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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가 내려온 산

한국문인협회 로고 조평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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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 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말띠 해’ 새벽이 되면, 동네 뒤 바위산에는 백마(흰 말)가 내려왔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그 백마는 산봉우리 바위에 엎드려 혼잣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이번 사흘 동안에는 나처럼 온몸이 하얀 여자 아기가 태어나야 할 텐데.’

하늘나라 백마는 인간 세상의 먹이를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흘 동안 몸이 하얀 여자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백마는 백 리(40km)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밝은 두 귀를 활짝 열었습니다. 아기의 첫울음 소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흰 털에 싸여 있는 백마의 눈동자는 참으로 이상한 힘을 가졌습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직접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몸속의 뼈 사진을 찍는 엑스레이처럼 집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백마는 몸이 하얀 여자 아기가 태어나길 사흘 동안 기다렸지만, 그 해에도 헛일이었습니다.

‘이번에도 허탕이야. 십이 년 후에 다시 와야지. 그땐 온몸이 하얀 여자 아기가 꼭 태어나야 할 텐데.’

백마는 바위에서 껑충 뛰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십이 년 세월이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옥황상제님, 내일 새벽이면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 세월 참. 네 나이가 스물이 되었으니 마지막이 되겠구나. 말의 나이 삼십이 되면, 저승길이….”

옥황상제님도 걱정이 되어, 백마의 몸뚱이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옥황상제님,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저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백마는 앞다리를 구부려 몸을 낮추었습니다.

“그래, 웬만하면….”

“예, 고맙습니다. 몸이 하얀 여자 아기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몸에 흰 점 하나라도 있으면….”

“음, 흰 점 하나라도…. 오냐, 사람 몸에 까만 점은 더러 있어도 흰 점은 흔치 않느니라. 그런 여자 아기라도 있으면 데려오너라. 그러면 그 여자 아기를 처녀 흰 말이 되게 하여 너와 혼례식을 올려주마. 그런데 내가 그런 일을 해도 괜찮을지….”

“그 여자 아기가 흰 말이 되어 하늘나라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저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이번에도 장가들지 못하면 백마의 손(대, 자손)이 끊어집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다른 말은 몸 색깔이 하늘색을 닮아 파랗습니다. 그런데 흰색 말은 오직 노총각 백마 한 마리뿐입니다.

‘내 색시는 나와 같은 흰 말이어야 해.’

백마는 자기와 같은 백마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백마가 한 마리뿐이어서, 늙은 총각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인간 세상의 그 산봉우리에 내려온 백마는 바위에 엎드려 아기의 첫울음소리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백마는 두 눈의 기운을 쭉 뻗어 아기가 태어난 집으로 보냈습니다.

‘이런! 또 남자 아기. 요즘에는 아기 낳는 집이 드물고, 어쩌다가 낳아도 아들이야, 고추 달린 남자 아기.’

비 오는 날도 백마는 비를 맞으며 아기의 첫울음 소리만 기다렸습니다. 어디서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빗줄기 사이로 들렸습니다.

‘이번에는 구십 리 밖이군.’

백마는 집 안, 옷 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의 기운을 구십 리 밖으로 보냈습니다.

‘반가운 여자 아기! 그런데 몸에 점이 없잖아. 검은 점도 흰 점도.’

백마는 밤에도 잠을 안 잤습니다. 그러다가 사흘째 되는 마지막 날, 바위에 엎드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때 먼 곳의 어느 동네에 여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를 받아서 목욕시키던 이웃집 할머니가 주름진 눈꺼풀을 치켜올렸습니다.

“세상에! 여자 아기 몸에 흰 점이…. 하늘에서 백마가 데려간다던데.”

“예? 아기 몸에 흰 점이라고요?”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얼굴로 벌떡 일어났습니다. 아기 얼굴의 이마 한복판에 박혀 있는 흰 점을 본 어머니는,

“할머니, 소리 내지 말아요. 백마가 들으면….”

하고,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랑채에 있는 남편을 오게 하였습니다.

“여보, 빨리 먹을 가져오세요. 벼루에 먹을 갈아서, 흰 점에….”

“그럽시다. 흰 점이 검은 점으로 보이게 합시다.”

이웃집 할머니와 부부는 급히 서둘렀습니다.

뒤늦게 눈을 뜬 백마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오늘이 사흘째니까.’

백마는 소리나는 쪽으로 급히 몸을 돌려 두 눈의 정기를 보냈습니다.

‘여자 아기! 그런데 흰 점이 아니고 검은 점이잖아. 이마에 검은 점.’

백마의 눈길은 끊어진 고무줄처럼 쑥 당겨졌습니다.

‘할 수 없지.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검은 말하고 결혼하는 수밖에. 자식을 여럿 낳으면, 나를 닮아 흰 말도 태어나고 제 어미 닮아 검은 말도, 어쩌면 절반씩 닮아 얼룩말이 태어날지도 몰라. 그것 참 재미있겠네.’

백마는 다시 하늘로 뛰어 올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애타게 기다리던 말띠 해의 여자 아기, 그것도 온몸이 희거나 흰 점이 있는 아기를 만나지 못해 서운하였습니다. 지난 세월이 아까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일찌감치 검은 말하고 결혼할걸. 괜히 옹고집 부리다가.’

백마의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산봉우리의 바위에는 백마의 눈물이 떨어져 움푹움푹 자국이 생겼습니다. 눈물이 스며든 바위의 색깔이 희끄무레하게 변하였습니다.

백마의 눈물 방울로 생긴 그 자국 안에는, ‘하늘나라에서 짝을 찾지 않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다니. 하루에 열두 번 울어도 싸지.’ 하고, 자신을 꾸짖는 마음도 넣어 두었는지 모릅니다.

백마가 내려왔던 그 산은 요즘도 ‘백마산’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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