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겨울호 2024년 12월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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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손 놓기 전, 딸아이와 함께한 둘만의 휴가길. 송산 IC로 내려 제부도가 목적지다. 나들목을 빠져나와 향하기만 하면 되는데, ‘사강’이라는 이정표가 돌발상황이다. ‘화성·송산·사강’ 기억 상자를 헤집으니, 평생을 교직에 헌신하게 된 출발지 송산중학교, 작품으로 널리 알린 ‘나의 친구 우철동’이 근무한 사강우체국, 목월 선생이 먼저 알아본 문단의 떡잎,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를 내게 가르쳐 준 인연. 닫혔던 뇌리를 뚫고 나오는 한 사람, 영원한 나의 어린왕자 ‘정대구 시인’.
시인의 고향은 늘 작품 속에 있다. 타향도 고향인 듯 머무는 곳마다 노래다. 농부가 한 알의 낟알을 거두듯, 시인은 한 낱의 낱말을 거두어 수렴하는 사람. 기계공에게 멍키와 스패너가 있다면, 나에겐 언제나 펜과 원고지가 있다며 시인은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수년 전, 어린 날의 고향으로 낙향. 백련산 기슭의 청아한 둥지로 들앉아 고향 제자들을 품고, 구순을 앞둔 숫자마저 무색하게 시 창작에 남은 생을 갈아 먹이며 포육 한창이다.
-선생님, 제가 지금 사강시장에 있어요.-아, 그래요? 거기서 10분 거리에 내가 있어요. 반가움이 폭포수 되어 귓속을 휘돈다. 바깥출입은 물론, 집 안 계단도 수월한 것 하나 없지만, 칸막이 없이 널따란 2층 공간은 당신 문학의 산실이자 역사관. 한 벽면을 넓게 차지한 창문 너머로 멀리 산자락이 마주하고, 드넓게 펼쳐진 너른 들녘은 당신만의 화수분. 에스프레소 맛만큼이나 무거운 발걸음으로 물러나오며, 단단한 뼈대를 가진 앙상한 거목을 거푸 안고 또 안고, 멈출 수 없는 시간을 꼬집을밖에.
키 작고 옹골찬 나무를 닮은 체형, 동글동글한 얼굴에 눈썹 가까이 눌러쓴 반달 모자, 통 넓게 줄여진 바지에 엉덩이를 훌쩍 덮는 점퍼, 낡고 빛바랜 샘소나이트 갈색 가방을 좁은 어깨에서 반대쪽 가슴께로 비스듬히 메고. 건장한 사내인 양 당찬 발걸음, 좁은 보폭만큼 편안한 음색, 헤프지 않은 미소는 열반의 부처님. - 존재만으로 기꺼운 어린왕자님.
오래전 서울행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시 한 편의 인연으로 20여 년을 한결같은 모습. 이젠 황혼길의 동무 되어, 구순을 바라며 칠순을 바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노을을 닮아 간다.-세월아, 너만 가거라. 그림자 더는 늘이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