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겨울호 2024년 12월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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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한복판 인사동 거리에는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행인들을 신비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역사의 흔적만큼이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모여드는 문화의 거리이자 모임 마당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큰 도로 한 블록 뒤편에 위치한 ‘라파엘카페’는 유방암 환우회인 ‘비너스리본’ 회원들의 쉼터이자 사랑방이었다. 치열하고 전쟁 같은 삶으로부터 우아함으로 부드러움을 채워주는 특별한 안식처. ‘비너스리본’ 환우회 회원들에게는 검은색 리본이 붉은빛 리본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희망이 피어나는 곳이었다.
그래서 카페 안의 공기는 무겁지 않고 새털처럼 가벼웠고 늘 따사로웠다. 쓰면서 달콤한 향기가 진실의 풍미를 내었고 유방암 동지들이 생의 연대를 공고히 승화시키는 곳. 라파엘카페에서 유방암 환우들의 사랑이 넘치고 서로서로 격려하며 힐링을 나누는 대화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끊이지 않았다. 서로의 심정을 헤아리며 이해하는 그들끼리 공유하는 언어와 무게가 스며 있었다. 많은 희망의 붉은빛 리본들이 장식된 벽, 그리고 리본에 새겨진 사연들, 여기서 암의 그림자를 지우고 외로움을 떨쳐내고 있었다. 때론 조용한 웃음 속에 슬며시 흘러내리는 눈물마저 위로를 받는 이 카페는 치유의 ‘라파엘’ 천사가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라파엘카페는 오후의 평온한 햇살이 스며들어 은은한 조명을 뿌리고 있었다. 말기 환자인 미자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유방암 환우인 은숙과 민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머리에는 가발을 써서 많이 답답했다. 가슴에는 살색으로 된 비너스리본이 달려 있었다. 피로감과 구토감이 느껴졌다. 미자는 ‘비너스리본’의 총무로서 많은 유방암 환우들을 만나왔지만, 오늘의 만남은 특별했기에 너무 설레고 무척 기다려졌었다.
주인공 은숙과 민선, 이 두 사람은 그동안 미자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사연보다 기막힌 운명 속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40대 초반의 자주색 원피스 차림을 한 은숙이 먼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너무나도 밝고 화사한 화장까지 한 그녀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천사들에게서 나올 법한 아우라가 빛났다. 그러나 두 번째 여자 민선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누가 보아도 핏기 잃은 얼굴에 맥이 없어 보이는 전형적인 환자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는 시선조차 초조해 보였다. 차림새는 단정했지만, 표정에는 깊은 상처가 드러나 있었다. 미자는 일어나서 민선에게 다가가며 “민선 씨죠? 반갑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리로 앉으시죠.” 하며 테이블로 안내했다. 서로 짧게 통성명을 하고 세 사람은 테이블에 삼자 회담을 하듯 둘러앉았다.
미자는 한동안 두 사람을 살펴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두 분 모두 어렵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이 자리에 모신 이유는 다 아시겠지만, 두 분의 K병원 조직검사가 뒤바뀐 황당한 의료사고를 바로잡고자 비너스리본에서 함께 도와드리고 싶어서예요.”
은숙은 손끝을 떨며 미자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미자 씨도 들으셨겠지만, S병원에서 저는 멀쩡한 가슴을 잘라냈어요. 유방암이라고 했는데, 조직검사에서 유방암이 아니라고 나왔다는 통보를 받고는 정신을 잃을 뻔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에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이윽고 눈물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멀쩡한 내 가슴을, 아주 멀쩡한 내 가슴을 도려낸 거예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리고 이제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상실과 우울의 날들만 남았어요.”
민선은 그 말을 듣고 그저 말없이 은숙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저는 민선 씨와 정반대 상황이에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버렸죠.” 그녀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몇 년 전에 K병원에서 조직검사를 받았을 때는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안심하고 지냈죠. 그런데, 최근에 K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받아보니 말기라는 거예요. 여기는 안 되겠구나 싶어서 S병원의 유방암 권위자를 찾아갔어요. 이미 너무 늦어서 수술조차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청천벽력 같은 사형선고였지요. 내가, 조금 더 일찍 정확한 진단을 받았더라면 많은 비너스리본 환우들처럼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고 새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 거예요.”
사실 두 사람의 유방암 조직검사 결과가 뒤바뀐 것을 알게 된 것은 은숙이 K병원의 유방암 조직검사 결과를 가지고 유방암 수술에 가장 정통하다는 S병원 P교수에게 가면서 서서히 밝혀지게 된 것이었다. S병원 P교수가 K병원 조직검사 결과에 의거, 은숙의 멀쩡한 가슴을 도려낸 이후 절개 부위의 조직검사 결과에서 암 조직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P교수가 은숙에게 유방암이 아니라 단순한 종양이라는 소견을 알려주면서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반대로 민선은 K병원에서 은숙의 조직검사 ‘정상 소견’을 믿고 지내다가 최근 가슴에 멍울이 감지되면서 다시 조직검사를 받게 되면서 유방암 조직검사 결과 말기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K병원 병리과에서 라벨을 붙이는 과정에서 실수로 은숙과 민선의 유방암 검사 조직이 서로 뒤바뀌면서도 두 사람은 얄궂은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두 명 모두 완전범죄 같은 뒤바뀐 결과의 피해자였다. 한 사람은 치료 기회를 놓치고, 한 사람은 생 가슴을 도려내고.
“내가 그때 유방암 조직검사를 정상적으로 통보받았더라면 수술을 받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말기로 진행되지 않았을 거잖아요?”
민선의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엉켜 있었다. 미자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 고통스러운 대화를 위로해야 할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저도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믿기지 않았어요. 이런 실수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충격적이었죠. 하지만 이제 이 사실을 알았으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 봐야 해요.”
은숙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이미 다 끝난 거 아닌가요? 난 더 이상 내 몸을 돌이킬 수 없어요. 절개한 유방 성형술 일정이 잡혔어요. 내 생은 내 가슴처럼 완전히 망가졌어요.”
민선이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은숙 씨 말이 맞아요. 그런데 은숙 씨는 저보다는 낫죠. 아마 나는 여명이 얼마 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치료할 기회조차 완전히 잃었으니까요. 그런데 미자 총무님, 소송 같은 걸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겠어요?”
미자는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두 분의 아픔,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걸 알아요. 저도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고 내년이면 이제 10년이 됩니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유방암과 함께 살아오고 있어요. 함께 공존하고 있어요. 절대 지금 두 분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두 분께서 고통을 떨쳐낼 수 있도록 우리 비너스리본이 나설 겁니다. 진상 규명도 소송도 우리가 함께 하겠습니다. 억울함을 푸는 건 두 분 자신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 환우들에게 유사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은숙은 그 말을 듣고 조금은 진정된 듯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절망이 섞여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소송? K병원과 S병원을 상대로 싸운다고 해서 내가 잃은 걸 되찾을 수 있을까요?”
미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물론, 두 분이 잃은 것들을 원상태로 다시 되돌릴 순 없어요. 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건 남은 환우들을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환우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민선 씨, 은숙 씨. 두 분 모두 너무나 소중한 분들이에요. 저는 두 분이 이 법정 투쟁을 통해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고, 우리 환우들에게도 힘과 용기를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래요.”
민선은 미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자 씨 말이 맞아요. 나도 처음엔 이런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나 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단지 나를 위한 게 아니죠. 내가 살아온 인생을 마지막으로 지키는 일이기도 하죠.”
은숙은 침묵 속에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민선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요. 그 말 맞아요. 당신도, 나도, 이대로 끝내서는 안 돼요. 우리를 위한 싸움이자, 우리 비너스리본 환우들을 위한 싸움이기도 해요.”
미자는 은숙과 민선의 손을 차례로 잡았다.
“함께해요. 이 투쟁, 우리가 이겨낼 수 있어요.”
세 여인은 그날 찻집에서 서로의 고통을 나누었고, 그 고통을 새로운 힘으로 전환키로 결심했다. 그들은 운명처럼 엇갈린 두 사람의 사연을 부둥켜안으며 앞으로 전진해 나가기로 다짐했다.
은숙은 수술 직후 수술 집도의로부터 유방암 절단 부위에서 다시 한 조직검사 결과 악성 종양이 아닌 양성 종양으로 밝혀졌다는 통보를 받았던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돌이켜보니 은숙은 수술받던 날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하얀 밤을 지새웠다. 몇 날 며칠을 지새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날들이었다. 다음날부터 은숙은 진실을 위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회진을 온 S병원 P교수에게 물었다.
“왜 유방암도 아닌데 제 가슴을 잘라낸 거죠? 절제한 부위의 조직검사 결과, 유방암이 아니라면서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P교수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은숙 씨, 당시 다니시던 K병원에서 가져온 동결 절편의 조직검사 결과를 우리 병원 병리과에서 다시 판독한 결과도 같았습니다. 유방암 조직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 결과에 따라 저는 수술을 진행한 것입니다. 지금 상황은 너무 유감스럽지만, 다니시던 K병원의 조직검사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 병원 병리과 판독 결과도 악성 조직이 맞다는 것이 팩트입니다.”
“아마 최초 조직검사를 한 K병원에서 밝혀져야 할 문제 같습니다.”
은숙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저는 이 병원에서 제 가슴 절제술을 받았습니다. 내 인생을 망친 건데, 그 병원 핑계를 댈 것이 아니라 이 병원에 왔을 때 그 병원 조직검사 재판독을 하지 말고 처음부터 이 병원에서 다시 조직검사를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요?”
P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우리 병원 프로토콜은 타 병원에서 의뢰된 조직검사는 우리 병리과에서 재판독을 하고 그 결과에 따릅니다. 의뢰 병원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시 조직검사를 한다면 환자의 고통이 크고 많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저는 우리 병원 프로토콜에 따라 정확하게 수술을 했고 조직을 떼어서 검사의뢰를 했습니다. 여기서 사실관계를 밝히게 된 것입니다. 저로서는 어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문제는 그 병원에서 왜 이러한 조직검사 판독 결과를 냈는지 규명하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아마도 권리 구제를 위해서는 법적으로 대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은숙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래요? 그럼, 다시 K병원에서부터 진실을 차례차례 밝힐 겁니다. 두 병원 모두 법적 대응도 하겠습니다.”
그녀는 다음날 S병원을 퇴원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한편 민선은 1년 6개월 전, 은숙이 최초로 암 판정을 받았던 K병원으로부터 유방 조직검사에서 ‘약간의 석회화 정도가 발견되었고 아무 이상 없음’ 판정을 받았다. 그때 민선은 조직검사 결과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말기 유방암 판정을 받은 후, 그녀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분노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1년 6개월 전 유방암 진료를 담당했던 의사를 찾아갔다.
“말기 암이라고요. 제게는 여명이 길지 않다구요.”
민선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그런데 1년 6개월 전 조직검사 결과 이상이 없었는데 왜 그때는 암을 발견하지 못한 거죠?”
의사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급속한 유방암 병기를 보이는 경우는 있습니다. 어쨌든 저로서는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저는 유방 조직 검사를 시행했고 결과는 병리과의 판독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병리과에서 판독한 것이라 왜 조직검사가 바뀌었는지 저도 모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과 조직검사가 바뀔 수 있나요?”
민선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내가 1년 6개월 전에 유방암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말기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수술도 받고 치료를 받아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었는데. 이 병원이 나의 인생을 망가뜨린 것입니다.”
의사는 연신 미안하지만 병리과의 문제일 것 같다고만 반복했다.
“당시 저는 검사 결과에 따라서 진단을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병원 병리과에서 환자의 조직검사가 바뀐 사실을 저는 몰랐기에 당시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안타깝지만 권리 구제를 위해서라면 변호사와 상의하시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민선은 절망과 분노 속에서 K병원을 떠났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그녀도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겠다는 굳은 결심을 다지며 발걸음을 돌렸다.
K병원을 믿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민선도 한 가닥 희망을 위해 은숙이 그랬던 것처럼 유방암의 최고 권위자가 있는 S병원으로 갔다. 진료실에서 P교수와 마주한 순간, 민선은 목이 메어 말을 꺼내지 못했다. P교수는 의학 교과서처럼 말했다.
“유방암 말기여서 수술적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일단 항암으로 크기를 줄여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경과가 좋다면 그때 수술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K병원에서 조직검사가 뒤바뀐 은숙, 민선 두 사람의 운명은 기구했다. 둘은 일면식도 없는 서로 모르는 환자 대 환자였을 뿐이었다. 둘은 소송을 하다가 알게 되었지만 뒤바뀐 운명을 먼저 알아낸 것은 은숙이었다. 은숙은 K병원, S병원 고객 상담실에서 상담을 해 봤고, 의료 윤리위원회에 상정도 해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변호사를 찾아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녀는 수술 후 유방암 조직이 발견되지 않았음을 근거로 병원의 과실을 주장했다. 은숙의 변호사는 의료 과실을 입증하기 위해 의무기록 사본과 진료 일체에 대한 기록물들을 하나하나 수집하기 시작했다. K병원의 진단 과정, 검사 결과, 수술 기록 등을 면밀히 분석했고, 그녀의 억울함을 법정에서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민선 또한 변호사를 선임하여 소송을 진행했다. 민선의 경우, 1년 6개월 전 잘못된 진단으로 인해 치료의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 핵심이었다. 그녀의 변호사는 최초 유방암 진단 과정에서 놓친 부분들과 검사 결과가 뒤바뀐 의료 시스템의 과실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 사이 민선은 점점 몸이 쇠약해 갔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한 소송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소송이 진행되던 중, 두 사람은 우연히 같은 K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알게 되었다. 그 병원에서 얄궂게도 두 사람은 조직검사가 바뀐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이 비너스리본인 미자에게 알려지면서 인사동 라파엘카페에서 삼자 회동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자는 은숙과 민선의 사연을 듣고 그들이 같은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다시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함께 방법을 모색했다.
미자는 그날 이후로 은숙과 민선을 돕기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다녔다. 그녀는 환우회와 관련된 다양한 단체들과 연결해 그들이 소송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고, 언론을 통해 이 사건을 알리기 시작했다. 미자의 끈질긴 노력은 결국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이 문제는 사회적으로도 주목받게 되었다.
야속하게도 말기 암의 진행 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민선의 상태는 하루가 여삼추처럼 늘어졌으나 세월은 빛의 속도처럼 빨랐다. 마약성 진통제와 항암 치료는 이제 고통스러운 연명치료의 수준으로 격상되어 버렸다. 은숙은 하루 한 번씩 민선을 병문안하며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위로했다.
“민선 씨, 조금만 더 버텨요. 우리가 반드시 이길 거예요.”
민선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이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도 나는 이 땅을 곧 떠나야겠지.”
그녀의 말에 은숙은 할 말을 잇지 못했다. 민선은 더 이상 힘겨운 치료를 견딜 수 없었고,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결국, 그녀는 가족과 은숙, 미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잘 되리라 믿어. 은숙 씨! 뒷일을 잘 부탁해.”
그녀의 마지막 말, 즉 이것이 유언이었다.
민선의 장례식은 비너스리본 환우회에서 주최했다. 장례식장은 차분했지만, 슬픔과 함께 민선의 억울함도 환우들의 위로로 조금씩 씻겨지는 듯했다. 유방암 환우들이 모여 민선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녀의 기막힌 사연을 듣고 분노했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선이 천국으로 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미자는 장례식에서 민선의 생애를 기리며 말했다.
“한민선 환우는 끝까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리 환우들이 다시는 자신과 같은 의료사고를 겪지 않도록 죽는 날까지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에 헌신했습니다. 우리 비너스리본은 그녀의 노력과 유훈을 헛되지 않도록 계속 법정투쟁과 아울러 유방암 진료 프로토콜을 새로 제정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날 이후, 비너스리본 환우회는 민선의 죽음을 기점으로 국회 앞에서 거리 시위를 했다. 유방암 의료사고 피해자들을 위한 법적 투쟁과 의료기관의 새로운 유방암 프로토콜 제정을 요구했다. 두 환자의 조직 검사 뒤바뀜 사고와 수술에 대한 K병원, S병원의 진실된 규명을 요구했다. 그리고 정부에서 이와 유사한 유방암 의료사고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하는 시위가 시작됐다.
유방암 환자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거리로 나섰고, 은숙은 그 대열의 선두에 서서 미자와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피켓 시위를 하고 있었다. 피켓에는 ‘유방을 돌려달라’, ‘K병원은 법적 책임을 져라’, ‘S병원은 법적 책임을 져라’, ‘억울하게 죽은 한민선을 위한 한민선법을 통과시켜라’, ‘한민선법을 통과시켜라’, ‘우리도 여자로서의 권리가 있다’, ‘비너스리본을 다세요’, ‘우리는 유방을 잃었어요’라고 쓰여 있었다. 그들은 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안내장과 살색 비너스리본을 나눠 주기도 했다.
“민선 씨는 유방암 의료사고 피해자입니다! K병원이 민선을 죽였다. 살려내라, 살려내라!”
미자는 맨 앞에서 확성기로 강렬하게 외쳤다. 사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목숨이지만, 민선의 혼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미자가 다시 외쳤다.
“정부는 유방암 환자들의 안전진료를 보장하라!”
선창에 이어 환우들의 목소리가 목청을 높였다.
“보장하라, 보장하라!”
그들의 외침은 국회 앞에서 매일 이어졌다. 의료계와 정부도 당혹스러워졌다. 국회 정문 앞 시위 30일 만에 K병원 병원장이 국회 앞 시위 장소에서 환우회 회원들과 기자들 앞에서 공개 사과를 했다. 이어 보건복지부에서도 유방암 프로토콜을 제정하여 모든 의료기관에 공포하겠다고 약속했다. 비록 민선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은숙과 미자, 그리고 비너스리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은선의 사망, 은숙의 생가슴 절단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끝까지 법정 투쟁을 이어갔다.
법정은 조용했다. 은숙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김 변호사는 고개를 돌려 은숙을 잠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숙은 미소로 화답했다. 이 싸움은 쉽지 않았다. 반대편에는 K병원과 S병원의 국내 유수의 로펌 소속 고문 변호사들이 변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도 열과 성을 다해 재판에 임했다. 병원을 보호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법정에서 변론도 뜨거웠다.
법정에서 판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원고 측과 피고 측의 1차 변론을 듣겠습니다. 강은숙 원고 변호사님, 먼저 말씀해 주시죠.”
김 변호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이 잘못된 진단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저희 의뢰인 강은숙 씨는 S병원에서 유방암 2기라는 진단을 받고 양쪽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수술 후 진행된 조직검사에서 유방암 조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의 오진으로 인해 은숙 씨는 멀쩡한 가슴을 잃었습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김 변호사는 잠시 숨을 고르며 이어갔다.
“우리는 이 사건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병원의 시스템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입증할 것입니다. 진단 과정에서의 부주의, 환자의 검사 결과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의료진의 태만이 은숙 씨의 삶을 바꿔 놓았습니다.”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멈췄다. 이어 S병원 측 고문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은숙 측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준비된 듯 보였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 측은 원고 측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병원 측 변호사의 목소리는 냉철했다.
“당시 S병원은 모든 절차를 적법하게 따랐습니다. 진단은 당시의 K병원의 조직검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해당 시점에서는 유방암 진단을 내릴 만한 정확한 근거였고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또한 수술 후 조직검사 결과가 다르게 나왔다고 해서 병원 측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오히려 K병원의 잘못된 조직검사 불출로 인한 악결과에 해당합니다. 우리 병원 수술 집도의 P교수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의요 권위자입니다. 환자의 적출된 조직이 유방암이 아니라 단순 종괴임을 밝혀낸 것입니다. 당연히 조직이 뒤바뀐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잠시 은숙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원고 측이 주장하는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병원의 정당한 의료행위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 의료 과실이나 주의의무 태만 등 어떤 하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환자가 유방암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은숙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변호사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지만, 그들의 태도는 분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의적 책임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2차 변론이 열리는 날, 법정의 분위기는 더 무거웠다. 이번에는 민선의 사례가 은숙의 사건과 병합되어 3재판부로 배당되어 심리가 이어졌다. 은숙과 민선의 유방암 조직검사 뒤바뀜 사건은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연일 기자들이 방청석을 가득 채웠고, 비너스리본 회원들로 법정은 만원이었다. 법정에 입장하지 못한 언론사 기자들과 비너스리본 회원들은 법원 앞뜰에 모여 북새통을 이루었다. 세기의 재판처럼 연일 세인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민선에 관한 사건도 은숙에 관한 사건도 이 법정에서 결정될 것이었기에 2호 법정에 대한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김 변호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주장을 내놓았다.
“재판장님, 우리는 이번 사건에서 단지 강은숙 씨뿐만 아니라, 또 다른 피해자인 한민선 씨의 사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민선 씨는 K 병원으로부터 조직검사에서 ‘이상 없음 판정’을 받은 후, 최근 말기 유방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K 병원의 실수로 조직검사가 뒤바뀌는 바람에 ‘적시에 적정한 치료 기회’를 잃었고 결국 고통 속에서 사망했습니다. 어찌 대한민국 의료 현장에서 이토록 허망한 일이 벌어질 수 있나요? 최악의 시나리오를 보는 것 같습니다.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주의의무 태만에 의한 최악의 사망 사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정은 잠시 조용해졌다. 은숙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저세상으로 떠난 민선은 더 이상 이 싸움에 함께할 수 없었다.
“이 두 여성에 대한 사건은 우연이 아닙니다. K병원의 과실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한 환자의 생명을 앗아갔고, 한 환자의 생가슴을 도려냈습니다. 우리는 피고 측이 법정 최고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S병원 측 고문 변호사가 재차 반박했다.
“강은숙 씨의 경우, 당시 유방암 치료 프로토콜에 따라 타 병원에서 의뢰된 조직검사 원본에 의거 유방암 수술을 정상적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S병원은 수술 후에야 뒤늦게 K병원의 조직검사가 뒤바뀐 사실을 인지한 것입니다. 환자 치료에 있어 고의나 주의 태만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병원의 과실로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단지 악결과가 발생한 것입니다.”
법정 안에 있던 비너스리본 회원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병원 측의 주장이 매우 비인간적이며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했다. 은숙은 점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고, 법정은 소란스러워졌다. 판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고, 너무 법정이 소란스러워지자 최종 판결일을 12월 1일로 한다며 서둘러 재판봉을 두드렸다.
전설적인 유방암 환자 박미자, 그녀는 말기암 판정을 받고도 기적적으로 10년째 생존하면서 생의 끈을 놓지 않고 비너스리본 총무를 맡은 강철녀다. 국민적 관심의 두 여성의 사건의 중심에 서서 병원과 보건복지부에 대한 개선 요구와 법정 투쟁을 이끌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강인하고 거룩했다. 그녀 역시 항암치료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인한 구토, 피로, 그리고 잠시도 가라앉지 않는 통증은 그녀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밤이면 침대에 누워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사는 게 바람직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매일 떠올랐지만, 아침이 되면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어났다. 그녀의 목표는 분명했다. 죽는 날까지 유방암 환우인 은숙과 민선 같은 환우들을 돕는 것이었다. 미자는 비너스리본 환우회의 총무로서 모든 힘을 기울여 환우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비너스리본의 회원들은 미자의 고통 속에서도 헌신적인 모습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미자는 자신이 겪는 고통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나누며, 다른 환우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었다.
미자는 은숙과 민선의 법정 싸움을 위해 여러 차례 병원과 언론을 상대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제 미자는 환자단체의 환우회들은 물론 언론사, 정부, 의료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를 아는 여러 환우회와 시민 단체들이 그녀와 함께했다. 미자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이번 사건은 국민적 관심사가 된 것이었다. 정부, 국회, 언론, 국민 모두 이 사건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미자는 그 기폭제 역할을 했다.
미자의 헌신은 비너스리본 환우회 회원들에게도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많은 회원들이 자신의 고통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지만, 미자의 모습을 보며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회원 중 한 명인 수진은 미자 총무에게 말했다.
“미자 언니, 언니를 보면서 저도 힘을 얻어요. 언니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애써주시는 걸 보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자는 미소 지으며 수진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해요. 살아 숨 쉬는 동안 우리 모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면서 살아요.”
비너스리본 환우회는 이번 사건을 겪으며 미자의 지도력 아래 더욱 단단해졌다. 회원들은 서로를 응원하며, 법정에서 싸우는 은숙과 민선을 지지했다. 이 싸움은 그들 모두의 싸움이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함께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비로소 서로의 힘이 되었다. 결국, 미자의 헌신과 비너스리본 회원들의 지지가 은숙과 민선의 싸움에 큰 힘이 되었고, 그들은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2월 1일 판결일의 아침, 설악산에는 얼음이 얼었다는 뉴스가 TV에서 흘러나왔다. 그 밑에 자막이 한 줄 흘렀다.
‘유방암 조직검사 뒤바뀜 사건 결심공판일.’
은숙은 침대에서 일어나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오늘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잘못된 진단으로 인해 멀쩡한 가슴을 절제당한 그 순간부터, 오늘까지의 모든 순간이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은숙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죽어버린 민선을 위해서도 싸워야 했다. 민선의 억울함을 풀어줄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만 해. 민선을 위해서라도.”
은숙은 거울 속 자신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민선의 사진을 보았다. 두 사람은 처음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K병원에서 조직검사가 뒤바뀌는 얄궂은 사건으로 혈연처럼 질긴 인연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인생은 유방이라는 여성 상징을 사이에 두고 꼬인 실타래와 같았다. 그 운명을 함께 풀어가다가 민선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은숙은 민선의 아픔까지 안으며 법정투쟁의 최후 보루가 되었다. 은숙은 마지막으로 민선의 미소를 떠올리며 자신을 다잡았다. 오늘 법정에서의 판결은 민선의 마지막 소망을 이뤄줄 마지막 기회였다.
법원 앞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출동하여 폴리스라인을 치면서 주변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한편 2호 법정에는 비너스리본 환우회의 회원들이 미자 총무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많은 방청객들과 언론인들이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고 다투었다. 비너스리본 환우들은 법원 밖에서 피켓 시위를 했다. 방송사들이 좋은 위치에 카메라를 설치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소란하기가 장날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였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이 자리에 있었지만, 모두 은숙과 민선의 싸움이 그들 자신의 싸움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법원 안으로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은 법원 밖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하며 대화를 나눴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요. 은숙 씨가 이겨야 해요. 그래야 우리가 앞으로 안전하게 진료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
한 환우가 조심스레 말했다.
“맞아요. 이번 판결이 우리 모두의 미래를 바꿀 수 있어요.”
또 다른 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청권을 구하지 못한 많은 인터넷 방송사들과 유튜버들이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 생중계를 하는 바람에 법원 주변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언론은 법정 안팎의 상황을 생중계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쟁점을 설명하고 경과를 설명하며 오늘의 판결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고 있었다.
법정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방청석의 비너스리본 회원들도 미자 총무를 중심으로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말기 암 환자 미자는 아침부터 통증에 시달려 마약성 진통제 트리마돌 2캡슐을 복용하고 법정으로 들어왔다. 강한 고통을 참아가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고통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굳건한 결의의 표시로 이를 악물었다.
“미자 총무님, 괜찮으세요?”
옆에 앉아 있던 수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미자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끝을 볼 수 있었으면 해. 우리는 함께 싸웠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해.”
방청석 한쪽에는 K병원 측의 원무과 관계자들, S병원 법무팀 직원들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며 귓속말을 주고받는 모습도 보였다. 이 판결이 병원의 평판에도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온 국민의 관심사를 반영하듯 사뭇 긴장된 표정들이 역력했다. 판사가 법정으로 입장하자 모든 소음이 멈추고, 법정은 숨죽인 듯 조용해졌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몇 번 터졌고, 언론은 주목할 만한 순간을 포착하려 분주히 움직였다.
경비가 소리쳤다.
“판사님 입장하십니다. 방청객들은 기립하십시오. 인사! 모두 착석하십시오.”
판사는 좌중을 둘러본다. 먼저 은숙과 마주치며 눈인사를 나누었다. 이어 양측 변호사들을 쳐다본 뒤 천천히 자리에서 숨을 고른다. 그리고 판결문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권위 있게 판결문을 낭독한다.
“피고 K병원을 대상으로 한 원고 한민선과 강은숙의 조직검사 뒤바뀜 사건, 그리고 피고 S병원을 상대로 한 강은숙 원고의 생가슴 절제 사건에 대한 판결을 하겠습니다.”
판사는 잠시 멈추며 방청석을 둘러봤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판사에게 고정되었다.
“원고 한민선에 대한 판결입니다.”
판사는 목소리를 한층 무겁게 낮췄다. 방청석에서는 한순간에 숨죽인 긴장감이 감돌았다.
“본 재판부는 K병원이 한민선에 대한 유방암 진단 과정에서 명백한 과실이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K병원 병리과에서 조직검사가 뒤바뀌지 않아 진단이 적시에 이루어졌다면, 한민선 환자는 유방암 치료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사료됩니다. 한민선의 사망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고 병원의 명백한 과실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민선 환자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K병원은 유가족에게 20억 원의 배상금과 1억 원의 위로금을 지급할 것을 명령합니다. 또한, 본 재판부는 K병원에서 이와 유사한 과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방암 조직검사과 검사조직 관리 시스템을 재정비할 것을 권고합니다.”
방청석에서는 박수 소리와 함께 흐느끼는 소리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은숙은 눈을 감고 억울하게 죽은 민선을 생각했다. 손을 가슴에 얹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민선의 억울함이 조금은 풀렸으리라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다음 판결은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바로 강은숙 원고에 대한 판결이었다. 조직검사를 뒤바꿔 두 여인의 운명을 엉망으로 만든 사건 주범인 K병원에 대한 판결이 먼저 내려지고 이어서 S병원에 대한 판결이 예고되었다. 언론, 정부, 병원, 방청객, 비너스리본 환우 모두가 숨을 죽였다.
“원고 강은숙에 대한 판결입니다. 피고 K병원은 원고 강은숙에 대하여 명백한 과실로 한민선 환자의 조직검사와 바꿔서 S병원으로 의뢰하였습니다. K병원 병리과 의료진은 원고의 조직검사 슬라이드를 만들면서 유방암 세포를 가지고 있던 한민선 환자의 조직 검체에 강은숙 원고의 라벨을 부착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이 과실로 실제로는 양성 병변이었던 원고의 오른쪽 유방의 종양을 침윤성 유방암으로 오진하였고, 이 때문에 그 조직검사 결과지 등을 제출받은 피고 S병원에서도 이를 신뢰하여 잘못된 유방 절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고 K병원은 조직검사 슬라이드 제작 오류 및 유방암 판독상의 과실과 이 사건 수술로 인하여 입은 원고의 손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S병원에서 원고 강은숙은 멀쩡한 생가슴을 절제하였고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인 손해를 입었습니다. 본 재판부는 이러한 중대 과실에 대해 K병원은 강은숙 원고에게 10억 원의 배상금을 지급할 것을 명령합니다. K병원이 강은숙 환자를 S병원에 전원하면서 의뢰된 조직검사 결과지에 따라 S병원에서 강은숙 환자가 유방 절제술을 받았으나, 조직검사 결과 암세포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S병원은 조직검체가 뒤바뀔 가능성 등 매우 이례적인 상황에 대비하여 강은숙 환자로부터 새로이 조직을 채취하여 재검사를 실시하거나 갑 병원에서 파라핀 블록을 대출받아 조직검사 슬라이드를 다시 만들어 재검사를 시행한 이후에 유방 절제술을 시행할 주의의무까지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S병원의 진단과 수술 과정을 판단한 결과 법률적으로는 과실로 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S병원은 강은숙 환자의 생가슴을 절제한 사실 관계가 발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방 절제 수술을 받은 강은숙 환자는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에 S병원은 원고 강은숙 씨에게 손해 배상 책임은 없으나 신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해 위자료 1억 원을 지급할 것을 명령합니다.”
판사의 판결이 끝나자 방청석에서는 환호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탄식과 환호도 섞여 나왔다. 비너스리본 회원들 사이에서는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은숙의 승리를 축하하면서도, 그 안에 감춰진 상처를 느꼈다. 은숙은 그저 멀쩡한 가슴을 돌려받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이 싸움에서의 승리가 민선과 자신을 위한 작은 정의의 발판이라고 생각했다.
법정 안은 혼란에 휩싸였다. 비너스리본 회원들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쁨과 슬픔을 나눴고, 은숙은 민선의 유가족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민선 씨, 우리가 해냈어요.”
은숙은 민선의 사진을 손에 쥐고 조용히 속삭였다. 미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힘겹게 은숙에게 다가가 손을 꼭 잡았다.
“우리가 이긴 거야, 은숙 씨. 민선 씨도 지금 하늘에서 웃고 있을 거야.”
K병원 측 관계자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법정을 나섰다. 그들은 이 판결이 가져올 후폭풍을 두려워하면서 서둘러 법원을 떠났다. 법정 밖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판결 결과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일부는 기쁨에 찼고, 일부는 민선의 죽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슬픔에 잠겼다. 비너스리본 환우회 회원들은 이 판결이 그들 모두의 승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시는 환우들에게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슴에 새겼다. 은숙은 법정을 나서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워졌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민선의 빈자리가 남아있었다. 이제 그녀는 그 빈자리를 채울 작은 정의를 찾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법정을 나온 후, 은숙은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고, 마음은 무거웠다. 그녀는 갑자기 민선과 미자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싶어졌다. 언제나 큰 일이 있으면 습관처럼 찾아가곤 했던 동네 성당 앞마당의 성모 마리아상. 은숙의 발걸음은 어느새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멈추었다. 성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12월의 차가운 한기가 을씨년스러웠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성모 마리아상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성모 마리아님,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서는 것은 민선을 위한 것입니다. 민선은 너무나 힘든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큰 힘이었고, 그녀의 싸움이 오늘의 승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민선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고, 그게 너무나 슬픕니다. 성모 마리아님, 민선이 그곳에서 평안하게 쉬게 해 주세요.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이제는 다 내려놓고, 하늘에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민선을 지켜 주십시오. 그녀는 이 세상에서 큰 빛이었고, 그 빛을 잃은 우리는 너무나도 허전합니다. 민선을 저의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리고 유방암을 투병하면서도 우리 비너스리본을 이끌고 있는 미자 언니의 건강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전국의 비너스리본 환우들이 질병으로부터 새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켜주십시오.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겨울 햇살이 은숙의 가슴에 달린 비너스리본에 내려앉아 살색 빛이 마치 미소를 짓는 듯한 빛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