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겨울호 2024년 12월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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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틀린 남자
쪽팔린 소문으로 주검이 의식 없는 자들의 입쌀에 오르내린 남자는 그가 기거하며 살았던 대도시 일대에서 지독한 인사로 알음알음 알려진 사람이라고 했다. 이 남자의 주검이 마치 기묘하게 비틀린 나뭇가지처럼 말랐다더라는 소문이 발 없이 천리를 벗어나 만리를 향해 달릴 때쯤, 유언비어라며 소문을 주워 담으며 강력하게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남자의 아들이 나타남으로 인해, 하마터면 소문에서 소문으로 그쳤을 남자의 죽음이 표면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남자의 주검이 발견된 곳은 도심 속에 화려하고 유명한, 돈이 없으면 절대 들어가 살 수 없는 타운하우스라고 했다. 대개의 타운하우스가 그렇듯 비슷한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남자의 집은 달랐다. 가장 윗자리 언덕 위에 독특한 형식으로 지어졌다. 마당에는 세월을 이고 진 흔적을 고스란히 나이테에 간직한 해송 일곱 그루가 풍광을 이루고 사이사이에 잘 가꿔진 정원은 누구라도 이 집이 행복할 거란 지레짐작을 하게끔 했다. 뒷동산에는 독특하게 정원을 꾸며 놓았는데, 느티나무를 중앙에 심어 나무 아래 하얀색 철제 테이블이 놓였다. 주변으로 철쭉과 영산홍이 숲을 이루고 둘러싸고 있었다. 동산에서 바라보면 반대편으로 커다란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 집은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도록 집안 구조를 일부러 감춘 것처럼 조경이 되어있었다. 바깥에서 보이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낭만과 사랑과 기품 같은 것이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그 집에서 이상한 냄새를 감지한 아랫집 사람의 신고로 소문은 시작되었다. 신고를 한 아랫집 사람은 바람결에 언뜻 이상한 냄새가 났고, 며칠째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윗집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간혹 고급스러운 승용차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보았을 뿐,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반상회를 하거나 흔치 않은 호구 조사를 했을 때도 주인은 보이거나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비서라는 사람이 대신했다고 했다. 신고를 받은 강 형사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정말 기가 막히도록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모두 시취라고 생각했지만, 강 형사는 직감적으로 시취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남자의 시신은 대체적으로 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 형사는 감식반과 함께 시신을 수습했다. 남자는 숲의 아름다움이란 명분이 지켜내는 기묘하게 가꾸어진 분재처럼 잘 비틀린 나무 같았다. 마치 잘 보존된 미이라처럼 보였다. 그런 기묘한 비틀림이 지독한 시취를 덮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신을 수습해서 국과수로 보내고 강 형사는 남았다. 분명히 시취가 아닌 다른 냄새의 정체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강 형사는 수습 기간인 김 형사 한 사람만 남기고 모두 서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수습 김 형사와 함께 시취보다 더 지독한 냄새의 향방을 찾기 시작했다.
수습 김 형사가 강 형사에게 물었다.
“팀장님, 시신이 떠났는데도 시취가 가시질 않는군요. 매번 시취는 이렇게 지독합니까?”
“부패 여하에 따라 다르지만 이 냄새는 분명히 시취가 아니야. 아까 그 시신에서는 시취가 나질 않았지. 분명 다른 냄새의 근원지가 있을 거야. 지금부터 찾아보자고.”
본능적으로 강 형사는 이 지독한 냄새가 시취가 아니란 직감을 믿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건 현장에서 부패한 시취를 경험했지만, 분명히 이 냄새는 시취가 아니었던 것이다.
말을 마친 강 형사는 시신이 있던 거실 쇼파 겸 침대를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선 시취를 넘어선 지옥 같은 냄새가 더 강하게 풍겨났다. 딱 봐도 한눈에 고급스러운 장롱이 놓여 있었다. 왕이 사용하는 침실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보료와 원앙금침이 깔려 있었다. 강 형사는 노련하게 차근차근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첫 번째 장롱 문을 열었다. 비틀린 남자가 혼자 산 집이라기엔 너무나도 고급스러운 침구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두 번째 옆 칸 장롱 문을 열었다. 이상스럽게 그곳엔 나비 수가 놓여진 베개와 목숨(壽) 자수로 놓여진 옛스러운 베개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옆 칸 이불처럼 정갈하게. 강 형사와 수습 김 형사는 서로 얼굴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서로 두꺼운 마스크를 썼지만, 서로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침구가 정리된 장롱이 두 짝이었고 두 짝이 더 있었다.
옆 장롱 문은 열리질 않고 잠겨 있었다. 수습 김 형사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쇠붙이를 꺼내 열쇠 구멍에 넣고 작업을 하자 금방 문이 열렸다. 정식 열쇠가 아닌 작은 쇠붙이로도 쉽게 열리는 것에 놀라기 전에 두 사람은 얼이 빠져나갈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문이 열리자 시취를 넘어선 코를 내두르지 못할 지독한 냄새가 백 배 정도 강해졌다. 그러나 그 냄새를 넘어서서 지독한 냄새를 풍겨내고 있는 물건의 정체가 놀라웠기 때문이다.
수습 김 형사가 마저 옆 장롱 문도 열었다. 거기엔 곰팡이가 가득하고 썩고 문드러진 만 원권 지폐가 빼곡히, 빈틈없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사람의 욕망이 썩는 냄새, 사람의 탐욕이 발효되어 끝없는 인간의 욕망이 쌓여 있는 냄새였다. 강 형사와 김 형사는 기가 막힌 장면에 한동안 넋을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강 형사가 말문을 열었다.
“참, 인간은 독한 존재야. 이 일을 업으로 여기고 내 나이 육십을 바라보지만, 인간처럼 비열하고 비겁하고 더럽고 추한 족속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단 말이지. 분명 이 돈은 인간들에 얽힌 슬픔과 걱정과 분노와 환희를 버무린 욕망의 열병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거야. 김 형사, 이 현장을 잘 봐 둬. 앞으로 형사질 제대로 하려면 공부 제대로 해야지. 저 썩어가는 돈뭉치에서 비명이 들려 나지 않나? 내게만 들리는가? 원혼들이 들러붙어 질러대는 비명인가? 가끔 형사를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는데 오늘도 그런 날이 될 것 같군. 감식반 부르고 나가세. 한 잔 하지 않으면 이 돈이 질러대는 괴기스러운 비명을 잊을 수 없을 것 같거든.”
수습인 김 형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체 얼마나 될까요? 간단하게 1억이 들어간다는 20킬로 사과박스로 환산해도 어마어마한 양이 나올 거 같은데요.”
수습인 김 형사는 젊었다.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의기양양하게 강력계로 왔지만, 어지간한 강심장이라고 자부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물색 없었는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돈이라고 부르는 지폐 더미가 발효되면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발산하고 있었다. 빈틈없이 채워져 소리 없이 냄새로 발악하는 인간들의 슬픈 사연인 것만 같아, 젊은 김 형사는 마음이 미어지는 이상한 현상을 경험했다.
이 죽음에선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끌려 나올 것인가? 일단 팀장의 뒤를 따라 비틀린 남자의 집을 나섰다. 나무처럼 비틀렸던 남자의 시신과 시취보다 더 지독한 냄새로 자신을 불러들인 지폐뭉치들을 생각하면서.
국과수에서 부검 결과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서로 들어간 강 형사는 부검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부검 결과 남자가 주검이 된 원인은 자살이라고 했다. 장롱 안의 지폐더미를 보자면 자살은 참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 형사는 의문을 가지고 경찰서로 호출된 남자의 큰아들과 마주 앉았다.
남자의 큰아들이라면서 명함을 내민 고재혁은 눈썹이 진하고 눈이 크고 맑고 선해 보였다. 만약 남자의 죽음이 자살로 판명되지 않았다면 남자의 죽음과 관계된 용의자 1번으로 조사했을 사람이었다. 고재혁은 아버지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강 형사가 물었다.
“아버님께선 자식이 다섯이던데 왜 혼자 사셨을까요?”
강 형사가 묻는 말에 고재혁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강 형사가 그런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집엔 아버님 혼자 사셨나요? 자살로 판명된 이상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어제 아침 당신의 아버님께 원한이 있다는 사람이 신고를 해왔어요. 일단 민원이 들어온 이상 조사는 해야 하기에 여쭙는 겁니다.”
고재혁은 놀라는 듯했다. 큰 눈이 더 커졌으니까. 그러면서도 닫힌 입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재차 강 형사가 고재혁을 향해 마치 읊조리듯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 사시는 집에서 어마어마한 액수의 만 원권 지폐가 안방 장롱 안에서 부패된 채로 발견되었어요. 장롱 두 짝 안에 만 원권 지폐가 한가득 썩은 채로 발견되었어요. 돈이 썩기 시작한 기간은 꽤 오래되었고 금액을 아직 세보지 못해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나게 큰 액수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돈은 세척을 해서 분류해야 하기에 세척하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돈도 많은데 금고를 따로 맞추지 않고 장롱 안에 지폐를 쌓아둔 걸까요? 몸에 큰 장애를 가지신 분이시던데 왜 혼자서 그 큰 집에 살았을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실제로 사건을 조사할 수 없는 입장에서 알아볼 수 없고 말이죠. 너무 궁금해서요.”
강 형사는 아들 고재혁에게 무슨 말을 들을 거라는 기대를 애초에 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떠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고재혁이 입을 열었다.
“저는 아버지가 사는 집엔 한 번도 가지 않아서, 아마도 다른 자식들도 가지 않아서 아버지가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살았다고 봐야죠. 여자가 있었을 텐데 없던가요?”
오히려 강 형사에게 되묻는 고재혁이 어이가 없었다. 강 형사는 단박에 이해가 쉽지 않은 가정사가 얽혀 있구나 짐작만 할 뿐이었다. 강 형사는 자신이 본 현장과 둘러본 소회만 간단하게 들려주었다.
“아버님은 거실 침대로도 사용이 가능한 쇼파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 눈에는 자연스러운 아사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만, 국과수에서 부검 결과 자살이라 하니 자살하신 것이겠지요. 혹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아사하신 것이 아닐까 짐작도 해봤지만,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한 자살이라고 부검서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한 즈음엔 집에 아무도 함께 기거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여인이 있었다는 건 확실합니까?”
“저도 처음엔 아버지의 죽음은 타살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상상을 넘어서서는 현금 지폐가 장롱 안에서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는데도 사람의 기척 없이 자살을 하셨다니 놀라고 있습니다.”
고재혁의 말을 들은 강 형사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비틀린 주검의 남자와 함께 기거했다는 여자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재혁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2. 소문과 진실
남자에 대한 소문이 마침내 내게 닿았을 무렵은 이 남자가 죽은 지 수년이 지났고, 남자의 부인이 늙어서 기댈 곳이 없어 시골 마을을 돌며 떡장사를 한다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의 부인인 미역이 엄마가 떡을 팔러 마을에 들르면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을 하면서 문전박대한다는 것이었다. 나이 팔십에 떡장사를 하는데 누구도 가엾게 여기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미역이는 내가 예뻐했던 두 살 아래 동생이나 다름없었다.
“혹시 미역이가 왜 농약 마시고 자살했는지 알아요?”
선배는 내 말에 매우 격하게 흥분한 기색으로 낯색을 붉이더니 나뭇가지처럼 비틀려 마른 주검의 주인인 남자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말해주었다. 미역이가 자살한 것도 그 아비 때문일 거라고 했다. 늘 선하고 착한 인상으로만 대했다가 뭐랄까, 적의가 가득 찬 선배 얼굴을 보면서 순간 놀랐다. 여하간 호기심이 동했다.
“뭔데? 내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일이 있나 봐? 그러고 보니 나는 식구들과 일찌감치 고향을 떴지만 선배는 여전히 그곳에 부모님도 계시고 적도 두고 살고 있으니 이런저런 상황을 아나 보네. 자초지종 사연을 알려줘 보소.”
선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
“연락해 봐. 내가 알지 못하는 미역이네 내력을 들을 수 있을지 몰라.”
명함에 서유기 탐정사무실이라는 전직 강 형사였다.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은 고씨 성을 가진 집성촌이었다. 우리 집을 포함한 네 집 정도가 타성이었다. 집성촌의 내력을 살펴보자면 거의 같은 말거리로 엮이겠지만, 내가 자란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의 자기들끼리 대소사를 공유하고, 타성에게는 작은 일에 있어서나 큰일에 있어서는 쉬쉬하면서 배제하는 분위기 말이다.
아주 오래전, 언뜻 미역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미역이는 곱슬머리에 머리를 땋아 참 예쁜 아이였다. 곱상했고 순했던 어린 시절 그 모습이 아직도 백일홍처럼 남아 있다. 어린 시절에는 눈만 뜨면 보였던 흔하고 흔했던 백일홍꽃이었지만, 세월 뒤로 슬금슬금 색다른 꽃들의 뒤로 밀려버린 백일홍을 보게 되면 미역이의 자살이 생각나곤 했다. 미역이의 자살 소식은 내 가슴에 아카시아처럼 뿌리를 내려 박혀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나만이 미역이에게 가졌던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리 집은 동네 첫 집이었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는 마을 초입임에도 끝집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려고 동네로 들어가는 왼쪽 길로 접어들어 동네 초입으로 들어서면 못등이 나온다. 그 못은 크지 않은 규모에 정취가 아름답고 예뻤다. 특히 여름이면 피어나는 가시연꽃이 노랗고 빨갛고 하얗게 피어나면 발길을 멈추고 한참 감상하곤 했다. 이 못을 감싸고 있는 길 양쪽으로 훗날 문화재로 지정된 아름드리 소나무가 빼어난 풍채와 자태를 뽐내고 있어서 유명세를 타는 길이기도 했다. 못등 안쪽으로는 부잣집으로 소문난 집 세 집이 있었는데, 그중 한 집이 미역이 엄마가 시집온 집이었다.
이 못등을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저만치서 뭔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아서 뭔가 하고 열심히 바라봤었으니까. 멀리서 바라봤을 때는 비틀리고 기괴한 나무가 걸어오는 형상이었다. 놀라서 무엇이지 하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을 때는 나무가 아닌 기괴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남자였다. 점점 가까이 오던 남자의 전신은 비틀려서 제멋대로 조각나 사방으로 금방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렇지만 남자는 일정한 보폭으로 지팡이를 의지 삼아 걸음을 계속했다. 나를 천천히 비껴갔다. 너무 놀라 경직된 채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가만히 뒤돌아보았다. 그제서야 남자가 옆구리에 가죽 가방을 끼고 있음을 자각했다. 한참 못등을 지나 세 집 중 못등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정신을 차린 후 살피자 비틀린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남자가 나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산속에 큰 바위 틈에서 자란 소나무가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빗방울을 얻기 위해 온몸을 뒤트는 것이 보였다. 흙냄새를 쫓아 어찌하든 뿌리를 내리며 발버둥치면서 조금 더 비틀리고 또 비틀린 소나무가 마치 나를 비켜 간 남자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멍하니 뒤돌아선 채로 서 있었다. 나무나라에서 나무가 사람 세상에 나온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남자를 바라보았던 그 시간이 길었다. 난 그 길을 지날 때마다 필연적으로 그 남자를 생각했다. 가끔 눈에 띄는 굽은 나무거나 특이한 나무를 보면 이 남자, 미역이 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다.
‘미역이 아버지는, 아마도 저 나무 같은 나무가 사람으로 태어나면서 온전히 나무 태를 벗지 못한 것은 아닐까’라고.
나는 더디게 자랐다. 그러다가 훌쩍, 그러다가 부지런히 자라기를 거듭하다 초등학교 1학년에서 3학년이 되었고 곧 4학년으로 올라갈 겨울을 맞았다. 미역이네 집과 우리 집 사이에 수옥이 집이 있었으니까 가까운 거리였다. 미역이 집은 시골 집치고 큰 기와집에 마당은 넓고 길어서 집 안쪽으로 방앗간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로 이사를 내려오기 전에도 미역이네 방앗간에서 밀가루를 빻았던 기억이 있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용병으로 월남전 파병의 대가로 약속받았다는 미국의 원조 중에 어마어마한 밀가루가 들어와 풀리기까지 밀 농사는 빠질 수 없는 농사였다. 가을에 밀을 거두면 말렸다가 미역이네 방앗간에 가져가면 미역이 엄마가 방아를 찧어주었다. 곧 미국의 밀가루가 시골을 점령하자 밀 농사는 사라졌고, 현미 색깔이 났던 국수도 사라지고, 빵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뽀얀 국수와 빵이 자리 잡았다. 당연히 미역이네 방앗간도 새하얀 미국표 원조 밀가루에 밀려 문을 닫고 말았다. 마을로 이사를 오면서 가깝게 사는 미역이네 집에 갔는데, 집이 고급졌고 한문으로 쓴 글씨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미역이는 자기 아버지가 쓴 글을 엄마가 붙였다고 말해주었다. 미역이네 집에는 재미있는 책이 많았다. 도시에서 공부하는 오빠들이 셋 있는데, 그중 셋째 오빠가 책을 즐겨 읽어서 늘 챙겨다준다고 했다. 나는 그 책에 눈독을 들여 틈만 나면 그 집을 기웃거렸다. 미역이는 언니 언니 하면서 잘 따랐다. 그 아이는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오빠가 남겨두고 간 책을 슬그머니 빌려주었다. 그날 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읽고 다음 날 돌려줘야 했기에 할머니, 아버지가 목숨처럼 아끼는 전깃불을 켜서 읽지 못하고 큰 손전등을 이불 속에서 켜 놓고 읽고는 했다. 그 맛이 꿀이었고, 뜨거운 날 한 사발 냉수였으며 먹고 싶은 아이스케키 맛이기도 했고, 과수원 담장 너머로 가지를 뻗어낸 달달한 복숭아 맛이거나 시원한 배 맛이기도 했다. 몸의 성장이 멈추고 어른이란 이름표를 달고서도 나는 미역이가 몰래 빌려준 책들에게 대한 달콤함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은 길었다. 좀이 쑤시고 매사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에 질려서 뭐라도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시기기도 했다. 빌린 책을 돌려주려고 미역이네 집 대문에 매인 진돗개를 살살 달래며 집 안으로 들어섰는데, 그때 그 나무가, 아니 나무 같았던 사람이 그 집 안방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난 별안간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입이 다물지 못한 상태로 나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어른들이 인사를 잘해야 한다는 가르침대로 일단은 놀라움을 꾹꾹 눌러 감추고 허리를 숙여 배꼽인사를 했다.
남자는 심히 비틀려 있었지만 내가 상상한 이상의 말을 했다.
“네가 쌀장사하는 그 집 딸이냐? 그 집 자식들이 다 똑똑하고 공부 잘한다고 소문났던데.”
기괴하게 몸이 비틀리면서 입도 비틀리면서 나무가 말하는 것처럼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을 나는 찬찬히 마주 보면서 먼저는 놀랍고 신기했다. 그때 미역이가 방문을 빠르게 열고 나오면서 말했다.
“언니, 우리 아버지야. 여기 우리 집 벽에 붙어 있는 한문 우리 아버지가 쓰신 거야. 아버진 집에 잘 안 계시고 광주에 계셔. 광주에도 우리 집 있어.”
처음엔 미역이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 때 못등에서 마주했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채로 몸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미역이 아버지는 어디 외출을 나갈 모양이었다. 옷은 양복을 빼입었고 진회색 모직 코트를 입었으며 맥고 모자를 쓰고 한쪽 겨드랑이엔 몇 년 전 보았던 가죽 가방을 끼고 한 손엔 멋스러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안방에서 미역이 오빠 셋이 줄줄이 나왔던 것 같다.
미역이 오빠들은 잘생겼다. 잘생긴 세 아들이 아버지를 배웅하는 모습은 비틀린 나무 한 그루가 숲 밖으로 마실 나가는데 성한 멋진 나무 세 그루가 그 뒤를 따르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날은 햇살이 맑았고 숲의 나무들 가족이 마을로 내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내 일기장에 적은 날이었다.
3. 남자의 본질
나무처럼 비틀린 채로 생을 마감한 주검의 주인인 남자는 금융업자였다. 말이 금융업이지 악랄했고 원성이 자자한 고리대금업자였다는 걸 알 사람은 다 알았다. 결국 남자의 금융업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원성이 남자와 남자의 자식들과 본 마누라까지 사지로 몰아넣었다. 남자는 누구라도 알 만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태어날 때부터 지체부자유자로 태어났지만 남자의 머리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쓸어 담을 만큼 비상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아이는 하나를 보면 열을 깨우쳤으며 무엇을 보든 어떤 것을 대하든 머릿속에 바로 저장하는 능력을 가져서 신동이라거나 천재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고재혁의 아버지는 고상업, 나무처럼 마른 채 자살한 나이는 70세였다. 남자의 본가에선 병신자식이 태어났다고 내다버릴 것을 종용했으나 어미가 품어 기어이 길러냈다. 병신에게 시집올 여자가 없을 것이 뻔했기에 남자의 부모는 영리한 아들을 아들의 소원대로 법대에 보냈고 며느리를 가난한 집 딸로 탐색했다. 논 다섯 마지기와 밭 세 마지기를 묶어 며느리감으로 여자와 바꿔 집에 들였다. 다행인지 비틀리게 태어났지만 머리만 비상한 것이 아니라 그의 거시기도 한없이 실했는지 연이어 아들 셋에 딸 둘을 낳았다.
법대를 나왔지만 그를 고용해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남자는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여러 방면으로 법학도의 꿈을 이루고자 했으나 세상은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복수할 생각에 사로잡혔고 사채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태어난 본가의 재산이 꽤 된다는 것을 안 남자는 본인의 몫을 요구했다. 부모는 찬성했지만 그의 형제들은 반대가 심했다. 병신으로 태어났으면 병신답게 조용히 살라는 것이었다. 법학을 공부한 남자는 가족들마저 자신을 병신 취급하는 것에 분개했고 법적으로 소송을 걸어 부모의 거처만 남기고 형제들을 길바닥에 나앉게 하면서 그 재산을 차지했다. 그리고 대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사무실을 내고 사채업을 시작했다. 법을 공부한 그는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확실한 담보를 잡았고 약속 기한이 단 하루라도 틀어질 시엔 가차없이 법대로 처분했다.
자산이 늘어나는 규모만큼이나 원성과 원망도 비례적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법학을 공부하면서 연민인지 애정인지 모를 사연을 안은 같은 법학도였던 지수피란 학생이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매달렸다. 남자는 자신보다 똑똑한 여자는 원치 않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공증하고 여자와 도시에 있는 집에서 살림을 차리고 살았다. 여자는 예뻤고 지적이었으며 누가 봐도 품위가 있었다. 여자 쪽 집안에선 집안이 뒤집어지는 난리가 났지만 지수피의 고집은 대단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자를 얻겠다는 것이었다. 외국으로 보내려 했던 부모의 간절함을 저버리고 여자는 나무처럼 비틀린 남자를 택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 본처에게 5남매를 낳는 동안 그 여자에게서 자식을 보지 않았다. 철저한 계산 속으로 살아내는 남자였다. 여자는 남자가 가져오는 서류들을 정리했다. 처음엔 새 가죽 가방이었는데 점점 낡아갔지만 변함없이 가방 속에선 돈을 빌려주고 받은 담보거나 돈을 갚지 못해 법적으로 차압하는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어느 때는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울기도 하고 무릎도 꿇는 일이 빈번해지더니 어느 때는 몽둥이를 들고 와서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릴 질러대기도 했다. 일년 이년… 세월 속에 낡아가는 가죽 서류 가방만이 현실을 납득 시켜주고 있었다. 그래도 지수피는 남자가 좋았다. 남자는 비틀린 채로 걷거나 말을 해도 그 모습이 수피에겐 절대적으로 보였다. 남자를 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남자를 벗기고 닦이고 만지고 입히고 먹이면서 여자는 이상하게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4. 자살과 사랑의 관계
강 형사는 고재혁이 조심스럽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푹 빠져들어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가 식어버렸다는 감각조차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통각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고재혁이 이야기를 마치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서야 깨달았다. 고재혁의 담담한 그러나 곧 비틀릴 것만 같은 뒷모습만이 잔상으로 길게 남았다. 왠지 다시 만날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과 함께.
강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사건 현장으로 갔다.
‘자살, 자살이라… 다량의 수면제라….’
강 형사는 수습 김 형사를 전화로 불렀다.
“지금 빨리 쫓아와.”
강 형사는 옆자리에 앉은 김 형사에게 메모를 건네며 지시했다.
“지수피. 현재 나이 70세로 추정. 인근 병원 기록 좀 뒤져 봐. 최대한 빨리 부탁하고 뭐라도 나오면 전화해 줘.”
강 형사는 비틀린 남자가 죽어 있었던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서 수습 김 형사가 차를 대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둘은 집 바깥을 둘러봤다. 매 같은 눈으로 찬찬히 집을 한 바퀴 돌아본 강 형사가 김 형사에게 말했다.
“누가 설계했지? 기가 막히게 설계를 했군. 안에서는 바깥이 다 보이는데 바깥에선 전혀 안을 볼 수 없어. 담이 높은 것도 아닌데 말이지. 조경수를 기가 막히게 배치해서 심었군. 김 형사는 이런 집에서 살아보고 싶지 않아?”
“참으로 멋진 집입니다. 관리하기 꽤 손이 갔을 것 같은데 거주는 주인 혼자 했을까요?”
“지금부터 그걸 알아보려고 하는 거야.”
수습 김 형사가 강 형사에게 물었다.
“계속 밖에 계실 건가요? 들어가시죠?”
집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세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지수피의 흔적을 찾기 위해 집 안부터 살펴보았지만 딱히 눈에 띄거나 한 건 없었다. 지수피라고 추정할 만한 사진 한 장도 없었다. 오히려 강 형사의 궁금증이 커져 갔다. 그러던 차에 안방에 있던 장롱에 가지런하던 이불과 수놓아져 들어 있던 베개가 떠올랐다. 강 형사는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첫 번째 장롱문을 열었다. 금침이 가지런했다. 참 정갈하다. 안 수피가 이 집에 기거했다는 증거는 정갈하게 정리된 금침과 베개만이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안방을 더 둘러본 후 뒷 베란다에서 집 뒤편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자 처음 와서 보았던 동산으로 길이 나 있었다. 두 형사는 말없이 동산으로 올라갔다.
중앙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 하얀 앤틱 철제 탁자와 의자 2개. 주변에 철쭉과 영산홍. 한편에 라일락 세 그루. 또 한편에 장식대처럼 세워진 주변으로 장미 숲처럼 조성된 동산의 정경이었다. 강 형사의 눈이 커졌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쪽으로 뭔가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강 형사는 안 주머니에서 외알안경을 꺼내어 썼다. 동산 중앙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쪽으로 눈을 디밀었다. 작은 구멍이 있었고 그 안에 뭔가 있었다. 강 형사는 어느새 곁에 다가온 김 형사의 시선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구멍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주 작은 병이었다. 유리병은 아닌 플라스틱도 아닌 일부터 맞춤으로 제작하지 않고는 쉽사리 구할 수 없는 나무색과 거의 동일한 철제함 같은데 모양이 병 모양이었다. 나무를 병의 모양과 같이 부러 파서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강 형사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날은 현장을 철수했다. 강 형사는 여기저기 수소문하다가 결국 금고를 제작하는 사람을 소개받아 겨우 뚜껑을 열 수 있었다. 거기엔 돌돌 말린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를 열어본 강 형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비틀린 남자가 지수피에게 쓴 편지였기 때문이다.
樹皮 前이라고 시작한 편지의 내용은 기가 막혔다.
수피는 태어나면서부터 희귀병을 앓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쉬쉬하며 3대 만에 나타나는 저주병이라고 했다. 집안의 유전병이라고 알려졌고 병원에서도 아직 알 수 없는 병이라고만 했다. 어느 정도 성인이 되면 어느 시점에서 발병할지 알 수 없으나 전신의 근육이 말라가면서 전신이 비틀린 채로 죽는 병이라고 했다. 조상의 누구와 누구도 그렇게 죽어갔는데 이번 대에는 수피에게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수피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미래가 없지만 수피는 낙망했 고 좌절했으면서도 공부에 매달렸다. 머리는 뛰어나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렵다는 법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죽은 자식 소원도 들어줄 판인데 산 자식 소원 못 들어주랴하며 대학에 보내주었다. 수피는 자신의 생명을 우습게 아는 신들에게 세상의 법으로 엿을 먹여주겠다는 꿈을 가지고서 법대에 진학했다. 거기서 자신이 상상하는 자신보다 더 비틀린 남자를 만났다. 자기만큼 똑똑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남자에 대해 흥미로웠다. 수피는 비틀린 남자에게 같이 죽을 생각 없냐며 치근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죽고 싶었던 마음이 남자에게서 사라졌다. 그냥 살고 싶어졌다. 수피는 비틀린 남자에게 집착했다.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일찍 조혼을 한 남자에게 조강지처가 있고 벌써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피는 비틀린 남자를 누구보다 본인이 더 잘 안다면서, 남자의 조혼에 대해 누군가 알려주며 만류했지만 남자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비틀린 남자는 자신보다 더 영혼의 내면이 비틀린 수피를 보면 서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두 사람의 동거는 시작되었지만 남자는 수피와 몸만은 합치지 않았다. 수피에게 자신의 그것이 불구라고 했지만 수피는 이미 남자에게 가정이 있으며 아이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수피를 위해 비틀린 남자는 돈을 벌고자 했고 크게 돈을 벌었으며 수피를 위한 집을 공들여 지었다.
오직 수피를 위한, 수피를 안식하게 할 목적으로 집을 지었다. 그리 고 수피가 어린 시절 좋아했다는 당산나무를 큰돈을 마을 사람들에게 쥐어주고 파와서 조성해 둔 동산 중앙에 심었다. 남자는 동산에 애원(愛元)이란 이름을 붙였다. 사랑으로 으뜸이란 곳으로.
수피는 열심히 버텼다. 비틀린 남자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면서 억지를 부리며 살기를 꿈꿨다. 그렇게 안간힘을 다하다 수피는 정말 기적처럼 청년의 때를 넘겼고 중년의 때를 아슬아슬하게 넘길 것 같았지만 기어이 증세가 조금씩에서 점점 강도가 더해졌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이 희귀병을 앓으면 몹시 고통스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수피에겐 큰 고통은 없었고 발병은 했지만 고통 없이 잘 버티는가 싶었을 때 수피에게 갑작스럽게 죽음이 닥쳤다.
눈을 감던 날 수피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나이 육십 다섯이었다.
“우리 다시 만날까요? 당신은 나무의 나라로 갈 건가요? 나는 당신을 보면서 덜 자란 나무로 당신을 따라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곤 했어요. 내 이름이 수피잖아요. 내 이름은 가족들이 외국으로 피서를 떠나려고 했던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예정일을 당겨 미리 세상에 나왔다 고 수피라고 지었다 해요. 그런데 당신을 만나면서 난 내가 나무를 이루는 세포라고 생각해서 이름을 수피(樹皮)로 완벽하게 법적으로 바꾸었죠. 이름 덕분에 당신 곁에서 이만큼 살아낼 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나, 당신 찾아서 나무나라로 갈까? 당신 나라에서 연리지로 만나는 꿈을 꾸곤 했죠. 당신 남겨두고 내가 먼저 가는 것이 아프고 슬퍼요. 당신 덕분에 포기했을 목숨을 이만큼 잇고 왔네요. 옆에서 당신 지켜보느라 지루할 새가 없었죠. 이걸로 충분해요. 나, 갈게요. 내가 혹시라도 나무의 나라로 찾아가면 손잡아줘요.”
이렇게 수피는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눈을 감겨줄 필요도 없어 남자는 그저 묵묵히 수피 곁을 지킬 뿐이었다. 수피가 눈을 감은 곳이 비틀린 남자가 떠난 자리였다. 남자는 자신의 일을 봐주는 후배에게 넉넉하게 돈을 내어주고 장례를 집도해 줄 장례사를 소개받아 수피의 유골을 동산 느티나무 아래 고이 묻었다. 그 순간부터 수피는 느티나무였고 느티나무는 수피였다.
나무들의 사랑이었다. 본인도 나무로 돌아가 안식할 자리였다.
5. 비틀린 경계
강 형사에게 부탁을 받은 김 형사는 병원 기록을 찾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수피란 사람은 육십다섯에 사망신고가 되어 있었다. 지수피 집에서 부친이 지수피 사망신고를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지수피 부친 또한 사망 후라서 깊은 내력은 조사를 해봐야 알 수 있었다. 강 형사는 고재혁을 불렀다. 고재혁은 깊은 수심을 얼굴에 담은 채로 경찰서로 나왔다. 강 형사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고재혁은 아버지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고재혁은 아버지가 지수피에게 보낸 편지가 담긴 아주 작은 철제함을 강 형사로부터 받았다. 아버지가 살던 집 뒷동산에 있는 느티나무에 그대로 가져다 달라는 부탁과 함께. 지수피가 육십다섯에 떠났다면 세월이 꽤 흐른 터였다. 지수피의 납골당은 따로 있었다. 도시 인근 공동묘지 납골당에 그녀의 흔적이 존재하고 있었다. 김 형사는 지수피가 잠들어 있다는 납골당을 확인하기 위해 관리자 를 찾았다. 관리자는 친절하게 지수피에 대해 알려주었는데 현재의 납골당에 모셔져 있노라고 했다. 뻔한 답을 들은 강 형사는 지수피 집안에 대해 알아봤다. 그리고 지수피의 동생과 연락이 닿아 그간의 일을 들을 수가 있었다.
가족들은 지수피가 희귀병으로 이십대를 넘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언제라도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십대를 넘기고 삼십대를 넘기고 사십대를 넘기자 가족들은 병신 옆에 붙어 있는 지수피를 용서하기로 했다고 했다. 오십대도 넘길 수 있을까 했을 때 그녀는 가끔 일어나는 경직과 발작으로 인해 병원에 다니면서도 병을 이겨내며 눕지 않았다고 했다. 지수피가 숨을 거뒀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찾아가 보니 이미 당산나무 아래 수목장을 치른 후였다고 했다. 지수피 아버지는 노구를 이끌고 지금의 납골당을 준비해서 마치 지수피의 유골을 안치한 것처럼 지수피의 죽음을 마무리했다고 했다. 이에 대한 비밀은 가족들만 알 뿐 누구도 모르는 비밀로 유지되고 있다면서 지수피의 동생 지금비는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강 형사는 묵묵히 지금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럼 지금비는 비 내리는 금요일에 낳았을까' 생각하며 상념을 떨쳐냈다.
남자에게 처음으로 돈을 빌려 가는 사람들은 주로 그날의 장사로 하루하루 벌어 먹고사는 시장 사람들이었다. 남자는 성실하게 일수를 놓았고 상인들은 선량했다. 몇 년 열심히 굴린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 다. 돈을 그냥 두지 않고 시장 건물을 매입하고 시가지에 있는 건물도 잡았다. 작은 대출 사무실을 시가지에 매입한 건물로 옮겼다.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기한 안에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 또한 늘어났다. 남자는 법 전공자로서 최대한 법을 이용해 담보를 근거로 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잔혹사가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원성이 잦아지고 비정한 죽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의 몸이 비틀리게 태어난 것을 저주했고 저주의 방법으로 법이란 호화로운 잣대를 들이대며 돈을 쌓고 쌓기를 쉬지 않았다.
남자가 돈을 빌려주는 이자는 가히 살인적으로 높아져 갔지만 다급한 사람들은 우선 돈을 빌려 갔다. 심지어는 고향 사람들이 찾아온 경우에도 남자는 잔혹성을 거두지 않았다. 이자가 들어오지 않는 다음날 곧바로 법적 절차가 밟아지면서 이자에 이자가 복리로 붙었다. 남자는 지독한 고리대금업자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남자의 고향에는 남자의 돈을 쓰고 패망한 집이 곳곳에서 생겨났다는 소문이 달음박질하더니 천지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미역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 윗마을 사는 두 사람이 찾아왔 다. 중간고사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미역이는 아버지가 얼마나 악랄하며 잔혹한 사람인지에 대해 두 남자로부터 들었다. 두 남자는 곧 집이 쫓겨날 처지이니 아버지에게 말해 말미를 달라는 부탁 아닌 협박을 하 고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미역이는 그대로 학교를 나서 집으로 돌아와 농약병을 들고 조용히 마셨다. 미역이 어머니가 노구를 이끌고 미역이를 찾겠다며 떡함지를 이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는 속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