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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남양에서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동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3월 6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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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군도(南洋群島)는 남쪽 바다에 흩어져 있는 무리 섬을 말한다. 더 이르자면 남태평양에 있는 크고 작은 군도들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왜정(倭政)의 끝자락이었는데, 태평양의 섬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충청도의 산골 고향에 자라면서 나는 어른들로부터 남양군도의 얘기를 많이 들었던 생각이 난다. 남양군도가 바다에 있는 섬을 이르기보다 사람들은 고향의 젊은 장정들이 일본인들에 의해서 징용으로 끌려가는 지역이라고 알면 더 정확하겠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 있는 일본의 총독부에서 내려진 국가총동원령으로 우리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삼촌 또래들이 서너 명이나 징용의 이름으로 그곳에를 갔으니 동네 사람들이 모이면 언제고 남양군도 얘기를 많이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징용에 간 집의 가족들은 추운 겨울이면 ‘더운 지방임에도 어휴 이눔이 얼어 죽겠네. 휴우∼ 남양군도에 가서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고, 노친(老親)들은 징용 간 자식들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았던 것이다.

당시에 시골 고향 사람들은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일본인들은 미국과의 전쟁을 핑계로 쇠붙이인 숟가락과 살림 용구들을 거두어 갔으며 학교에 다니는 형들에게 산에 가서 송진을 채취해 오라고 했다. 그리고 추수 마당에서 공출의 이름으로 가을의 결실을 모두 빼앗아 가기 때문에 먹을 게 없어서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찾아서 산야를 헤매었던 것이다. 당시에 거리에는 걸인들이 다녔고 배가 고파서 개구리나 뱀을 잡아먹었으며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을 때이다. 그렇게 가난한 삶이지만 사람들은 배움이 적고 미개하여 세상사를 모르고, 일본은 알지만 일본의 좋지 않은 행태를 알지 못한 채 ‘세상살이가 다 그런가 보다, 나라가 어려우니 그런 게지’라고 생각을 하며 가난한 사람들끼리 어울려서 불평을 하지 않았다.

왜인들이 추수 마당에서 결실을 가져갈 때에 면서기가 일꾼을 앞장세우는데 더러는 주민이 추수를 빼앗기는 것에 반항을 하므로 검은 제복의 순사가 동행할 때도 있었다. 그들은 가끔 추수를 가마니에 담아서 짐을 꾸려 놓고는 멍석 위에서 순사와 면서기와 동네 이장이 동쪽을 향하여 허리를 굽히고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기도를 했다. 이때 일하는 이들과 구경을 하던 아이들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는데 이후에 알고 보니 쇼와 덴노(히로히토 일본 왕)에 대한 의례적인 존경의 의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나라가 어려워서 이렇게 가져가지만 미국을 이기고 나서 좋은 세상이 오면 넘치게 갚아줄 것, 그것은 우리를 잘살게 하시려는 쇼와 천황님의 은덕이므로 언제고 우리 국민은 천황님에게 충성을 하라’고 말했다.

우리 집에서 옆의 골목으로 조금을 가면 ‘병대집’으로 부르는 집이 있었다. 병대(兵隊)란 군인의 시골 방언인데 농촌인 우리 고향 동네에서 군인을 그렇게 불렀다. 병대집에는 학수 이름의 아들이 남양군도에 징용으로 가고 나이 많은 어머니가 혼자서 살고 있었다. 시골에서 농업 중학교에 다니던 학수 아재가 얼마 전에 징용에 끌려갔는데 이후에 할머니는 아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는 때가 많았다. 할머니는 아들이 돌아올 리가 없는데 아들인 학수 아재를 기다리며 언제고 밥을 아랫목에 묻어 놓고 아들이 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노친이 혼자서 어떻게 사시나’ 크게 걱정을 하며, ‘어머니 다녀올게요’ 말하고 일본인 순사 뒤를 따라서 동구를 나가는 아들이 눈에 밟혀 할머니는 잠시도 마음을 놓지를 못한다고 했다. ‘일찍이 혼자 되어 아들 하나를 바라보고 살았는데∼, 없는 살림에 학교에 보내고 가르쳤는데∼, 아들을 다 키워 놓으니 병대로 끌고 가다니∼, 지금까지 건강하고 똑똑하게 자라며 어미 마음 하나 거스르지를 않았는데’라고 말하며 할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가끔은 동네 이장이 순사와 같이 할머니 집을 방문하여 ‘학수가 병대에 가서 공을 세우고 높게 되어 올 테니 걱정을 마사고’, ‘남양군도에는 땅이 넓고 열대 작물이 지천이어서 그곳에 살기를 원하면 우리 쇼와 천황님께서 땅을 주고 집도 준다’는 말로 위로를 하지만 모두가 헛말이며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할머니는 말한다. ‘그저 자식은 부모 옆에 있어야’ 하는 게 할머니의 속마음이다.

학수 아재가 어머님을 두고 징용에 가긴 싫지만 당시에는 일본의 정치이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아재가 긴 칼을 찬 순사의 뒤를 따라서 읍내 징병들이 모이는 장소에 갔더니 모두 50여 명의 젊은이들이 집합해 있다. 그곳에서 담당인 인솔자에게 인계가 되었는데 안내하는 사람은 총을 멘 일본 군인이 2명이고 일반인은 3명인데 일반 안내원은 읍내에 사는 건달들이어서 학교에 다니던 학수 아재의 눈에 많이 익은 젊은이들이다. 입대하는 징병들은 어느 여관으로 인솔이 되었고, 커다란 방 하나에 10여 명이 들어서 잠을 잔다고 했다. 입대하는 장정들은 군사 훈련을 받지 않았으므로 현지에 도착하는 대로 군사 훈련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로 전장에서 일본의 정규군을 돕는 노역을 하게 되며 그들의 행선지는 남양군도라고 안내자가 이른다.

저녁에 각자에게 노란 단무지가 박힌 주먹 크기의 보리밥 한 덩이씩이 주어졌다. 이에 어느 젊은이가 거친 음식이어서 불평을 하자 몽둥이를 든 인솔 장정이 ‘지금부터 너희들은 군인이고 앞으로 단체 행동을 해야 한다. 질서를 잡기 위해서 개인 의사는 무시한다’고 말하며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므로 누구도 불평을 하지 못했다. 총기를 가진 일본 군인의 지시에 의해서 전원이 무릎을 꿇고 동녘을 향해 ‘대일본국의 천황님에 대한 묵념’을 하고 나서 앞으로 행해질 단체 행동에 주의할 사항을 일러준다. ‘우리는 언제고 쇼와 천황님의 은덕을 생각하고 몸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 그리고 이후 주어진 단체 생활에 불평을 하지 말고 어떠한 어려움도 참아낼 것, 불평을 하든지 아니면 단체 생활을 저해하는 어떤 행동도 용납을 하지 않으며 이에 반항을 하면 우리의 대열에서 낙오가 된다’는 내용을 인솔자가 강조했다. 그리고 지금 미국과 전쟁 중인데 미국을 이기고 나면 그의 영광은 모두 너희들의 것이 된다고 덧붙였다. 무거운 분위기여서 누구도 그들에 이의를 제기치 않았고, 젊은이들 모두가 일본 군인과 불량배 같은 인솔자들에 잔뜩 주눅이 들어서 시키는 대로 하였다.

이튿날 일행은 화물자동차에 실려서 남쪽 항구인 부산에 오고, 그곳에서 대기하는 선박을 타고 남양군도로 향하였다. 부산으로 오는 동안에 거친 행동을 하는 징용 대원 두서넛이 인솔자에게 몽둥이로 심하게 두들겨 맞은 사례가 있기는 했지만 모두가 잘 순응을 하므로 큰 사고가 없었다. 학수 아재는 어떠한 경우라도 굳게 참아내자는 결심을 하고 그곳에까지 왔다. 아재는 학교를 다니며 단체 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크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부산에서 인솔자의 지시로 큰 함선에 올랐는데 여러 곳에서 모인 징용자와 일본 군인과 거기에 정신대라고 하는 젊은 여자들도 몇 명이 함께했다. 일본 군인은 만주와 조선반도에 있는 부대에서 복무를 했는데 남양군도의 전선이 일본의 입장에 매우 중요하고 지금은 어려우므로 그곳에 보충이 되어 간다고 했다.

긴 항해의 끝에 남양군도에 왔다. 오는 중에 언뜻 망망대해와 아름다운 정경의 섬을 스쳤지만 징용에 끌려가는 학수의 입장에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도착한 곳이 북마리아나 제도의 하나인 사이판 섬이라는데 그곳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필리핀의 동남쪽에 위치한 군도 중의 하나이다. 부산에서 사이판으로 오는 동안에 무장한 일본 군인이 무서워서 승선한 병사와 징용병들이 질서를 잘 지키는 여행이었다. 항해 중에 군인들은 자주 쇼와 덴노에 대한 충성과 만수무강을 빌고,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쳐 충성을∼ 운운하는 천황과 나라에 대한 의식을 자주 그리고 엄숙하게 시행하였다. 학수 아재는 학교에 다니며 천황에 대한 의식을 자주 보았고 남들을 따라 하였던 경험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의 천황에 대한 신격화는 8세기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태양신의 직계 자손이라는 덴노는 일본 민족의 상징이고 신성불가침이어서 모든 국민은 천황에게 몸을 바쳐서 충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수 아재는 일본 국민과 군인들이 쇼와 덴노에 대한 충성의 정신이 농후하게 세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세뇌는 머리를 씻어낸다는 즉 종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머리에서 비워버리고 새로운 마음인 천황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히 채운다는 뜻이 되겠다. 정치나 전쟁에서 상대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꾸게 하는 세뇌는 매우 중요하다. 세뇌의 방법은 전에부터 있어 왔다고 하며 2차 대전의 전체주의자들과 중국에서 국공(國共) 내전 때 모택동이 국민과 전쟁의 포로들을 상대로 세뇌 교육을 하여 상대를 자기의 편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일본이 제국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사람들의 의식을 모으는데 많은 힘을 기울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된 여자 은행원 3명과 남자 1명이 납치범들의 친절과 호의에 감화가 되어서 이후에 납치범의 편이 되었다는데 그러한 현상을 말한다고 했다. 한국 전쟁 때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미군이 중공군의 세뇌로 인해서 이후에 이편으로 투항을 거부한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이비 종교에서 교주에게 세뇌된 신도들이 자신의 온전한 생활을 잃어버리고 이상한 행위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도를 통하여 많이 보게 된다. 세뇌는 주로 상대에게 고통을 주고, 거듭해 고통을 가하여 상대가 괴로움을 겪을 때 이를 친절하게 해소해 주어서 그의 마음을 바꾸게 한다는 것이다. 군국주의(軍國主義)인 일본 국민이 쇼와 천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12세기에 헤이안(平安) 시대가 끝나고 봉건제도인 막부의 정치 형태로 변화가 되었다. 막부 정치란 예하의 정해진 지역을 다이묘(領主)들이 다스리게 하고 이들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이름의 총사령관이 통제하는 봉건 정치의 형태이다. 정이대장군은 나쁜 오랑캐를 정벌한 정의로운 대장이라는 뜻이다. 영주는 사무라이가 보호하고 충성을 다한다. 그렇게 막부 정치로 이어오다가 우리나라에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17세기 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시작한 에도 바쿠후 세력이 19세기에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젊은 사무라이들이 중심이 되어서 메이지 덴노(明治天皇)의 절대 왕권 정치로 바뀌었으며, 발달된 외세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명치 유신의 혁명을 단행하므로 정치와 경제와 군사의 안정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아시아 대륙으로 시야를 돌려서 1875년에 우리의 강화도로 운요호 군선을 앞세우고 침입을 하였다. 그 결과로 일본은 한반도에 진입해 자리를 잡고 청나라와 러시아 3국이 한반도에서 세력 경쟁을 하게 되었으며, 청과의 전쟁에 승리하고 이어서 러시아와 싸움에서 이김으로 한반도의 주권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와 한일 의정서를 거치고 일방적으로 을사 보호 조약과 정미 7조약을 맺어서 1910년에 강제로 한일 합방을 하였다. 그들은 그때마다 일본은 우리 조선 왕실의 존엄과 안녕을 보장하고 조선인들의 복지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는 속임수를 앞세웠다.

그렇게 대륙 진출에 성공한 제국주의인 일본은 1931년에 만주로 침입해 사변을 일으켜서 허수아비인 만주국을 세우고 상해 사변을 거쳐 중국의 난징으로 쳐들어가 중일 전쟁으로 대륙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일본은 교활하게 그때마다 사건을 조작하고 상대에게 덮어씌워서 싸움을 걸었다. 중국에서 한동안 마땅한 전리품을 챙기지 못한 일본은 홍콩을 거쳐서 동남아시아로 진출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41년 12월 동남아에서 세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기세를 꺾으려고 태평양 진주만을 습격해 미군 사상자 3400여 명의 피해를 주었으며 항공기와 함선들을 파괴하여 미국 국민과 정치계를 분노케 해 미일 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일본이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전쟁을 가장 싫어하지만 정치와 경제와 군사의 최대 강국이다. 17세기 유럽에서 청교도들이 이주를 하여 너른 땅인 아메리카를 개척하고, 1차 대전에 많은 전쟁 국을 상대로 원조하고 교역을 하므로 부자 나라가 되었다. 거기에 비해 일본은 점령지에서 쇠붙이를 거두고 송진을 따서 열량(熱量)을 마련하는 전쟁 자원의 빈국이다. 태평양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다가 1942년 6월 태평양의 미드웨이 해전에 미국이 승리를 하고 연이어 과달카날 전투에서 기세를 잡으며 전세가 미국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일본이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학수 아재들은 먼 항해 끝에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이르렀다. 도착지는 북마리아나 제도의 많은 섬 중에 하나인 사이판이라고 하는데 일본이나 제주도에서 바닷길로 3000km 떨어진 서남쪽의 해상에 위치해 있다. 크기는 울릉도의 1.6배 정도이고 원주민은 차모로족이며 1차 대전 후에 일본이 관리하는 섬이어서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인구는 5만여 명이라고 했다.

거대한 함선에서 풀어낸 사람들은 일본 군인과 징용되어 온 한국인과 군인의 뒷바라지를 한다는 몇 명의 여자도 있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너른 바다와 갈매기 소리와 그림같이 아름다운 섬인데 학수는 그런 것에 마음을 둘 수가 없고, 오로지 사고 없이 현실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마음이므로 대열에 따라 배에서 내렸다. 섬에는 일본 군인이 많았고 더러는 조선인도 있었다.

일본의 해군 사령부는 그곳에서 동해상으로 5Km쯤 떨어진 티니안 섬에 자리를 하였고, 사이판의 마피산에 있는 천연 동굴에 육군 사령부가 있다는데 사령관은 일본인이며 계급이 각각 중장이라고 한다. 바다 저편에서 간헐적으로 쿵 쿠웅 쿵쿵 포음(砲音) 소리가 작게 들리고 미국의 항공기인가, 비행기들이 상공을 지나가지만 전투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배에서 내린 이들이 각기 흩어져 가고 학수 아재 일행은 인솔병의 지시에 따라서 한참을 행군하여 어느 조그만 가건물에 들어갔다. 적도(赤道)의 조금 북단에 위치한 사이판은 몹시 더웠다.

실내에 징용병들을 세워 놓고 일본 군이 강단에 올라서 지시를 한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천황님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 군인이다. 그러므로 군율을 철저히 지켜야’ 운운으로 시작하여 그곳 동남아시아의 군도는 대일본 제국의 명운을 지켜내야 하는 절대 요새지여서 악마와 같은 미군과 싸워야 하므로 이렇게 제국의 군인과 징용들이 지원병으로 오는 것이라고 했다. 함께 온 군인들은 만주의 관동군과 여러 곳에서 차출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 우리 일본이 미국을 반드시 이길 것이고 이후에 승리의 영광은 너희들의 것이니 용기를 가지고 싸우자, 로 강의가 끝나고 다시 대원들을 동북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고 교관이 외친다. ‘쇼와 덴노 헤이카 반자이(히로히토 천황 각하 만세).’ 그리고 군인들이 시행하는 의식에 대해 설명을 한다. 대일본 제국군은 짐승 같은 미군에 투항이란 없다. 죽어도 전진이고 그리고 천황님께 충성을 외치며 적을 무찔러야 한다. ‘가미가제’는 신풍(神風)을 일으키며 돌진해 천황님을 옹위하는 거고, 위의 구호는 적에게 승리를 하기 위해서 몸을 던지며 외치는 구호인 것, 전투에 승리를 하지만 최후의 수단으로 해야 하는 즉 자살 특공대의 외침이라고 했다. 그렇게 일과를 끝내고 역시 주먹밥 한 덩이로 저녁을 마친 학수 아재들은 그곳에서 이부자리도 없이 새우잠을 잤다. 어머니가 그립고 떠나온 고향이 생각나지만 아재는 오로지 고난을 견디고 고향에 돌아가서 어머니를 뵈어야 한다는 마음뿐이다. 아재는 학교에 다니며 단체 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고, 본래가 건강한 몸이어서 크게 고통을 느끼지 않고 곧 잠이 들었다.

학수가 사이판에 자리를 잡은 때는 1944년 6월경이다. 당시는 세계 제2차 대전도 막바지에 들었으며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독일과 일본이 전반의 전투에서 패하고 전세가 영국과 연합국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상태이다. 1939년 9월에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로 쳐들어가면서 시작된 전쟁은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계속해 동맹국과 연합국이 서로 공방을 하다가 1944년 6월에 영국과 연합군이 프랑스 해안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프랑스를 회복하고 소련과의 전투에도 독일이 밀리기만 한다. 한편 일본이 1940년 이탈리아와 독일과 3국 동맹을 맺고 연합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므로 일어난 미일 간의 태평양 전쟁도 처음에 동남아에서 일본이 미국과 연합국을 물리치고 기세를 올렸으나 이제는 일본이 완전히 기세가 꺾여 알류산 열도와 솔로몬 제도의 싸움과 마샬 제도에서 계속해 패하며 남양의 북마리아나 제도 방면으로 전선이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학수와 징용 대원들은 다음날부터 제식 훈련과 군사의 기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가끔 섬 주민이 경작을 하고 있는 사탕수수 밭에 가서 일을 해주는데 이는 주민에게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교관은 대원들을 거칠게 다루었다. 개인에게 지급이 되는 보급품이 없으며 식사가 거칠고 많이 부족하여 대원들이 질병을 앓기 시작한다. 의료 시설은 아예 없다. 거기에 감독하는 교관들은 대원들이 크게 잘못을 안 해도 몽둥이로 마구 매질을 했다. 매를 맞아서 더러는 죽어가고 중병으로 사고가 나기 시작을 한다. 군과 징용병들이 주야로 받는 교육은 ‘천황님을 위해서 충성 운운’이다. ‘적과 싸우다가 유리처럼 허무하게 깨지지 말고 천황님을 위해서 옥쇄(玉碎) 즉 단단하고 깨끗한 옥이 되어서 아름답고 정의롭게 부서져야’라는 교육이다. 그리고 미군은 잔인하므로 미군에게 투항이란 절대 하지 말아야∼ 미군에 잡히면 비참하게∼’고 했다. 시골에서 징용으로 온 대원들은 거의가 교육이 없고 이해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일본 교관의 말에 세뇌가 되어 그대로 믿는 사람이 많았다. ‘열심히 교육을 받고 쇼와 천황님에게 충성을 다해야, 미군은 무서운 사람들∼’라고 해서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학수 아재는 겉으로 그들의 말을 수긍하는 척하고 어떻게든 위험한 고비를 넘겨서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미군은 평화를 좋아하고 생명을 아끼고 존중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굶주림과 고된 훈련을 받으며 참고 지내는데 마피산에 있는 천연 동굴의 육군 사령부 사무실에서 아재에게 호출이 왔다. 웬일인가, 하고 달려갔는데 그곳의 작전과장이라는 일본 군이 학수에게 학교에 다닌 경험이 있으니 전령(傳令)으로 일을 하란다. 전령이란 본부에서 지시하는 내용을 문서화하여 예하 부대에 전달을 하는 연락병이다. 전령이 있기는 하지만 군인이 많고 섬이 무질서해서 위험하므로 전령을 도와 같이 일을 하라고 말한다.

그날부터 학수 아재는 동굴의 사무실 귀퉁이 책상에서 일본 군 선임 전령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학수는 사령부에서 근무를 하므로 미일 간의 전투 전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넘치는 전쟁 장비와 물자를 앞세우고 계속해 전진만을 외치는 패기의 미군에게 전반의 전투에서 밀리며 지리멸렬이 된 일본은 이제 남태평양 몇 개의 섬만을 최후의 보루로 생각을 하고 방어 작전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 사이판이 가장 중요한 방어 지역이므로 이곳에서 패하면 끝장이라고 한다. 일본 군은 모두가 패색이 짙어 보인다. 사령관인 사이토 중장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군인들은 나서서 징용병과 위안부 여인과 섬의 주민들을 상대로 쉬지 않고 옥쇄 작전을 독려한다. 미군이 악마여서 잡히면 비참하게 죽으니 오로지 전진하고 그리고 반드시 옥쇄를 하란다.

학수는 속으로 ‘미군은 전쟁을 가장 싫어하고 생명을 존중히 하는데∼, 일본은 전쟁을 좋아하고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며칠이 지나면서 건강하고 착실하게 일하는 학수 아재에게 사령관과 작전과장과 선배인 전령병까지 친절하게 대해준다.

대본영(大本營)은 일본국의 히로시마에 본부가 있고, 제국주의를 위해 아시아와 태평양 등지에서 분전(奮戰)을 하고 있는 일본 군사의 현황을 보고받고 또 총 지휘를 하는 천황의 직속 기관인데 일본 내각의 총리가 운영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 총리인 도조 히데키가 사이판의 사령관인 사이토 중장에게 동남아시아의 전황을 물어왔다. 이에 사이토 사령관이 관동군과 조선 주둔의 지원군을 합하여 사이판과 그리고 조금 떨어진 티니안도에 모두 배치를 마치고 항공기도 300여 대를 대기케 하여 미국 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답신을 보냈다. 미군에게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부연도 했다. 이에 사이판 전투는 최후의 국방선이고 대일본 제국의 명운이 걸린 한판의 승부이니 완벽해야— 다시 격려하는 뜻에서 장비와 보급품을 지원하니 착오가 없도록 운—의 도조 히데키 총리에게서 당부의 답신이 내려왔다.

그러고 얼마 후 태평양 상공에 일본의 비행기가 뜨고, 이를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하던 미국 군함에 장착된 고사포가 화염을 뿜어내며 일본 비행기는 공중에서 폭파되어 해상으로 추락했다. 이때 비행기의 잔해에서 일본 1급 기밀문서가 유출이 되어 바닷물에 밀려다니다가 민간인에게 발견이 되었다. 이 문서가 미군 부대에 신고가 되었고 미군 측에서 기밀문서를 자세히 분해를 하므로 일본군의 작전 계획이 미군 측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이 서류는 미군이 알고 있음을 감추기 위하여 다시 민간인을 통해서 몰래 일본 군 부대 옆에 버려졌다. 이후 일본의 기밀 내용에 따라서 예정된 시간에 미군의 항공기와 군함이 남태평양에 대기를 하였고 얼마 후에 일본에서 장비와 보급품을 가득 실은 거대한 수송선이 사이판을 향해 다가온다. 이때 미군 군함의 방사포에서 정확히 화염이 뿜어져 나가고, 상공에 대기하던 비행기에서 일본의 수송선에 네이팜 소이 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의 보급품을 가득 실은 함선은 곧바로 바닷물에 수장되었다.

그렇게 일본의 보급품을 차단시킨 막강한 군사력의 미국 군함과 항공기는 점점 사이판으로 다가오고, 일본의 군사들도 사이판에 배치가 되어서 전투 준비가 끝났다. 미국의 군함은 사이판 주위에 가득히 집결해있다. 그런데 전쟁을 싫어하고 인명을 아끼는 미군의 전투 장비는 넘치는데, 일본 진영에 보내온다는 군수품 소식이 없어서 초조하고, 일본 군은 부대 운영에 몹시 어려움을 겪는다. 일본 군 지휘부에서는 자꾸만 어택 반자이(공격 만세)만을 외치고 군사들은 주민과 징용병과 시중드는 여자들을 상대로 거듭해 ‘미군은 악마여서 잔인하므로 죽어도 공격이고 아니면 만세를 부르고 옥쇄를 해야∼’라고 세뇌 교육에 열심이다. 섬은 주민과 군인과 징용병들이 어지러이 혼합되어서 질서가 없고, 먹을거리와 의료 시설이 부족해 질병으로 죽어가는 병사들이 많다. 더러는 일본 군이 잔인하게 매질을 하여서 주민과 징용병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 아수라에도 주민은 1차 대전 이후에 일본의 위임 통치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일본 군인들의 주장을 철저히 믿고 있다.

마침 학수 아재는 전염병인 말라리아 증세가 있어 열이 나고 몸이 아파 온다. 아재는 과장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얻어 민가에 가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아재는 본래가 건강한 몸이어서 질병은 가벼운 증세이다. 꾀병으로 보인다. 주인집 여자와 이웃 사람들은 악마라는 미군이 몰려오므로 공포감을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른다. 주민들은 일본 군의 말을 믿고 그들을 따라가자고 상의를 한다. 이에 학수 아재는 은밀히 그들에게 미군은 절대로 나쁜 사람들이 아니고 생명을 아끼는 착한 사람들이니 마음 놓고 집에 가만히 숨어 있으라고 말했다. 일본 군들을 따라가면 살아남지 못하니 가지 말라고 자꾸만 그렇게 설득을 하자 주인과 주민들은 일본인들을 따라가려고 하다가 포기했다.

미군이 몰려오고 전투가 심해져서 학수 아재는 산속으로 피신을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전쟁이 지나간 후에 미군이 섬을 완전히 점령하면서 일본인은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학수 아재는 산에서 내려와 미군 부대에 자수를 하고 미군의 보호를 받는다. 아재처럼 살아남은 징용병들이 많았다. 미군들은 포로들에게 잘 대해주었다. 아재는 미군 부대의 일을 돕고 한동안 그렇게 지내다가 미군으로부터 구호 식품과 의류를 얻어 가지고 요양으로 머물렀던 집에 가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주민들은 미군이 무서워서 일본 군을 따라갔더라면 옥쇄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죽었을 건데 학수 아재의 설득으로 살아난 셈이어서 몹시 좋아하고, 아재에게 고마워했다.

학수 아재는 그렇게 며칠을 미군 부대에서 일을 돕다가 살아남은 징용병들과 같이 미군의 배려로 귀국선에 오를 수가 있었다. 아재가 머물렀던 집주인과 이웃 주민들이 이별의 자리에서 아재에게 다시 오라고 말하며 매우 섭섭해 했다. 그렇게 고생의 끝에 학수 아재는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아재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자 덩실덩실 춤을 추신다. 그렇게 고향에서 쉬다가 학수 아재는 학업을 계속하고 그리고 이후에 고급 공무원이 되어서 어머니께 효도하며 살았다.

어느 해 여름인데 흘러간 세월에 고통을 겪었던 생각이 나서 사이판으로 여행을 갔다. 옛날에 인연이던 주민들을 반갑게 만나고 그리고 섬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미국과 일본의 사이판 전투는 그해 6월 15일부터 7월 9일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전투가 시작이 되고 8일 후에 일본 정부는 전세가 미군에게 완전히 기울어져서 사이판을 포기하였고, 7월 3일에는 섬 전체가 모두 미군에게 함락이 되었다. 일본 지도부에서 사이판 전투에 패하므로 ‘일본의 희망이 사라지고, 헤어날 확률은 제로’ ‘일본은 지옥이 가까워 온다’라고 자탄을 했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전하는 얘기를 듣고 섬의 북단에 있는 만세 절벽과 수림 속의 자살 절벽을 돌아보았다. 절벽 앞에 세워진 위령비에 예를 올리면서 당시에 상상하기 어려웠던 정황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미일 전투에서 일본 군은 2만 4천여 명이 전사하고 미군은 3천4백 명이나 인명의 손실을 입었다. 주민이 5만여 명인데 당시에 자살 절벽과 만세 절벽의 80m 벼랑으로 몸을 던지거나 질병과 전쟁의 고통으로 2만여 명의 인구가 줄었으며, 일본 군인도 5천여 명이 벼랑에 몸을 던졌다고 하니 끔찍하다. 사이판 전투에서 패하여 도조 히데키 내각이 붕괴가 되었고 일본은 내리막길에 들었다. 도조 히데키 총리는 중일 전쟁에 일본의 관동군을 지휘하며 중국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못된 짓을 한 관동군 사령관이었는데 일본 정부의 내각 책임자로 승진하였던 것이다. 이후에 일본이 그렇게 패망을 하고 연합국의 전범자 재판에서 도조 히데키는 사형 언도를 받고 처단이 되었다.

사이판 전투가 지나고 다음 해인 1945년 4월 28일에 3국 동맹이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무솔리니는 연합국에게 전세가 몰리자 내연녀인 클라라 페티치와 스위스 쪽으로 도주를 하다가 국경의 산지에서 반군에 붙잡혀 사살이 되었다. 나치의 히틀러도 그해 4월 30일에 독일 베를린이 소련에 함락되면서 결혼하고 하루 만에 새로 들인 부인 에바 브라운과 지하 벙커에서 자살을 했으며, 1945년 5월 7일에는 일본의 동맹국이던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했다.

남태평양을 평정한 미군은 승승장구이다. 이어서 미국이 아오지마를 거쳐 일본 본토의 폭격에 들어가고 군수 공장도 모두 파괴했다. 중국의 장개석이 사양길의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러시아가 일본 군을 밀고 만주 지방으로 쳐내려온다. 미국은 일본이 지배하던 티니안을 다시 회복하고, 1945년 8월에 티니안 섬의 비행장에서 탄명(彈名)이 리틀 보이와 팻맨의 원자탄을 B29 폭격기에 장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진을 하여 8월 6일과 8월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함으로서 일본 시민 17만여 명의 인명이 손실되었다. 그래서 더 버티지 못하고 히로히토 천황은 8월 15일에 지난 7월에 있은 연합국들의 포츠담 회담 결의 내용인 일본의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고 전쟁도 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9월 2일에 태평양상의 미주리 전함에서 일본의 외상인 시게미스 마모루는 미국의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 장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쇼와 천황의 전범 처벌만을 제외시켜 달라’고 애걸하면서 항복 문서에 날인을 하였다.

전쟁 주의자가 자신들의 점령지에서 언제고 하는 말이란 무엇이 있을까, 점령지 주민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운운 아니면 전쟁은 문명을 한 단계 창조를 하고 인명을 보호하고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운운의 허언을 한다고 했다. 그들은 총을 쏘면서 생명을 보호한다는 말을 하고, 시설물을 파괴하면서 어이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일본이 꼭 그렇게 했다. 그래서 전쟁을 싫어하는 어느 사람은 전쟁은 사기라고 말했다. 거짓말로 피해자를 속이고 믿게 하여 재물을 편취하는 행위가 사기죄인데 전쟁 주의자들은 속이고, 싸워서 얻는 전리품을 달러로 만들어 몇 명이 나누어 가져가는 사기 행위라는 것이다. 그는 국가의 방위 기구는 최소한이어야 하고 외부 세력의 침입을 막는 데에만 운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국주의 일본이 점령지에서 언제고 앞세우는 말이 점령지 주민의 해방이고, 주민의 존엄과 복지를 위해서 일본은 최선을 다하고 운운, 재물을 빼앗아가며 지금은 어려워서 이러지만 앞으로 더 많이 돌려주고 잘살게 하려는 행위 운운의 말을 한다. 한편 자신들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서 이를 대동아 공영권을 방어하는 전쟁이라고 궤변을 했다. 1940년경에 일본에서 등장한 이 말은 태평양 연안의 아시아 국가는 모두 나서서 단결하여 미국과 서구의 침탈에 대비를 해야 운운이라는 것이다. 서구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자신들이 앞장을 서는 것인데 모두 나서서 일본국에 힘을 모아달라는 말이다.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을 합리화하고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가 나서서 일본에 힘을 합쳐 미국과 서구 연합의 침략자와 싸우자는 외침이다. 완전히 사술(詐術)인 것이다. 자신들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의 3국 동맹을 맺었고 제국주의의 야심으로 그네들이 먼저 일으킨 세계 제2차 대전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인데 일본은 이를 대동아 전쟁이라고 했다.

학수 아재는 자신이 사이판에서 일본 때문에 고생한 과거를 자세히 생각해 보았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존재의 본능에 의해서 손짓과 눈짓과 발짓을 하는 게 아닌가. 먹고 마시고 걷는 것도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존재를 하려는 제반의 몸부림이다. 사람은 누구이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온갖 지혜를 활용하고 있다. 왜인들이 19세기에 행한 유신 혁명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정한론(征韓論)을 펴고 대륙으로 눈길을 돌린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다. 거기에 온갖 사술을 동원하여 우리 조선국을 괴롭히고, 청나라와 러시아에 전쟁을 자행한 것도 큰 잘못이다. 이어서 만주로 쳐들어가고 중일 전쟁으로 중국에 많은 인명 피해를 입힌 것은 마땅히 지탄을 받아야 한다. 한편 전력과 자원이 부족하면서 경제와 군사의 최강국인 미국에 싸움을 청한 행위는 사리의 변별력이 도무지 부족하다고 하겠다. 모든 사안은 사필귀정이라는데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의 전후 처리에 일본의 무장 해제와 7년 동안 연합국이 보호하는 것 운운은 그들의 만행에 비해서 매우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 사회에서 가벼운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을 받는데 3국이 동맹하여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기고 무려 530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저지른 것은 엄청난 범죄가 아닌가. 전쟁은 인명의 피해와 고통과 파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전쟁은 다시 있어서 아니 된다는 생각을 학수 아재는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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