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먼저
소설가 ·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37
2
글을 쓰는 사람을 문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문인이 쓴 것을 문학작품이라고 한다. 따라서 문인들은 그 문학작품이라는 것을 잘 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바꿔 말해, 문학성이 있는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작품을 창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노력만 한다고 꼭 될 일도 아니다.
사람에게는 각자 지니고 있는 재능이 있어 훌륭한 문학작품을 창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문학작품에는 시, 소설, 수필 등 여러 장르가 있다. 장르마다 제각기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공통된 점은 사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람이 쓰는 작품이니 사람이 배제될 수는 없는 노릇이겠으나, 그런 소재적인 면에서의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만큼 작품 속에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인간이 들어가 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작품을 읽으면서 그런대로 좋은 작품이긴 했으나, 그 작품 속에는 ‘인간미’가 결여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저 그럴듯하게 포장된 작품, 얼핏 보면 참 잘된 작품으로 보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앞서 말한 인간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좋은 작품으로 평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문학작품을 지성으로만 쓰려고 하면 그런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지성과 올바른 인성이 함께 작품을 창출해야 정말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다.
미국의 제21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는 200일의 짧은 재임기간을 마친, 어찌 보면 불우한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는 학창시절 미래의 꿈을 묻는 질문에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별것 아닌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새겨들으면 큰 울림을 남기는 말이다.
정치를 하든 법률가가 되든 재벌이 되든 예술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 간에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인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다음에 무엇을 하든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있고, 모든 사람을 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문학작품 속에 따뜻한 인간미가 들어가 있을 때, 그 작품은 더욱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고, 진정한 의미의 문학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처음 작가가 되면 작품을 쓸 때는 그저 무조건 좋은 작품을 쓰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경향이 많다. 흔히 주변으로부터 잘 쓴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급급해서, 정작 지녀야 할 ‘인간’이 결여되어 있는 작품을 쓰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문학작품은 그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이는 속빈 강정과도 같은 격이다. 우리 문인들이 무엇 때문에 작품을 쓰는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산고의 고통을 이겨내며 원고지와 씨름하며 힘든 작업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보자.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나만이 지니고 있는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흡사, 신라의 이발사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을 참을 수 없어 소리쳤던 그런 심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욕구가 가슴에서 치밀어 올라 글을 쓰는데, 그것이 단순한 자신의 욕구를 풀어놓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그저 욕구 해소에 불과한 것이니, 이를테면 타인에게는 하등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문학작품은 앞서 말한 그런 자신의 욕구 해소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작품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고, 나아가 타인도 구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문학작품으로서의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작품은 종교처럼 구원의 작업이기도 하다. 작품을 통해 삶의 가치를 알려주고, 그 가치 속에서 인생과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을 쓰려면 무엇보다도 인성을 다듬고, 그 다듬은 인성 속에 인간에 대한 따뜻함을 지녀야 가능한 것이다.
문학이전에 사람으로서 지닌 올바른 인성이 있어야, 사람을 위한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저 얄팍한 생각에서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는 그런 작품은 얄팍한 글재주만으로도 가능하다. 아니, 단순한 글재주만으로도 웬만한 글은 잘 쓸 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글재주에 불과한 것이지, 문인이 쓴 진정한 문학작품은 아닌 성싶다.
적어도 문인(작가)이 쓴 문학작품이라면, 그 작품 속에는 따뜻한 인간애가 살아 있는 ‘인간’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인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과 함께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어야 한다. 아울러 그 인간애를 통해 인류가 추구하고 있는 휴머니즘적 사랑과 평화가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문학작품다운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점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렇게 작품이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문인이 문인다운 생각과 문인다운 인성과 가치관을 스스로 다듬고 만들어, 자신도 모르게 그런 방향으로 작품을 쓰려고 노력할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문인은 글을 쓰는 노력보다도, 이렇게 문인다운 자세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것은 각기 타고난 성격과 살아온 삶의 과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꾸준히 노력하면 문인다운 품성으로 바뀌고, 문학작품 또한 글재주만으로 쓴 것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훌륭한 문학작품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어야 작품 속에 살아 있는 ‘인간’을 넣을 수 있음을 가슴 깊이 새겨보아야겠다. 정말 진정한 문인이 되려면, 글보다는 우선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다음 작품 속에 살아있는 뜨거운 인간애를 담아야 비로소 훌륭한 문학작품이 될 수 있음을 거듭 말하고 싶다.
따뜻한 봄빛에 새롭게 약동하는 신록처럼, 우리 문인들 가슴에도 따뜻한 인간미가 더욱 샘솟길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