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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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술은 왜 존재하는가
예술이라는 큰 틀 안에서, 문학에 초점을 맞추어 최근 동향을 살펴보고 미래를 조망한다. 예술의 세부 분야가 각기 그 표현 방식은 다를 수 밖에 없으나, 모든 예술이 추구하는 목표, 기능, 영향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우선 예술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BC.384년에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은 억압된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카타르시스란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참한 운명을 보고, 간접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두려움과 슬픔이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말한다.
정신분석치료에서는, 마음속에 억눌려 있는 감정의 상처를, 언어나 행동을 통해 밖으로 표출함으로써, 강박 관념을 없애고 정신의 안정을 찾게 한다. 우리 내부에 있는 무의식을 탐색하여, 트라우마 등 정신적 인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면하여 생각을 바꾸게 함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예술은 정신분석치료처럼 우리의 무의식에 접근하여, 어두운 욕망이나 마음의 상처 등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예술가 본인에게는 물론 유사한 심리적 상처를 가진 독자 및 관객 등 예술소비자에게도, 예술작품은 자에게도, 예술작품은 카타르시스 역할을 한다.
예술철학자 아도르노(T.W. Adorno; 1903∼69)도 표현은 달라도 결국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인간이나 오늘날의 인간이나 크게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현실의 고통을 표현하지 못하는 예술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다. 현실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는 예술이야말로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려고 왜곡시킨다고 했다. 아도르노의 예술관은, 현실의 고통을 표현해서, 직면케함으로써, 현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 출신 뭉크(E. Munch; 1863∼1944) 는 표현주의 화가이며, 노르웨이 지폐에도 그의 초상과 오슬로 대학 벽화 <태양>이 그려져 있다.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의 작품은 인간의 삶, 죽음, 고독, 불안 등을 표현하고 있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고흐의 작품을 접한 후, 자신보다도 더한 고난 속에서도 밝고 아름다운 색채를 사용한 고흐 작품에 매료되었다. 뭉크가 그린 <태양(The Sun)>에는 중심에 밝은 태양이 빛나고 있는데, 뭉크가 50세 되던 해 오슬로 대학 100주년 기념관 벽에 그린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인식되고 있는 <절규>가 아닌 <태양>이 지폐에 등장한 이유는, 이 작품이 나타내고 있는 희망의 빛 때문이다.
정신과 육체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던 니체(F.W. Nietzsche; 1844∼1900) 는 음악을 통해 삶의 기쁨과 영혼의 해방을 느꼈다고 한다. 음악을 하는 소크라테스를 꿈꿨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목회자 집안에서 나서 자란 탓으로 교회를 오가며 음악을 접했다. 생전에 70여 곡을 작곡하기도 했던 니체는 우울과 방황을 반복하면서 정신병원에 갇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피아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리하르트 바그너(W.R. Wagner; 1813∼83)와 교류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바그너는 작곡자이자 시인이었고, 철학, 심리학 등에도 능통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Lozano; 1914∼1998)는『활과 리라』서문에서‘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정신 수련으로 얻어지는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라고 했다.
200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가오싱젠(Gao Xingjian)은『창작에 대하여』에서,‘글을 쓰는 과정에서 위로와 즐거움이라는 보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 발표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해도 계속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문학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 기능에 관한 주장들을 요약하면, 예술작품을 제작하거나 감상함으로써 삶의 질곡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낄 수 있고, 희열을 맞볼 수 있다면, 그 작품은 구원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구원은 예술가에게도 예술소비자에게도 예술작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다.
2. 예술가란 어떤 사람인가
칼 융(1875~1961)의 분석심리학에 기대어 말하면, 예술가는 무의식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사람이다. 우리에겐 의식과 무의식이 있는데, 무의식은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무의식에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살아온 삶의 경험이 들어있고, 집단무의식에는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의 신화, 종교, 역사가 축적되어 있다.
집단무의식에 담겨 있는‘넓은 의미의 신화’를, 개인무의식이라 할 수 있는 개인의 예술론에 의해, ‘지금-여기’에서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 예술작품이다. ‘넓은 의미의 신화’란, 그리스-로마 신화를 비롯한 각 민족의 설화뿐만 아니라, 성경과 역사를 모두 포함한 개념이다. 성경은 최고의 신화이며, 역사란 소수의 리더(영웅)들에 의해 추동 된 사건들을 기록한 것으로, 유사한 내용을 신화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역사는 신화가‘지금-여기’에 맞게 수정, 복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피카소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는 예술관은, 결국 모든 예술은 과거 인류 삶의 흔적(집단무의식)과 예술가 개인삶의족적(개인무의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책, 그림, 음악 등 많은 좋은 작품을 접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창고인 무의식에 자료를 축적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작품 활동을 할 때, 조합되어 튀어나오는 것이‘예술작품’이기 때문에,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작품을 경험해야 한다. 어느 한 장르에만 매몰되기보다는 주변 예술은 물론 철학까지도 섭렵해야‘고전’반열에 오를 수 있다.
예술가는 단순한 자연의 모방을 극복하기 위해 추상화한다. ‘추상화 하다(to abstract)’라는 단어에는‘요약하다, 추출하다’라는 뜻이 포함되 어 있다. 대상을 보고, 관련 데이터를 나의 무의식에서 찾아내어, 요약 하고 응축하는 방법에 따라, 예술적 추상의 경향이 다르게 나타난다.
예술에서의 추상 방법은 예술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우선 사물을 바라보는 눈〔心眼〕이 다르고, 또 그것을 개인무의식에 기댄 예술혼에 의해 해석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모든 작품은, 아무리 구상적이라 하더라도,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나 모방이 아니므로 추상적이라 할 수 있다. 시(詩) 도 한 편의 추상화다. 독자가 자기 나름으로 시를 읽고, 이미지를 떠올려,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3. 예술소비자 즉, 독자와 관객은 어떤 사람인가
독자나 관객은, 예술가의 작품 의도와 이미지로부터 해방되어, 예술 소비자 자신의 무의식에 의거 각자 나름의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여 예술작품을 해석한다. 예술소비자와 예술생산자는 공존하면서 독립적인 존재다.
우리는 작가가 의도하는 내용을 항상 알 수는 없으며, 설령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작품은 그 의도에 부응하지 못할 수 있다. 또한, 독자가 작가의 의도하는 바와 전혀 다른 해석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작품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한 편의 시가 여러 가지로 읽힐 수 있는 예를 보자. 아무리 읽기 쉬운 시라 하더라도 추상화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수많은 발자욱이 해변에 어지럽다
바다는 하얀 포말을 밀고 당기며
열심히 다림질하여
갈색 비단을 펼쳐놓는다
사람들은 그 위에
발자욱을 다시 찍는다
수천 년을 바닷가에서
팽팽하게 대립하는
발자욱과 파도의 밀고 당김
—김철교,「파도와 발자국」〔『아침에 읽는 시』(시문학사, 2018)〕전문
「파도와 발자국」“내용은 해안의 모래에 찍힌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을 파도가 지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를 만들 때 썼다가 지웠다가 하며 수정하는 창작과정을 말하는 것이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더라도 무방하게 된다. 이것은‘인간과 자연의’밀고 당기는‘줄다리기’가아닌 인간의 죄 흔적과 신이 베푸는 은혜의 구속사적인 모습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정재영,「정재영의 명시산책」(『기독교한국신문』, 2014. 8. 4.〕
여기에서 독자인 평론가는, 시를 쓴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한 편의 시를 세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는 해안의 모래에 찍힌 사람들의 발자국을 파도가 계속 지워대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 둘째는 시를 썼다가 지웠다가 하는 시인의 창작과정, 셋째는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죄를 계속 하나님이 용서하는 장면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짧은 시이지만, 평론가는 세 가지 이미지로 읽고 있다.
필자는 미니멀리즘 기법4)을 염두에 두고「파도와 발자국」을 썼으며, 영원한 자연 앞에서의 찰나적인 인간의 무력함을 담고 싶었다. 미니멀리즘은 최소한의 단위를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술에 있어서,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여 작품의 본질적인 특성에 집중하는 것을 말하며,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즘은 짧은 구절과 동일한 음의 반복, 일정한 박자와 화음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미니멀리즘의 시는 에즈라 파운드의「In a Station of the Metro」, 일본 하이쿠, 우리나라 단시조처럼 짧은 것이 특징이지만, 표현의 간결성, 주제의 단순성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일상의 사소한 일 같지만, 심층에 다른 세계를 품고 있는, 말하자면 무기교의 기교를 중요한 특징으로하고있다.
예술소비자(특히 평론가)는 신비평에서처럼 꼼꼼히 작품 자체를 깊이 분석하고 주제를 찾아내어 유기적인 통일성을 발견하려 하되, 예술가 삶의 궤적과 시대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작품 내의 인물과 사건에 미친 정신분석학적 접근 등, 여러 가지 독법이 조화를 이룰 때, 비교적 충실한 작품 이해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물론 독자나 관객의 관점에서 독특한 시각, 다시 말하면 평론가 자신의 정신적, 지식적, 감성적 문법에 의한 독특한 향기가 첨가되면 화룡점정이 아닐까 싶다.
절대음악이나 추상미술 등 추상예술의 장점은 예술생산자에게나 예술소비자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자유를 허용한 데 있다. 절대음악은 음의 형식 그 자체가 내용이 되는 음악으로, 대부분의 교향곡, 소나타, 협주곡 등이 해당된다. 예술소비자는 예술가가 어떤 이미지를 그리려고 했는지, 어떤 대상을 어떤 주제로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와 닿는 이미지로 받아들이면 된다.
예술소비자가 예술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작품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낯설게 하기’가 성공한 것이다. 너무 쉽게 경구처럼 읽히는 시는 그 글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고 그 이상 더 상상의 날개를 펴기가 어렵다. 소위 이발소 그림이나 낙서처럼 말이다. 너무 빤한 이야기는 깊은 예술적 향기가 없다.
소통이 불가능한 작품도 예술소비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낙서와 추상미술은 다르다. 소통 부재의 시(詩)는 낙서와 같다. 추상미술이 소통부재는 아니다. 어떤 작품을 대했을 때 예술소비자가 어떤 통일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은 낙서가 아니다. 비록 확실하게 의미는 파악할 수 없지만, 예술소비자에겐 어떤 전체적인 이미지 형성에 공헌하고 있다면 그 나름의 훌륭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잭슨 폴록의 흩뿌리기 기법으로 그린 그림이 예술소비자들에게 나름대로 미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공감을 갖게 되고 좋은 작품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작품을 대할 때 통일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낙서와 같은 것이다.
각종 비평이론을 적용하여 분석하고 자기 무의식과 지식(의식)을기반으로 읽는 사람이 예술소비자의 하나인 비평가다. 비평가는 작품의 단점을 캐내려는 것이 아니고 장점을 찾아내어 격려함으로써 그 장점을 발전시켜나가도록 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왜냐면 그 작품의 단점이라고 느끼는 것이, 읽는 사람의 방어기제에 걸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식도, 절대적인 아름다움도, 절대적인 선도 인간에게는 접선 불가능한 영역이다. 누구든 어떤 작품에 대한 가치를 말할 때, 그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오직 차이만을 나타낼 따름이다.
아무리 훌륭한 것으로 인정되어 온 명작이라 하더라도, 예술소비자의 과거 심리적 상처를 건드릴 경우, 거부감을 가지고 외면해 버린다.
똑같은 그림, 똑같은 음악, 똑같은 문학작품이라 하더라도 이를 대하는 사람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다른 이유다.
4. 최근 예술의 방향성은 어떤가
시각예술은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발전의 전위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미술의 현재를 분석해보면 문학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금년 2월에 선정한 <올해의 작가상 2023>을 보면 현대 예술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 다. 올해의 작가상’은 오랫동안 SBS문화재단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매년 선정하여 시상해 오고 있다.
원래 음악을 전공한 수상자 권병준의 작품에서는“이주민들의 낯선 노래들과, 풍경의 향, 지나간 시대의 변화가 사운드 하드웨어에 담겨 전시장에서 제공”되고 있고, “작가는 인간을 닮은 비-인간의 상징인 로봇을 파트너로 삼아, 이 비눗방울과 같이 투명하고 아름답지만 찰나적인 공동체가 이웃과 타인의 구분을 넘어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인간 공동체의 궁극적인 한계를 시험한다”고작품 해설로 제시하고 있다. 언뜻 보면, 번쩍번쩍 시끌시끌하여 신기하고 아름답지만, 해설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전기가 꺼지면 작품은 죽은 것처럼 보인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백남준의 작품도 마찬가지로 전기가 흐르지 않으면 컴퓨터 혹은 TV의 모니터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현대미술의 지금과 미래를 조망할 수 있다. 첫째, 예술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있다. 음악과 디지털 색채의 어울림 또한 스토리텔링이 없으면 이해가 불가능한 작품이다. 둘째,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관계 등‘여기-지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이민자는 물론, 로봇과 인간과의 관계에까지 눈을 돌리고 있다. 셋째, 기술적 측면, 즉 각종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역할이 큰 몫을 해내고 있다.
미래를 이끌어나갈 AI가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즈음은 더욱 기술적 지원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인간 삶은 워낙 복잡하여, 만족스럽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를 참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AI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문화, 예술까지도 아우르는 모든 정보를 기반으로 답을 찾아내는 것을 기본원리로 하고 있다. 문학도 인류가 쌓아온 삶의 데이터베이스인 무의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모든 예술작품은 이러한 무의식의 의식화 작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열린 예술’이라는 흐름이 점차 파고를 높이고 있다. 시각예술에서는 이미 평면적인 그림에 머무르지 않고 입체화되고 있으며, 대상을 그대로 찍은‘날 사진’에서 벗어나 각종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다듬는 작품 제작이 일반화되어 있다. 벽면에 붙어 있는 그림이 무대로 나온 지 오래되었고, 이제 전자 매체의 지원을 받아 디지털 색상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 각종 인터렉티브 콘텐츠(interactive contents)를 비롯하여 웹소설과 스마트소설, 디지털포엠 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예술은 진부한 것을 참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모색해 나가는 것을 속성으로 하고 있어, 많은 예술사조가 등장해 왔다. 신화를 매
개로 현세주의에서 출발한 인성 중시의 헬레니즘과, 성서에 중심을 둔 신성을 중시한 내세주의를 표방한 헤브라이즘에서 출발한 문예사조도, 이성과 감성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고 있으며, 내적/정신적 측면과 외적/형식적 측면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이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도출되었다.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고전주의와 주지주의는 이성을, 낭만주의와 유미주의는 감성에 무게를 두었다.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는 외적/형식적 측면에 관심을 가졌으며,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는 내적/정신적인 측면에 치중하였다.
이제 아서 단토(Arthur Danto; 1924∼2013)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 칸막이가 무너져버렸다. 아서 단토의『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예술가가 예술에 관한 어떤 이론에 의거, ‘예술은 이런 것이다’라고 주장하면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거리에 나뒹구는 찌그러진 깡통도 갤러리 전시실에서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의 옷을 입으면 예술작품이 된다.
예술의 종말이란, 예술 자체가 종말을 고했다는 것이 아니다. 미술의 개념은 바자리(G. Vasari; 1511∼74)가『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 전(Le Vite de Piu Eccelenti Pittori. Scultori et Architeili Italiani, 1550)』을 쓴 르네상스 때에 비로소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미술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단토는 바자리 이후 1964년까지의 서양미술사를 하나의‘르네상스 패러다임’6)에 비유했는데, 이 전형이 1964년 워홀(Andy Warhol; 1928∼1987)의 <브릴로 상자(Brillo box, 1964)>가 등장하면서 종료되었다고 보고 있다. 1965년부터를‘서양미술사 이후’의 시기로 인식하면서, 예술가는 이제 모든 형식과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예술가의 유일한 역할은‘예술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7)
현대 예술의 큰 흐름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모더니즘은, 19세기 사실주의(Realism)에 대한 반발로 촉발되었다. 사실주의에서는 대상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는 재현(representation)을 강조하여 대상을 실물처럼 묘사하려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객관적 진리 자체에 대한 회의로 단 하나의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미술의 경우 대상은 보는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되어 입체파 등 구상보다 추상을 추구하였다.
문학에서는 저자의 서술 대신, 주인공 의식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제임스 조이스가 1922년 발표한「율리시즈」 다. 그러나 이러한 모더니즘은 난해하고 추상적인 기법으로 대중과 유리되기 시작하여, 이를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대두되었는 데 이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 한다.
미술에서는 추상 대신에 대중성을 띤 구상이 등장하였다. 마릴린 먼로 같은 대중성 있는 사람의 얼굴을 여러 가지 색깔로 반복하여 실크스크린에 찍어내는 등 팝아트가 등장하였고(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모나리자>와 같은 친숙한 그림을 패러디한 작품(듀샹이 1919년 모나리자에 수염을 붙인 그림 <L.H.O.O.Q.>)이 등장하였다. 얼마 전에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코미디언>에서 바나나를 벽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전시했었는데, 억대의 금액으로 매매되기도 했다.
문학에서는 인물의 독백이 사라지고 다시 저자가 정면에 등장하지만 19세기 사실주의와 같은 절대재현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소설 속의 소설, 극 중의 극 같은 메타 픽션이 등장하여‘작가가 자신의 서술을 되돌아보고 의심하는 자의식적 서술’이 등장하였고, 현실 세계와 비현실세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도 한다.
또한, 미니멀리즘 소설에서는 작가의 권한을 최소화하기 위해 불필요한 언어를 최대한 제한하여, 독자가 사고하는 영역을 넓혀주고 있다.
최근 스마트폰에 중독된 현대인을 위한 스마트소설도 주목을 받고 있다. 장편(掌篇)소설, 엽편(葉片)소설, 미니픽션(minifiction), 콩트처럼 짧으면서도 완결성이 있는 스마트소설은 압축미, 간결미, 시사성을 가지되 정통 서사의 품격과 문학성을 추구한다.8)
이하에서는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열린 소설(interactive novel)’과 ‘디지털 포엠’을 중심으로, 문학 분야의 종합 예술화 경향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본다.
(1) 열린 소설의 가능성: 넷플릭스 <블랙미러: 밴더스내치>
넷플릭스의 <블랙미러>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비현실적이다 싶은, 미디어와 과학기술의의 이면을 다루기도 한다. 이 중에 <블랙미러: 밴서스내치>는 시청자 참여형 영화다.
스토리가 진행해가는 도중, 수시로 시청자가 선택하도록 하는 선택권을 준다. 예를 들면, 아침 식사로 무엇을 먹을까 메뉴를 제시하면 어떤 메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후 진행되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또 스토리가 진행되다가 등장인물을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시청자에게 묻는다. 어떤 등장인물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그 이후 진행되는 스토리가 달라지는 형식이다. 중간중간 시청자에게 주어진 선택에 따라 그 이후의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다양한 결말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기법은 웹소설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인터렉티브 소설(interac-tive novel)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웹에서 소설을 읽어가다가 중간중간 독자에게 인물, 장소 등 선택권을 주고, 그 선택권에 따라 그 뒷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전개한다. 독자의 선택에 따라 다양한 결말에 이르는 소설이 만들어질 수 있다.
(2) 인터렉티브 콘텐츠 개념을 활용한 디지털 포엠
예로 제시한 디지털 포엠「POWER & MONEY로 만든 신호등」은김 동유의 그림과 앤디 워홀을 작품을 차용하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을 한 송이 꽃으로 표현하였다.
다섯 개의 꽃잎은 김동유의 작품이며, 잎과 줄기와 뿌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돈(생존수단)과 섹스(종족보존수단)와 권력(돈과 섹스를 얻기 위한 수단)을 상징하는 세 가지 색깔의 글씨, 그리고 삼원색의 총합을 나타내는 검은 색 글씨(마릴린 먼로 vs 마오 주석)로 구성되어 있다.
암술과 수술이 있는 부분은, 워홀의 작품에서 차용한, 노랑(yellow) 머리와 붉은(magenta) 입술과 청록(cyan) 눈화장의 마릴린 먼로다.
배경음악에 따라, 글씨는 네온처럼 반짝이고, 김동유의 그림은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나풀거린다. 마릴린 먼로의 머리털, 눈, 입술도 배경음악에 따라 움직인다. 배경음악은 2016년 노벨문학상 수장자인 밥딜런(Bob Dylan; 1941∼ )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In The Window)>의 곡을 차용한다. 이 노래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모순에 관한 아홉 개의 질문을 던지면서, 그 대답은‘바람만이 알고 있다’고한다.
김동유(1965∼ )의 유화 <마릴린 먼로 Vs 마오 주석, 130×162Cm, 2005, 캔버스에 유채>는 2006년 5월에 홍콩 크리스티에서 열린 아시아 현대미술 경매에서 258만4,000홍콩달러(약 3억2,300만 원)에 낙찰되었다. 김동유는 작은 픽셀로 된 마오쩌둥의 초상을 이용해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그렸다. 작은 마오 주석의 사진이 모여 먼로의 얼굴을 구성하고 있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얼굴은 필자가 MoMA(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촬영한 작품에서 차용하였다. 이들 그림을 활용하여 기획한「POWER & MONEY로 만든 신호등」은, 사진 편집 프로그램과 동영상제작 프로그램 등을 활용하여, 배경음악과 함께 움직이는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디지털 포엠’으로 만든 것이다.
김동유의 그림으로 만든 꽃 이파리(5개) 하나하나를 클릭하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역사, 의미, 장점, 단점 등에 관한 전문적인 글들을 접속할 수 있도록 하이퍼텍스트 기능을 도입한다. 다만, 먼저 국민을 선동(좋은 의미)하여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키는 내용을 제시하고, 독자의 댓글을 통해 더 좋은 방법을 다듬어 가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클릭하는 사람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개량시킬 방법을 고민하게 하도록 치밀하게 프로그래밍할 필요가 있다.
「POWER & MONEY로 만든 신호등」에서 꽃 이파리마다에 독자가 참여하여 수정 보완될 수 있는 내용은 정밀한 편집으로 사사시 형태로 제작되어야 한다. 21세기가 문을 열자마자 시도되었던 하이퍼텍스트 소설「디지털 구보 2001」과 하이퍼텍스트 시「언어의 새벽」이실패10)한 이유도 정밀한 프로그래밍의 결여로 보인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진화되어야 할 것인지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돈과 섹스와 권력은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고, 자본주의는 이 셋을 향유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셋을 마음대로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므로, 민주주의는 이 셋을 골고루 나누어 갖자는 투쟁의 이념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 대다수 민중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행복지수를 높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많은 사람은 돈과 섹스와 권력을 남보다 많이 향유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질곡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꿈꾸고 있다. 과거의 모든 화려한 문화가 소수의 가진 사람들의 역사였던 것처럼, 여전히 지금도 돈과 권력과 섹스의 역사는 가진 사람들이 써가고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사회 및 정치 시스템을 통해 보다 낳은 자본주의, 보다 낳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모색하겠지만, 워낙 인간의 욕망이 순정하지 만은 아니하기에 정답은 얻기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의 발전에 따라 모든 분야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지금의 하이퍼미디어 시대는 예술의 종합화가 구현된 영화 와 같은 작품이 일반화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