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그늘
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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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아내의 앙칼진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긴 상념에서 깨어났다. 정원에 단 한 그루 있는 감나무에 감이 붉게 익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을이면 감나무는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감나무는 쓸모없으니 베어 버리자 주장했던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지금도 나무 밑에 앉아 공상 중이다.
“다시 묻겠는데, 어떤 년을 생각하고 있기에 내가 불렀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어?”
아내는 격앙된 목소리로 내 코앞까지 휠체어를 밀고 오더니 내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낚아채 자신 무릎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 나서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미안한데, 나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한 생각한 것 아니야. 사실 오늘 아침에야 생각이 났었는데 어린 시절 나를 귀여워하시던 할머니 기일이 다가오는 것이 생각났잖아. 이번에는 별일 없으면 본가에 다녀오고 싶어서….”
나는 말끝을 흐리며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아내는 본가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일 년에 두 차례 명절을 보내기 위해 부모님 댁을 찾을 때면 며칠 전부터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부모님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부모님 성화에 자주는 아니지만, 얼굴을 비추러 고향집을 찾을 때면, 친척들과 형수님 여동생 등 불편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명절 음식을 도와줄 수 없는 아내의 입장을 고려하면 혼자 부모님을 뵈러 가야 했지만, 아내는 불편을 감수하고 시댁 가족들과 만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했었다.
할머니는 아내의 불치병 소식을 듣고 손자인 내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식을 낳을 수 없다꼬? 우짜노, 니는 참 처복도 없고, 자식복은 더욱 없는갑다.”
할머니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잇지 못했다. 할머니 마음은 아는데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바쁜 부모님을 대신 학교에 다녀오면 군것질거리를 숨겨 두었다 몰래 챙겨 주신 할머니였다. 할머니 손에 자란 나는 엄마보다 더 따랐고, 그것은 낳아준 엄마를 서운하게 하기도 했다.
아내는 할머니 기제사 이야기에 기분이 풀린 듯했다.
“난 또 오빠가 어떤 년 생각하는 줄 알고 그랬지.”
아내는 나이가 들어 갱년기가 다가오니 성격이 더욱 표독스럽게 변했다. 예전에 없던 질투심이 생기고, 편집증처럼 한 가지에 집착하는 버릇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거리에서 여자들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만 보아도 불같이 화를 내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20년 이상 가사 노동 중인 나, 회사에 나가 일하지 않으니 자연 내 손으로 돈을 벌지 못한다. 겨우 장모님이 주신 돈으로,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돌보고 살림하면서 푼돈을 모아 모바일 주식을 할 뿐이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채, 점점 사회에서 고립되고 있었다. 가끔 동창들과 만나 대화할 때면,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고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질 때가 종종 있었다. 동창들의 관심사는 오직 몸값을 올려 좋은 조건에 연봉 계약을 하거나 퇴직금으로 자신의 사업체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손발이 되기로 결정 후 강산이 두 번 흘렀지만, 일상생활의 변화 없이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을 살 뿐이었다.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하던 패기 넘치던 30대의 나는 이제 없다. 절친인 영훈조차 나에게 팔자가 늘어졌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실상 현실을 들여다보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들만이 내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며칠 전 외출하려 거울을 바라보다 부쩍 늘어가는 흰머리를 바라보면서 우울감이 깊어졌다. 50년 인생을 통틀어 보아도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었다는 자괴감이 가슴에서 토해내지 못한 응어리로 뭉쳐 있는 듯했다. 어느날부터 피붙이 하나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자괴감에 빠져 우울감이 심했었다. 사후에, 비석에 새길 문구 생각하다 피식 혼자 웃음이 터지기도 했었다. 세상에 태어나 큰소리 내며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도 없이 나이 오십이 넘은 남자가, 수도승이 되어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행복할 것만 같았던 우리의 결혼 생활은 어느 날 갑작스레 파국을 맞았다. 아내와 나는 직장인으로 아침 식사는 간단한 시리얼이나 토스트로 해결하고 있었다. 우리 둘만의 보금자리는 청결과 아늑함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아침은 늘 향긋한 버터 내음과 베이컨의 맛있는 향이 집 안에 머물 때면 ‘이것이 행복이구나’하고 느끼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오랜 자취 생활에 지친 나는 매일 집밥을 먹는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아내도 조간 회의 참석이 있는 날이라, 여느 날처럼 시리얼을 그릇에 채운 후, 수저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오빠, 내 손가락에 힘이 없어, 며칠 전부터 발가락에 감각이 없는 것 같아. 자판을 치는 손가락이 아파.”
“혹시 모르니까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 요즘 회사 일로 무리한 거 아닐까?”
아내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아 몇 달째 매일 야근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말에 아내는
“직업상 느끼는 일인데 뭘”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한의원에 다녀왔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그러나 한 달 후에 종합병원에 다녀온 후에도 아내는 계속해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아프다며 통증을 호소했었다. 몇 달 동안 여러 병원에서 진료받았지만, 아내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예전처럼 회복되지는 않았다. 아내는 회사에 병가를 내고 대학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정밀 검사를 위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하지만 아내의 몸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근육이 조금씩 굳어 갔다.
아내는 건강을 위해 그토록 좋아하던 테니스와 피아노 치는 것을 중단했다. 처음 손가락에서 발가락으로 근육이 굳어 가더니, 급기야 다리에 힘이 없어 물건을 붙잡지 않으면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아내는 매일 울면서 자꾸만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의 근육이 남아 있을 때 하고 싶어 했다. 급기야 두 다리로 서 있지 못할 지경에 나온 결과는 참담했다. 우리나라의 병원을 다 돌아다녔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희귀병인, 루게릭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아내는 자신의 힘으로는 잠시도 혼자 서 있을 수 없게 되자, 직장에 사표를 냈다. 그날 저녁 방문을 잠그고 밤새도록 울었다. 아내를 지켜보는 나는 남편으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한숨만 나왔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것은 나와 아내의 결혼 1주년 기념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일어났다. 아내의 손가락 근육은 점점 굳어 가는데 컵을 잡을 힘도 없고 수저와 젓가락도 잡을 수 없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장모님께 알리자, 여걸 장모님은 내 손을 꼭 잡고 가슴을 치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아내는 자신의 불치병 진단을 믿지 않았다. 목발 없이는 걸을 수도 없는데, 술을 마시고 새벽에 귀가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한 날이면 밤새도록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면, 나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내의 불치병 진단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터에, 기어이 아내는 집안에서 동맥을 끊고 말았다. 아내를 데리고 응급실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 후 나는 아내의 무서운 모습을 보는 게 두려웠다. 어두컴컴한 빈방에 아내는 잠옷을 입고 휠체어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면 마치 영안실 시체를 보는 것 같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 모습을 즐기는 아내는 유령처럼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아내는 스스로 식사량을 줄이고 커피와 담배에 의지했다. 아무리 달래고 애원해도 아내는 탄수화물을 줄였다. 그렇게 아내는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절식했다. 아내를 붙잡고 제발 먹어야 한다고 애원했지만, 그럴수록 아내는 싸늘하게 비웃음을 날렸다. “오빠도 알잖아, 나… 길어야 이삼 년밖에 살지 못해. 나는 점점 죽어가고 있는 거라고, 알기는 해? 그러니까….”
아내는 끝내 울음을 삼키고 엎드려 울었다.
아내의 루게릭병 치료를 위해 전국의 유명한 한의원과 병원을 다 돌아다녔지만, 치료 약이 없다는 좌절 섞인 말 외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도움이 될 정보를 찾기 위해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루게릭병의 사전적인 정의는 근위축성 측상 경화증(ALS) 또는 운동신경원 질환이라는 생소한 것이었다. 운동신경 세포가 퇴행성 변화로 점차 소실되어 근력 약화와 근위축을 초래하여, 언어 장애, 사지 위약, 급격한 체중 감소, 폐렴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에는 호흡장애 등으로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눈앞이 깜깜해지고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아내는 눈에 띄게 신경이 예민하고 청각이 발달했다. 다행인 것은 체중 감소는 있었지만, 언어 장애는 없는 상태였다. 아내가 낮잠을 자는 시간, 책을 읽다 말고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아침저녁 아내 얼굴 보는 게 두려웠다. 나는 매일 아내의 약을 직접 챙긴다. 몇 년째 같은 약인 비타민과 리루텍을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면 아내는 물컵을 입에 대고 병아리처럼 받아 삼킨다.
“그저 내 딸이 살아 있을 때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서 살았으면 하네. 그때까지 자네가 아영이의 손발이 되어주게. 돈은 내가 벌겠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손주를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것이 떠올랐다. 아내를 도와줄 간병인 겸 도우미를 채용했지만, 그들은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 당시 나는 이제 대리로 진급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친구들은 “부자 아내 덕에 노후는 걱정이 없겠다”며 미리 선수를 치면서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당시 장모님은 장인어른이 운영하던 회사를 물려받아 크게 키우고 있었다. 장모님은 이재에 밝은 분이라, 이미 서울과 경기도에 빌딩과 아파트를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다. 몇 년 후 장모님은 장인어른과 사별 후, 아내를 보살핀다는 핑계로 함께 살기를 종용했다. 처음 아내와 살던 신혼집도 장모님이 마련해준 집이라 나는 장모님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집을 처분했다. 아내는 장모님과 살림을 합치고 나서 예전의 활기를 찾는 듯했다. 장모님은 아내가 생활하기 편리하게 집을 새롭게 꾸몄다. 주택 1층은 장모님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꾸미고 2층은 신혼인 우리 부부를 위해 깔끔하게 꾸며 주셨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을, 휠체어를 끌 수 있도록 꾸몄다. 장모님은 혼자서는 걷지도 움직일 수 없는 아내를 위해, 집 안 전체를 새롭게 리모델링했다. 화장실에 있는 문턱을 없애고 현관과 거실에 휠체어가 통행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했다.
시간이 흘렀고, 재활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녀오는 날이면 기진맥진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혼자서는 커피잔을 들지도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젓가락을 손가락에 끼워주거나 아이처럼 포크와 수저가 일체형인 것을 가지고 식사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음에 아내는 끝없이 좌절과 번민에 휩싸였다. 약을 먹지 않고 버티는 날은 하루 종일 아프다 소리를 치며 아우성쳤다. 하루하루 변해 가는 아내를 바라보는 나는 고통을 대신할 수도 없고, 위로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기보다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 고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루가 일 년처럼 길고 기나긴 시간의 연속이었다.
평상시에는 아내를 휠체어에 태우고 집 근처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장을 보았다. 집에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 그날은 어찌 된 영문인지 혼자 다녀오라며 손인사를 건네며 방으로 들어갔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자동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 운전하는 내내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엄마 몰래 불량식품 군것질에 빠진 아이처럼 기분이 좋았다. 빈 장바구니를 트렁크에 넣을 때도 왠지 모르게 들뜨고 기분이 상쾌했다. 주차하고 마트에 들어서자, 매장에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임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혼자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노부부와 마주쳤을 때도, 혼자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아내와 같이 마트에 갈 때면, 아내를 빤히 바라보던 관심 어린 눈길과, 남자가 살림하는 것에 대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 없이 오롯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장을 보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반찬을 파는 코너에 들러 아내가 불러준 장아찌와 장모님이 좋아하는 간장 게장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긴 상념을 깨고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장모님이었다. 내가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 “예, 장모님”하고 인사를 건네자 이어지는 장모님의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 지금 어딘가?”
망설일 틈도 없이 “아영이를 어떻게 한 것인가?”
장모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왜요? 장모님.”
나는 장모님의 화난 목소리에 뜨악했다. 평상시와 다른 목소리 톤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 사람 정신이 있나 없나. 얼른 집으로 가보게.”
장모님의 전화는 툭 끊겼다.
집을 비우고, 이제 겨우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잊고 오직 혼자라는 홀가분함을 즐기고 있었다. 집을 나서고 나서, 장을 보고 구경하고 이것저것 사느라 아내 생각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모처럼 혼자 나와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 마시고, 중간에 엄마랑 전화 한 통 했는데, 아내에게 일이 생긴 것이었다. 카트에 담아 둔 물건을 내동댕이친 채로 집으로 향했다. 집 현관문을 열자, 아내는 거실에 있는 연주용 피아노 옆에 휠체어와 함께 엎어져 있었다. 집안에는 잡다한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아내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아내는 대답 대신 나를 밀치며 발버둥을 쳤다. 발버둥치는 아내를 달래며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다시 아내를 번쩍 안으며 물었다. “당신 왜 이러고 있어? 내가 혼자 마트에 가서 화나서 그러는 거야?”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물었다. 집 안에는 아내가 아끼는 악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싱크대 주위에도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아영아, 물을 마시려다 엎지른 거야?”
내가 재차 아내에게 캐물었다. “내 집에서 나가, 없어지란 말이야.”
아내는 괴성을 지르며 악을 쓰면서 울고 있었다. 아내의 마법은 한 달에 한 번씩 시작되었는데 며칠 동안 무척 예민해 있었다. 음식에 대해서도 민감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내가 울고 있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자, 아내는 더욱 크게 소리치면서 팔로 피아노를 거칠게 내리쳤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피아노 굉음이 집 안을 울렸다. 그때 바지에 붉은 꽃물이 흥건하게 젖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 필요 없어, 꺼져 꺼지란 말 야.”
장모님이 출근한 후, 아내와 대화를 하지 않아 미처 살피지 못한 일이었다. 피아노에서 나는 소음이 온 집 안을 휘몰아쳤고,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으며 나와 아내의 사이에 있었다. 한참 후 진정이 되었는지, 아내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다 필요 없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야. 인간은 이런 식으로 굴지는 않겠지… 나는 밥만 축내는, 식충이야… 돈 잡아먹는 돈벌레야. 이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수도 없고, 간단한 생리 현상도 해결 못하는, 죽어 있는 닭날개 같은 것이지. 죽고 싶지만 쉽게 죽지도 못해, 당신은 내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지. 내가 죽어야 당신 좋아하는 그 건강한 여자와 재혼도 하겠지. 특히 엄마는 내가 죽으면 금방 잊겠지. 엄마는 내가 죽고 없으면 돈을 더 많이 벌지도 모르지. 비싼 병원비 지출할 일도 없으니….”
끝없이 이어지는 아내의 넋두리에 나는 그만 진이 빠지고 화가 났다. 아내의 침통한 표정을 앞에 두고서도, 얼마 전 가로수길에서 잠시 스쳤던 활기찬 여자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내의 흐느낌은 오래도록 이어졌고, 나는 옆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봤다. 아내의 질긴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부스스한 아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차마 눈뜨고 못 볼 몰골이었다. 아내의 귀신 같은 몰골을 보고 나자 속에서 메스꺼움이 밀려왔다. 속으로는 이 고통이 언제쯤 끝나나 생각했다.
욕조에 따스한 물을 채우고 아내를 편안하게 앉혔다. 그리고 샤워기를 틀어 물을 부으려 했더니, 손을 저으며 반대 의사를 표했다. 아직도 남편인 나의 손길을 부담스러워하는 아내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이 없었다. 결혼 10년이 지났지만, 샤워나 목욕은 아직도 장모님의 손길이 필요하다. 아내는 그날이 되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무엇보다 가시가 돋아, 상처를 많이 받았다. 아내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힘없는 손가락으로 건반을 쿵쿵 두드렸다. 그렇게 한참 연주하다 피곤하면, 연주 드레스를 입혀 달라고 했다. 전신 거울에 자신 모습을 살피다 눈물을 흘렸다. 아내의 머리를 말려 주고 나서 거실에 섰다. 거실 피아노 악보 대에는 예전 아내가 즐겨 연주하던 악보가 삐뚜름하게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자, 그간 그녀의 행동을 읽을 수가 있었다. 손가락이 굳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지 못하자 아내는 손등으로 건반을 눌렀다. 아내는 특히 재즈 연주회를 자주 보러 다녔다. 그럴 때면 얼굴이 상기될 만큼 그날 연주자에 대한 품평으로 시름을 잊었다.
아내의 드레스 룸과 신발장에는 반짝이는 고급 명품 구두와 테니스화가 나란히 열을 맞춰 놓여 있었다. 어느 것은, 한 번도 착용하지 않아 라벨 상태로 주인을 기다리곤 했다. 아내가 늦은 밤 신발을 보관한 방에서 신발들을 나란히 늘어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휠체어로 신발을 짓밟고 나서 소리내어 우는 것을 몇 차례 지켜보았다. 그런 다음 날이면 또 어김없이 백화점을 찾아, 같은 디자인의 테니스화를 한꺼번에 두 세 켤레 샀다. 내가 옆에서 한 켤레만 사라고 잔소리를 조심스럽게 하면, 나를 비웃듯이 말했다. “어차피 이 신발 살 돈은 오빠 돈이 아니잖아, 엄마가 번 돈을 딸인 내가 쓴다는데 왜 그렇게 참견이야. 어차피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하고 싶은 거 모두 하고 죽을 거야.”
아내의 시한부 이야기는, 이제 새롭지도 않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20년을 건강하게 살고 있는 아내는 툭 하면 마치 오늘 죽을 것처럼, 나를 괴롭혔다. 최근에 유튜브에서 1980년대 농구 코트를 누비던 루게릭 환자가 투병 생활을 하다 결국 천국으로 떠난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서 아내가 가여웠으나, 이내 아내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 영상 속 루게릭 환자는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그러나 아내는 너무 건강해서 환자가 아닌 것 같고, 아마 나보다 훨씬 오래 살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내의 긴 간병으로 지친 나는 생활인의 모습 대신 하루하루 운명에 자신을 맡기며, 기쁨과 슬픔을 잊은 채 주어진 하루를 보냈다. 그런 나에게 가끔 숨통을 틔워주는 영훈이 없었다면, 반평생을 우울증에 갇혀 지냈을 것이다. 영훈은 장난기가 심했다. 가끔 동호회 여성 회원들과의 합석 자리가 마련되면, 나를 돌싱으로 소개해, 관심을 받을 때가 있었다. 아내에게 들통난 후 영훈에게 불똥이 튀어 한동안 영훈을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는 엉뚱하게 나를 소개팅에 밀어 넣기도 했는데, 짧은 순간이지만 아내를 잠시 잊고 혼자만의 상상을 펼칠 때면, 아직 살아 있다는 생각에 슬며시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는 베이컨과 아보카도를 얹어 토스트를 구웠다. 거기에 유기농 치즈를 얹고 커피는 아내가 좋아하는 사향커피를 내려 마셨다. 소파에 앉아 커피잔에 전해지는 뜨거움에 혓바닥이 얼얼했다. 실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앞산을 내려다보았다. 넓은 거실 창으로 햇살이 내려앉았다. 아내가 좋아하는 호두까기 인형에서 배음으로 연주했던 곡이 흘렀다. 호로록 커피를 음미하다 신문에 눈길을 보내고 멍하게 앉아 있었다. “오빠, 우리 여행 갈까?”
아내는 평상시처럼 담담하게 물었다. “어디로 가려고 그래? 일본으로 일주일 뒤에 떠날 텐데… 또 무슨 여행을 또 어디를 가자는 거야?”
아내는 일본을 좋아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어,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아내는 휴가차 자주 일본으로 가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아내의 여행 계획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실 여행하는 데 지쳤다. 아내는 자신이 죽기 전에 세계 여행을 하고 죽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나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아내를 돌보는 일이 이젠 지치고 지겹다. 그것을 모르는 아내는 자꾸 외출하려 한다.
영훈을 만나면 아내와 있었던 일은 잊고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언제나 걱정이 없는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영훈은 소주가 두어 잔 들어가자,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명예퇴직을 할 것인지 아니면 정년을 모두 채워서 퇴직해야 할지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는 녀석의 넋두리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퇴직할 직장이 있고,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뭔가 계획을 세우고 살았던 시간이 있었던가,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영훈을 째려보았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영훈은 입꼬리에 소주를 흘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소주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으며 생각했다. 녀석의 걱정하는 모습도 행복한 고민으로 보였다. 나는 영훈을 뒤로 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는 피곤한 듯 보였다. “손님,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군요?”
나는 기사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좋은 일은요, 단지 기분이 울적해서 한잔했지요.”
열린 창틈으로 가을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또 계절이 바뀌는 모양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잊은 지 오래되었다. 집이 가까워지자 맑았던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내의 찡그린 얼굴과 옆에서 아내를 달래는 마녀 장모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오늘따라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나 보다. 택시 기사의 “손님, 목적지에 다 왔어요”라는 외침에 지갑을 열어 카드를 내밀었다. 택시 뒷좌석 문을 쿵 소리나게 닫고 나서 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몇 걸음을 떼었을 때,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내 옆에 서 있는 그림자는 장모였다. 아내와 장모는 검은 숄을 걸치고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아내는 늘 이런 식으로 나를 감시하고 자신의 발아래 두려 한다. 순간 조금 전, 영훈과 마신 술이 확 깨면서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아내의 꽉 다문 입술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머릿속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나는 휴대전화를 압수당했다. 나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침울하게 보냈다. 아내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나면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 일을 마치면 텔레비전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마당으로 나가 낙엽을 쓸어 내다 문득 깨달았다. 인생이 덧없다는 사실을, 얼마 전까지 마당을 싱그럽게 수놓던 나무들은 울긋불긋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가슴에서 무엇이 치밀어 올라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몇 달 동안 침대에 누워도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 3시까지 눈을 말똥거리며 누워 있다, 긴 한숨을 쉬었다. 아내는 약기운으로 평온하게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식사를 준비했다. 매일 일정한 일이 루틴처럼 일어나는데, 나는 로봇처럼 아내를 케어하는 로봇이 되어 기계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무런 기분이나 감상 없이 주어진 하루를 살고 있다. 무기력하게 하늘만 바라보는 일이 이어지다 보니, 가끔은 심장이 없는 허수아비가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 달 뒤 병원에 갔다. 의사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의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진단받았다. 처방받은 약을 먹지 않은 날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풍선을 타고 두둥실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수면 부족으로 눈에는 벌겋게 실핏줄이 툭툭 불거져서 흡사 흡혈귀처럼 보였다. 수면 부족은 식욕부진으로 이어졌다. 식욕부진은 일상생활의 리듬을 깨트렸고, 자주 건망증이 생겼다. 커피잔을 씻다 말고 다음 일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억 나지 않았다. 아내의 약 챙기는 일을 자꾸 잊었다. 그런 나를 아내는 하루에도 수없이 질책하고 짜증을 냈지만, 뚜렷하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수 없었다. 나는 아내와 장모에게 병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숨겼다. 소파에 멍하게 앉아 있으면 은퇴 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장모님이, 이제 대놓고 잔소리했다. 장모님의 잔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내는, 매의 눈으로 매섭게 쏘아 보며 정신 줄을 어디다 놓고 사느냐 빈정거렸다. 아내의 빈정거림과 장모님의 힐난을 뒤로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와 멍하게 앉아 있자 서글픔이 몰려왔다. 며칠 전에도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약을 삼키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잠결에도 아내의 앙칼진 목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넓은 집에 오롯이 혼자 있을 공간이 없다. 아내가 없는 곳을 찾아, 집안을 이리저리 도망치지만, 결국 아내의 손바닥 위에 떨고 있는 작은 누에고치가 되고 말았다. 아내는 누에고치를 손등에 올려놓고 나무젓가락으로 꾹꾹 찌르면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살아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내 눈앞에서 웃고 있는 아내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인데, 내 몸은 강한 밧줄에 묶인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밧줄을 풀고 도망치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몸은 더욱더 옥죄어 오고 나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가슴 통증 때문에 나는 깊은 수렁으로 빠졌다. 밤이면 잠든 아내의 숨소리를 확인하다, 나쁜 생각을 했다. 이 악몽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죽을지, 아니면 아내를 죽이고 내가 죽을지 몇 달째 순서를 생각했다. 그러나 계획만 세우고 실행을 못하고 있었다.
아내의 울부짖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눈앞의 풍경은 나를 평생 괴롭힌 그날의 풍경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었다. 함께 쓰는 하얀 침대 시트는 구겨져 있었고, 항상 있어야 할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혼자서는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아내가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놀라 방문을 열고 거실로 뛰었다. 그리고, 화장실 앞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사람은 분명 아내였다. 마루는 온통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두려움에 숨소리를 확인하려고 가까이 다가간 순간, 기괴한 표정의 아내를 보았다. 너무 무서워 장모님을 깨우려 아래층 계단을 내려가다 그만 발이 미끄러져 그대로 나뒹굴고 말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두런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눈앞에 비웃듯이 미소를 날리는 아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제 정신이 들어? 남자가, 장난친 걸 가지고 놀라서 혼비백산하는 꼴이라니 쯧쯧.”
아내의 혀 차는 소리를 듣다 주위를 살폈다. 장모는 2인용 소파에 앉아 TV 채널을 이리저리 누르고 있었다. “아! 이 서방, 자네도 참 딱해. 어쩌다 이 꼴이 되었누. 하마터면 저승 갈 뻔한 것을 우리가 119 불러서 병원에 오길 잘했지….”
뭘 잘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악마의 얼굴을 한 아내를 빤히 바라봤다.
우울증 진단 후 삼 개월 만에 의사와 마주 앉았다. 의사는 그동안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했다. 그러나 나는 의사가 권유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같은 취미 생활을 할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오직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였다. 나는 의사의 말을 경청하며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가족과 잠시 떨어져 지내기와 취미 생활을 권유했던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별도의 시간을 내기 어려우시면, 새벽에 가까운 약수터에 다녀오는 것도, 무리는 없을 겁니다.”
의사는 동아리 활동이나 평상시에 관심 있는 것을 시도해 보라고 말했다. 가까운 친구와 자주 만나는 것도 도움이 될 거라는 당부와 함께. 그러나 당장이라도 새로운 것을 할 것처럼 의사 앞에서 지껄이다 병원 문을 나서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다짜고짜 배고프다고 아기처럼 보채면서 짜증을 부린다. 집 안에는 아내를 간병하고 가사를 돌봐주는 도우미가 있었다. 그런데 또 밥을 달라고 전화했다. 이제 아내의 목소리만 들어도 두통이 시작되고 명치 끝이 아팠다.
아내에게 아버지 기일에 어머니를 뵈러 가겠다 하자,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고 함께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의외였다. 아내가 약간 이상했었다. 다른 날 같으면 아내의 의사도 묻지 않고 이것저것 음악을 골랐다면, 오늘은 신중하게 아내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선곡했다. 아내는 기분이 좋은지 나를 칭찬했다. 결혼생활 20년이 넘는 동안 아내의 칭찬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손가락을 꼽아도 열 손가락이면 충분했다. “오빠, 오늘 보니까, 나이 먹어도 엄마를 만나러 가는 게 즐거운 모양이지? 웬일로 오늘은 친절하게 굴고.”
속으로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운전했다.
고향은 어린시절에 보았던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없던 낚시터가 생겼다. 그곳은 원래는 저수지로 수심이 깊어서 어른들은 저수지에 가는 것을 위험하다고 말렸다. 나는 아내를 고향집에 내려놓고 둘러보기로 했다. 그곳에는 강태공을 흉내 내는 사내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저녁 식사 때 조금 전 들렀던 낚시터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내가 관심을 보였다.
“어머니, 이런 시골에도 낚시터가 있어요? 저도 어릴 때 아빠 따라서 낚시터에 간 적이 있어요.”
평소답지 않게 아내가 낚시에 관심을 보였다.
“우리 내일 집으로 올라가기 전 낚시터 구경할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아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낚시터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별로 없었고, 빈 파라솔만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를 휠체어에 태우고 낚시터를 구경했다. “낚시터에 이왕 왔으니 물고기 잡는 시늉이라도, 할까?”
나는 아내에게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하면서, 낚시 장비를 챙겨서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아내는 물끄러미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더니, 자신도 한 번 해보겠다고 졸랐다. 나는 아내 머리에 챙이 넓은 모자를 씌워 주고 손에 낚싯대를 끼워주었다. 아내는 신기한 듯 낚싯대를 물에 드리우고 가만히 물속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 동안 낚시터에 앉아 있자 현기증이 나고 어지러웠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내를 바라보다 문득 어린 시절 냇가에서 친구들과 물장구치던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아내가 타고 있는 휠체어를 힘껏 밀었다. 수영 못하는 아내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 소리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에서는 알 수 없는 광기 어린 외침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