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겨울호 2024년 12월 69호
33
0
새파란 바탕에 경찰이라는 단어는 흰색으로 돌출된 간판 앞에 섰다.
눈에 잘 띄도록 제작되었을 것이다. 늘 무심히 지나쳤는데, 비로소 자세하게 보았다. 치안센터에 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 찾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도 나는 치안센터를 찾으려고 주변 상점에 물으면서 돌아다녔다. 경찰이라는 고딕체 단어는 경직되어 보였는데, 경찰 캐릭터 호돌이와 호순이가 활짝 웃는 얼굴로 두 팔을 펼친 채 맞이했다. 숨을 크게 한 번 쉬고, 유리문을 손으로 밀었다. 내가 들어오는 걸 거부하듯 문은 무거웠다. 몸을 유리문에 밀착하여 힘을 주자, 고꾸라질 듯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친절한 말투지만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경찰이 물었다. 마음은 급한데 입천장과 혀가 말라붙은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 손으로 목을 주무르며 침을 몇 번 삼켰다. 다른 손으로는 수어 하듯 휘저었다. 다른 경찰관이 천천히 말하라며 물 한 잔을 건넸다. 이번에는 급하게 마시다 사레가 들려 캑캑거리며 눈물이 찔끔 나왔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더듬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게요. 그게, 그게 말이에요. 저, 저 시어머니가 실종됐어요.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말을 맺기 전에 눈물이 후드득 쏟아지고 목이 메었다.
“언제, 어떻게 실종되었는지 차근차근 말해 보세요.”
“그게요. 글쎄요. 오늘 아침인데요.”
머리카락 사이로 땀이 가랑비 내리듯 얼굴을 타고 흐르고, 눈물과 섞여서 범벅이 되었다. 경찰은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의자에 앉아서 말할 여유가 어디 있냐고, 어머니가 없어졌다고 빨리 찾아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경찰도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자세히 말해 보라며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아침에 병원에 가셨거든요. 병원에는 왔었다는데 그다음부터 연락이 안 돼요.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으세요.”
“몇 시에 나갔지요? 몇 시부터 연락이 되지 않는 건가요?”
“아침 8시쯤이었어요. 중간에 전화를 한두 번은 받으셨는데, 지금 몇 시인가요? 2시네요. 그러니까 아마 12시에서 1시 사이에 어머니가 전화 받은 게 마지막이었어요.”
“할머니가 치매이신가요?”
“아니에요. 치매 아니에요.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치매가 아니면, 집을 찾아갈 수 있을 테니까, 기다려보시지요.”
“아니에요. 아닌 거 같아요. 전화를 안 받아요. 전화를 받으면 기다리겠는데, 전화를 안 받아요.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어요? 찾아주세요. 못 찾으면 어떻게 해요.”
어느새 내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울음이 가득 차 왕왕거렸다.
“평소 할머니가 다니던 병원에 가신 건가요? 그렇다면 익숙하실 텐데….”
“며칠 전 이사를 했어요. 그래도 전혀 낯선 길은 아니거든요. 중간에 경동시장에서 내려서 갈아타야 하는데, 경동시장은 자주 가서 그 근처가 익숙해요. 거기서 갈아타면 병원 앞에서 내리니까 혼자서 갈 수 있다고 했거든요. 근데 경동시장에서 내렸는데 어떻게 갈지 잘 모르겠다 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택시를 타라고 했고, 택시 기사한테 병원 앞에서 내려주라고 해서 잘 가실 줄 알았어요.”
“그럼, 병원까지는 잘 가신 거네요?”
“네, 병원에 가서 확인했어요. 진료받은 거까지. 병원에서 기다리면 제가 데리러 간다고 했는데, 병원에 가니까 없더라고요.”
“주변은 찾아보셨어요?”
“그럼요. 무악재 고개까지 가 보고 서대문 로터리까지 다 가봤는데, 없어요.”
없어요까지 말하고 나자, 몸에서 힘이 전부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병원에 안 가도 괜찮겠어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보호자가 정신을 차리셔야 해요. 할머니는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니라고, 우리 어머니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병원만 갔다가 집으로 바로 온다고 했었다고 말해도 경찰은 나만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실종 신고는 24시간이 지나야 접수할 수 있어요. 그러니 오늘은 기다려보세요.”
무슨 소리냐고, 노인네가 없어져서 연락이 안 되는데 24시간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을 수 있냐고 나는 소리쳤다. 경찰은 나 같은 사람 수없이 봤고, 이런 일 무수히 겪었을 테니, 내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설명하면서 오히려 나를 설득했다. 그리고 사고가 났으면 바로 알 수 있다. 오히려 아무 사고가 나지 않아서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집에 가서 기다려라. 그런 얘기만 반복했다. 생전 처음 치안센터에 간 나는 경찰한테는 어떻게 얘기해야 경찰을 움직일 수 있는지에 대해 무지했다. 아무 소득 없이 몸으로 밀었던 유리문을 다시 몸으로 밀어서 밖으로 나왔다. 6월 하순 오후의 해는 한여름처럼 열을 뿜어 아스팔트가 이글거렸다. 잠시 멈췄던 땀은 머리에서 이마로 콧등에서 인중으로 타고 흘렀다. 차라리 어머니가 아니라 내가 길을 잃은 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잃은 아이는 목 놓아 울기만 하면 되었다. 엉엉 소리내 울기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어린 시절 시장에서 엄마의 손을 놓쳐 혼자가 되었을 때, 엄마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울기만 했었다. 어린아이의 특권이었다. 얼마나 엄마를 부르며 소리내 울었을까? 어른들이 한 사람씩 가까이 와서 이것저것 물었다. 손에 먹을 것을 쥐여 준 사람도 있었다. 눈물이 흐르던 양쪽 볼의 물기가 말라서 피부가 당기고, 콧물이 흘러 얼굴은 꼬질꼬질해졌을 것이다. 집 잃어버린 아이 같아 보였을까?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높은 곳에 앉혀 놓고 음료수를 주면서 달랬다. 이렇게 높이 앉아 있으면 엄마가 찾을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울다 울다 지쳐 눈꺼풀이 자꾸 감기는데, 흐느낄 때마다 놀라 눈이 벌떡 떠졌다. 다행히도 멀리서도 보였는지 엄마가 나를 찾았다. 어디 사는지, 엄마 아버지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간신히 내 이름만 알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엄마를 잃어버린 사건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 후 오랫동안 길을 잃고 울며 헤매는 꿈을 꾸었다. 너무 어려서 내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어머니가 실종된 사건이 불러올 미래가 두려웠다.
2
분명히 산이 보였었다. 산이 보여야 한다. 우뚝 솟은 높은 탑의 일부가 보이기 시작하면 산도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이쪽으로 걸어가면서 늘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걸어가곤 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산도 탑도 보이질 않는다. 병원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걸어가면 짐작하는 대로 되었었다. 그 산은 내가 가야 할 방향의 지침이고, 시작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곳에서 멀리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전쟁이 났다고 수군대는 목소리가 우리집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평소대로 하루를 꽉 채워서 일을 할 뿐이었다. 전쟁을 겪은 적도, 눈으로 본 적도 없어서 얼마나 참혹한 일인지 몰랐다. 전쟁이 났다는 소문이 고개를 몇 개 넘어 우리 마을까지 전해진 것은 전쟁이 일어나고 한참 지난 때였나 보다. 황해도 은율 두메산골은 소식이 전해 오기에도 깊은 산골이었다. 아버지는 어쩌면 전쟁보다 농사 수확량을 더 무서워했을지도 모른다. 굶어 죽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서 식구 모두 해 떠서 질 때까지 일을 해야 했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해를 넘겼어도 우리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 해를 넘기자, 우리집에 전쟁을 실감하는 일이 생겼다. 오빠 둘이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떠나는 오빠들에게 어찌 되었든지 죽지만 말고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만 반복했다. 다짐과 기원은 그럴 수 없는 현실에서 마지막에 해 보는 바람이다. 떠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오빠 둘의 전사 통지서가 왔다. 아버지는 밭으로 나가 캄캄해질 때까지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변할 것 같지 않던 동네가 뒤숭숭해졌다. 비행기가 수시로 지나가며 포탄을 떨어뜨렸다. 결국 동네에 포탄이 떨어져 사람들이 죽자, 짐을 이고 지고 동네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겼다. 바닷가에 배가 왔다고, 이번이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거라는 말이 떠돌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절대 떠나지 않을 것 같던 아버지는 거의 마지막으로 마을을 떠났다. 우리 식구의 짐은 단출했다. 곧 돌아올 거라는 아버지의 말 때문이었다. 엄마는 억지로 떠밀려 배를 탄 사람처럼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든 다 마찬가지지, 뭐가 더 나을 거라고 동네를 떠나는 거냐고 투덜거렸다. 그때는 그렇게 배를 탄 것이 그나마 행운인 줄, 고향에는 살아생전 다시 오지 못할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배멀미는 지독했고, 입으로 창자까지 토해낼 뻔하면서 진도 항에 짐짝처럼 내쳐져서 몇 시간 동안 땅바닥에서 누워 있었다. 진도항이 한반도의 어디쯤 있는지 모르는 건 나도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거기에서 어떤 사유로 서울까지 왔는지 모른다. 아버지도 차근차근 이야기해 줄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고, 이야기한들 가족 중 누가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서울역에 내려졌을 때도 배에서 내렸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열 살을 갓 넘긴 나는 그날 서울역에서 태어나 가장 많은 사람을 보았다. 인파 때문에 멀미가 나서 더 어지러웠고, 땅바닥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세차게 따귀를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리라고. 아버지도 처음 밟아 본 서울 땅, 서울역 앞 많은 사람 사이에서 가장으로서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버지는 엄마, 언니와 나를 세워 놓고 남산을 가리켰다. 만약 가족과 헤어지게 되면 저 산을 기억하라고, 산에서 멀리 벗어나지 말라고 서울역과 남산을 잊지 말고 이 근처에서 머물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아버지가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까, 나는 엄청난 피난민이 휩쓸고 다니는 길에서 아차 하는 순간 부모와 헤어지고 말았다. 아버지 말처럼 나는 서울역과 남산 사이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굶어 눈에 헛것이 보여도 서울역 앞이 보이는 만큼만 멀어졌다가 되돌아왔다. 고아가 된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남자들이 와서 데려가려고 해도 나는 낯선 아주머니 치마폭을 한 손으로 잡고 딸인 양하며 잡혀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다시 만난 가족들은 남산 근처에 판잣집을 짓고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 후 평생 남산과 멀어지면 불안증이 도졌다. 지방에 갔다가 돌아올 때도 멀리 남산이 보이면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 남산이 보이는 쪽으로 가면 내가 가야 할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 낯익은 길에서 정신이 차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 조각만이라도 보이면 될 텐데, 보이질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수없이 걸어 다녔던 병원에서 서울역 사이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되뇌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갑자기 너무 낯설다. 처음 온 길처럼.
다시 병원으로 가야 한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병원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고 싶지만, 갑자기 병원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왜 이러는 걸까, 치매가 오는 걸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마도 당황해서 그러는 걸 거다. 평소에도 당황하면 잘하던 것도 되지 않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은 경험이 있었다. 치매와는 다른 거다. 병원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니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가 봐야겠다. 낯설게 보니까 모든 것이 낯설게만 보인다. 가슴이 쿵덕거리며 숨이 가빠진다. 전쟁 중에 서울역에서 길을 잃었던 사건 후 평생 혼자 멀리 가지 않았다. 가는 데만 가고 가던 길로만 다녀서 길을 잃지도 않았었다. 수술한 양쪽 무릎이 점점 뻣뻣해지고 무겁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기운은 점점 빠지고 주저앉고만 싶다. 그래도 병원으로 가야 한다. 병원만 가면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걸었다. 아주 천천히 다리를 질질 끌고 그러나 멈추지 않고.
3
아침에 시어머니가 집을 나설 때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병원 예약을 변경해서 같이 가자고 했다. 전에 살던 집보다 거리도 멀어졌고,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서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평소에 고집이 센 편은 아닌데, 간혹 고집을 부린다. 그중 하나가 병원 문제이다. 양쪽 무릎 인공관절 치환 수술을 받고 나서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 당장 아파서 가는 것이 아니니, 꼭 오늘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혼자 갈 수 있다니까. 경동시장에서 갈아타면 된다며? 경동시장은 자주 다녀서 잘 알아.”
“걷는 게 예전 같지 않으니까 그렇죠. 버스 타고 내리기 힘들까 봐요. 그럼 차라리 택시 타고 가세요.”
“돈이 얼만데. 여기서 병원까지 택시를 타냐? 일찍 나가서 천천히 가면 될걸.”
어제저녁부터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오전에 부동산과 중요한 일이 있어서 시어머니를 병원까지 동행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딸에게 시어머니를 버스 태워드리고 학교 가라고 부탁하고, 시어머니에게는 핸드폰을 잘 챙기고 전화를 꼭 받으라고 신신당부했다. 담담하게 집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왜 편치 못했는지 그때는 몰랐다.
벨이 한참 울렸다. 핸드폰이 감정이 있다면 화가 나서 들썩거릴 것 같다. 전화가 울리면 빨리 받지 않는 것은 집안 내력이다. 시어머니와 남편 모두 전화를 빨리 받지 않는다. 그뿐 아니다. 전화를 걸고도 먼저 말하지 않는다. 액정에 누가 전화했는지 알 수 있는 핸드폰을 전 국민이 갖고부터 그 답답함은 사라졌지만, 그 이전에는 전화를 받고 ‘여보세요’를 두세 번은 하면 “나다” 또는 “나야”라고 말해서, 적응될 때까지 나는 속이 터졌다. 왜 그러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다만 포기했을 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어머니가 핸드폰을 열어서 전화를 받은 것은 울림이 지칠 때쯤이었을 거다.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인가 보다 하고 끊었겠지만, 끈질기게 기다렸다. 전화를 받을 때까지. 내 머리가 폭발하기 직전, 마침내 시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조금 전과 달리 전화를 받아준 것만 고마웠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머니, 지금 어디예요? 경동시장에 내렸어요?”
전화가 끊기면 언제 또 전화를 받을지 몰라 속으로 애가 타서 빨리 물어봤다.
“으응, 내렸어. 근데 잘 모르겠네. 낯익지가 않어.”
낯익지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속이 탔다. 다른 곳에서 내린 걸 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경동시장 정류장 아니에요? 잘못 내리신 거예요?”
“아니여, 경동시장이라고 해서 내렸는데, 잘 모르겄네.”
한숨이 나왔다. 재빨리 생각의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어쩐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난감했다.
“어머니, 안 되겠어요. 근처에 택시 있으면 택시를 타세요. 그리고 기사를 바꿔주세요. 제가 택시 기사한테 말할게요. 전화 끊지 말고 택시 타세요. 아셨죠?”
다행히 금방 택시를 탔다. 휴대폰 너머로 시어머니의 상황이 들리니 안심이 되었다. 나는 기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무악재 쪽 병원 이름과 병원 앞에 내려주라고 부탁했고, 기사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한숨 돌리고 커피를 마셨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넣어주지 않은 위장에 커피가 들어가자, 위장이 진저리를 쳤다. 위장의 아우성은 뇌에서 속쓰림으로 인지되고, 나는 위를 부여잡고 위장약을 먹었다. 부동산 사장이 왜 전화가 계속 통화 중이냐며 집으로 쫓아왔다. 부동산 사장과 일을 보면서도 눈은 자꾸 시계로 갔다. 지금쯤 도착했을까? 부동산과의 일을 마치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었다.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전화를 받으라고 신신당부했었다. 화가 나서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서성이다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간신히 간호사와 연결이 되었다. 간호사는 바쁜지 설명을 잘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름을 대고 지금 거기에 있는지 확인해 달라 고 통사정을 했다. 곧 진료실로 들어갈 거란다. 진료를 마치면 집으로 가지 말고 병원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간호사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집을 나섰다. 뛰는 듯 걸으면서 택시를 탈까 지하철로 갈지 고민하다가, 차가 막히면 더 걸릴 수 있으니,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병원으로 가면서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어머니는 받지 않았다. 그래도 병원에서 나를 기다릴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진료가 끝나서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병원 진료실 앞에서 몸이 우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누구라도 잡고 물어보고 싶어도 아무도 정말 아무도 없는 그 공간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또다시 전화기를 붙잡고 계속해서 연결을 시도했다.
4
“어머니∼.”
며느리가 운 것 같은 코맹맹이 소리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생소했다. 평소의 며느리답지 않다. 늘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짧게 딱딱하게 부른다. 시어미한테 배울 것이 없어서일까? 아무리 못 배운 시어미라고 해도 저보다 산 세월이 얼만데 아무렴 저보다 못할까 싶은 생각이 들면 가끔 화가 나기도 한다. 주위에서 똑부러진 며느리라 좋겠다고 하면, 그래? 살아봐라. 그런 소리 나오나. 겉으로는 말 못 하고 속으로만 구시렁거렸다. 한 번 더 부르면 대답하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두 번째 목소리는 빨리 대답 안 해서 그런가? 벌써 목소리가 올라갔다.
“으응.”
“핸드폰 벨 소리 안 들리세요? 제가 병원에 계시라고 했는데, 지금 어디 계신 거예요? 제가 병원으로 데리러 간다고 했잖아요? 잊으셨어요? 병원에 왔는데 안 계시고 전화했는데 안 받고 그래서 놀랬잖아요. 어디예요?”
“으응, 약국에 가려구 나왔지. 근데 약국이 문을 닫았네.”
“약국이 왜 문을 닫아요, 그래서 지금 약국 앞에 있어요?”
“아녀, 서울역으로 가려구 하는데, 돈이 없어서 걸어가구 있었어.”
“아이구, 못 살아. 어머니, 돈이 왜 없어요. 그리고 서울역은 왜 가요? 그렇게 가시면 길이 어긋나서 서로 못 만나요. 주변에 뭐가 보이는지 말해 보세요. 큰 글씨 보이는 걸로요.”
“서울역으로 가다가 서울역도 안 보이고 남산도 안 보여서 다시 돌아서 병원으로 가는 중….”
이야기하는 중에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왜 그러지, 내가 뭘 잘못 만졌나, 고장이 났나, 배터리를 다 썼나.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다시 핸드폰은 켜지지 않았다. 며느리와 나를 연결하는,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연결이 끊어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힘이 빠져 길거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서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에 힘이 없는 건지, 다리가 문제인 건지 모르겠다. 할 수 없이 엉덩이를 조금씩 옆으로 밀어서 가로수에 기댔다. 다리를, 무릎을 만져보았다. 의사를 만난 조금 전의 일이 멀게만 느껴지고. 의사가 했던 말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당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머릿속에 돌덩이 하나 들어앉은 것이 무겁기만 하다.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아 다리를 쭉 폈다, 다리를 쭉 펴고 땅바닥에 앉다니, 평소의 나라면 어림없는 일이다. 가로수에 해가 가려서 앉은 자리에 그늘이 졌다. 들고 있던 손수건이 땅바닥에 떨어져 쓰레기 같다. 엄마와 손을 잡고 걸어가던 아이가 궁금한지 허리를 숙여 손수건을 만지려 하자, 아이 엄마는 더럽다며 자기 발로 손수건을 쓱 밀더니 밟아서 아예 쓰레기로 만들어 버린다. 갑자기 황해도 은율이 기억났다. 그래, 내 고향이지. 어릴 때는 맨날 흙바닥에서 놀았었다. 흙 묻은 손으로 아무거나 먹었다. 그랬지. 없어서 못 먹었지 그까짓 흙 좀 묻으면 대수인가. 며느리도 그랬다. 비위생적이라고 아이에게 아무거나 먹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하며 키웠다. 손주가 아기일 때 내 입으로 빨아서 아기 입에 먹을 걸 넣어주는 걸 보더니 기겁하고 애를 데려갔다. 얼마나 무안했던지. 지금 필요한 기억은 나지 않고 기억하지 않아도 좋은 쓸데없는 기억이 나다니.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내 손수건을 밟은 아이 엄마는 이미 사라졌다. 잠시 모든 걸 잊고 가로수에 기대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길바닥에 앉아 있는 현실의 급박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마음에서 불안함이 불쑥 올라왔다. 잠시 잊었던 집을 찾아갈 걱정과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생각할수록 생각이 더 엉키기만 한다.
서울역 피난민 틈에서 가족과 헤어졌을 때는 아버지와의 약속이 있었다. 그때는 어려서 아버지의 말이 전부였다. 그랬기 때문에 멀리 가지 않았고 강한 믿음으로 기다렸다.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그때의 아버지보다 훨씬 늙었고, 생각이 많아졌고, 내가 옳다고 하는 말을 가족은 고집이라고 부르며 자꾸 부딪친다.
엉덩이가 아프다. 딱딱한 바닥에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 거 같다. 일어서고 싶다. 다시 다리를 움직여 일어서려고 해 보았다. 잘 되지 않는 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해가 지지 않았으니, 저녁때는 아니다. 배가 고픈 걸 보면 점심때가 한참 지난 건 사실이다. 사람 구경하는 것도 진력이 났다. 몸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지려고 한다. 눕고 싶다. 눕고 싶다고 생각하니 내 방 침대가 간절하다. 맞다. 내 방에 침대가 있었지. 가만가만 머리를 달래며 생각이란 걸 한다. 나는 내 방이 있는 사람이고, 침대도 있다. 이름이 뭔가? 김 씨다.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여기 가 어딘가. 왜 가로수에 기대고 앉아 있는 건지, 우리집은 어디인지. 궁금증만 늘어가고 해소는 되지 않아 답답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바보가 되었나, 영영 집으로 가지 못하게 되는 건가, 기울어지는 몸을 한쪽 팔로 지탱했다. 누우면 안 된다. 누우면 죽는다. 길바닥에서 죽을 수는 없지. 앉아서 버텨야 한다. 살아서 집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내가 앉은 바닥에서 물이 번져 나온다. 하루 종일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5
치안센터에서 아무 소득 없이 나왔다. 내리쬐는 햇빛에 땀범벅이 되었는데, 갑자기 등줄기로는 한기가 스쳐 내린다. 몸이 부르르 떨리며 진저리가 처졌다. 시어머니를 잃어버린 내일이 현실이 된다면, 나에게는 지옥일 것이다. 시어머니의 실종이 아무리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일까, 늘 같이하던 시간과 공간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사라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죽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종으로 헤어지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한 지옥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다정한 사이가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함께 살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삶이 솔직히 힘들었지만, 어느새 일상이 되었고 익숙해졌다. 잠시 여행을 가는 일을 제외하면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다. 눈물이 떨어지고 목이 멘다. 그동안 내가 한 말들이 내 마음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왜 지금 깨달을까. 시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나는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나의 결백이 더 중요했던 적이 많았다.
콧물을 훌쩍이며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리번댔다. 경찰은 아직 실종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 실종은 아니다.’ 마음을 다시 다잡는다. ‘어머니, 죄송해요. 하나님, 어머니 찾게 해주세요.’ 저절로 사과와 기도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 연결을 시도해 보았다. 전원이 꺼져 있다고 한다. 아침에 시어머니가 입고 나간 옷이 무엇이었는지, 무슨 색깔이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녹색 무늬가 들어간 상의를 입고 나갔었지. 눈을 크게 뜨고 녹색을 찾기 시작했다. 경찰이 찾아주지 않아도 나의 시어머니는 내가 찾을 것이라고 소리 내 말한다. 찾을 수 있다고,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목소리는 자꾸만 작아지며 자신이 없어진다. 무악재 고개까지 세 정류장을 걸어가면서 정류장마다 멈춰서 살폈다. 다시 길을 건너 서대문 사거리 쪽으로 걸으며 도로와 붙어 있는 공원까지 샅샅이 뒤졌다. 티끌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집중했다. 지하철 환기구로 올라가 더 멀리, 더 자세히 본다. 시어머니와 나 사이에 텔레파시가 느껴질 것만 같다. 그래, 우리는 그런 사이이지, 하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조이듯 간절해진다. 어머니, 내 눈앞에 나타나 주세요. 내 눈에 띄어 주세요. 어머니가 그렇게 원하던 교회도 갈게요. 또 무악재 고개로 길을 건너 다시 서대문 쪽으로 걸었다. 어머니는 분명 이 근처를 많이 벗어나지 않았을 것만 같다. 이 지역에서 찾지 못한다면 영영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몇 번째인지 모른다. 지하철 환기구와 길거리 화분에 올라서서 멀리, 더 멀리 초록 비슷한 것이라도 찾아내려고 눈을 부릅뜬다.
6
“도와드릴까요?”
지나가던 사람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묻는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비록 땅바닥에 오줌을 싸고 앉아 있지만, 나는 치매 노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흘러 나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잠깐씩 정신이 몽롱하다. 나는 전쟁 중에도 살아남은 사람이 다. 뜬금없이 이 말이 떠올랐다. 살아생전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이다. 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살아남고 맨몸으로, 남쪽에 와서 굶어 죽지 않은 자부심이 있었다. 맨몸이라는 건 몸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어서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피난민은 거지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나를 학교에 보내지 못했지만, 동냥은 시키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엉겁결에 온 남쪽은 일가친척은 불구하고 지인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남에게 기대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고 굳건하게 뿌리를 내렸다. 한 끼니 쌀에서 한 수저를 덜어내 저축하면서 말이다. 절약은 몸에 배어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은 언제 그렇게 살았냐는 듯, 버는 대로 잘 쓰고 산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오히려 나에게 이제 좀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한다. 그런 말을 자식들에게 들을 때마다 화가 난다.
동네 애들 중에서 아들이 가장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양말 속에 현금 다발을 넣어 가서 첫 등록금을 내주었다.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하고, 며느리 맞을 때 동네 사람들의 축하를 듬뿍 받았다. 마음이 벅차 세상에 대고 가슴을 내밀었다. 거기까지였다. 며느리에게 시어머니인 나는 옛날 사람이었다. 여기저기서 세상이 변했다고 했다. 왜 하필 내가 시어머니가 되니까 세상이 변한 걸까? 이제 내가 대접받을 차례인데 왜? 완전히 쭈그러든 늙은이가 되어 오줌 싸고 길바닥 가로수에 기대 앉은 나를 아는 사람이 보지 않는 게 다행이다. 하지만 이 모습으로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며느리를 만나는 것이고, 며느리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것이다. 이 순간 며느리만 생각나는 건 무슨 일인가. 겹겹이 쌓인 세월 때문일까. 고분고분하지 않은 며느리가 못마땅해 속을 끓인 날이 얼마나 많은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고 나면, 결과적으로 며느리의 판단이 더 나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 많았다. 사실은 그걸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다. 속으로만 며느리를 인정했다.
잠이 눈앞에서 어른거려서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정신을 차려야지, 잠을 자면 안 된다. 피난길에서 아버지는 잠자면 안 된다. 잠자면 죽는다고 하며 뺨을 때렸었다. 그렇다. 여기서 잠을 자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오른손으로 뺨을 때렸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지나가던 사람이 힐끗 쳐다본다. 미친 사람 보듯. 일어나야 한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고 해 보았다.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걷지 못하게 될까 봐 무릎 인공관절 수술까지 했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7
정숙은 티끌만 한 단서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한 표정이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흐르다 마르고 흐르다 마른 땀으로 얼굴이 얼룩덜룩하다. 마주 오던 사람과 어깨가 부딪쳤다.
“어딜 보고 걷는 거야? 똑바로 걸어. 여편네가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는 거야?”
부딪친 남자가 화가 난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더위로 지쳐서 짜증이 난 건지, 심한 말로 화를 냈다.
“뭐예요? 할아버지가 똑바로 봤으면 안 부딪쳤을 거 아니에요? 같이 부딪쳐 놓고 왜 나한테만 난리를 치는 거예요?”
바늘을 갖다 대기만 해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감정이 툭 터졌다.
“아니, 지가 잘못해 놓고 어따대고 성질을 부리고 지랄이야? 어이구 재수가 없을래니까, 원.”
“뭐예요? 누가 성질을 부려요? 성질은 할아버지가 부렸지? 그리고 재수가 없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어요?”
“뭐야? 이 여자가 보자 보자 하니까.”
할아버지가 손을 쳐든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말렸다. 나이 더 먹은 사람이 참으라고. 그렇게 말해봐야 무슨 좋은 소리 듣겠냐고. 젊은 사람들은 다 저러려니 하고 이해하라고 했다. 금방까지 성질내던 남자는 말리는 사람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말하자, 내가 사람이 좋아서 가는 줄 알라며 떠났다. 이번에는 말리던 노인이 정숙에게 이해하라고 어깨를 다독였다. 그 말에 정숙은 울음을 터뜨렸다. 노인은 왜 그러냐며 당황했다.
“어머니를 잃어버렸어요. 어머니를 찾아야 해요. 우리 어머니 좀 찾아주세요.”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울먹임에 사람들이 더 모여들었다. 구경거리 났냐며 노인은 사람들을 물리치고 들고 있던 생수병을 정숙에게 건네며 마시라고 했다. 뭘 도와줄지 물었다. 그제야 정숙은 정신을 차리고 아니라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앞을 향해 걸었다. 벌써 몇 번째 반복해서 이 지역을 뒤지는 중이지만 처음처럼 연신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신호가 바뀌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온다. 잠시 멈춰 서서 사람들에게 눈을 맞춰본다. 건너온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정숙의 시선은 다시 앞으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다시 앞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그 순간 뭔가 본 것은 아닌데, 가슴이 찌르르한 걸 느낀 정숙의 눈은 앞으로 더 앞으로 시선을 보낸다. 그러고는 알 수 없는 끌림을 따라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