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5년 3월 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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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이 끝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3가지>.
도대체 선생님은 이런 걸 왜 쓰라고 하는지 진짜 알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내가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매주 주제 쓰기에 매일 써야 하는 감사일기와 정리 노트까지 우리 반은 쓰는 게 너무 많았다.
나는 정말로 쓰는 게 귀찮고 싫었다.
뭐라고 써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특히 주제 쓰기는 10줄이나 써야 했다.
‘꼭 하고 싶은 일은 모르겠지만 주제 쓰기는 확실히 안 하고 싶은 일이에요.’
책상에 앉아 딴생각만 하다 핸드폰을 열었을 때였다.
“아린아, 옷 입고 나와.”
엄마랑 서점 가기로 한 걸 깜빡했다.
엄마는 문제집을 보러 가자고 했지만 내 목적은 따로 있었다.
오빠들 신곡 앨범을 얻어낼 계획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문제집 앞에서 엄마가 심각한 얼굴로 이 책 저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문구류와 앨범이 있는 코너로 향했다.
내가 서점에 따라가는 이유는 바로 그 공간 때문이었다.
갈 때마다 새로운 물건들이 눈길을 끌었다.
귀여운 인형, 특이한 파우치도 있었다.
필기구들을 이것저것 시험해 보다가 매대에 붙어 있는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나만의 펜. 내 이름을 새겨요. 20초 완성.’
둘러보니 한쪽 구석에 예전에 못 봤던 기계가 보였다.
이름을 새긴 펜이라니 나도 하나 갖고 싶었다.
어떤 걸 살까 고민하다 연필을 사기로 했다.
우리 선생님은 샤프도 못 쓰게 한다.
6학년들에게 연필만 쓰게 하다니.
샤프로 쓰면 필체도 나빠지고, 샤프 장난은 위험하고, 연필로 쓰다 보면 쓰는 맛을 알게 된다나.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연필을 집었다.
“연필에도 새길 수 있어요?”
“네. 할 수 있어요. 뭐라고 써 드릴까요?”
“작가 최아린. 이렇게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연필이 기계 사이로 들어가고 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바박. 불꽃이 번쩍하며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월요일 수업 시작 전, 감사일기를 쓰는 시간이었다.
매일 감사일기를 써야 하는 것도 스트레인스인데 앨범 산 일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새로 산 보라색 연필을 꺼냈다.
연필의 끝부분에 새겨진 내 이름이 보였다.
연필을 꼭 쥐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뭔가 새로운 마음이 드는 기분이었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5월….
적당히 진하고 부드러운 심까지 마음에 드는 연필이었다.
‘앨범을 샀다 감사하다’라고만 썼다가 연필의 가볍고도 단단한 느낌이 좋아서 조금 더 연필을 쥐고 있었다.
1분쯤 지났을까.
서점에서의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올랐다.
엄마가 문제집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답답했고,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서 저절로 몸이 들썩거리기도 했다.
신나서 앨범을 들고 나오다가 넘어질 뻔도 했다.
앨범에서 최애 오빠의 포카까지 나와서 운이 좋아진 건지, 한 줄만 더 써야지 하고 쓰다 보니 5줄이 넘었다.
있었던 일과 내 기분을 썼을 뿐인데 이렇게 길게 쓸 수도 있다니.
세상에!
신기한 일이었다.
내 감사일기의 신기록이었다.
지난 금요일의 일기를 펼쳐보았다.
‘어제 마라탕을 먹었다. 요거트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진짜 맛있었다.’
2교시 체육 수업을 하고 교실로 돌아오니 선생님이 걷어갔던 감사일기를 돌려주었다.
“아린아, 오늘 감사일기 정말 잘 썼던데? 그래, 그렇게 쓰면 되는 거야. 조금만 생각하고 솔직하게 말이야.”
얼떨떨했다.
칭찬을 받는 일이 흔하지도 않은데 더구나 뭘 써서 칭찬을 받았다니.
매일 보던 감사 일기장이 새롭게 보였다.
솔직히 기분이 너무 좋았다.
6학년이 되고 두 달이 다 지나도록 내가 쓴 글에 달린 선생님의 코멘트는 늘 ♡였다.
이건‘너무 좋아요. 혹은 잘했어요’가 아니고 그냥‘확인했어요’라는 뜻이다.
지윤이 일기장에는‘good! ’혹은‘A+’도 있었다.
그런데 내 일기장에‘참 잘했어요!!!! ’가 있었다.
선생님의 칭찬도 기분이 좋았지만 사실 나 스스로 뿌듯했다.
수업이 모두 끝나기 15분 전, 정리 노트를 꺼냈다.
정리 노트는 수업 시간 중 1, 2시간을 골라 그날 배운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체육 시간이니 정리할 수업도 체육이었다.
‘50미터 달리기를 했는데 지난번보다 기록이 0.3이나 빨라졌다….’
쓰다 보니 기록이 왜 빨라졌을까 궁금했다.
내 생각에는 스타트가 빨랐다.
그리고 지난번 수업은 5교시여서 배도 부르고 피곤했는데 이번엔 2교시여서 컨디션도 딱 좋았다.
이 내용도 뒤에 이어서 썼다.
다 쓰고 나니 종이 쳤다.
15분을 꼬박 다 썼다니.
원래 정리 노트를 쓰는 데는 2분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좀 신기한 날이었다.
감사일기에 정리 노트까지 잘 써지다니.
왜 갑자기 잘 써지지?
뭐가 달라진 거지?
전과 달라진 건 보라색 연필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연필은 다른 연필들과는 달랐다.
2교시까지 쓰고 한 번 깎아야 할 만큼 심이 빨리 닳았다.
금세 없어지고 갑자기 잘 써지게 만들고.
‘뭐야. 마술 연필이라도 되는 건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1학년 최아진이나 할 수 있는 말도 안 되고 유치한 생각이었다.
학교 끝나고 논술 학원에 가야 하는 날이었다.
엄마는 이렇게 억지로 다니는 게 더 쓰기 싫게 만든다는 건 알지 못했다.
꾸역꾸역 가서 자리에 앉고 지난주 수업에 제출한 숙제를 돌려받았다.
종이에는 까만 글씨보다 선생님이 쓴 빨간 글씨가 더 많았다.
대충 훑어보고 가방에 넣었다.
학교 밖에서는 애들도 그렇고 나도 당연히 샤프만 썼다.
선생님이 나눠준 참고 자료를 읽고 내용을 짜깁기하고 조금씩만 바꿔써서 내버렸다.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이 종이를 어떻게 메꿔야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학교에서는 잘 써졌는데 논술 학원에서는 아니었다.
역시 연필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보라색 연필만 쓰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매일 감사일기와 정리 노트를 잘 쓴다는 칭찬을 들었다.
주제 쓰기는 담임선생님이 반 애들한테 읽어주기까지 했다.
“아린아, 진짜 잘 썼다. 세상에. 우리 딸 이렇게 할 수 있으면서 그동안 왜 그렇게 대충했니?”
주제 노트에 사인하는 엄마는 거의 노래를 불렀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자꾸 칭찬을 들으니 기분도 좋고 점점 쓰는 데 자신이 붙었다.
그런데 칭찬보다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따로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 쓴 노트들만 봐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민주랑 떡꼬치 먹다가 흘린 빨간 양념이 잘 지워져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일기는 내가 봐도 재미있고 잘 썼다.
선생님은 사소한 일에도 감사함을 느낄 줄 알기 위해 감사일기를 쓰는 거라 했다.
그런 부분도 있지만 지나가 버리는 오늘을 기억하게 되는 의미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쓰는 게 전처럼 귀찮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았다.
그리고 대박인 사건이 있었다.
<즐거운 학교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그림과 글을 내는 공모전이 있는데 하고 싶은 사람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콕 찍어 나에게는 글을 꼭 썼으면 좋겠다고 하신 거다.
나는 부담이 됐지만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고 요즘 다들 잘 쓴다고 했으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 정도로 잘 쓰나?’
조금 우쭐해진 기분으로 필통을 열었다.
‘어? 어디 갔지?’
아무리 찾아도 필통 안에 연필이 없었다.
필통을 뒤집어서 탈탈 털어도 연필은 나오지 않았다.
가방까지 다 뒤집었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한테 모두 물어봤지만 보라색 연필을 봤다는 애는 없었다.
수업에 집중도 되지 않고 쉬는 시간마다 필통과 가방만 열었다 닫았다를 수십 번은 한 것 같다.
정리 노트를 쓰는 시간이 되었다.
종일 연필이 없어진 것만 생각해서인지,
‘영어 시간에 단어 시험을 봤다. 아는 단어였는데 실수한 것 같다. 아쉽다.’
이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보라색 연필은 정말 마술 연필이었던 걸까.
집에 와서 책상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무리 얘기해도 진짜 하기 싫은 일 중 하나였지만 순전히 연필을 찾기 위해서였다.
책상 위, 서랍들, 방바닥 구석구석, 학원 가방까지 다 찾았지만 연필은 나오지 않았다.
온 집안을 다 뒤졌지만 결국 연필은 찾지 못했다.
감사일기부터 쓸 일이 막막했다.
연필이 사라져서 속상한데 감사한 일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뭘 써야 하는 모든 시간이 다시 괴로워졌다.
마술 연필이 사라지고 나니까 나는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와 버린 것이었다.
“아린아, 공모전 낼 준비는 잘 되고 있지?”
가장 큰 일이 결국 다가오고야 말았다.
“네? 네, 아….”
갑작스런 선생님의 질문에 당황한 나는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냥 안 내겠다고 할 걸.’
‘선생님한테 지금이라도 못한다고 할까.’
몇 번을 망설였는지 모른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오늘 나랑 서점 가자. 나 살 거 있어.”
“얘는. 엄마 일 끝나고 가면 저녁인데 다음에 사. 급한 거면 다잇소나 문구점 가서 사고.”
“안된다고. 꼭 거기 가야 해. 엄마, 제발.”
나는 엄마에게 울면서 졸랐고 엄마와 나는 8시가 넘어서 서점에 도착했다.
연필을 샀던 곳으로 달렸다.
제발, 제발.
내가 샀던 것과 같은 보라색 연필을 찾았다.
이제 이름만 새기면 됐다.
그런데 이름을 새기는 기계가 있던 자리에는 이름 스티커 기계가 떡 하니 서 있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나가던 직원 아줌마에게 물어봤지만 잘 모른다고만 했다.
이제 나는 정말로 망했다는 생각에 멍하니 서 있다가 연필만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기분 탓인지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다음날은 학교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를 이틀이나 안 갈 수는 없었다.
“아린아, 몸은 괜찮아? 혹시 공모전 글 썼니? 내일까지는 내야 하는데….”
“선생님. 저 그거 못 낼 거 같아요.”
내가 아파서 그런 줄 아시는지 선생님은 다른 말씀 없이 알겠다고 했다.
다 해결된 건데 나는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공모전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어떻게 쓸까 고민했다.
연필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틈날 때마다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정리한 내용도 있었다.
집에 도착해 책상 앞에 앉았다.
없어진 연필만 생각하느라 며칠 동안 감사일기도, 정리노트도 잘 안 써졌는데 공모전에 낼 글까지 못 쓰게 되어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새로 사 온 연필을 깎았다.
그리고 쓰기 시작했다.
내가 잘 못 써도 어차피 누구도 내게 뭐라 하지 않을 거였다.
다른 애들도 그림을 내기도 하고 글을 내기도 하는데, 며칠 동안 조금이라도 생각한 게 아까우니 되는대로 써보자는 마음이었다.
잘 쓴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끝까지 썼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중요한 건 마술 연필이 아니라 그저 내 생각과 연필을 잡고 쓰는데 필요한 약간의 노력이었다.
이제 선생님이 쓰라고 하는 글만이 아닌 내가 쓰고 싶은 것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2주쯤 지나서 공모전에서 내가 쓴 글이 장려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화상품권 5만원도 부상으로 온다고 했다.
너무너무 신났다.
나 자신 아주 칭찬했다.
그리고 이름이 새겨진 보라색 연필도 찾았다.
최아진 필통 속에서 말이다.
동생이 아니라 웬수가 따로 없다.
그래도 이제 상관없었다.
이름이 새겨진 보라색 연필이든 새겨지지 않은 연필이든 이제 나에게는 모두 다 소중한 똑같은 연필이다.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노트를 열고 연필을 잡기만 하면 시작되는 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