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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하현숙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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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정아의 피부는 유난히 검고 거칠었다. 양쪽 귓불이 살짝 보이는 밝은 갈색 단발머리는 항상 헝클어져 있었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참 예뻤다. 쌍꺼풀이 굵은 눈엔 물기 먹은 검은 포도알이 또랑또랑 빛났다. 체구는 작아도 당차고 손재간이 야무졌던 아이, 정아네는 일곱 식구였다. 정아의 아버지는 철길을 보수하는 막노동을 했고, 정아의 엄마는 미군부대 병사들과 사는 아가씨들의 빨래를 하며 돈을 벌었다. 정아의 오빠 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양복 기술을 배우겠다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중 오빠 하나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심하게 절룩거리면서도 콧노래와 웃음소리가 걸음보다 경쾌했다. 정아는 돈을 벌어야 하는 엄마 대신 매일 아침저녁으로 불을 때서 밥도 짓고 집안일을 하며 동생들을 챙겼다.

정아와 나는 미군 지프차와 소달구지가 간간이 지나는 신작로를 걸어 초등학교에 다녔다. 나는 학교에 갈 때마다 뒷집 사는 정아네 집에 가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같이 가곤 했다. 정아는 밥도 잘 지었다. 어른처럼 밀가루 반죽을 버무려서 무쇠솥 뚜껑을 열고 솔솔 뿌린 다음, 뜸을 들인다며 활활 타는 불길을 부지깽이로 토닥토닥 두드리던 모습은 우리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정아네 아침 밥상은 사계절 단출했다. 김치와 간장 새우젓, 밀가루로 만든 개떡과 사기그릇에 담긴 꽁보리밥 두 그릇이 전부였다. 테두리가 조금 찌그러지고 접이식 다리가 세 개인 은색 양은 밥상을 정아는 번쩍번쩍 들었다. 정아는 간장에 비빈 꽁보리밥을 동생들에게 나눠주고, 흐린 날의 구름 모양 밀가루 개떡을 한사코 내게 권했다. 나는 아침밥을 먹었는데도 정아가 만든 밀가루 개떡을 맛있게 먹었다. 정아는 동생들이 반찬 투정을 하며 조금씩 남긴 밥을 새우젓과 김치를 올려 맛깔스레 먹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나면 정아는 양은 주전자 주둥이를 입에 대고 물을 한참 동안 마셨다. 정아가 짜디짠 새우젓과 김치를 간장에 비빈 꽁보리밥보다 더 많이 먹은 까닭을 나는 철이 들고 나서야 알았다.

학교가 파하면 정아네 안마당이 놀이터였다. 매일 일이 많은 정아는 친구들과 뛰노는 게 쉽지 않았다. 정아네 집으로 모여들던 친구들이 예닐곱 명 정도였다. 건강하지 못했던 정아 엄마는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달고 살았다. 정아는 그런 엄마 대신, 울퉁불퉁하고 검은빛이 도는 양잿물 비누로 돈벌이가 되는 빨래를 했다. 한여름에도 불을 때서 빨래를 삶아야 했던 정아의 긴팔옷은 추운 겨울에도 항상 팔꿈치까지 올라가 있었다. 손등은 시퍼렇고 실핏줄이 툭툭 터져 거칠고 두꺼웠다. 작고 도톰한 입술도 사계절 새파랬다. 따뜻한 계절엔 냇가에서, 비가 오거나 추운 계절엔 펌프가 있던 우리 집에 와서 빨래를 했다. 빨래하는 정아를 돕겠다고 펌프 손잡이에 매달려 열심히 물을 퍼 올리는 일이 내겐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정아가 빨래를 줄에 널어 기다란 바지랑대를 높이 올리면 미군 병사들과 사는 아가씨들의 알록달록한 속옷들이 무지개를 만들었다. 정아는 고구마도 잘 쪘고, 감자도 잘 쪘다. 농사는 없었지만 친구들이 옥수수며 감자 고구마를 가지고 놀러 가면 정아는 무쇠솥이 걸린 아궁이에 불을 때서 맛있게 먹게 해주었다. 친구들은 감자 고구마는 뒷전이고 정아가 만드는 밀가루 개떡을 더 좋아했다.

들판의 낟알들이 한창 익어갈 무렵이었다. 정아가 메뚜기를 잡으러 가자고 했다. 예닐곱 명의 친구들이 기다란 정종병이며 사이다병을 들고 따가운 땡볕을 이고 따라나섰다. 허수아비의 옷자락이 바람에 팔랑이고, 영글어 가는 벼 이삭이 가느다란 몸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간간이 쓰러져 물웅덩이에 빠진 것들도 있었다. 정아가 맨 앞에 가며 참새 떼를 쫓았다. 정아는 고무신을 신었는데도 어찌나 발이 빠르고 몸이 날쌘지 미처 날지 못한 참새 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져버렸다. 논둑에 줄을 선 친구들이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정아는 물에 빠져 푸드덕거리는 참새를 꺼내 물기를 닦아주고 높이 날려주는 마술 같은 솜씨도 부렸다. 논둑에 줄을 서서 걷다가도 기차 소리가 나면 누구랄 것 없이 일제히 기차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들판에서 와르르 깔깔하는 동안 문산역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경의선 기차가 세 번 올라갔다. 참새와 메뚜기랑 세 시간을 넘게 뛰어다녔다. 정아는 친구들이 잡은 메뚜기를 한데 모아 프라이팬에 바삭하게 볶아주었다.

정아와 나는 학년이 달라서 하굣길에서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늘에 닿을 듯한 미루나무 사이로 코스모스가 곱게 핀 날이었다. 내겐 전에 없이 늦은 하굣길이었다. 철길로 기차가 지나고 강 다리 아래로 깊은 물이 흐르는 한가로운 그림 속에 정아가 앉아 있었다. 메뚜기 떼를 쫓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섞일 만도 한데, 이따금씩 지나는 달구지를 따라 뛰어갈 만도 한데 정물처럼 움직이지 않는 정아가 이상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도 반응이 없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벗어 놓은 고무신 한 짝엔 작은 돌과 또 다른 한 짝엔 활짝 핀 코스모스꽃이 가득했다. 정아는 다가가 앉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물이 흐르는 다리 아래로 돌 하나, 코스모스꽃 하나를 던졌다. 그리고 하나, 또 하나…. 쭈그리고 앉은 몸이 점점 작아지더니 양 무릎 사이로 머리를 푹 파묻어 버렸다. 평소의 정아가 아니었다. 정아는 웃음도 많았지만, 얘기 거리도 많고 말도 잘하는 아이였다. 정아의 검정 고무신에 굵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정아는 함께 쭈그리고 앉은 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붉은 해가 강물에 젖을 무렵, 서울로 향해 멀어지는 기차를 보며 흐느끼는 정아와 나는 말없이 걸었다. 정아의 손이 따뜻했다.

다음날, 정아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미루나무의 마른 잎이 힘없이 떨어지고, 가로수의 은행잎이 다 떨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정아가 서울로 떠났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아는 병이 들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엄마를 대신해 돈을 벌어야 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서울의 부잣집에 가정부로 갔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울던 정아의 모습이 빈 들판에 가득했다. 낟알을 떨군 볏단 위로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허수아비도 쓰러졌다.

그날 이후, 수십 년이 지났다. 정아는 미군 병사였던 흑인과 스무 살이 채 되지도 않은 어린 나이에 가정을 꾸려 딸 하나를 낳았고, 시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잘 살고 있다. 오래전, 정아가 나를 찾아왔을 때, 그 심장의 뻐근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뜨거운 눈물이 폭포처럼 흘렀다. 정아는 30년 만에 만난 내게 아무 맛도 없던 밀가루 개떡을 맛있게 먹어줘서 참 고마웠었다는 말을 건네며 하염없이 울었다. 가슴을 앓는 텅 빈 가을. 정아가 중년이 되어 찾아온 계절도 은행잎이 눈부신 가을이었다. 내게 가을은 정아처럼 가고 정아처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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