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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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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겨울호 2024년 12월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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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준 선생님께 드립니다.
저는 통영시청 문화예술과에 근무하는 박수현입니다.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라서 여러 날을 망설이다가 이렇게 당돌한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내년에 회갑을 맞이하는 저의 어머니는 지금 이곳을 떠나 작은 섬에 가 계십니다. 뜻하지 않는 병고로 요양차 가 계시는 어머니는 장연화씨입니다. 설령 선생님의 기억 속에 저희 어머니가 남아있지 않으시더라도 저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거역할 수 없는 의무감을 뿌리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장연화라는 이름에서 그리고 내년에 회갑을 맞이한다는 말에서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의무감이란 말도 의미심장했지만 장연화라는 이름은 40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있었다. 내년에 회갑을 맞이한다면 내년에 정년을 앞둔 나와 동갑이고 더욱이 통영이라면 틀림없이 그녀인 것이다.

안동에서 지역의 A교대를 두고 D교대로 간 나와, 근처의 J교대를 두고 D교대로 온 그녀와는 입학식 직후부터 첫눈에 서로의 눈빛은 남달랐던 것이다. 그것은 교대 근처 서로의 자취방이 골목을 사이에 둔 가까운 곳이라는 장소의 동질감이 우선 컸다. 등교때면 골목에서 함께 학교로 가는 일이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 한 것 또한 집을 떠나 먼 객지에서 생활하는 젊음의 시기를 붙들어주는 매개체가 되었으리라 생각된 것이다.

그때까지 바다 구경을 한 번도 하지 못한 나는 바다 이야기와, 충렬사 그리고 한산섬 등 통영 이야기를 자랑삼아 하는 그녀의 깜빡이는 까만 눈 속으로 빨려들듯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래, 그녀 이름이 장연화였다.

저는 몇 년 전 긴 세월 동안 그리던 학창 시절의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던 소설가로 등단을 하고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근무하는 곳도 문화예술을 관장하는 부서로 저의 직무와의 연관성을 조금은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곳이어서 나름의 역량을 펼칠 수 있다고 자신하며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무남독녀인 저를 이때까지 돌봐 주시던 어머니가 큰 수술을 받고 멀지 않은 섬으로 거처를 옮긴 후, 어머니의 짐을 정리하던 저는 놀라운 자료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장롱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크지 않은 보따리에는 이명준 선생님과 관련된 자료며, 어머니가 틈틈이 적은 것으로 보이는 색이 바랜 일기장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자료 중 교직에 계시면서 서예의 일가를 이루신 많은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을 보는 순간 저는 소설로 꾸밀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선생님의 자료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근무하시는 학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선생님께 어느 정도의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히 용기를 냈습니다. 아직은 햇병아리 수준의 소설가여서 어떻게 엮어낼까 두려움이 앞서지만, 아득한 40년 전 선생님과 저희 어머니의 미완성 러브스토리를 재현하고 싶은 어줍잖은 치기로 시작했습니다. 마무리되지 못한 초고를 선생님께 보내드리는 결례를 무릅쓰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지금 연화도 용머리 바위를 굽어보는 작은 암자 근처의 어느 조용한 집에 계십니다. 어머니는 제가 이 소설을 쓴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하던 작은 보따리도 까맣게 잊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선생님께선 소설의 첫 독자이십니다.

*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
“아니 지척의 J교대를 두고 먼 곳 D교대라니 네 설명 한번 들어보자.”
“그곳으로 간다고 꼭 그쪽 지역의 학교로 발령받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설명이 빈약하구나. 서울이나 부산이라면 또 모를까 대구 쪽이라니 말이다.”
“이곳이 바다여서 육지 깊숙이 가자는 건 아니고요, 내륙 학교로 가고 싶어서 그래요.”

아버지 눈치만 살피던 어머니도 팔을 걷어 부치는 표정 뒤에 말했다.
“연화야. 이제껏 한 번도 표시를 안 하더니 먼 곳으로 간다고 하니 부모로서 썩 내키지 않아서 그렇지. 넉넉잖은 우리 집 형편에 떨어져 지낼 네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다.”
“학교에도 그쪽으로 원서를 내기로 했으니 엄마 아빠도 좀 헤아려 주세요.”

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긴 학교에서도 조금은 의아해한 부분이다. 특히 담임선생님은 숫제 말리기까지 했다. 사실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아름다운 이곳 풍광을 벗어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동경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몰랐다.

필기와 면접시험을 치르고 합격통지를 받고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구했다. 이불 보따리와 단출한 살림을 들고 동행한 엄마는 ‘어린 것이 어린 것이’ 하면서 내내 눈시울을 적셨다. 짐 정리를 마친 뒤 몸조심을 당부 당부하며 기차역으로 갔다. 대구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탄 엄마는 기차가 미끄러지면서 나가자 마지막 고개를 가로저으며 끝내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한 학년 250명의 정원은 남녀 구성비가 50대 50이었다. 모두들 나름의 실력으로 무장한 젊은 눈동자들은 사명감을 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형편을 꿰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북쪽(안동)에서 온 이명준과 남쪽(통영)에서 온 장연화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마치 우리 둘을 자연스럽게 묶어두려 한다는 느낌마저 들게 하였다.

캠퍼스 남쪽에 우뚝한 산 앞산의 웅장함을 몇 번이나 말하던 명준이 하교 때 말했다.
“이번 일요일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앞산 정상으로 등산 가자.”
“단둘이서 말이냐?”
“둘이면 되지 누가 더 필요하겠나?”
“누가 보면 우짜노?”
“크하하하!”

조금은 호쾌한 그의 웃음소리가 좁은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나는 명준이가 나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구 앞산은 산행이 시작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급경사로 이어지고 있었다. 변변한 준비 없이 시작된 산행이었지만 우리는 거침이 없었다. 우리는 아직 손을 잡고 오를 수 있는 단계까지는 아니었다. 먼저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는 일행이 우리를 보고는 ‘그래, 젊음이 좋다’ 라며 허술한 우리를 변호하는 듯했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선 우리는 함께 환호했다. 분지에 안긴 대구 시내의 광활한 풍경이 좌우로 그리고 저 멀리 아득히 이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대구 시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때 ‘우리 앞날도 저렇게 펼쳐진 것처럼 거침없이 나아가자’고 염원했는데 명준이도 같은 생각을 하리라 믿고 싶었다.

멀리 북쪽에 동서로 장쾌하게 우뚝한 산이 팔공산이라고 명준이 말했다. 과연 대구를 품고 있는 두 산은 예사롭지 않았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환호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던 우리는 내려가는 길에 섰다. 군데군데 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내가 자연스럽게 명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명준은 주저 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계속 명준에게 내 손을 맡기고 싶었다. 평탄한 길에서도 손을 잡고 싶었으나 남의 눈을 의식한 우리 둘은 서로의 손을 밀어내야 했다.

산행에서 돌아와 집 앞에서 헤어질 때 명준이가 말했다.
“다음 일요일엔 시내 구경 갈까?”
“시내 구경?”
“그래, 서점도 가고 유명한 동성로 구경도 하고 영화도 보고….”

서점 구경을 가자는 명준의 말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영화라는 말에 나는 명준을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명준의 눈이 깊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서점이라니? 학교 도서관에도 책이 넘치잖아?”
“학교 도서관에 비할 수 없지. 신간 구경도 쏠쏠하다. 사지 않고 읽는 신간이란….”

명준의 눈웃음이 내게로 여지없이 파고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가자’ 하고 말했다.

다음 주 일요일 우리는 동성로까지 걸어서 갔다.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거리였지만 걸어서 갔다. 돌아보니 지난주에 올랐던 대구 앞산이 저 멀리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내리막에서 잡았던 명준의 손이 새삼 부드럽게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저만치에서 보였던 ‘본영당 서점’이라는 간판 아래서 명준이 섰다. 내가 간판을 올려다보는 사이에 명준이 말했다.
“연화야! 앞으로 우리 단골이 될 서점이야.”
“단골…?”
내가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명준이 서점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섰다. 따라 들어선 나는 깜짝 놀랐다. 넓은 벽을 채운 책도 책이지만 꽉 들어찬 사람들이 모두 책을 들고 있었다. 아니,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명준은 나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 잠시 책을 살피던 그가 주저 없이 책을 빼 들었다. 황석영의 『객지』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를 내뱉었다. 같은 국어교육과를 다니지만 명준의 독서 정서를 가늠하지 못했던 나는 내가 꿈꾸는 소설가의 필독서라 할 책을 명준이 펼친 것에 더없이 기뻤다. 명준은 책장에 기대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말을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로 심취한 모습이었다. 주저하던 나는 서점을 한 바퀴 돌면서 책 구경을 했다. 2층까지 서점 구경을 하고 내려와도 명준은 그 자리, 그 자세로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을 암시하는 표정으로 다가선 내게 명준은 “그래, 이제 동성로 구경할까?”라며 책을 제자리에 꽂았다. 서점을 나서며 “배고프재?”라고 말한 명준이 “맛이 기막힌 떡볶이집이 있다.”며 앞섰다. 동성로 거리엔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허기를 참았던 우리는 사람들이 줄을 선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기다린 보람을 보상해 주는 떡볶이 맛에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가난한 주머니로 누린 호사에 연신 미소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서점 순례와 동성로 탐방을 기억에 담았다. 그날 동성로 거리에서 우리가 맛보았던 한 접시 떡볶이의 포만감과 행복감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영화 구경은 다음으로 미루자는 명준의 제안을 나는 웃으며 받아들였다.

서로의 마음이 조금씩 열려간다는 징표는 하나둘씩 나타났다.
교대생이라는 프리미엄이었을까? 우리 둘은 입학식 며칠 뒤 같은 동네 주민들로부터 과외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주일에 이틀의 수업으로 중학생을 지도하게 된 것이었다. 고향으로부터 올라오는 생활비는 그야말로 빈약했으니 과외는 우리 주머니를 안정적으로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함께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우리 둘의 얼굴은 자신이 넘쳤다.
집을 떠나 혼자 자취를 하는 마음속에는 고향 가족을 대신해 주는 포근한 정을 나눌 수 있음도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휴일이면 우리 둘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명준이를 따라 극장을 찾는 날은 괜히 설레기도 했다. 시내 중앙통 근처에는 1류 극장부터 요금이 조금 싼 2류 극장이 있었다. 제일, 국제, 아시아, 만경관, 한일극장이 1류라면, 송죽, 자유, 신도, 남도, 사보이는 2류에 속했다. <벤허>, <에덴의 동쪽>,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은 주로 1류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솔저 블루>, <나바론 요새>, <태양은 가득히> 등은 2류 극장에서도 볼 수 있는, 우리에게 끌리는 영화였다. 특히 동성로의 한쪽으로 난 길을 가운데 두고 마주한 송죽극장과 자유극장은 주머니가 빈약한 우리를 끌어들이기에 맞춤한 곳이었다.
근처 교동시장도 우리 발길을 잡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미군에서 흘러나오는, 쉽사리 만나기 힘든 신기한 제품을 구경하면서는 키득거렸다. 먼 나라를 경험한다는 야릇함이리라.

학교에서 들은 정보로 알게 된 카페 <숲속의 빈터>는 우리 과 모두가 은근히 아끼는 곳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를 연인으로 밀어준 은밀한 장소로 오롯이 기억되는 곳이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어쩌면 명준보다 내가 더 적극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 곳, <코리아 음악감상실>도 정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음악의 갈증을 풀어주는 곳으로, 빼곡이 들어찬 레코드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그 당시로서는 음악의 성지였다. 신청곡을 적어낸 뒤 우리가 신청한 음악이 흐르면 우리는 소리 없이 환호했다. 올 때마다 어김없이 신청하는 로보의 <I’d Love You to Want Me>와 클리프 리처드의 <Evergreen Tree>가 흘러나오면 우리는 서로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곤 했다. 그건 먼 훗날 우리의 여정을 암시하는 음악으로 안성맞춤이라는 공감대여서 그랬을 것이다.

근처에는 또 우리들이 명소로 꼽는 곳이 있었다.
중앙통 건너 길게 이어지는 그곳은, 막걸리 한 주전자를 주문하면 정갈한 안주 12접시를 내놓는 향촌동 막걸리 골목이다. 보통 때는 학교 앞 식당에서 간단한 자리를 가지지만 의미가 있는 행사 뒤엔 반드시 이곳으로 모여야 했다. 빈약한 주머니로도 우리는 거칠 것 없는 얼굴로 모여들곤 했다. 그런 자리에 명준과 나는 어김없이 참석했다. 우리는 풋풋한 스무 살이었다.

2학년이 되면 임용고시에 매달려야 할 터, 1학년 때 여유를 가질 수 있음도 서로 마음의 기대로 가능했으리라. 1학년을 마무리하는 학사 일정에 들어가는 어느 날, 명준이 말했다.
“이제 방학을 하면 2학년이 될 때까지 떨어져 있어야 할 텐데, 보잘것없는 자취생 방이지만 방학 전 우리 집 구경 한번 오너라.”

그러고 보니 지난 1년간 우리는 서로 집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집엔 발길을 하지 않았다. 골목 가까운 곳이고 등하교 때마다 마주친 집이어서 어렵잖게 찾아갈 수 있는 명준이 자취방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명준이 집으로 갔다. 남학생 혼자 사는 자취생 특유의 냄새가 났지만, 우리가 보낸 시간에 비례하는가 단촐한 세간이며 정돈된 책상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책꽂이엔 교과서며 파일철 그리고 교양서적이 보였다. 옆자리의 책이 내 시선을 끌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홀로 사는 즐거움』, 『물소리 바람소리』 등이 보였다.

그 책꽂이 위쪽 벽에 명준의 필체로 보이는 글귀가 있었다.
‘맑은 시선 조용한 미소 따뜻한 손길 말이 없는 행동’
내 눈길을 끌었다. 법정 스님의 책에서 따온 글귀로 보였다.

영화 관련 책자도 보였는데, 영화에도 관심이 있는가 싶었다. 그리고 서예에 관한 책자도 보였다. 생각해보니 명준의 글씨체는 예사로운 글씨가 아니었다. 초라한 내 책상에 비하면 풍성한 책꽂이를 보면서 쉽게 말할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지는 명준이가 새롭게 다가왔다.

지난번 서점에서 거침없이 뽑아 들었던 황석영의 『객지』를 떠올리던 나는 명준에게 물어보았다.
“소설 쪽에 관심이 많은가 보던데… 소설 공부도 따로 하고 있는가 보네?”
뜻밖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던 명준이 말했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소설 쓰는 걸 염두에는 두었지만, 특별히 따로 공부는 하지 않고 있다. 연화도 소설 쪽에 관심이 있는가 보이던데?”
“『학원』에 실리는 작품들을 보면서 나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다.”
“그랬구나. 교직을 목표로 공부하면서 나란히 소설에도 뜻을 가지고 있어서 각별하구나.”

자연스럽게 잠시 소설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교직에 몸을 담더라도 소설로 꼭 등단을 하자는 목표를 서로 공유했다. 몇 권의 소설책 역시 책꽂이 한쪽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옆의 영화 관련 책 쪽으로 시선을 보내면서 명준에게 물었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구나.”
“관심은 있지만 아직은 문외한 수준이다.”
그러면서 명준은 파일에 필기해 둔 자료 하나를 보여주면서 “일반적인 정서와는 배치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마는 이쪽 작품들에 관심을 조금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필생의 목표로 하는 찾아가 보고 싶은 무대와 장치들.

「아라비아 로렌스」 데이빗 린 감독.

  • 헐리우드 영화에서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아라비아, 다마스커스, 바그다드, 하늘을 날아가는 양탄자, 베일을 드리운 여인들의 침실, 베개와 방석을 깔고 비스듬히 누운 하렘 여자들의 젖가슴,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은 남자들, 화려하게 장식하고 초승달처럼 생긴 칼, 지붕이 만두처럼 동그랗게 생긴 집들에 대한 환상적이고 시각적인 개념 –

다시 다른 파일에 적힌 내용도 읽을 수 있었다.

「사막의 화원」 “사랑을 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악할 수가 없다”

  • 모래로 운명을 점치는 존 캐러딘의 예언을 무시하고 끝없는 사막으로 사랑의 여로를 떠나는 두 사람, 모래와 하늘과 태양밖에 없는 풍경, 석양의 사막 위에 걸려 있는 조개구름, 푸른 달밤의 횃불, 오아시스의 종려나무 밑 샘물이 있는 그늘, 카라반의 행렬, 낙타, 헝겊 천막들, 수염을 기르고 터번을 두른 유목민들, 파란 베일을 쓰고 선정적인 춤을 추는 여자들, 펄럭이는 불꽃 모양으로 움직이는 무희들의 손가락들, 두껑처럼 생긴 페즈 모자 –

조금은 알 듯해도 역시 화면으로 보는 것 이상의 정리는 요원했다.

그날 밤 명준의 방에서 내게 전해진 일련의 자료들은 우리 둘을 강하게 견인해 주고 있다고 나는 믿었다. 미군 바지를 검정색으로 염색한 옷을 단벌로 입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명준의 옷은 단순했다.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런 대학생이 책에 대한 목마름을 서점에서 선 채로 속독으로 읽어내는 재주를 명준은 가진 것이었다. 학교 도서관도 많이 이용하는 명준이가 서점을 찾는 것을 작은 기쁨으로 여긴다고 나는 단정하였다.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그 특별함으로 명준이가 내게 각인되었다.

이렇게 안동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은 내가 나도 낯설다.

임용고시에 합격한 명준이가 안동 길안면 D초등학교로 초임을 받고 근무한다는 소식을 편지로 보내왔다. 지난 1년간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는 헤아릴 수 없다.

1학년을 이수하고 고향 통영에 내려와 있던 내가 몸의 이상을 느낀 건 유난히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새해가 된 후 한 달여 만의 일이었다.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에 가 보라는 진단을 내릴 때 무슨 소리냐며 일축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는 단호하게 허락하지 않았다. 부산의 큰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 절대 요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암이란 말이오?”
아버지의 득달에 의사는 차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영양실조에 장 기능이 심하게 훼손돼 치료와 요양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 영양실조에 장 기능 훼손이라니?”
어머니와 아버지는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을 풀지 않았으나 결국 입원과 요양을 택했다.
당초에 멀리 떨어진 학교로 가는 걸 반대했던 어머니 아버지는 이렇게 된 것이 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 내게 있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눈이 아려왔다.
결국 2학년 진급을 포기하고 휴학을 하기까지의 시간은 무참했다.
명준에게 편지를 보내 자초지종을 알렸다. 무슨 날벼락이냐며 보내온 답장을 나는 제대로 읽지 못했다. 내가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명준의 편지는 사흘이 멀다 하지 않고 도착했다. 몸이 호전되고 건강을 회복했다는 판단이 섰지만 자신이 없었다. 무료한 날이 이어지면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자문하기도 했다. 통영 시내를 굽어보는 미륵산에 올라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내가 휴학을 하고 집에 와 있다는 소문은 퍼졌으리라. 다행히 중병은 아니라는 소식이 알려진 탓일까,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선을 보라는 것이었다. 박 선주 집으로 불리던 누구라 하면 다 아는 집이었다. 어선을 몇 척 보유한 부잣집인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저쪽에서는 T여고 재원으로 불리던 내가 교대를 휴학하고 있는데 우선 결혼을 한 뒤 복학을 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복학과 편입, 그리고 그 위 학업도 지원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나를 설레게 했다. 내게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이 되었다.
완강하게 반대를 고집하던 나는 현실적인 판단을 주문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눈빛을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선을 보고 결혼 날짜를 잡기까지의 모든 일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우리들 꿈을 흐트리지 말고 키워가자 다짐했던 명준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자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준의 얼굴만 보고 오자는 계획을 세웠다.
부전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오후 2시 안동역에 도착하는 비둘기호였다. 새벽에 통영을 출발할 때부터 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은 비는 경주를 지나 영천을 지날 때는 장대비를 퍼붓고 있었다. 봉림역을 지나는 기차가 느리다고 생각하는데 차내 방송이 나왔다. 제시간에 안동역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나의 노심초사는 항용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 폭우로 봉림역과 화산역 구간에 노반 침하가 우려되는 구간이 생겨서 정상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정에 따라서는 잠깐 정차를 해야 하는 구간도 발생할 수 있으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불편하시더라도 차 내에서 안전하게 계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방송은 몇 번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안동역 2시 도착은 난망해 보였다. 지친 표정의 승객들은 아예 편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안절부절했다. 장마가 끝나고 가을 초입에 들어서는 때에 내리는 장대같은 비를 보며 사람들은 ‘풍년이라고 하는데 웬 쓸데없는 비가 이리도 내리나’ 말했다. 감속 운행으로 역마다 연착을 계속하던 기차는 의성을 지날 때 이미 오후 2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 빗속에 명준은 안동역에 무사히 올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도 잠깐 잠깐씩 눈이 감겼다.
“장마철도 아닌데 무슨 비가 하루 종일 퍼붓는교?”
“낙동강 범람이 우려된다는 방송은 들었니껴?”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듣는 순간 몰려오던 잠이 달아났다. 그때까지도 기차는 애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굼벵이가 되어 있었다. 급기야 안동이 얼마 남지 않은 무릉역에서는 도무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애타는 시간이었다.
나는 명준이 안동역에 나왔을까라는 생각 뒤에, 안동에서 부산 가는 기차는 있을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3시간 여가 지난 뒤 기차는 안동역에 도착했다. 플랫폼도 그렇고 대합실도 한산했다. 대합실을 아무리 훑어봐도 명준은 없었다. 막막했다. 역무원에게 ‘혹시 2시에 도착 예정이던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기다린 사람이 없었나요?’ 묻자 ‘당췌 무슨 말이냐’라는 표정으로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서다 말고 내가 ‘부산 가는 기차는 몇 시에 있나요?’ 다시 물었다. 손목시계와 대합실 벽에 있는 시간표를 번갈아 보던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연착인 관계로 2시간 뒤에 있습니다’ 사무적으로 말했다. 비는 몇 차례 뇌성까지 동반하며 내리고 있었다. 더딘 시간이 흘렀다.
명준과는 어떤 연락도 주고받을 수 없는 지금 이 시간이 진공 같다고 느껴졌다.
그날 안동역에서 다시 부전역까지 그리고 통영 집에 도착했을 때는 으슥한 새벽이었다. 새벽인 것은 좋았다. 빗속에 집을 나선 내가 하루 종일 아무런 연락도 없자 우리 집에서도 시댁이 될 박 선주 집에서도 난리가 난 것이었다. 내게서 어떤 시원한 대답도 얻지 못한 어머니 아버지는 박 선주 집에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있었다. 두 집 외에는 모르는 일이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모든 것을 비로 돌리기에는 어림없는 행동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축복받는 결혼식이었다. 크게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내가 박 선주 집 박상진의 아내가 된 사실은 지역의 가십거리로 충분했다.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다녀온 다음 날부터 박상진은 사회를 대변하는 지역의 인사였다. 시아버지의 그늘이라 해도 지역의 크고 작은 모임과 행사에 주빈으로 참석하는 시간이 많았던 것이다. 가정보다는 회사와 지역사회가 우선인 유명인사인 것이다. 그런 처신에 시부모님도 전적인 무언의 동의를 해주고 있었다.
딸 수현이가 태어나고 잠깐 가정에 충실하는 것 같던 그가 어느 날 행사에 갔다가 늦은 귀가 뒤 술이 거나한 채로 내게 말했다. 그의 게슴츠레한 눈은 이미 도를 넘고 있었다.
“장연화 씨! 그날 비가 쏟아지던 날, 안동에 다녀왔다는 그날, 대체 누굴 만나러 갔지?”
“비가 쏟아지던 날? 안동?”
“그래, 하루 종일 안동에 갔다 온 그날 누굴 만나고 왔나 이거야.”
“몇 번을 말했어. 교대 동기 만나러 갔다고 몇 번을 말했잖아요?”
“교대! 교대! 좋다 이거야. 교대 동기, 남자야? 여자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안동에 가서도 만나지 못하고 왔네요.”
“이 여자가 사람을 바보로 아나. 남자냐 여자냐 말이야. 가서도 못 만났다고?!”
“못 만난 것을 못 만났다고 말하지, 만났다고 하란 말이에요?”
“당신 같은 부도덕한 사람을 내가…”
“부도덕?”
“거기에다 정숙하지 못한 것까지.”
“정숙하지 못한 것?”
내가 발끈하여 소리치며 대들 듯 나서자 팔을 치켜들던 그가 두 손으로 자기 뺨을 사정없이 때리고 나서 새근대며 잠들어 있던 수현이가 잠에서 깬 기척을 하자 거실로 나가버렸다.
문득 문득 명준이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내가 복학을 하고 임용이 되고 우리 둘이 결혼을 하고 소설가의 이름을 올리고 부자가 아니지만 한 가정을 이루었다면 지금과 같은 회한이 들까 하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몰려오는 것이었다. 지아비로부터 부도덕하고 정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 참담함을 무엇으로 상쇄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보아도 허망함만 남는 것이었다. 특히 쓰고 싶은 소설을 한 줄도 쓰지 못하는 현실은 끝내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도 수현이가 예쁘고 똑똑한 아이로 자라주어서 내게 선물이 된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수현이가 대학 입시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어느 날 비보가 날아들었다. 통영문화예술회관 근처의 내리막길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며 경찰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5미터 아래로 전복한 사고였다. 사망사고였다. 동승자가 있었다. 여자였다. 경찰에선 신원 확인 중이라는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로선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통영문화예술회관에서 큰 행사가 있다는 것은 여러 매체에서 알려주어서 익히 알고 있는 행사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나에게 부도덕하고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는 표현을 시도 때도 없이 퍼부어대던 사람이었으니, 신원확인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쉬지 않고 밀려 왔다.
수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통영시청의 공무원으로 발령을 받는 날, 나는 조용히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D교대 2학년 복학을 했더라면 교직에 몸을 담고 쓰고 싶은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스무 살 시절 1년간 대구에서 보낼 때만큼 빛나는 시절이 없었다는 생각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수현이가 엄마 피를 이어받은 영향일까 소설에 관심을 보여주어서 내가 못다 한 꿈을 이루어줄 것 같은 생각이 더 간절한 것이다. 한 가지, 지아비로부터 평생 들었던 저주가 동티로 나타났을까 몹쓸 병을 안은 내가 스스로 안타까울 뿐이다.
그날 폭우 속에 다녀왔던 안동행이 평생 내 업보가 되었을까 하는 자괴를 떨치고 이제 연화도로 가려 한다. 내 이름을 달고 있는 연화도로 갈 줄 정말이지 내가 일찍 알았을까.

*

선생님.
엄마는 왜 평생 선생님을 가슴에 담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엄마는 일기에서 말했듯이 스무 살 시절 1년간 대구에서 보낼 때만큼 빛나는 시절이 없었다는 표현에서 유추해 보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엄마는 아빠로부터 받은 냉대를 선생님 생각으로 버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순한 마음이 아닌, 그때 두 분이 약속했던 몇 가지가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믿는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통영에서 안동까지는 가까운 길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평생을 교직에 계셨으며 서예에 일가를 이루신 교장선생님으로 이제 퇴임을 앞두신 선생님께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선생님.
이곳 통영엔 한번 다녀가신 적이 있으신지요?
꽃말이 라틴어로 ‘물을 담은 항아리’라는 수국이 6∼7월이면 연화도에 만개합니다. 특히 용머리 해안, 연화사, 보덕암 쪽의 수국이 장관을 이룬답니다.
이번 저의 편지가 선생님께 불편을 드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편지를 접습니다. 내내 강건하시고 평안한 일상이 되십시오.
통영에서 박수현 드림.

40년 전 우리가 보냈던 1년간의 일들이 생생하게 펼쳐진 글을 보며 나는 혼란에 빠졌다.
스무 살 시절을 되살려준 편지를 나는 쉽게 손에서 놓지 못했다. 엄청난 기록인 것이었다.
그날 연화의 편지를 받고 난 일주일 뒤 토요일 오후 2시, 연화는 안동역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아침이 되면서 시작된 비는 오전 수업을 마치기도 전에 폭우로 변했다. 청송에서 안동으로 가는 도로는 곳곳이 무너지고 범람하여 버스는 애초에 운행을 포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안동역까지 가려면 1시간 전에 버스를 타야 하는데, 시간은 이미 1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안동역에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안동역입니까?”
“예. 안동역입니다.”
“부탁이 있는데요. 잠시 후 2시에 도착하는 부산에서 오는 비둘기호 기차 승객들 내릴 때 방송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방송을요?”
“‘기차에서 내리는 승객 중 장연화 씨가 있으면 오늘 안동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이명준 씨가 폭우로 찻길이 끊겨서 못 온다고 하니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사적인 일인 그런 방송을 역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적인 방송은 금지되어 있어서 할 수 없습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인데 도저히 갈 수 없는 형편이어서 그렇습니다.”
“암튼 사적인 방송은 불가입니다.”
무너지는 듯한 가슴을 교실 창문에 밀어붙인 나는 비가 제발 좀 잦아들기를 기도했다. 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장대비를 퍼붓고 있었다. 이윽고 시간은 2시를 지나 3시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지라며 눈을 지그시 감을 때 눈가에 물기가 느껴졌다. 연화는 안동역에 도착했을까? 낙동강 범람이 우려된다는 이 빗속에 기차는 안동역까지 왔을까? 부산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연화는 탔을까? 돌아가는 기차를 못 탔다면 이 빗속에 어떻게 하고 있을까?
가슴은 미어지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던 어느 선생이 ‘아니, 이 선생 집에 안 가고 뭐하고 있어요?’ 하는 말에 대답을 하는 것도 잊고 물바다가 된 운동장을 바라보며 망연해했다.
연락은 두절되었다. 편지 왕래도 끊어졌다. 그렇게 무심한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여태까지 다녀온 전국의 어느 곳보다 통영은 꽤 여러 번 다녀왔다. 욕지도, 소매몰, 연화도, 한산도, 사량도, 미륵산, 통영운하, 서호시장, 그리고 동파랑과 서파랑.
수국이 만개하는 6월과 7월이 오면 연화도의 일출과 일몰에 젖어보는 상상을 해보는 머릿속은 시간여행을 예비하는 순간들이 해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1) 안정효,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87p
2) 안정효『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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