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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민 딸 하전이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항암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겨울호 2024년 12월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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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강원도 치악산 상원사 부근에 화전민이 살았다. 1940년 6월 하순, 하전이는 화전민 강희구의 3남매 중 큰딸로 태어났다. 1945년 8월 15일 여섯 살 때, 우리나라는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8·15 해방을 맞이했다. 1950년 6월 25일 열두 살 때,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3년 7월 27일 열여섯 살 때, 3년 동안 계속되던 동족상잔의 비극은 삼팔선을 경계로 유엔군과 북한 김일성 사이에 정전협정이 이루어졌다. 그녀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세상이 변화무쌍하게 요동치는 우여곡절을 눈으로 보고 자라면서 보통 아이들보다 철이 일찍 들었다.

그런 와중에 가족들이 전쟁으로 생긴 참담한 피해를 보지 않고 무사해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전이는 열여섯 살이어서 학교에 다녔다면 중학교 3학년이었다. 하지만 국민학교 문턱도 밟지 않았다. 신체적으로는 학문을 배우는 것과 관계없이 평범한 아이들처럼 성장해서 처녀가 되었다.

달거리가 시작되었다. 코밑에 솜털이 나고 젖가슴이 툭 튀어나와서 볼록했다. 엉덩이가 맷돌처럼 펑퍼짐했다. 육체가 성숙해진 만큼 품행이나 인격이 어른스러워졌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처럼 외간남자와 거리를 두었다. 남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져서 당황했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 딸아이가 열서너 살이 되면 부모가 시집보냈다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부모님을 닮아서 국민학생처럼 키가 작았다. 하전이 가족들은 나무를 베고 불을 질러서 농사를 짓는 화전민이었다. 그들은 가진 재산이 없어서 콩 반쪽씩 나눠서 먹고 살아도 마음만은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섯 식구를 보살피던 그녀의 아버지 강별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날이 구만리 같은 서른여섯 살에 유명을 달리해서 고인이 된 일은 가족들에게 커다란 슬픔이었다. 죽은 사람을 어쩔 수 없어도 살아 있는 가족들은 슬픔을 잊고 어떻게 하든지 살아야만 했다.

“엄마, 아빠도 세상을 떠나고 우리 네 식구만 남았는데 산골짜기에서 화전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요. 그러지 말고 파주나 원주로 나가서 직장에 나갈게요.”
“다 큰 처녀가 무슨 직장을 나가. 죽으나 사나 화전을 일구어서 먹고 살아야지.”
“아니야, 친구 말순이도 파주에서 다방에 나가더니 천사처럼 다른 사람이 되었어.”

열여섯 살밖에 안 된 큰딸 하전이는 가장이 되어서 가족들을 보살펴야만 했다. 어린 나이에 불어닥친 슬픔은 슬프다고 끝나지 않았다. 당장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 나갈 일이 걱정되었다. 그녀는 장녀라는 책임감 때문에 가족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잊지 않았다.

작고한 아버지처럼 산에 불을 지르고 땅을 일구어서 농사를 짓는 화전민으로 살기보다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살고 싶었다. 가족들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큰딸 하전이를 따라 경기도 파주 연풍리에 있는 용주골 근처로 이사했다. 이삿짐이라고 해도 별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당장 덮고 잘 이부자리를 머리에 올려놓았다. 하전이를 비롯한 동생들은 밥을 지어 먹을 그릇과 솥단지 등 당장 필요한 살림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짊어졌다. 며칠 동안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경기도 파주 연풍리까지 걷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다리가 무겁고 뱃가죽이 등에 붙어서 배가 고팠다.

이윽고 지친 몸으로 파주 연풍리 용주골에 도착했다. 조금 남은 비상금으로 가족들이 살아갈 방을 얻었다. 그리고 이삿짐을 풀었다. 연풍리 근처에 미군 부대가 있고, 용주골에 양공주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도 그들이 사는 동네는 멀리 떨어져서 그런지 한적했다.

하전이 가족들은 하루가 가고 이틀, 사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고향을 떠날 때 가져왔던 식량을 먹고 살았다. 사는 입에 거미줄 치겠냐는 말이 무색했다. 어느새 식량이 바닥나서 항아리가 밑을 드러낼 지경이었다. 그 순간,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맞았다.

어릴 때 친구 말순이가 생각났다. 그녀는 한 해 먼저 동네를 떠나서 용주골 다방 레지로 일했다. 하전이는 국민학교 문턱을 밟지 않았어도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을 비롯한 집 안에서 살림하는 일은 말순이보다 잘했다. 마땅한 기술을 배우지 않아서 몸뚱이를 굴려서 하는 일이 전부였다.

“말순아, 지금 나가고 있는 다방에서 일하면 안 되니?”
“알았어, 주인 마담 언니에게 말하면 가능할 거야.”
“고마워, 그럼 부탁해.”

만약에 말순이가 일할 자리를 구해주지 않으면 가족들이 앉아서 굶어 죽을 형편이었다. 그녀는 돈을 벌 수 있다면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하전이는 어릴 때 친구 말순이를 찾아가서 일할 자리를 부탁했다. 오직 말순이가 일할 자리를 알아보고 도와주기만을 바랐다.

“하전아, 주인 마담 언니가 한 번 와보래.”
“고마워, 말순아, 시키는 일은 뭐든지 열심히 할게.”

하전이가 말순이 레지로 일하는 용주골 다방에 취직한 일은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나이만 열여섯 살이지 옷차림이며 얼굴은 스킨로션도 바르지 않고 산골에서 화전민으로 살던 때하고 마찬가지였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 역시 경험이 없는 탓에 어색했다.

“얘야, 안 되겠다. 옷도 세련되게 입고 얼굴에 화장도 해야지. 이대로 일하면 손님이 다 떨어지겠다. 내가 빌려준 돈으로 말순이하고 시장에 나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라.”
“네, 마담 언니.”

하전이 모습은 때가 묻지 않은 숫처녀의 순진함 그대로였다. 그녀는 마담 언니가 말한 대로 친구 말순이를 따라 근처 장터로 갔다. 새 옷도 사고 얼굴에 바를 스킨로션도 샀다. 서투른 솜씨지만 화장하고 새 옷을 입은 다음, 다방에 나온 그 순간 친구 말순이하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예쁜 요조숙녀였다.
흠이 있다면 키가 작아서 국민학생처럼 왜소했다. 몸매가 쭉 뻗은 숙녀는 아니어도 성숙한 여인으로서는 부족함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뭇 남성들을 유혹하고도 남았다. 주인 마담 언니와 친구 말순이는 감탄한 나머지 입이 하마처럼 벌어져서 닫힐 줄 몰랐다.

“하전아, 정말 예쁘다. 이제는 남자들이 암내를 맡고 줄줄 달라붙겠다. 그렇다고 해서 헤프게 놀면 안 돼. 남자들은 늙으나 젊으나 암내를 맡으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어떻게 해보려고 환장하거든.”
“알았어요. 언니….”

하전이는 포동포동한 몸을 치장하느라 때 빼고 광을 낸 다음, 다방에서 레지로 일을 시작한 날짜가 3개월이 지났다. 그녀는 화전민으로 살아가던 시절의 촌티를 말끔히 벗었다. 얼굴에 기름기가 번질거리고 말씨도 늘어서 도시에서 닳고 닳은 사람처럼 청산유수였다.

“마담, 잠깐 봐요.”
“아유, 양칠이 상병님, 오늘 외출 나오셨군요. 길 건너 용주골 기지촌에 정순이를 보러 가지 않고 여기에 오셨어요.”
“거기야, 다음에 가면 되지 않아요. 오늘은 마담 누나를 보고 싶어서 찾아오면 안 되나요?”
“그럴 리 없지, 이 누나가 양칠이 상병을 얼마나 좋아하는 걸 몰라요.”
“누나도 참, 농담이야 농담. 하하하.”
“쌍화차에 달걀노른자를 둥둥 띄워서 석 잔 가져와.”
“누군 누구야, 나하고 마담, 그리고 하전이까지 석 잔이지.”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하전이는 손님 받느라 바빠도 특별히 배려해서 이리 오라고 부를게요.”

주인 마담은 양칠이 상병에게 넉살을 부렸다. 그녀는 30대 후반이었다. 빼어난 미모로 용주골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로 매춘하는 양공주였다. 어느 정도 자금이 축적되자 예전에 일하던 기지촌을 그만두고 다방을 차렸다. 그리고 기지촌 이름을 따서 ‘용주골 다방’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를 부르셨어요.”
“하전 양, 성씨가 강가라고 했지?”
“네, 제 이름은 강하전이에요.”
“그래, 좋은 이름이군. 하전이가 아니고 상전이라고 지었으면 귀부인이 되었을 텐데 안타깝군. 나는 제주도가 고향이고 이름은 양칠이야.”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저는 이제 꽃망울이 맺힌 열일곱 살이고요. 작년부터 친구 따라와서 일하지요.”
“그래, 반가워. 앞으로는 하전이를 만나러 자주 찾아와도 되지?”
“그럼요. 차만 사주시면 언제든지요. 그런데 양칠이 상병님은 군인인데 마음대로 외출이 되나요?”
“나는 주특기가 행정인데, 사령부에서 인사업무를 맡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외출증을 만들어서 나올 수 있지.”
“양칠이 상병님은 몇 살이세요?”
“나는 하전이보다 열 살 많은 스물일곱 살인데, 남녀 사이에 나이가 무슨 대수야. 스물세 살에 서울 G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군에 입대했지.”

주인 마담은 사정이 있어서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 전력이 있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식한 여자였다. 젊은 나이에 산전수전을 겪어서 그런지 장사수완이 남달랐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줄 줄 아는 여자였다. 반면에 하전이는 국민학교도 다니지 못한 무식쟁이여서 부잣집 식모나 다방 레지가 제격인지 몰랐다.

양칠이 상병은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스물세 살에 군대에 입대했다. 그런 사람이 하전이와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여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양칠이 상병이 관심을 보인다고 해서 하전이가 ‘웬 떡이냐’며 덥석 응하기는 어려웠다.

하전이를 보려고 찾아오는 단골손님도 늘기 시작했다. 3개월이 지난 지금은 하전이가 접대하느라 의자에 앉아서 쉴 시간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세상 경험이 없는 일자무식 하전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이목을 끄는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양칠이 상병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학벌이라는 벽을 넘어서 자주 만나며 대화를 나눌수록 친근감이 더했다. 하찮은 말을 해도 유머가 넘쳐나서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녀는 만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양칠이 상병이 아버지나 큰오빠처럼 듬직하고 품위가 있으며, 교양이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하전이는 가족을 3명이나 거느린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가진 것은 오직 몸뚱이밖에 없어서 내세울 일이 아무것도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그런 일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눈에 꽂혀서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돈도 명예도 필요 없이, 지남철처럼 이끌림이 전부였다.

양칠이 상병은 부대로 돌아가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용주골 다방에서 만난 하전이가 눈에 어른거렸다. 살살거리는 눈웃음, 앞으로 뚝 튀어나온 멍울진 젖가슴, 맷돌처럼 펑퍼짐한 엉덩이, 키는 작아도 근육질이라 단단하고 오동포동한 몸매가 머릿속을 맴돌아 밤잠을 설치게 했다.

그는 근무 중에도 하전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음 외출할 때까지 불과 며칠 남지 않았는데도 하루가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양칠이 상병은 그녀의 가녀린 눈웃음이 눈에 선해질 때마다 애간장이 끓었다.

“마담 언니, 잘 지냈어요. 하전이가 보고 싶어서 외출하자마자 단숨에 달려왔지 뭐예요.”
“호호호, 어서 오세요. 상사병은 약도 없다는데, 양칠이 상병님이 하전이한테 빠져서 오줌을 질질 흘리고 오금이 저리는 모양인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요.”

양칠이 상병은 외출하는 날이면 하전이가 보고 싶어 다방으로 단숨에 달려왔다. 하지만 주인 마담에게 그런 심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관심이 없는 척 내숭을 떨었다. 체면이고 뭐고 당장 하전이를 안아 보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의 이목을 생각해 담담하게 행동했다.

1956년 1월 초순, 하전이는 열일곱 살 처녀가 되었다. 그녀는 꽃망울이 맺혀 건드리기만 해도 팍 터질 것처럼 싱그럽고 풋풋했다. 하전이는 양칠이 상병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열아홉 섬 색시가 뭍으로 간 선생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심정보다 덜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방에서 레지로 일하는 동안 양칠이 상병의 손을 잡아본 적도 없었다. 더구나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겪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양칠이 상병을 보면 볼수록 마음이 꽂혀 가슴이 꽉 메였다. 주인 마담이나 다른 사람이 남자에 대한 연정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마음도 몸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다방에서 일하는 동안 손님에게 차를 나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그런저런 생각을 할 짬이 없었다. 하지만 하루가 저물어 일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면, 온종일 손님에게 시달려 녹초가 되어 금방 꿈속으로 빠져들어야 할 시간에도 양칠이 상병이 눈에 어른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일과를 시작할 때도, 일이 끝났을 때도, ‘벙어리가 냉가슴 앓듯이’ 마음속으로 끙끙 앓았다. 친구 말순이나 주인 마담 언니에게도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터놓지 못했다.

일주일이 지나 토요일이 되었다. 양칠이 상병이 다방 문을 열고 나타났다. 하전이는 그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멈출 것처럼 굳어져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맨발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손목조차 잡아보지 못한 사이였기에 혼자만의 몸부림이었다.

“하전아, 이리 오너라. 양칠이 상병님이 보고 싶단다.”
“…….”
“왜 말이 없냐, 쌍화탕 두 잔 주문해서 가지고 이리 오라니까. 저 아이가 쑥스러워서 그러니까 이해하시고요. 이만 일어설 테니까, 하전이가 오면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세요.”

양칠이 상병은 토요일마다 부대에서 외출하면 용주골 기지촌에서 일하는 양공주 정순이를 만나러 갔다. 간혹 다방에 들러 차를 마시는 경우가 있어도 말순이나 주인 마담에게는 거들떠보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열일곱 살 애송이 하전이를 바라보면 심장이 팔딱거리다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여기 쌍화탕 가져왔어요.”
“그동안 잘 지냈어? 여기 앉아서 같이 마시자고.”
“덕분에요. 양칠이 상병님도 잘 계셨지요?”
“그럼, 하전이가 염려해준 덕분에 잘 지냈지.”

양칠이 상병은 하전이의 손을 넌지시 잡아 옆으로 끌었다. 그녀는 못 이긴 척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았다. 엉덩이를 살살 만지기도 하고, 등가죽을 쓸어내렸다. 그럴 때마다 뜨거운 기운이 하전이의 전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동안 보고 싶었어.”
“…….”
“왜 말이 없지?”
“저도요.”

짤막한 대화 속에서도 두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양칠이 상병은 하전이가 보고 싶어 상사병이 날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전이도 그의 품에 안겨본 적이 없었지만, 밤마다 양칠이 상병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리고 새빨개졌다. 가슴이 뛰고 심장이 멈출 것 같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우리 이러지 말고 주인 마담에게 말하고, 다방 영업이 끝나면 바깥바람이나 쐬러 나가자고.”
“아직 이곳 지리도 잘 몰라요.”
“내가 잘 알아. 걱정하지 말고 따라오면 돼.”

1956년 12월 하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는 성탄절 전야였다. 양칠이 상병은 하전이를 데리고 다방을 나섰다. 미군들이 드나드는 기지촌 용주골 주변을 돌아다녔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집집마다 분홍빛 조명이 줄지어 켜졌다. 양공주라고 불리는 성매매 종사자들을 찾아온 손님들이 오갔다.

“시장할 텐데 양식당에 들어가서 식사하자고.”
“여기에 이런 곳도 있네요.”
“그럼. 여기는 미군을 비롯한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카투사와 나처럼 한국 군인들도 오지. 그리고 일반인도 오고 말이야.”

양칠이 상병은 레스토랑이라는 양식당을 자주 드나든 경험을 하전이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두 사람은 종업원에게 적당히 익힌 스테이크를 주문해 먹기 시작했다. 하전이는 아직 스테이크 먹는 방법을 몰라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를 눈치챈 양칠이 상병은 스테이크를 손수 잘라 그녀가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녀는 말로만 듣던 중간쯤 익은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여러 번 씹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하지만 집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생각나 포크를 놓았다.

“집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나서 그렇지? 걱정하지 마. 내가 가족들 몫을 주문해서 싸줄게.”
“감사합니다.”

하전이는 눈치가 빠르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양칠이 상병이 고마웠다. 가진 돈은 없었지만, 그녀는 몸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친 후, 디저트로 커피를 마셨다.
“사실은 이곳에 있는 정순이라는 여자를 만나러 토요일마다 외출 나왔지. 정순이도 하전이처럼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양공주가 되었지. 마음씨가 착한 여자야. 요즘 하전이를 만난 다음부터 그녀를 보러 가지 않았거든. 아마도 지금쯤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
“그럼 지금이라도 다녀오세요.”
“아니야. 이제는 하전이만 있으면 돼. 나는 고향이 제주도인데,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니려고 서울로 올라왔지. 고향에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이 있어서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는 편이야. 제대한 다음 하전이와 결혼하면 서울로 올라가서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자고.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들도 함께 살지.”
“양칠이 상병님은 대학교를 나와서 고등학교 선생님인데 저는 국민학교 문턱도 밟지 않았어요. 제가 감히 양칠이 상병님을 넘볼 수 있겠어요.”
“무슨 말이야. 남녀가 사랑하는 데 나이나 학벌은 상관없어. 나만 믿어.”
“고마워요.”

하전이는 어머니와 동생들도 책임지겠다는 그의 말이 고마워서 귀가 솔깃했다. 이렇게 착하고 마음이 풍족한 사람을 만나서 살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양칠이 상병은 하전이를 안으면서 등을 다독거렸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벌판처럼 넓고 포근하면서 따뜻한 젊은 남자 품에 안겨본 순간이었다.

“이러지 말고 근처 여인숙이라도 들어가서 몸을 녹이자고.”

하전이는 불두덩이 뻐근했다. 자궁에서 음수가 흘러서 팬티를 흥건히 적셨다. 숨이 가빠지면서 몸이 굳어져 걷기조차 힘들었다. 여성 특유의 암내가 바람결에 흩날렸다. 하지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통 때처럼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양칠이 상병은 하전이의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보들보들한 손을 잡고 근처에 있는 여인숙으로 들어갔다. 폭신한 요와 이불을 펴놓은 방바닥에 앉았다. 두 사람은 차분하게 있으려 했지만, 젊은 피가 펄펄 끓어서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입은 채 방바닥에 뒹굴었다.

“아악, 아파요. 흐, 흐, 살살….”
“조금만 참아. 좋게 해줄게.”

물불을 가릴 필요가 없는 젊은 혈기를 지닌 두 사람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육체를 탐했다. 하전이는 졸지에 17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했던 금단의 문을 열었다. 양칠이 상병의 돌덩이처럼 단단한 포신이 조가비 깊숙이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그녀는 조가비가 초토화되는 순간, 선지가 낭자했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맺고 한 몸이 된 순간, 성숙한 여자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어른들이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남녀의 성관계는 오줌 한 번 누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성관계가 끝난 다음 자궁이 뻐근하고 처녀막이 터져서 피가 흘렀을 뿐, 한강에 배가 지나간 것처럼 잔잔했다.

양칠이 상병은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외출할 때면 열 일 제치고 하전이를 찾아왔다. 하전이 역시 양칠이 상병을 하루라도 만나지 못하면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리고 일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방을 나와 몸을 불태우며 사랑을 속삭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하전이, 나 제대했어. 이제는 다방을 그만두고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 가자고. 넉넉하지는 않아도 부모님께 받은 유산과 조금 모아둔 돈으로, 대학교 다닐 때 하숙했던 동네에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들과 함께 살자고. 나도 직장에 취직해서 한 푼이라도 벌고 말이야.”
“고마워요.”

1957년 4월 초순, 양칠이 상병은 병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만기 전역했다. 곧바로 하전이가 일하는 용주골 다방을 찾아왔다. 하전이는 그가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지켜주어 고마웠다. 어머니와 동생들까지 거둬주어 감개무량했다. 그와 함께라면 천국이 아닌 무간지옥에서 살아도 좋았다.

양칠이는 서울을 오가며 서울역 앞 청파동에 가족들이 살아갈 부엌이 딸린 두 칸짜리 허술한 판잣집을 장만했다. 예정대로 서울로 이사했다. 비상금도 여유가 있어 당분간 생활이 궁핍하지 않았다. 양칠이는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기 싫어 조그마한 회사에 취직했다.

1958년 1월 하순, 하전이는 입맛이 없어서 밥을 먹지 못했다. 신음식이 먹고 싶었다. 근처 산부인과에서 진료받았다. 임신 3개월이었다. 양칠이는 집안에 경사가 났다고 기뻐했다. 7월 초순, 그녀는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첫아들을 낳은 기쁨은 삶의 의욕을 갖게 했다.

아기 이름을 양일이라고 지었다. 하지만 첫아들 양일이가 돌이 지나도록 보통 아이들처럼 기거나 일어서지 못했다. 병원에 다니며 진료받아도 별다른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신체적으로 발달이 늦고 저능아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기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얼굴이 그늘졌다.

“여보, 아기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 속상해서 어떻게 하지요?”
“할 수 없지. 기다려봐야지.”

양칠이는 아내 하전이에게 말하고 돌아서면 마음이 허전했다. 속상한 나머지 선술집에 들어가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전이는 그녀대로 첫아들 양일이를 정상적인 아이처럼 기르려 갖은 공을 들였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되지 않아 실망한 나머지 점점 지쳐갔다.

“여보, 둘째를 임신했어요. 벌써 달거리를 하지 않은 지 석 달이 되었어요.”
“알았어.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잘해 봐. 힘든 일이 있으면 장모님에게 맡기고.”

양칠이 조그만 회사에서 받는 월급으로 다섯 식구가 먹고살기에 부족했다. 그럭저럭 몇 년이 흘러가자 비상금이 바닥났다. 더구나 첫째 아들 양일이가 미숙아로 태어난 일이 가슴 아팠다. 그는 속상할 때마다 선술집을 드나드는 사이에 살림이 더욱 궁핍해졌다.

1961년 3월 초순, 그들은 둘째 아기를 분만했다. 아들이었다. 1963년 6월 초순, 셋째 아기를 출산했다. 아들이었다. 1965년 10월 초순, 넷째 딸아이를 출산했다. 가난한 집에 제사가 돌아오듯 자식을 네 명이나 낳았다. 예전에 어른들이 “한 푼 더 벌려고 하지 말고 입 수를 줄여라.”라고 했던 말이 맞았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요동쳤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 학생 혁명이 일어났다. 여당 실세 이기붕 일가가 자결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허정 임시 내각을 시작으로 장면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미국의 480호 원조에 의지하는 재정 상태는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 등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1962년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어 국교 수립과 동시에 경제 재건을 목적으로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 등 5억 달러의 차관을 들여왔다.

야당 정치인과 학생들은 날마다 반대하는 데모를 벌였다. 양칠이는 그런 와중에 취직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나이로 보아도 서른여섯이면 불혹의 나이가 가까워서 회사를 그만둘 때가 되었다. 하지만 가족들을 부양하고 살아갈 돈을 벌지 못해서 문제였다.

그는 길가에서 포장마차를 하려고 해도 밑천이 없어서 손발이 묶인 셈이었다. 그러다 보면 선술집에 앉아 변변한 안주도 없이 소주를 마시는 일이 일과였다. 어느새 술에 중독되어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수전증 환자처럼 손발이 떨려서 견디기 힘들었다.

하전이는 남편 복으로 편히 살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녀는 남편 양칠이 대신 돈을 벌어 한참 자라는 자식들과 친정 식구 등 가족들을 보살펴야만 했다. 하지만 배우지 않아서 가방끈이 짧은 데다가 특별히 배운 기술도 없었다. 가진 돈도 없어서 다방이나 선술집이라도 운영할 형편이 아니었다.

몸은 건강해서 가정부나 예전에 용주골에서처럼 다방 레지나 주방장 일은 가능했다. 용주골 기지촌에서 미군들을 상대하던 양공주에게 손님을 데려다주는 일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심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우두커니 앉아 하늘만 쳐다보는 하세월보다는 몸을 놀려서 한 푼이라도 벌어야 했다.

그녀는 서울역 앞에 있는 사창가 포주로 취직했다. 그리고 창녀들에게 남자 손님을 데려다주고 구전을 받았다. 자식들 넷이 머지않아 국민학교에 다니고, 친정어머니를 비롯한 여동생과 남동생 등 아홉 식구가 피죽이라도 먹으며 살아가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년이 샛서방이 생겼는지 날마다 어디를 나가는 거야.”
“아니에요. 그냥 동네를 돌아다녔어요.”

남편 양칠이는 술중독자에다가 의처증까지 생겨 하전이를 보기만 하면 트집을 잡았다. 그렇다고 사창가에서 남자 손님을 모시는 포주로 일한다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양칠이는 대낮부터 술에 취해 한길을 걷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하전이는 술중독자가 되어 실업자로 살아가던 남편 양칠이에게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가 막상 세상을 떠나자 미운 정보다는 안타까움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자식들 넷이나 남겨 두었고, 여덟 식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청상과부가 되어 살아갈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첫째아들 양일이는 미숙아였기에 국민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1968년 3월 초순, 둘째아들 양이부터 국민학교에 보냈다. 양이는 운동에 취미가 있어 야구부에 들어갔다. 셋째아들 양삼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막내딸 양희가 국민학교에 입학하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전이는 벌써 마흔 살을 넘긴 과부의 몸으로 가족들을 부양하기에 한계를 느꼈다. 사창가에서 포주로 일해 돈을 벌어 보았자 가족들 뒷바라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밤이나 낮이나 몸이 부서지도록 남의 집 빨래도 해주고 살림을 거들어 주었지만, 수고비 몇 푼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극단적으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중년이 되었어도 아픈 곳 없이 건강하고 힘이 넘쳤다. 어지간한 어린 창녀들보다 경험을 살려 섹스의 진수를 보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찾는 손님이 있다면,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기꺼이 몸을 팔아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결심했다.

“사장님, 놀다 가세요. 예쁘고 젊은 아가씨가 있어요.”
“얼마예요?”
“잠깐이면 100원이고요. 주무시고 가면 1,000원입니다.”
“그럼, 아주머니하고는요?”
“저는 늙어서 되나요. 그래도 괜찮으시면 젊은 아가씨보다 서비스를 잘해드릴게요.”

하전이는 남편도 없는 과부인 마당에, 남자 손님이 좋다면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경제적으로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살림이면 운동선수 뒷바라지에 골병이 들었다. 더구나 딸아이가 무용을 배우는 일도 운동선수 뒷바라지 못지않았다.

둘째아들 양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하지만 잘할 수 있는 일은 운동밖에 없어서 할 일이 많지 않았다. 시간이 나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를 돌아다녔다. 패싸움을 하기도 하고 경찰서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의 집에 드나들면서 도둑질을 시작했다.

셋째아들 양삼이는 착하고 성실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을 상대로 과외공부를 가르쳤다. 우리나라에서 수재들만 모이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축하받았다. 예전에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양삼이에게 해당할 뿐, 부모가 부자로 살면 자식들도 부자로 사는 요즘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넷째딸 양희는 대학교에 진학할 때 무용과를 지망하고 합격했다. 비록 첫째아들 양일이와 둘째아들 양이가 잘못되기는 했어도 집안에 경사가 난 일은 사실이었다. 배우려고 노력하는 자식들이라도 뒷바라지해서 앞길을 열어주면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양희는 남자친구를 따라 어디론가 행방을 감추었다. 어머니 하전이와 외할머니는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찾으러 다녔지만 허사로 끝났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남자친구를 따라 외국으로 나갔다고 했다. 어느 술집에서 작부로 일한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현장을 보지 못해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2000년 12월 하순, 첫째아들 양일이가 걸인이 되어 노숙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의 집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죽었다. 1년 전에는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천식에 걸려 기침하다가 해수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 살 터울 남동생마저 직업이 없는 실업자로 살다가 독감에 걸려 앓다가 죽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셋째아들 양삼이는 서울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근무했다. 배필을 만나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며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혼자 사창가를 돌아다니며 목구멍에 풀칠하고 사는 늙은 어머니 하전이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까짓 어머니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꿈에도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만 잘살아도 다행 아니에요?”
“그래도 그렇지. 어머니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너무 고생하잖아.”

하전이는 셋째아들 양삼이 부부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배 아파 낳은 자식이기에 걱정해주는 것만도 고마웠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포주로 일하던 사창가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는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삭신이 쑤시고 아팠다. 몸도 수척해졌다.

어릴 때 부모님 슬하에서 동생들과 함께 화전민으로 살던 시절이 그리웠다. 열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이 되어 가족들을 보살필 길을 찾으려고 파주 연풍리로 이사했다. 용주골 다방에서 레지로 일하던 때가 생각났다. 친구 말순이도, 주인 마담 언니도 눈에 선했다.

2021년 6월 초순, 그녀는 여든두 살 노인이 되었다. 부모님이 여름에 태어난 그녀에게 ‘하전이’가 아닌 ‘상전’이라고 이름을 지었더라면 부잣집 마나님으로 살았을지도 몰라서 아쉬움이 남았다.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화전민 딸 하전이’는 서리가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무료 급식을 하는 파고다공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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