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3월 6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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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에 갔던 각시가 돌아왔습니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던 시국이라, 덜컥 겁도 났었습니다. 각시가 영영 집으로 오지 못할 것 같은 현상들이 하루가 멀다고 생겨나니 더 안달하고 애가 탔습니다. 친정이 좀 멀어야! 한달음에 달려가서라도 모셔오지요. 아닙니다. 갈 수만 있으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겠는데, 안팎으로 그럴 처지도 못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하고, 당장 자신의 내일도 장담할 수 없다고 난리들입니다. 전문가들도 통계학적인 수치에 따른 예측과 전망을 내놓을 뿐이고, 당국도 어련무던한 당부가 최선인 듯합니다. 대명천지,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는데, 하루 또 하루가 달라졌습니다. 긴가민가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고, 애면글면해보지만 속수무책이니 어쩝니까. 나 잡아봐라, 식으로 한 발 다가서면 두 발 더 멀어지는 상황이라 여기저기서 설왕설래입니다. 우선 마스크부터 착용해보자 했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자신을 스스로 지켜보자고 설득도 하다가 또 규제와 억압도 했습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포 분위기는 만들어졌습니다. 백해무익은 아니지만 그 정도에서 사태가 진정되고 해결방안이 나왔더라면 그토록 애간장이 녹아나지는 않았겠지요?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말입니다.
하여튼 각시는 친정아버지가 편찮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다니러 갔는데, 그만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베트남이라고 우리와 달랐을 리 만무했고, 오히려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겁니다. 친정아버지 건강 상태는 이유도 모르겠는데,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답니다. 몸살감기쯤으로 생각했던 증상이, 지속적인 발열과 근육통이 나타났고 또 호흡곤란과 구토, 설사까지 반복되더랍니다. 그래서 각시는 입국 날짜를 이날저날로 미루던 중인데, 아버지 증상 때문에 가족 모두가 출입이 제한되는 상황으로 몰렸답니다. 그러는 와중에 친정아버지는 병원에도 가보지 못하고, 그야말로 허망하고도 황망하게 속수무책으로 돌아가셨답니다. 사람이 이토록 쉽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이 각시는 두렵고 무섭더랍니다. 이런 환장할! 장인이 돌아가셨다는데도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벌써 출입국 상황이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각국의 방역패스도 시시각각 달라졌고, 방역 원칙과 제도도 어떻게 적용되고 운영될지 알 수도 없어서 납작 엎드리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딸을 앞세우는 등 비굴한 방법까지 동원해서라도 각시한테 가고 싶었지만 다 소용없었습니다. 역시 뭘 해도 안 되는 놈은 팔자가 그런 모양입니다. ‘조금 모자란 듯 살아야 삶이 활기차지고, 부족한 듯 살아야 인생이 깊어진다’는 말이 아니라도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나 분수는 또 ‘나 푼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촌놈으로 태어나 분수껏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푼수가 되었습니다. 촌놈으로 오래 살려면 차라리 푼수로 사는 게 답이었던 겁니다. 이 동네, 저 마을 할 것 없이 사방팔방의 장례식장을 다 찾아다녔으면서도 정작 본인 발등의 불은 어쩌지도 못하는 처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함평 촌놈 푼수는 그 소문이 하노이까지 건너가고 말았습니다. 착한 사위 얻었다고 그토록 좋아했던 형님 같았던 장인이었는데 말입니다.
말짱했던 푼수 모친도 탈이 났습니다. 어느 날부터 기운 빠진다고 외출을 삼가다가 이제는 방문 밖으로도 나서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당연히 그 이유도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세상이 시끄럽던지 말든지, 할머니들은 마을 노인정에 모여 밥도 해 먹고, ‘삼봉’도 치면서 지내기 마련이었습니다. 집집마다 할아버지들은 대개가 돌아가시고 없는, 그래서 노인정은 고인 물처럼 늘 민숭민숭했지만 그나마도 사람 냄새가 풍기는 곳은 거기뿐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기저기, 이 집 저 집 아들딸들의 전화 질 등쌀에 밀리고, 푼수 같은 이장님 성화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여서 뒤늦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었고, 그래저래 발걸음이 흐지부지해지던 차였습니다.
그랬는데 금방 다녀온다던 당신 며느리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탈이 날 법도 했습니다. 벌써부터 이주여성들에 대한 속상한 소문은 떠돌았고, 하루가 멀다고 노인정으로 전해지는 다문화 며느리들의 가출 소식은 푼수 모친을 더 기운 빠지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귀로 듣고, 또 무시하면서 “내 메느리는 일 업쓴께 걱정허덜 말어” 그랬고 또 때로는 투덕투덕 입씨름도 했던 모양입니다. 웃자고 꺼내놓은 말인 줄 알면서도 다문화 며느리들 흉보는 꼴이 싫었고, 만에 하나 소문처럼 당신 며느리도 그 꼴 나면 어쩌나 싶어 더 무섭더랍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도록 함께 잘 살았던, 착하고 똑 부러지는 당신 며느리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하도 시끄러우니 그랬을 겁니다. 자랑스럽게도 읍과 면에서는 다문화 가족 1호였고, 군에서도 여전히 모범 다문화 가족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각시는 성공한 이주여성으로 그 사례가 널리 소문나 도내 다문화 행사에도 자주 초대받는, 남편 푼수를 능가하게 바쁜 주부였는데도 그랬습니다. 하여간 그런저런 잡소리들이 기운을 빼더랍니다. 뿐만 아니라, 대학생이 된 손녀딸 하나는 어쩔 것이며, 어렵고 또 힘들게 늦장가 들어 그럭저럭이라도 잘 살고 있는 당신 아들은 또 어째야 쓸지 싶어서 생병이 나고 만 것입니다. 안타깝고 짠하지만 푼수가 겨우 지켜내고 있는 ‘낙천동’ 마을뿐 아니라 근동에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젊은 며느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푼수 각시를 포함한 애먼 다문화 며느리들이 고부 갈등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심심풀이 땅콩처럼, 그리고 ‘이웃집 며느리 흉도 많다’ 했듯, 싫으나 좋으나 시골 노인정의 단골 메뉴처럼 이주여성들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경우입니다.
그런 사소함으로 그냥 웃고 말았으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아니었습니다. 푼수 모친도 결국은 읍내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살 만큼 살엇씨야, 거그다 줄 돈 있으먼 고기라도 사묵것다”면서 지지리 싫어했던 병원인데, 당신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역시나 그 증상이었습니다. 땀에 젖은 솜이불처럼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푼수와 딸도 감염 의심자로 곤혹스러울 만큼 자가 검사와 격리 과정을 거쳤는데, 다행스럽게 확진자는 면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방역패스 적용은 더욱 강화되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습니다. 푼수는 어찌할 바 모르고 동분서주, 좌충우돌입니다. 하노이 장인 모습이 떠올랐고, 차분했던 각시가 허덕이고 숨차하던 상황이 푼수를 더 다급하고 애타게 했습니다. 그래 봐야 아무런 소득도 없었고, 이제는 병문안도 할 수가 없습니다. 소문난 효자! 나 푼수 꼴은 말이 아닙니다. 그나마 각시와는 시시때때로 전화 통화라도 할 수가 있어서 감사할 일이고, 학교 기숙사가 폐쇄된 상황이라 어쩌지 못하고 집에 내려왔다는 딸 나 하나의 보탬이 아니었으면, 또 다양한 푼수다움의 일들이 생겨났을 겁니다.
아무리 비상시국이라도 촌놈이 농사철을 다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농촌에 사람이 턱도 없이 줄고, 농사할 사람이 없어지니 농업 방식도 빠르게 기계화 작업으로 바꿨습니다.
농사도 외국인 일손이 곳곳에서 필요하게 되었고, 농업기술센터에서 다양한 도움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에서는 푼수 같은 일꾼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을 수밖에 없답니다. 이래저래 다 팔아먹고, 손바닥만큼씩 남은 논과 밭을 포기할 수 없어서 꼭 붙들고 있는 동네 어르신들 농사부터 집안의 잡일까지 틈이 많습니다. 그 틈을 채우고 어르신들 살피는 것까지 일은 겁나게 많습니다. 해서 함평천지 들녘을 모두 자동화 시스템으로 바꿔 농사를 하는 그날까지는 푼수 손과 발이 더 부지런해야만 합니다. 뿐인가요, 기껏 하고도 실속이 없는, 잘 해놓고 본전도 못 챙기는, 말로 주고 되로 받았음에도 그냥 송아지처럼 웃고 마는 푼수입니다. 그런 일상이니 늘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놓치고 잃은 것도 많습니다. 때문에 모친으로부터 “시상에나 저런 모지리 같은 사람이 또 어디가 있으까이” 늘 지청구를 듣고 삽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그러지 못하면 살 수가 없는데요.
푼수는 지금 이앙기 모내기를 하는 중입니다. 넓고 넓은 들녘에 사람은 오로지 푼수뿐입니다. 농수로에 홀로 서 있는 두루미처럼 이앙기에 올라앉은 푼수도 꼭 길 잃은 철새 모습입니다. 사람 구경하기 힘들어진 농촌에서 늦은 모내기를 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일이야 있든 없든 늘 바쁘기 마련이고, 엎친 데 덮친다고 모친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있어서 모내기가 많이 늦어진 겁니다. 겨우 자투리 시간을 내 이앙기를 본인 논으로 이제야 끌고 왔습니다. 모친이 말짱했더라면 벌써 난리가 났을 겁니다. “하이고, 저런 쑥맥은 또 업쓸거시여! 이녁 농사부터 해야지, 시상만사 그거시 뭔 짓이냐고?” 닦달을 해도, 푼수는 모내기 하루 이틀 늦다고 밥 굶는 것도 아닌데요, 하며 소처럼 웃고 말았을 겁니다. 하여간 모내기도 대개가 끝나서 논이나 밭에 사람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고, 견딜 수도 있습니다. 하온데 푼수 곁에는 지금 어머니도 각시도 없어서 더 속이 상하고 기운도 나질 않습니다. 이래저래 코로나19가 푼수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기운이 없으니 재미도 없고 일도 줄어지지가 않네요. 이런저런 잡생각 없이 그냥 이앙기 굴러가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데, 오늘은 다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니 이걸 어쩝니까? 이럴 땐 잠시 쉬는 게 상책입니다. 뭔 일이 터질지 모르고, 기계 고장이나 또 사고가 생길 수 있거든요. 아까부터 손 전화가 여러 차례 울었지만 이앙기 운전대를 잡고 있으니 무시했습니다. 사실은 모내기를 오전에 빨리 끝내고 모친한테 달려갈 참이어서 마음도 급했습니다. 논두렁으로 내려앉은 푼수가 우선 전화기부터 확인합니다.
딸 하나가 여러 차례 전화를 했던 모양입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할머니한테 간다고 나갔습니다. 하나는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도시나 시골이나 할 것 없이 병원마다 부족한 것들이 더 많아서 허덕일 때, 심부름이라도 하겠다며 나섰고, 할머니도 그 병원에 계시니 당연하다 생각했답니다. 각시가 딸에게 엄마 몫까지 살펴야 한다고 통화할 때마다 신신당부를 했을 겁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엄마뿐 아니라 아빠 몫까지 대신하고 있는 딸이 든든했습니다. 읍내 병원도 임시 격리 병실까지 만들어 치료를 시작했는데,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갑작스런 사태라 임시방편도 한계가 있어서 집중 치료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당연히 면회도 금지되고, 병원 출입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하여간 병원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덜컥 또 겁이 났습니다. 신호음이 떨어지자마자 울먹이는 딸 하나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빠,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대….”
“그거 뭔 소리여? 하나야, 정신 차리고.”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지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곁에 갈 수도, 볼 수도 없고, 무조건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내가 곧 갈꺼니까, 딸 침착해라이.”
“…….”
사망진단서의 사망 원인은 ‘코로나19 감염증’이었고, 유가족은 정부의 방역정책으로 임종, 장례, 추모 등등, 애도의 권리가 유보되는 ‘코로나19 사망자 장례 관리 지침’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푼수는 “그게 뭔 개소리여! 다 때려치우고 우리 엄니나 보게 해달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선 화장, 후 장례라는 듣도 보도 못한, 가혹한 원칙을 따르라니 미치고 환장할 판입니다. 물론 다른 방법이나 묘수는 없었습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처럼 지지리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푼수는 모친 장례를 빈소도 없이 치렀습니다. 원통하고 절통해도 그뿐이었습니다. 그동안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수없이 냈던 부의금이 다 무슨 소용이며,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동네 선후배들 부모님 상 당했을 때 그 자식들보다 먼저 달려가서, 내 부모 모시듯 상례를 갖춰 다 보내드렸는데, 정작 본인에게는 그야말로 꽝! 입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고, 넋을 놓아버린 것처럼 푼수는 지금 엉망진창입니다. ‘조용한 장례’라던가? 허망하고 막막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이 세상 모든 확진자와 사망자 통계를 날마다 발표하고, 실시간으로 방역 상황과 지침을 수정 보완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숫자는 늘어나고 지침은 강화됩니다.
할머니 건강이 아주 좋지 않다는 소식을 딸 하나로부터 접한 각시는 더는 견딜 수 없었던지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푼수는 장인이 돌아가셨는데도 베트남으로 가지 못했지만 각시는 대한민국에 돌아오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를 쓴 모양입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해외 입국자는 2주간 의무적으로 자가 격리를 해야 하지만 직계 존비속이나 형제나 자매가 사망했을 때 인도적 차원에서 자가 격리 면제를 받을 수 있는 예외 조항이 있다는 희망을 안고 출발했답니다. 어쨌든지 살아계신 시어머니를 만나볼 욕심으로 베트남에서도 어렵고 힘들게 시비곡절을 넘고 인천공항에 겨우 도착했는데, 푼수 모친은 전날 오전에 그만 돌아가신 겁니다. 그것도 억울한데, 인도적 자가 격리 면제 신청서를 제출하려면 영사관에 사망진단서를 보내는 절차가 필요했고, 또 각시 경우는 입국 후 상을 당했기 때문에 단순 입국자로 자가 격리 면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했답니다. 그렇게 각시는 공항 선별진료소에서 진땀만 빼고, 임시 생활 시설에서 대기하다가 정작 시어머니의 무빈소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신세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가슴이 미어터지고 말 지경이었답니다. 뿐입니까, 각시를 눈앞에 두고도 만날 수 없는 푼수는 미치고 환장할 판이고, 애간장이 녹아내릴 지경입니다. 늘 푼수처럼 살았지만 그냥저냥 무난했었는데, 지금 이 세상은 도대체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고, 만사가 불안하니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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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를 공식적인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선포한 지 2년이 지났다. 이후 사람들의 생활과 근무 방식부터 의학적인 치료법까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놀라운 속도로 변했다. BBC 월드서비스를 통해 팬데믹 후 우리가 배우고 경험했던 몇 가지들을 새겨본다.
우선 ‘mRNA(메신저 RNA) 백신 기술이 적용되어 코로나19 백신이 빠르게 만들어’졌는데, 백신에 대한 불신과 우려에도 천만다행이었다. 과학의 발전과 속도에 놀랍고 감사할 일이며, 백신 기술 성공으로 수백만 명의 삶을 바꿀 치료법 연구가 더 활발해질 거란다. 그런데 ‘바이러스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게 공기로 전파’되었다. 처음엔 공기로 전파되지 않는다 했고, 마스크 착용을 권고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환기가 잘되지 않는 실내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말하거나 노래하거나 숨을 쉬면서 내뿜게 되는 공기 중 바이러스가 대부분 전염의 원인일 가능성이 크며, 왜 위험한지도 알게 된다. 그래서 ‘재택근무가 확대되었으며 자리를 잡게’ 된다. 거대 IT와 SNS 기업들이 생겨나고, 그 기술력으로 화상 교육이나 회의 등 일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또한 ‘팬데믹은 사회 취약계층에게 타격이 더 컸던’ 것이다. 코로나19 영향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는 알 수 없지만 국가별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 중 하나가 백신 접종률이다. 그 데이터에 따르면 고중소득 국가에서는 약 70%가 백신 접종을 완료했으나, 저소득 국가에서는 그 비율이 4%밖에 안 되고, 저중소득 국가에서도 접종자는 32%밖에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오미크론 변종이 유행함에 따라 많은 의료 당국이 부스터샷 접종을 실시하면서 개발도상국 내 백신 접종 지연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경고한다. 그리하여 ‘코로나19 위기가 어떻게 끝날지가 미지수’이다. 팬데믹 초기 집단 면역은 유행어처럼 떠돌았고, 만약 충분한 규모의 인구가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백신을 맞아 면역력을 획득하면 바이러스가 덜 치명적이게 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인체의 면역 반응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소한다는 것이 밝혀졌고, 변종 바이러스 출연으로 백신을 신규 변이에 맞춰 정기적으로 개발하는 한편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가능성도 대두된 것이다.
통계개발원에서 발간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2’에는 코로나19 전후로 우리 사회가 겪은 다양한 변화들이 나타났다. 바이러스 감염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전파되는 것 같으나 실상 그 피해는 임시직이나 일용직, 대면 업종 자영업자나 저소득층 등 일부 계층과 집단에 차별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이 확대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영업시간 제한 등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결혼과 출생도 뚜렷하게 감소된다. 이전에도 감소는 했지만 방역 대책이 강화되면서 결혼을 미루고 연기하니 출산율은 빠르게 하락한다. 초중고 학생들은 어떠했을까. 스마트기기 의존도가 증가해 사회성 발달 저해에 우려가 깊어졌을 뿐만 아니라, 학업 성취는 전반적으로 낮아졌는데,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급증한다. 특히 수학과 영어 과목에서 중위권 가운데 일부가 하위권 또는 상위권으로 이동함으로써 학력 양극화가 발생했으며, 남학생과 읍면 지역 학생들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고, 고소득층 학생들은 사교육에 더 많이 참여한 기간이기도 했다. 대학생도 원활한 학교생활과 취업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휴학생과 학사 학위 취득을 유예하는 학생도 증가했다. 노동시장에서는 택배와 배달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주로 30대 전후의 플랫폼 노동자가 급증했는데, 업무 과정에서 교통사고나 실업 등 위험에 노출되었으나 사회보험 가입률은 제도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매우 낮았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주택 가격이 급등하여 자산 격차 또한 확대된다. 또 대출을 통해 급등기에 주택을 구매한 청중년 가구는 금리 상승과 집값 하락세로 이중고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자살자와 우울증 환자도 급증하는데, 고령층이나 여성과 10대, 20대 증가율이 더 높았던 기간이기도 했다. 코로나19의 충격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 충격은 비슷해 보이나 상대적으로 취약한 계층이 경험한 피해는 훨씬 더 크다. 때문에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또 보호하기 위해 더 촘촘한 사회 안전망을 제공해야 모두 함께 그 충격으로부터 슬기롭게 벗어날 것이다.
결국은 사람의 욕망과 욕구로 인해서 인수공통 감염병은 발생하게 되었고, 팬데믹으로 수많은 생명을 잃게 되었다. 열사병을 비롯해서 스페인 독감, 한센병, 매독, 콜레라, 결핵, 그리고 코로나19까지. 또 무엇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전염병은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대응책도 나왔고 완화되고 극복하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 사람은 그것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마스크는 유해한 공기를 걸러주어 건강과 생존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물건이지만 마스크 착용자에 대한 보편의 인식은 좋지 않은 편이다. 다양한 이유 중에는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할 때 많은 영향을 주는 얼굴을 반절 이상이나 가리기 때문이다. 문화에 따라 스타일로도 여기지만 미세먼지로 인해 쓰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거나, 또 알레르기와 초상권에 민감한 인식으로 착용하거나, 또는 외모적 결함을 보완함과 동시에 내성적인 심리적 안정감으로 착용하기도 한다. 반면에 의료기관이 아닌 병원 밖에선 환자나 범죄자들의 전유물로 취급받던 게 마스크였고, 평범한 사람이 쓰고 돌아다니는 걸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인식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아무쪼록 마스크를 더 쓰지 않고도 평온하게 살 수 있기 바라는 소망 또한 간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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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우와 직녀의 만남이 그랬을까요? 아무튼 징그럽게 애태우다 푼수는 각시를 만났습니다. 엉망진창으로 살면서 흥청망청하다 멀어진 사이도 아닙니다. 더더욱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 끝으로 귀양 간 것도 아니며, 칠석날에만 만나야 할 이유도 없었는데, 그토록 애간장이 탔습니다. 다문화 가족이서 그랬고 농촌에 살고 있어서 그토록 불안하고 안달이 났을까요? 코로나19 탓이라 생각은 했는데도, 그냥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코 허투루 살지 않으려 허리가 휘게 고단했던 푼수였고, 그 각시였습니다. 그랬는데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그 지랄방정이었으니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뿐이겠습니까, 주변이 각박해지고 사람 사이도 삭막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느닷없이 꽉 막히고, 다 갇힌 현실이 무심하고 낯설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시간이 지나면 격리도 해제되고, 각시도 만날 수 있다는 관계자들 말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방역 원칙이 그렇다는데요. 푼수처럼 견디고 기다려야지요. 그동안도 다 기다렸고, 그 먼 곳도 아닌,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 각시가 와 있는데, 2주간을 더 기다리지 못하겠습니까. 기다림, 그 보람으로 정말 꿈같은 만남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무작정 부둥켜안았습니다. 덕분에 실컷 펑펑 울었습니다. 우세스럽기는 했지만 그냥 눈물이 쏟아졌고, 엉엉 울다 보니 속도 시원해졌습니다. 이래저래 참았던 눈물이고 울음이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푼수는 모친과 헤어지면서도 또 모친을 저세상으로 보내드리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울지 않았던 푼수 같은 아들인데 말입니다.
“우리 각시, 고생했어여.”
“고생 나만 아니고, 우리 모두가 고생하고 힘들어요.”
“이렇게 지금이라도 각시를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여.”
“지금 빨리 어머니한테로 가요. 나, 어머니 많이 보고 싶었어요.”
각시가 푼수 팔을 잡아당기면서 앞장섰습니다. 시어머니를 모신 산소에 빨리 가고 싶다는 표현이면서 또 뭔가 불안해서 자신도 모르게 서두르는 모습입니다. 다문화 가족은 말보다 눈치코치가 먼저였듯이 척하면 알아듣지만 각시가 구사하는 한국어는 수준 이상입니다. 며느리가 영상 통화로 “어머니, 속상해도 쪼금만 참아요. 곧 한국 갑니다요” 그러면, 시어머니는 “애미야, 여그는 걱정허덜 말고, 느그 부모님덜 잘 챙겨드리고 와야 쓴다이” 그러면서 한숨을 폭폭 내쉬었습니다. 어째든 각시는 시어머니가 그토록 빨리,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은 본인 탓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각시는 더 많이 슬퍼했고, 안타까워하고 속상해 했었습니다. 이 시국에 무얼 탓하고 후회한들 무슨 수가 있겠어요. 답답했다는 표현일 겁니다. 조금 전 임시 생활 시설 정문을 나온 사람들은 마치 교도소 문을 막 벗어난 것처럼 허둥지둥 심호흡을 했고, 햇살을 처음 느껴보는 것처럼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 역시 주눅이 들거나 뭔가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조심스러웠습니다. 그 모호한 현장 분위기, 짐작되십니까? 방호복 차림의 관계자들이 친절하게 출입구까지 인솔해주고,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면서 공손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격리 시설 앞 풍경은 쓸쓸했습니다. 여기가 최후 방패막이라 여기고 최선을 다하려 했던 관계자들의 분주함과 고단함을 결코 모르지 않았을 격리자들인데, “고맙습니다”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돌아섰던 겁니다. 내외국인 모두가 그런 표정들이었습니다. 싫어서가 아니라 해방감이 먼저였기에 그랬겠지요? 일테면 본래 사람들은 다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니까요.
푼수가 늘 몰고 다니는 덜렁이 같은 포터2 앞에 각시가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는 너무 오랜만이라는 듯 안도하는 숨을 내쉽니다. 이제야 실감이 나고, 드디어 집에 왔네, 싶은가 봅니다. 마냥 속 좋은 신랑과 꼿꼿하고 정갈한 시어머니를 더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많은 체념이 필요했던 것처럼, 친정보다 더 내 집 같은 마음으로 살고자 했던 각시였습니다. 각시는 생각했던 것보다 격리 시설에서의 생활이 공포였던 모양입니다. 통화할 때마다 좀 지루하지만 잘 지내고, 견딜만하다 했었습니다. 안절부절, 어서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표정입니다. 죄인도 아니었고 확진자도 아니어서 기약 없는 격리 생활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일시적으로 잠시 통제를 받았을 뿐이었는데, 각시에게서 나타난 현상은 그랬습니다. 조수석에 올라앉은 각시가 우선 마스크부터 벗어 들고 또다시 깊은 숨을 내쉽니다. 이제야 각시 모습을 제대로 봅니다. 마스크를 쓴 모습도 어색했지만 벗은 모습은 더 생경했습니다. 그동안의 몸 고생, 마음고생이 얼굴에 다 있었습니다. 푼수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깡마르고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서 눈빛만 초롱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봅니다. 푼수 모습이 안쓰러운지 각시가 먼저 시선을 거두고 바로 앉아 눈을 감았습니다. 주차장에서 트럭을 몰고 나오며 혼잣말처럼 푼수가 그럽니다.
“우리 각시도 많이 힘들었던 모냥이여? 못 견디고 탈출한 사람도 있었다더니.”
“그 사람들 마음도 알 거 같아요.”
“거그서도 나름 최선을 다했겠지만 내 집 같을 수야 없었겠지 뭐.”
“다 고맙고 감사했는데, 죽는 것이 무서웠을 겁니다.”
“하여튼 우리도 더 조심하자고여. 확진자와 사망자는 계속 있다니까. 빨리 백신 효과가 나타나고 집단 면역이 생기길 바랄 뿐이라는데.”
“우리 하나는 일 없어야 하는데, 봉사활동 계속해야 할까요?”
“환자들 모이는 곳이라 걱정되는데, 본인이 원하니 뭐.”
“…….”
각시가 말 대신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딸 때문에도 생각이 많을 터입니다. 봉사활동을 빠질 수 없다고 서슴없이 마중을 포기한 딸입니다. 1년도 넘게 못 본 엄마였고, 그야말로 어려운 출입국 절차를 거쳐야 했던 사실도 잘 알고 있었던 딸인데 말입니다. 하나는 주관이 뚜렷하고 주장도 강합니다. 푼수 같은 아빠보다 강단의 엄마 성격을 더 닮아 집착과 자기 소유욕이 강했는데, 대학생이 되면서 더 파워풀해졌습니다. 베트남 말과 문화를 스스로 찾아 배우고 익혔으며, 엄마가 한국어를 구사하는 만큼의 베트남어를 하나도 이미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더 깊게 공부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믿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관함도 코시안과 라이따이한에 대함도 너무 일찍부터 파고들어 머리 아파 하는데, 걱정이 많을 수밖에요.
각시가 두리번거립니다. 선산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 모양입니다. 농로에 접어들자, 저 산자락 앞으로 어머니가 마중이라도 나와 서 있는 것처럼 푼수도 눈앞이 아련하고, 뭘 잘못 삼킨 것처럼 울대가 먹먹합니다. 각시도 긴장이 되는지 등받이와 허리 사이에 양팔을 끼워 더 꼿꼿하게 앉았습니다. 눈에는 벌써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에움길을 벗어나면 윗대부터 차례대로 모신 묘소에 도착합니다. 차가 멈춰 서자마자 각시가 곧 뛰기 시작합니다. 어쩌려고 저러나 싶은데, 그냥 두기로 하고, 푼수는 미리 준비해온 제사 음식을 챙겨 듭니다. 어머니가 늘 챙겨주었던 화문석도 잊지 않았는데, 세월 탓인지 돗자리 가장자리가 날깃날깃 합니다. 푼수는 그것들을 양손에 나눠들고 천천히 묘소로 향합니다. 부친 묘에 모친을 합장해 모셨던 터라 산소 주변은 잘 정리되었고, 봉분도 많이 헐지 않고 모실 수 있어서 감쪽같은데, 보충해 심은 잔디와 그 뿌리에 묻어있던 황토 흙이 아니었으면 흔적을 찾기 어려울 뻔했습니다. 각시는 상석 앞에 엎드려 목 놓아 우는데, 언제까지 저럴까 싶으면서도 푼수는 그냥 멀뚱하게 서 있습니다. 할 말도 많고, 이래저래 속상하고 후회되고, 크고 작은 아쉬움부터 즐거움까지 어찌 다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기다렸는데, 각시가 허리를 펴면서 무릎 꿇고 앉았습니다. 그 틈에 푼수는 상석 위에 준비해온 음식을 차리고, 앞에 화문석도 폈습니다. 음식이라야 단출합니다. 모친이 좋아했던 홍어 한 접시, 황석어젓 한 종지, 모싯잎 송편과 과일 몇 가집니다. 당신이 죽으면 제사도 다 필요 없고, 명절에도 제사 음식은 절대로 차리지 말라고 유언처럼 했습니다. 부족했지만 종부로서 그 역할은 당신으로 끝내야 한다며, “푼수 가튼 내 아들허고 사는 것만도 감사헌디, 어뜨케 종부 일을 물러주것냐고.” 당신이 굳게 결심하고 아들에게서 다짐받았던 약속입니다. 하지만 오늘만은 각시를 앞세워 핑계 김에 일 저지르고 말 생각이었습니다.
푼수가 입을 엽니다.
“엄니, 그렇게 똑똑허고, 야물고, 이쁜, 당신 메느리가 요러케 왔네요. 쪼까만 더 기다렸으면 겁나게도 좋았을 것인디. 인자는 다 털어 내 불고, 편히 계시랑께요. 그렁께 그토록 오매불망했던 메느리 술이나 한 잔 받으셔라우.”
각시가 술잔을 올리며 다시 통곡을 합니다. 푼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넘치는데, 울음소리는 내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절을 올리면서도 각시가 계속 울어, 푼수는 그만 진정하라 등살을 어루만지고 토닥이지만, 그래도 그치지 않아 가슴으로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들 뒤로는 내내 맑았던 해가 기울려고 구름 속을 들락거립니다. 두 사람이 큰절을 다시 올린 후 각시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술잔을 푼수 앞에 내밀었습니다. 고맙고 또 고생했다며, 그 퇴주잔은 각시에게 먼저 권하고 싶었는데, 그랬습니다. 서로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음복을 합니다. 아침부터 들떠 있어서 둘 다 끼니를 챙길 수 없었겠으나 제사 음식인데도 참 맛나게 먹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그들은 부모 무덤 앞에서 만찬을 즐기는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애련하면서도 또 애틋합니다. 해 질 녘의 함평천지가 세상의 모든 아픔들을 품어 안을 것처럼 차분해집니다. 한풀 꺾인 햇살도 순해지고, 푸르른 들녘은 더 고즈넉해졌습니다.
*
각시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직 하나뿐인 딸, 나 하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읍내 병원에서도 여전히 코로나19 때문에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하나가 지금 그 현장에 나가 있습니다. 관계자들은 팬데믹을 넘어섰다는 조심스런 전망을 내놓고도 안절부절합니다. 오늘도 신규 확진자 수는 집계되고, 위중증 환자와 사망자도 누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거리두기와 격리 기간 동안에 이미 경험했을 정신 건강 문제도 회복해야 하고, 삶의 질과 행복에 대한 관심을 높여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방호복을 입은 하나가 집에 왔습니다. 자전거에서 내려선 모습은 분명 하나뿐인 딸인데, 하나가 낯설었습니다. 이걸 어쩝니까? 늦은 밤에 돌아와 방호복을 벗은 하나 모습은 마치 파김치와 같습니다. 야릿야릿하고 웃음기 많았던 소녀다움이 사라져 버린, 격무에 지친 관계자들 모습 그대로입니다. 한마디로 꼴이 말이 아닙니다. 자원봉사자 모습이 저 정도면 더는 묻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이 됩니다. 그런 딸 모습을 확인한 엄마는 놀라움을 넘어, 기가 막힙니다. 얼마 만에 바라보는 엄마고 딸인데, 다가서지도 못하고 서로를 바라볼 뿐입니다.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해도 서운할 판인데, 그러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전히 마스크를 벗지 않았고, 벗은 방호복 등속을 정리해 창고에 두고 나와 화장실 겸 욕실로 들어갔습니다. 차분하면서도 절도 있는 행동을 지켜보는 엄마는 계속해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 딸을 저렇게 변화시켰는지 알고 싶은 것처럼 엄마는 그 앞에 마냥 서 있습니다. 엄마 역시도 마스크는 썼습니다. 하나가 욕실에서 나왔습니다. 마스크는 여전히 쓰고 있습니다.
딸 하나가 묻습니다.
“엄마, 왜 그러고 서 있어요?”
“우리 딸 얼굴 보고 싶은데, 그거 좀 벗을 수 없을까?”
하나는 대답 대신 엄마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것도 감질나게 잠시였습니다. 딸을 마음껏 안아주지 못한 엄마가 표해낼 수 있는 것은 눈물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식탁 의자에 앉았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식구가 함께하는 모습입니다. 의자는 딱 네 개뿐이었으나, 얼마 전까지도 참 행복했었습니다. 성장한 하나가 광주로 올라가면서 빈자리가 생기더니, 이 순간에는 할머니 자리가 비었습니다. 믿어지지가 않는답니다. 하나는 할머니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림을 아직도 인정하지 못합니다. 죽음을 확인할 수도 없었고, 볼 수도 없는, 그리고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는데, 할머니를 떠나보낼 수 있겠냐고 앙살을 했었습니다. 하나가 마스크를 벗어 왼쪽 팔목에 걸면서 다시 말합니다.
“엄마, 오늘도 사람들이 죽었고, 내일도 죽을 거예요. 이젠 무섭지는 않으나 사람들이 너무 쉽게, 아무나 죽는 거 같아서 슬퍼요. 아빠, 엄마를 더 오래도록 보려면 언제 어디서나 마스크는 꼭 착용해야만 해요.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고요. 노 마스크?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으니까요.”
“하나는 언제까지 봉사활동 할 건가? 엄마가 겁나게 걱정하는디 아빠도 그러코.”
“우리 딸, 너무 말랐어. 하나 같지가 않은데, 어쩌면 좋으냐! 봉사활동이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 거니?”
“…….”
엄마, 아빠의 걱정이 부담스럽다는 듯, 하나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칩니다. 간단하고 명료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서둘러 본인 몫의 식사를 끝내고, 마스크를 다시 쓰고, 자리를 벗어납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각시가 아쉬웠던지 딸의 뒤를 눈으로 따라가는 것 같아, 푼수가 만류합니다. 그 사이, 세상은 변해도 너무나 많이 변해 버린 듯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코로나19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 후유증일까요! 아직도 그것은 진행 중인데, 각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