, 엄마가 다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다 내 탓이야. 내가 죽일 년이야. 내가 나쁜 년이라고. 동규야, 너에게 큰 상처를 준 이 못난 엄마를 용서해 줄 수 없겠니? 그땐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정말 내가 미친년이지. 내가…. 흑흑 난 어미 자격도 없어. 모진 어미 때문에 우리 동규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하다. 가여운 내 새끼! 흑흑흑! (술잔을 바닥에 힘차게 던지며) 아니, 뭐라고? 이 새끼가? 지금 나 보고 욕한 거야. 씨이발? 씨이발? 이 새끼가! (잔뜩 술에 취한 눈으로) 너, 내 아들 맞니? 엉? 너 누가 보내서 왔지? 엉? 민증 까봐. 이 새끼야. 어섯! (화를 내며 달려들어 동규 주머니를 마구 뒤진다.)  
동규: (술에 취해 밀치며) 어, 에이 씨, 저리 비켜.  
공락희: 헉, 이 새끼가? 안 보여주려면 꺼지라고!  
동규: 뭐라고? 꺼지라고?  
공락희: 그래, 나갓! (악을 쓰며) 여기가 어디라고? 어디서 호랑 말코 같은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생떼야. 감히 누구한테 난리야. 불한당 같은 놈, 오늘은 재수에 옴 붙었나. (사과를 동규에게 던지며) 에잇!  
동규: (순간, 귀신에게 씐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동규는 쟁반에 놓인 사과를 깎던 과도를 본다. 노을빛 받아 붉은 과도를 들어 락희를 마구 찌르며) 죽어! 죽어버려. 악마 같은 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짐승 같은 년! 바로 너 때문이라고? (발광하며) 으아아악!  
공락희: (쓰러져 있는 자리, 피가 이리저리 튀어 그로테스크하다.) 억, 으아 음.  
동규: (술에 취해서 정신없이 한참을 울부짖는 동규) 악, 으악. (노을이 붉게 물들어 동규를 감싼다)  
공락희: (눈을 부릅뜨고 숨을 거둔다. 외마디 비명) 억!  
동규: (부르르 떨며) 헉! 어떡하지? 이건 아냐. 아니라고! (오열한다.) 내가 엄마를 죽이다니…. 그렇게나 보고 싶던 엄마를 내가… 죽였어. 흑흑! (오열하는 동규)  
박두식: (환영) 아들아, 잘했어. 이제야 내가 눈을 감을 수 있겠어. 수고했다. 동규야! 고맙다. 내 아들!  
동규: 아, 아빠… 아버지!  
박두식: (환영)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 내 아들, 너도 힘들었지. 이젠 괜찮아!  
동규: 아빠! 아빠가 맞아. 그동안 너무 괴로웠어. 모든 냉대와 멸시, 이 모든 불행의 시작! 바로 그놈 때문이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가정파괴범.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거야. 두고 봐. (이를 갈며)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지. 기다려. 이 악마 같은 놈아. 내가 반드시 복수할 거야. 기다려.  

노을의 붉은 빛 사라지며 조금씩 어두워지는 무대.  

박두식: (소리, 다급하게) 동규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정신 차리고 어서 도망 가! 이곳에서 빨리 나가. 더 지체하면 잡힐 거야. 서둘러, 얼른! 잡히면 안 돼.  
동규: 아, 알겠어요. 아버지! (거칠게 피 묻은 옷을 벗어 던지고 칼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두고 봐. 두고 보라고. (암전)  

어둡고 후미진 동네 구석진 공간, 희미한 가로등 밑.  

동규: 맞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엄마를 꾀어내고 엄마와 함께 야반도주한 그놈.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은 그놈 때문이야. 조금 후면 만나겠구나. 내 인생을 철저하게 망치고 우리 가정을 송두리째 부숴버린 악마! 어, 저기 오네. 내 아버지의 원수, 우리를 지옥에 던져버린 짐승보다 더 나쁜 놈!  
도씨: (다가오며) 락희 아들이라고?  
동규: (싸늘하게 웃으며 돈이 든 쇼핑백을 준다) 엄마가 이걸 전해드리라고 해서….  
도씨: (돈을 세어보고 나서 훑어보며) 청년이 다 되었구나. 잘 지냈니?  
동규: (고개를 숙이고) 네, 잘 지냈어요.  
도씨: 그래, 수고했다. 근데 너 결혼은 했니?  
동규: 아직….  
도씨: 젊은 놈 꼴이 이게 뭐니? (어깨를 툭 치며) 축 처진 빨래같이!  
동규: (중얼거리며) 뭐라고? 빨래라고?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  
도씨: 하여간 고맙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는데 어디 가서 밥이나 먹자. (손을 잡으려고 다가가는 순간)  
동규: (갑자기) 죽어. 죽어버리란 말이야.  
도씨: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억!  
동규: (짧은 순간,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마구 찌르며) 이 악마 새끼! 다 너 때문이야.  
도씨: 으악! 왜 인제 와서 나한테, 나를…. (배를 움켜잡으며 쓰러진다.)  
동규: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이 파렴치한 놈아!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려. 너 때문에 우리 집은 산산조각이 났다고.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나쁜 놈아!  
도씨: 흐헉! 다 지난 옛날 일인데 이렇게 억울할… 수가! 제발 살려 줘…. (목이 접히며 고꾸라진다.)  
동규: (어둠 속으로 도망치며) 나쁜 새끼, 넌 천벌을 받은 거야. 인과응보라고! 바람피운 새끼들은 잘 봐. 똑똑히 보라고. 사랑? 성욕? 그거 찾아 떠날 땐 배우자와 자식 인생 모두를 짓밟는 거야. 다 죽인 거라고! 남의 인생 망치지 말고! 제발 정신 좀 차려! (암전)  

 

3장: 아픔은 자국을 남기고  
미추홀 파출소, 시끄럽고 어수선한 파출소 안.  

경찰1: 뭐라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청년이 사람을 죽였다고? (팔을 잡아끌며) 자, 자아! 여기 앉아서 말해 봐요.  
경찰2: 응? 사람을 죽였다고? 어휴 술 냄새. 술독에 빠졌다 나왔구먼. 술에 취했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자지. 파출소까지 와서 술주정이야.  
동규: (술 냄새 진동하고 횡설수설하며) 저 진짜 자수하러 왔어요. 제가… 사람을…죽…였…다고요.  
경찰1: (소파를 가리키며) 자, 여기 앉아요. 여기서 좀 쉬고 있어요. 원, 술에 떡이 되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동규: (실신한 듯 앉으며 고통스러운 신음) 으음.  
경찰1: (물잔을 건네며) 자, 마셔요. 쭈욱 들이켜요. 어이, 김 순경! 여기 냉수 한 잔 더 줘 봐! 이 청년 완전히 취했는데. 허허 제정신이 아니야.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네. 허 참!  
경찰2: 면접에서 떨어졌나? 누구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걸까? 저 소파에서 재웠다가 깨면 자세한 얘기 들어보자고.  
동규: (횡설수설하며) 내가 지금 여기서 뭣 하고 있는 거지? (나가려고 일어나며) 저, 다시 올게요. (술에 취해 혀가 꼬여 발음이 불분명하게) 안녕히 계세요.  
경찰1: 어, 어 (동규 바라보며) 조심해. 정신 차려요.  
동규: (머리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린다)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려야지. 어서 이곳에서 나가. 잡히면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어서 부두로 가서 밀항선을 타야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니?  
경찰1: 그래요. 그래. (동규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달픈 날도 있어.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날도 있지. 여기 앉아있다가 술 좀 깨면 얘기해요. 내가 다 들어 줄 테니.  
동규: <방백>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어. 언제나 나만 불행하고, 나만 처량하고, 나만 비참한 이 거지 같은 세상!  
경찰2: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우리 젊을 땐 더했으면 더했지. 에구 시대가 젊은 사람들한테 너무 가혹해, 그래도 솟아날 구멍이 있을 거야. (자리로 이동하며) 제발 힘내게.  
경찰1: (동규 손가락에 피가 묻은 휴지가 감겨 있는 것을 보며 놀라서)(조명: 스포트라이트) 아, 아니? 피가… (놀라서) 이봐요. 청년! 술이나 깬 뒤 집으로 가요. 저렇게 비틀거리면서, 원∼. 지금 가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휘청휘청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쯧쯧쯧!  
남자: (부부싸움 끝에 파출소에 온 남녀가 귀를 쫑긋하며 참견한다.) 시방 뭐라는 거야?  
동규: (소파에 웅크리고 기대앉아) 사실은… 월드메르디앙에서 엄마… 엄마를 죽였어요. 내가 엄마를 죽였다고요.  
여자: (눈이 둥그렇게 커진다) 뭐, 진, 진짜야. 그 말? 정말이야? (급하게 부른다) 오빠, 오빠!  
남자: (째려보며) 아따, 왜 그러는 거야? 시방 나를 고소하겠다고 난리 치더니, 뭔 난리가 난겨! 왜 그렇게 날 불러 싸. 생각이 바뀐 겨?  
여자: (귀에다 손을 대고) 난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오빠! 내가 방금 들었는데 이 청년이 자기 엄마를 죽였대. 자기가 살인자래.  
남자: 정말? 천지가 개벽할 일이네. (급하게) 경사님, 경사님!  
경찰2: (무시하며) 아 잠자코 기다리라니까 왜 자꾸 불러요. 사고 친 주제에! 차례대로 하고 있으니 조금 기다리세요.  
동규: (중얼대며) 복수를 끝냈으니 홀가분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찢어질 것같이 괴롭지?  
여자: 오! (동규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정신 차리고 말해 봐요. 도대체 무슨 소린지….  
동규: 난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숨쉬기가 힘들어요. 어렸을 때 아주 끔찍한 일이 있었어요. 어느 날 집에 왔는데 엄마가 침대에서 발가벗고 다른 남자와 뒹굴고 있는 모습을 봤거든요.  
여자: 어머 어머머! (손으로 눈을 가리며) 어 아유, 끔찍한 광경이네. 어떻게 그런 일이!  
동규: (담담하게) 그날 이후로 엄마, 아빤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죠. 매일 부부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엄마가 사라졌어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어요. 우릴 버리고… 상간남인 도씨를 따라 야반도주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숙덕 거리는 소릴 들었어요.  
남자: 에구, 비정한 엄마네.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자: 사내한테 미쳤네. 아주 돌아버렸어. 색정이 무섭네. 무서워!  
동규: (울먹이며) 아버지는 술독에 빠져 지내다 결국 막다른 선택을 했어요.  
여자: 헉! 막다른 선택을 했다고? 이런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일이 있나?  
남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군. (맞장구치며) 아버지가 주야장천 술만 마시다 죽다니! 말문이 막혀서 어이가 없어. 애들 생각해서 정신을 차려야지.  
동규: 우리 돌볼 생각은커녕 마지막까지 엄마 원망만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으면… 흐흑흑, 아버지!  
남자: 에구, 가엾은 청년. 쯧쯧! 그 모진 풍파를 맞으며 그리움에 미움에 어떻게 살았을지!  
동규: 12살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우리 형제는 보육원으로 보내졌어요. 거기서 지내다 동생은 스웨덴으로 입양 가고….  
남자: 동생이 입양을 갔다고? 더군다나 멀리 스웨덴으로! 동생도 없이 혼자서 견디느라 더 힘들었겠네.  
동규: (서러운 듯) 나 혼자 남겨져 왕따도 당하고 고아라고 학폭도 당했어요. 정말이지 너무 외롭고 사는 게 괴로워서 보육원에서 몰래 도망쳤어요.  
여자: 보육원에서 뛰쳐나갔다고?  
동규: 네, 그 후 공장을 전전하며 정말 힘들게… 그래도 열심히 살았어요. 나쁜 짓 안 하고.  
여자: 혈혈단신으로 살면서 착하게 사느라 애썼다니….  
동규: (허탈해하며) 그러다 이번에 정규직으로 취직도 했어요. 자립 청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덕분이죠. 취직해서 번듯한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남자: (놀라며) 취직도 했어? 근데 왜?  
여자: 어휴, 오빠! 뭘 물어. 이 청년이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지. 어린 시절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냉대받고 사느라 뼛속까지 미움이 생긴 거지. 말해 뭐해. 에그 불쌍해. 법을 대신해서 쓰레기를 청소한 거지.  
남자: 그래도 스스로 죗값을 치르러 파출소에 왔다니?  
여자: 죗값을 치르고 나면 깊은 응어리가 조금은 풀어질까?  
경찰1: (조용히 듣기만 하다가) 그래도, 허 참…. 두 명을 살해했다고?  
동규: (넋이 나가서) 누구나 내 입장이 되면 알 수 있을 거야. 바람난 엄마와 그놈은, 내 인생을 갈가리 찢어 놓고 우리 가족을 망쳤어. 난 짐승만도 못한 인간을 죽인 거야. 잡초를 제거한 거라고. 난 엄마를 죽이지 않았어. 자식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은 엄마가 아니야, 엄마가 아니라고!  
경찰2: 잊고 잘 사는 게 복수인데… 살인은 아니지! 더구나 존속살해라니….  
남자: 저 청년, 좋은 사람을 만나 보살핌을 받았다면 인생이 이렇게 기구하진 않았겠지? 정말 안됐어.  
여자: 너무 불쌍해. 출소하고 난 세상은 따뜻하고 행복하면 좋겠어. (성호를 그으며) 가엾은 청년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남자: 허 참, 그러게. 우리도 그만 싸우고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오늘부터라도 내가 잘할게.  
여자: 오빠, 나도 미안해. 별것도 아닌 것 갖고 유난 떨었어. (남자의 손을 잡으며) 내가 잘못 했어. 오빠, 미안해.  
동규: 오늘 내가 불행의 씨앗을 제거했어. 이건 인과응보라고! 아빠도 하늘에서 편안해하시겠지.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난 악마를 죽인 거야. 난 잘못하지 않았어.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심장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지?  
경찰1: (동규를 말리며) 진정하게. 진정해.  
동규: 이제 복수를 마쳤으니 됐어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그건 헛소리야!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맞죠. 다 끝났어요.  
남자: 그러게. 인생 참! (혀를 차며) 한 생명을 태어나게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책임도 못 지면서 깽판을 치면 어떻게 하라고!  
동규: (두 손을 내밀며) 죄송해요. 저 자수하러 여기 왔어요. 근데….  
경찰1: (놀라서) 자, 자수하러 왔다고?  
동규: 누구에게라도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모진 엄마, 날 태어나게 해서 죽음보다 더 힘든 경험을 하게 한 사람. 엄마! 이름만 불러도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죠? 엄마!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요?  
여자: (눈물을 훔치며) 에구,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어.  
경찰1: (찰칵! 수갑 채우는 소리 강조. 동규 손에 수갑 채우며) 당신을 살인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당신이 하는 말은 당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으며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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