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엘레지
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겨울호 2024년 12월 69호
52
0
층고 높은 난바역 계단을 빠져나오며 기훈은 숨을 몰아쉬었다. 요즘은 연일 피곤하다는 느낌밖에 없었다. 주중에 야근이 이틀이나 있었고, 주말인 어제도 출근해 프로그램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오사카에서의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일요일인 오늘만은 늦잠을 잔 후 숙소 근처 규카츠 맛집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싶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로 계획은 박살 나버렸다.
-그건 괜한 일이 아니라 네 할아버지의 일이야!
통화 중에 핏대를 올리던 아버지의 음성이 아직 귀에 쟁쟁했다. 기훈은 자꾸 달라붙는 음성을 떨쳐버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지난 1월, 오사카의 스타트업 회사에 입사해 한국을 떠나올 때부터 기훈의 아버지는 명령에 가까운 요구를 했다. 당신의 5촌 아저씨를 꼭 찾아뵈라는 거였다. 기훈은 귓등으로 듣고 말았는데, 아버지는 수시로 전화해 더는 지체하지 말라며 압박해 왔다. 아버지에게 5촌 아저씨라면 기훈에겐 7촌인 셈이었다. 열 손가락을 동원하지 않으면 헤아리기 도 어려운 촌수였다. 결국, 증조할아버지 친동생의 직계 후손을 찾아보라는 명령이었다. 기훈이 알기로는 그들은 4대째 일본에 정착해 살면서 한국을 잊어버린 사람들이었다. 남보다 못한 친족을 찾아뵈라는 아버지의 아집이 지긋지긋했다.
-너한텐 남일지 몰라도 네 할아버지에겐 형제보다 소중한 사촌동생이라고!
도톤보리로 향하는 기훈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할아버지의 일이면 나한테 무조건 중요한 일이냐고 받아치지 못한 게 후회됐다. 기훈의 판단에도 할아버지 생전에 그는 결코 애틋한 손자가 아니었다. 보통의 손자들이 그렇듯 그도 무의식중에 어머니의 시각으로 할아버지를 인식했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자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다가, 귀국해서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노동자가 되어 고생만 하다 죽은 사람이었다. 간단하게 정의하면, 기훈에게 흙수저 신분을 물려준 장본인이었다. 기훈이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가난과 일본’이라는 두 단어가 따라붙었다. 전자에는 원망을, 후자에는 반목을 느꼈다.
기훈의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가리켜 ‘무능력한 데다 남에게 이용이나 당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정의했다. 어머니가 단정할 때마다 입술에는 비웃음까지 서려 있어서 그의 머릿속에 박힌 할아버지의 초상은 늘 초라했다. 기훈이 보기에도 어머니의 정의는 거의 정확했다. 할아버지가 군 제대 후 일본 기업인 오토바이 회사에 들어가 생산 현장에서 죽도록 일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스무 평 낡은 빌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판단을 뒷받침해 주었다. 낡고 좁은 빌라는 머릿속에 할아버지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기훈이 할아버지에 대해 못마땅한 건 또 있었다. 일본에 대한 지나친 향수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열한 살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를 지겹도록 반복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보다 문명 수준이 미개해 놀랐다는 푸념도 수십 번 들었다. 일본에선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한국에 와 보니 또래들이 짚신 차림이어서 놀랐다는 일화나 당시 어른들조차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더라는 일화는 외울 정도였다. 특히 유년기 부적응 상황을 회상할 때는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처럼 슬픈 표정까지 지었다. 일본에서는 조센징으로 무시당했고 한국에서는 쪽발이로 따돌림을 받았다던 할아버지는 성장기 내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고 하소연했다.
기훈은 매번 할아버지의 넋두리를 대꾸 없이 듣기만 했다. 반복보다는 편협함에 지쳐서였다. 민족의식이 부족한 할아버지의 가치관을 주변 사람들이 알까 봐 조심스러웠다. 당신이 태어난 고향 오사카 얘기를 할 때면 더 답답했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상관없는 화제에 오사카를 연결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가족 중 누군가 부산으로 피서 가고 싶다고 하면 부산은 오사카와 분위기가 비슷한 도시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가족이 둘러앉아 만두를 먹으며 맛이 괜찮다고 하면 어떤 만두도 오사카 만쥬 맛을 따라갈 수 없다고 반응해 화제의 초점을 흐렸다. 처음엔 이 시점에 왜 오사카 얘기가 나오냐며 황당해하던 가족도 나중엔 아예 못 들은 것처럼 무시했다. 어머니가 대놓고 이죽대면 민망해진 가족은 할아버지의 눈길을 피했다.
아버지에게 떠밀려 도톤보리로 걸어가는 기훈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제발 본인 세대 일은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했으면 싶었다. 당장 발길을 돌리고 싶어도 완고한 아버지의 요청을 계속 무시하면 후폭풍이 클 터였다. 대충 친족을 찾는 시늉만 하고 어서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가서 만나라 했으니 물리적 접촉 후에 다녀왔다고 통보만 하리라 마음먹었다.
아버지의 6촌이 도톤보리에서 우동 가게를 운영하는 건 기훈이 일본으로 오기 전부터 알던 사실이었다. 사실 오사카에서 육 개월 생활하는 동안 회식 차 몇 차례 도톤보리로 나왔었다. 아버지의 요청은 애써 무시하면서도 매번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기훈도 그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일본 생활에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숙식부터 언어 장벽, 문화 차이까지 적응해야 할 난제가 많았다. 회사 숙소는 월세가 싼 대신 낡고 좁았다. 겨울밤 다다미방에서 느껴지는 한기는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일본어의 미세한 뉘앙스 차이를 몰라 직원 간의 대화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국으로 쫓겨나지 않으려면 단기간에 업무도 완벽하게 익혀야 했다.
그래도 낯선 오사카에서 기훈을 버텨내게 한 건 헬조선을 떠났다는 위안이었다. 한국에서의 거듭된 취업 실패는 내면을 황폐화했다. 가족들의 기대는 물론, 먼저 대기업에 취업한 친구들의 눈길도 받아내기 힘들었다. 한국에서의 정체성은 흙수저 출신의 루저, 어정쩡한 대학 출신의 너드남에 불과했다. 취업 준비로 오롯이 삼 년을 허비하고 오사카에 일자리를 얻었을 때 한국은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취업 스트레스에 비하면 현재의 업무 스트레스는 견딜 만했다. 그간 일본어 실력도 조금 늘었고 일본 문화에도 그럭저럭 적응해가는 중이었다.
코딩 교육 플랫폼을 만드는 스타트업 회사의 인적 환경도 나쁘지 않았다. 소수의 인원에 모두 일본인들이라 쓸데없이 깊은 관계를 만들지 않아도 괜찮았다. 기훈은 아는 이 없는 타국의 거대도시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일요일 한낮의 도톤보리는 휴일을 만끽하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대부분 글리코 네온간판 앞에서 인증샷을 찍거나 오사카 덕후들이 추천하는 맛집의 대기 줄에 서 있었다. 기훈도 처음 오사카에 왔을 때 했던 행동들이라 저절로 웃음이 났다. 낯선 도시를 익히려고 구글 지도를 따라 이리저리 쏘다녔고, 세계적인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자신이 대견해 인증사진도 여러 번 찍었다. 한국 대기업에 먼저 취업한 친구들에게 보여 주려고 톡 프로필에 인증사진을 올려두기도 했다. 긴장했던 육 개월의 시간도 이제는 추억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일상 속에 끼어든 일본 친족만 아니면 힘들어도 견딜 만했다. 멀고 먼 7촌을 찾아가는 지금, 기훈의 머릿속으로 이십사 년 전 할아버지의 오사카 방문기가 떠올랐다.
기훈의 할아버지는 꿈에도 그리던 오사카를 정년퇴직 후에야 다시 방문할 수 있었다. 강제 징용자 아버지를 따라 열한 살 때 귀국선을 타고 한국에 들어온 지 오십 년 만의 귀향이었다. 출국 날 아침, 할아버지는 꼬마 기훈이 보기에도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안주머니에 잘 넣어둔 여권과 비행 티켓을 달달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확인했다. 꼼꼼히 준비해 둔 여러 개의 트렁크를 끌고 마침내 스무 평 빌라를 나서는 순간, 얼굴은 상기된 채였고 다녀오겠다는 인사말은 가늘게 떨렸다.
아버님, 제발 길이나 잃어버리지 마세요!
염려를 쏟아놓으며 기훈의 어머니는 뒤에서 조소했다. 할아버지에게는 평생의 소원을 이룬 날이었지만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은 등 뒤에서 비웃었다. 그날 할아버지의 들뜬 모습은 희화되어 가족들 사이에서 농담거리가 됐다. 이십사 년 전 할아버지도 자신의 동선을 따라 친족을 찾아갔을 거란 생각에 기훈은 괜히 속상했다.
7촌 아저씨가 운영한다는 가게는 도톤보리 북쪽 난바신사 외곽에 있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 모퉁이, 스무 평 남짓한 2층 목조 건물이었 다. 일본 전통 가옥 형태로 외양이 수수해 보였다. 핵심 상권에서 벗어나 있어서인지 점심시간인데도 대기 줄이 길지는 않았다.
‘戀し’. 기훈은 일본어 간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고이시, 그리움이라는 뜻이었다. 우동과 그리움의 상관관계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뜬금없다는 생각 끝에 주인이 꽤 서정적인 사람일 거라 짐작했다. 6월 들어, 기훈도 뜬금없는 감정에 빠져들 때가 있었다. 창백하고 푸른 여름 저녁 빛이 어둠 속으로 삼켜질 때면 진단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텅 빈 가슴을 훑고 지나가곤 했다. 오사카에 적응해가고 있는 시점에 스며든 감정이 낯설었다. 불명의 감정이 스칠 때마다 그리움일 리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기훈은 서너 명이 서 있는 대기 줄 끝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문득 인사치레로 가져온 건 과일 바구니뿐, 친족을 만나서 나눌 어떤 이야기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난감했다. 7촌 아저씨에게 과일 바구니를 건네고 나면 무슨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얼굴을 대하면 자기소개부터 해야 할지, 김상경 씨냐고 확인부터 해야 할지 그것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잊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가게 주인인 7촌의 이름 ‘김상경’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기훈의 아버지 ‘김일경’과 같은 항렬의 이름이었다.
“요옴방.”
대기 번호 4번을 부르며 한 청년이 가게 밖으로 나왔다. 기훈은 또래로 보이는 청년의 말쑥한 얼굴을 살폈다. 가게를 승계하는 일본의 전통대로라면 그와 8촌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에 긴장했다. 깨끗한 조리복을 갖춰 입은 청년은 한눈에 보기에도 미남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가무잡잡한 자신과 달리 청년의 얼굴은 티 하나 없이 하얗다. 기훈은 생전에 유난히 피부가 하얗던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기 줄 앞쪽에 서 있던 연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청년이 다가와 기훈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미리 주문하라는 뜻이었다.
“식사하러 온 게 아닙니다. 김상경 씨를 뵙고 싶습니다. 아버지 김일경 씨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조심스레 일본어로 얘기하자 청년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스쳤다. 그리고는 잠깐 기다려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 청년을 기다리면서 기훈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부담스러워 내내 미뤄왔던 과제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죄송하지만, 대기 줄에서 이대로 좀 더 기다려 줄 수 있나요? 지금 가게 안에 여유 테이블이 없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청년은 어색한 얼굴로 부탁했다. 미안해하는 표정도 아니고 간절한 어조도 배어 있지 않았다. 기훈은 당황스러웠다. 이곳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꿈에도 그리워한 친족의 터였다. 작년에 여든다섯의 나이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이곳을 예순둘에 방문했으니 꼭 이십사 년 만의 친족 방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기 줄에 그대로 세워두는 행태는 서운했다. 그들이 걸어둔 간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 여기며 기훈은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여름의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파랬다. 오기 싫은 길이었는데 막상 서운한 대접을 받고 보니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아버지는 왜 기어이 아들을 등 떠밀어 이곳에 보낸 건지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다.
기훈의 아버지는 한 번도 일본에 와보지 못했다. 어려운 형편에 자식 셋과 동생 둘을 거두느라 평생 여력이 없었다. 허리를 다친 이후로는 항상 시난고난 앓았다. 눈을 뜨면 일하러 가고 집으로 돌아오면 잠을 잤다. 아내가 자식 셋을 앉혀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늘 잠을 잤다. 기훈의 할아버지가 정년퇴직 후 오사카를 방문했을 때도 아버지는 허리 디스크로 병원에 누워 있었다.
벌써 오후 한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늘이 짧은 뒷골목에 서 있는 기훈의 등에 살짝 땀이 뱄다. 아침을 거르고 나와서 배도 고팠다. 서늘한 실내에 들어가 시원한 물부터 마시고 싶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따라오세요.”
한참 만에 가게 밖으로 나온 청년이 앞서 인도했다. 기훈은 미간을 찡그린 채 뒤를 따랐다. 가게는 예상보다 협소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픈식 주방이 보였다. 일본식 다찌 구조였다.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조리사가 막 세팅한 우동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대여섯 명의 손님들이 눈앞에 놓인 우동을 보고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얼핏 면 위에 올려 둔 네모난 유부와 벚꽃 모양의 분홍색 어묵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라 조리사의 머리에 두른 두건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힐끗 쳐다볼 뿐 다른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6촌인 듯했지만, 기훈도 미리 내색하지 않았다.
기훈은 청년을 따라 나무 계단을 밟으며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한 사람만 겨우 오를 수 있는 나무 계단은 가파른 데다 디딜 때마다 삐걱거렸다. 2층에도 조금 전까지 손님을 받았던 듯 공간에 우동 냄새가 떠다녔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청년은 다시 내려갔다. 할아버지도 일본에 와서 이런 푸대접을 받았으리라는 기훈의 의심은 점점 커졌다.
-글쎄, 네 할아버지가 오사카에 초대형 캐리어를 세 개씩이나 끌고 갔다니까. 그 야박한 일본 인간들 뭐가 좋아서 없는 살림에 바리바리 선물을 준비해 갔는지 몰라. 그래놓고 그쪽에선 달랑 운동화 한 켤레 받아왔더라고.
기훈은 할아버지의 오사카행을 한심하게 평가했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어머니를 따라 웃었을 뿐,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왔을 때 어떤 일이 있었고, 누구를 만났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었다. 관심조차 없었다.
-기훈아, 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야.
어릴 적 할아버지가 강조한 교훈은 귀에 못처럼 박혀 있었다. 형제자매가 자신의 일부로 존재하듯, 사촌, 육촌, 팔촌도 한 조상을 나눠 가진 관계란 걸 잊지 말라는 당부였다. 일본에도 그의 일부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때마다 기훈은 그러려니 했다. 일제강점기에 증조할아버지 형제가 나란히 강제 징용당해 일본으로 건너온 후, 이웃해 살면서 아이들을 낳았다는 것도 너무 자주 들어온 전설이었다. 일본 여자와 결혼한 형은 오사카에 남았고, 동생인 증조할아버지만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연도 훤히 꿰고 있었다. 귀국 후 가족 전체가 고생이 심했다는 건 할아버지의 삶이 증명해 주었다.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도 서로를 그리워했다는 게 이해 불가였다.
2층 다락방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면서 기훈은 슬슬 화가 났다. 이곳이 할아버지가 꿈에도 그리던 유토피아인가 싶어 한심했다. 다락방엔 달랑 낡은 식탁 한 개에 의자 두 개가 마주 놓여 있었다. 뒤쪽엔 맛국물 내는 건어물 더미도 보였다. 기다리다 지친 기훈이 일어서려는 데 한 남자가 나무 계단을 삐걱거리며 올라왔다. 남자는 예상대로 오십 대 조리사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식사하러 온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어.”
남자는 종성 없는 일본식 한국어를 구사하며 그제야 미안해했다. 뜨거운 화로 앞에서 면을 삶다 온 그에게서 열기가 느껴졌다. 기훈은 남자와 무릎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 앉아 있는 게 부담스러웠다. 얼른 용건만 전하고 일어서고 싶었다.
“작은 선물입니다. 아버지가 보낸 것입니다.”
기훈은 엉거주춤 일어나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남자는 일어나 두 손을 높이 들어 받으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말뿐 아니라 행동 하나까지 완벽한 일본인이었다.
“저는 김일경 씨의 아들 김기훈입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5촌 아저씨께 인사드리고 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고… 병원을 알려주시면 그 할아버지께도 인사를 드릴 생각입니다.”
단숨에 용건을 꺼내자 남자는 잠깐 침묵하더니 씁쓸한 미소로 대답했다.
“내 아버지는 한 달 전에 돌아가셨네. 조금만 빨리 왔더라면 뵈었을 텐데…”
기훈은 허탈했다. 몸에서 에너지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듯했다. 늦기 전에 꼭 만나서 인사드리라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머리끝까지 화난 모습이 눈에 선했다. 병든 노인은 언제든 돌아가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기훈은 작년에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며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선조의 죽음은 바쁜 일상에 묻혀 곧 잊혔다. 아까운 일요일을 통째로 날리고도 나쁜 인간이 된 게 속상했다.
“자네 할아버지는 잘 계신가?”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한국에 조금만 빨리 오셨더라면 만날 수 있었을 텐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삼켰다. 어쩌면 남자도 우동 가게를 운영하며 바쁘게 살았을 터였다. 기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여유 없이 살아왔으니 어차피 같은 처지였다. 조금만 빨리 왔더라면, 이라는 말은 남자도 삼켰어야 했다고 여기며 기훈은 시선을 떨궜다.
“아, 그랬구나. 안타깝네. 이제야 알게 돼 정말 미안하네.”
남자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깍듯한 일본식 인사와 애도에 기훈의 속상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남자는 일어나 낡은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왔다. 탁자 앞에 놓더니 열어 보라는 메시지를 눈으로 보냈다. 기훈은 천천히 종이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남성용 하얀 운동화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한 번도 신지 않은 새것이었다.
“이 운동화의 주인은 자네 할아버지라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준비해 둔 선물이지.”
생전에 기훈의 할아버지는 왼쪽 다리를 약간 절었다. 기훈이 이유를 물어보아도 어릴 때 놀다가 실수로 다쳤다고만 했다. 낙천적인 성격의 할아버지는 그 일로 세상을 원망한 적 없다고 했지만, 기훈은 속상했다. 다리를 절며 걸어오는 할아버지와 마주칠 때면 친구들 앞에서 부끄러웠다. 부끄러움 뒤에는 늘 죄책감이 따라붙었다.
“두 분은 친형제보다 가까운 사촌이었지. 어릴 때 장난치며 놀다가 내 아버지가 네 할아버지의 발을 걸었는데 그때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다고 들었네.”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기훈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처음 듣는 사연이었다. 지겹도록 들려준 회상록에서 할아버지는 왜 한 사연만 빼놓은 건지 이해 불가였다. 만약 그렇다면, 남자 쪽에서 할아버지를 뵈러 한국으로 왔어야 마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 때문인지 내 아버지는 수십 년 전부터 매년 새 운동화를 준비해 두었지. 자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언제 또 일본으로 올지 모른다며…. 평생 죄책감 때문에 깨끗한 신발이라도 신겨주고 싶었던 것 같네.”
2년 전 남자의 아버지가 요양원에 들어가서도 두 번이나 운동화를 사두었다가 버렸고, 다시 새것을 사놓은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기훈은 아버지가 일본에 오고 싶어 했지만, 형편이 어려웠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남자 앞에서 집안의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지게차를 몰다가 허리를 다친 일이나 그 후 디스크로 여러 공장을 전전했던 일을 핑계하고 싶지 않았다. 기훈 자신이 아르바이트로 겨우 대학 공부를 마친 일은 집안의 흑역사이지 자랑거리 가 아니었다.
“늦어버려서 안타깝지만… 네 할아버지 묘소에 이 운동화를 갖다 줄 수 있을까?”
남자의 부탁에 기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서울과 오사카의 비행 거리는 두 시간 정도였다. 서로를 그리워해 온 친족들이 만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건 모순 같았다. 누군가는 운동화를 준비해 놓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누군가는 와보지 못해 안타까워한 건 무슨 신파인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오늘로 윗세대의 밀린 과제는 해결된 것 같아 후련하기도 했다. 다시는 이 가게에 들러 서로의 안부를 나눌 일은 없을 터였다. 기훈이 오사카에서 직장생활하고 있다고 굳이 밝힐 필요도 없어 보였다.
“가게 이름에 겨우 마음 얹어두고 사는 처지니, 다른 변명은 하지 않겠네. 자네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전해주게.”
남자의 부탁에 기훈은 다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해 그만 가보겠다고 하자 남자는 갑자기 혈족으로 다가서며 기훈을 붙들었다.
“내 마음이 담긴 우동 한 그릇은 먹여 보내고 싶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남자의 등이 얼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바로 거절하지 못한 걸 후회하며 기훈은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계획과 달리 만남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기훈의 생각에 7촌이란 두 시간 이상 소요할 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6촌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다 해도 만난 적 없는 친족을 향한 아버지의 감정은 과잉 반응 같았다. 기훈은 친남동생들과도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었다. 어차피 가족의 도움 없이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루에 두세 개의 아르바이트로 버티며 이어온 생활에 형제의 정 따위가 스며들 여지는 없었다. 같은 자궁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서로의 삶에 얽혀들 권리는 없어 보였다. 각자 개인의 삶을 살면 되는 일이었다.
기훈이 오사카로 올 때 그의 아버지는 과하게 반겼다. 마치 자신이 못다 한 사명을 아들이 이뤄줄 것처럼 들떠 있었다. 심지어 신기한 운명이라는 말도 여러 번 했다. 취업 준비로 날려버린 삼 년의 시간을 일본 친족을 만나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할 때는 기가 막혔다. 아들의 피 맺힌 시간을 엉뚱한 운명에 끼워 맞추는 행태가 황당했다.
기훈은 대기업, 중견기업 가리지 않고 신입사원 모집 공고가 뜨면 입사원서를 넣었다. 1차 서류심사를 통과한 건 백여 곳 중 한두 군데에 불과했다. 사력을 다해 면접을 준비해도 기계처럼 불합격 통보만 돌아왔다. 어정쩡한 수도권 대학 이력으로는 입사 전쟁의 견고한 벽을 뚫기에 부족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딱 한 번 계약직으로 들어간 중소기업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정직원들은 너드미를 풍기는 녀석이라며 뒤에서 까내렸고, 모임에 끼워주지 않았다. 회사를 나와 다시 아르바이트를 뛰는 내내 가족들 얼굴 보기가 민망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식당 주방일을 나가는 어머니 얼굴을 보는 게 가장 괴로웠다. 작년 추석에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뵀을 때였다. 하반기 취업이 가능하겠냐고 묻는 할아버지 앞에서 기훈은 뻗쳐오르는 대꾸를 억지로 삼켰다. 만약 당신이 가난하지 않았다면 손자 인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항변하고 싶었다. 뒤따라온 죄책감에 집 밖으로 나가 중랑천을 무작정 걸었다.
청년이 다락방으로 다시 올라왔다. 그는 정갈한 우동 세트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처음으로 웃었다. 7촌 아저씨의 아들, 기훈에겐 8촌이 되는 셈이었다. 옻칠이 된 정갈한 나무 쟁반 위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우동 한 그릇과 세 가지 종류의 튀김, 단무지, 식초에 절인 마늘이 세팅되어 있었다. 일본식 면 위에 고명으로 얹은 정사각형의 유부와 벚꽃 모양의 어묵에서 우동 이상의 단아한 품격이 느껴졌다. 청년은 한국인의 입맛대로 고춧가루를 넣어도 좋다며, 추가로 챙겨온 양념통을 열어주었다. 기훈은 눈앞의 청년과 피를 나눠 가졌다는 사실이 현실 같지 않았다. 분명 청년은 일본풍의 복식에 완벽한 일본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한국 이름은 김기원입니다.”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청년은 겸연쩍게 웃었다. 같은 항렬의 이름을 가진 청년을 기훈은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삼대를 더 올라가야 형제가 되는 가계의 후손들이었다.
어색해진 기훈은 국물부터 한술 떠서 후후 불고는 입에 넣었다. 깊고 담백한 육수의 맛이 혀를 부드럽게 감쌌다. 깊은데 담백할 수 있는 모순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우려내고 또 우려냈으면 이런 맛이 날까 싶었다. 새삼 7촌 아저씨의 땀 밴 모습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도톤보리의 흔한 맛집보다 국물 맛이 훨씬 탁월했다. 한국 들어갈 때 만약 청년을 함께 데려간다면 아버지는 무척 반길 터였다.
“기원 씨는 한국에 가본 적 있어요?”
침묵이 버거워 기훈이 먼저 청년에게 질문을 건넸다. 없다는 단답이 바로 돌아왔다. 한국 성을 가졌을 뿐 역시 그는 일본인이었다. 기훈은 인사치레로 한국에 같이 가보자고 권하려다 그만두었다. 절친한 사촌이었던 두 할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는데, 조상을 핑계로 얽힐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미 희미해진 인연이었다.
“언젠가는 꼭 한국에 가보려고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십 년 이상 가게 일을 해왔어요. 365일 휴일도 없었고 결근한 적도 없어요. 오사카 도톤보리에서는 온전히 몰입하지 않으면 가게를 운영할 수 없답니다. 최상의 맛을 만들어내고 싶어서 육수 만드는 법과 면 삶는 법을 꾸준히 연구 중입니다.”
가업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청년도 우동 전문가가 되어 가는 듯했다. 그의 몰입에 공감해 주려다 기훈은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기훈이 아르바이트를 뛰며 취업에 골몰할 때도 청년은 최상급의 육수를 우려내기 위해 화덕 옆에서 땀을 흘렸을 터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견뎌온 인내가 청년의 눈에 보였다.
“사실 가게에 한국인이 방문하면 더 반갑습니다. 기훈 씨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한국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일본인이 되고 좋은 우동 가게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증조할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의 증조부는 물론 할아버지와 아버지까지 모두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고 들었다. 기훈은 청년의 마음에 담긴 한국이 의외였다.
“가게를 물려받을 생각인가요?”
초면의 질문으로는 실례일 테지만 청년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가업을 승계하려는 의지 안에도 선조가 포함돼 있는지 궁금했다. 청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일 없이 일하다 보면 가게가 답답하지 않아요?”
기훈의 질문에 청년은 희미하게 웃다가 이번에도 바로 대답했다.
“처음엔 가게를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타국으로 도망간 적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 여기 남았어요. 일본에 정착하려고 흘린 선조의 땀을 무시할 수 없었거든요. 일본의 가업 승계 문화를 잘 아시죠?”
가업을 거절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는 청년은 적도를 넘어 세상 끝까지 떠나봤다고 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무작정 호주에서 일 년 정도 머물렀다는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 시간을 보내던 청년은 이국땅에서 뿌리내리려고 처절하게 살아온 선조를 떠올렸다고 담담하게 밝혔다. 청년은 집을 떠날 때처럼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 날 바로 가게에 나와 육수를 우렸다고 회상했다.
“난 외아들이에요. 선조들의 가업을 승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내가 어디에 뿌리를 둔 사람인지 잊지 않는다면 삶의 형태와 공간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청년의 고백이 오랜 고민 끝에 얻은 답인 듯해 기훈의 마음도 진지해졌다. 가난한 집을 떠나온 것에 만족하고 있는 자신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기훈에게 이국의 낯선 도시 오사카는 도망가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취업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가족과 한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었다. 가난과 질병, 실패와 좌절…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기훈의 뇌리로 노심초사하며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게를 나서면 전화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쫄깃한 면발을 흡입했다.
가게를 나오기 직전에야 청년에게 일본 이름이 따로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싱긋 미소를 짓고는 대답했다.
“‘사쿠’예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한국 이름과 함께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장차 내가 만들 우동에도 벚꽃이 활짝 피길 바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 이름 ‘기원’의 뜻은… 아버지가 한 번도 말해준 적은 없지만, 나의 근원을 기억하라는 소망이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