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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제173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5년 3월 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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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에 강풍까지 몰아치는 날, 눈송이 같기도 하고 솜털인 듯한 은빛 나래 하나가 기류를 타고 날았다.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요정처럼 춤을 추며 날아가는 하얀 물체가 궁금했다.

뒤따라가 보기로 했다.

녀석이 달리면 나도 달리고 서면 나도 섰다.

지근거리에서 만난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털북숭이 깃털 속에 까만 포자가 보석처럼 박혀있는 걸 보아 이름 모를 어느 풀씨라는 것을 알았다.

풀씨도 엄동설한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선 쥐 죽은 듯 동면을 해야 할 터인데 어쩌자고 저 연약한 풀씨는 겁 없이 거리로 나섰더란 말인가.

늦가을인가 하고 착각했을까.

아니면 호기심에 세상구경하려 나온 것일까.

무엇이 그리 좋은지 눈 오는 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괜스레 동네를 싸돌아다니는 삽살개처럼 보인다.

나비처럼, 잠자리처럼 날 좀 잡아보라는 듯 장난기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가가면 어느새 공처럼 튀어 오르다가 걸음을 늦추면 땅으로 사뿐히 내려앉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예측불허의 발레리나다.

어찌나 날래고 영특한지 에이아이 지능이라도 장착된 의식 덩어리 같기도 하다.

시멘트 블록 인도 위를 비행할 때는 땅 냄새를 맡는 듯 킁킁거리다가도 이거 아니다 싶으면, 또다시 땅을 박차고 오르는 행보는 가히 혀를 찰 정도이다.

아마도 바람이 실어다 주는 곳에 대충 안주할 녀석은 아닌 듯싶다.

자신의 운명을 무심한 바람에 맡기는 소극적인 풀씨가 아니라, 스스로 행복을 찾아 길을 개척해나가는 자세가 앙증맞지 않은가.

애틋하고 가녀린 풀씨지만 그의 위대한 종족 번식의 열망은 동장군도 못 말리는 듯 추위도 잠시 주춤하다.

어딘가에 있을 볕 좋고 흙 좋은 땅 한 줌 있으면 만족할 터인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듯 오체투지의 순례길처럼 길 위엔 눈발이 하나 둘 쌓인다.

그렇지만 에너지 넘치는 녀석을 따라가기에는 내 몸도 늙어 힘에 부친다.

차도가 아닌 어느 조그만 화단에라도 비상착륙을 한다면 박수를 보내고 돌아설 텐데, 마땅한 정착지가 보이지 않는지 요모조모 터를 고르는 행동거지가 여간 꼼꼼하지가 않다.

그때 한줄기 돌풍이 불었다.

녀석은 이때가 기회라고 여겼을까, 자신의 작은 몸을 돌돌 말아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러고는 차도 건너편 산 쪽으로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 버렸다.

허탈했다.

하지만 쌩쌩 달리는 차량에 치이지 않고 무사히 길을 건넜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해야 했다.

집에 와서 식물도감을 찾아보니 녀석은 바람이 많은 정월에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나는 박주가리 홀씨라는 것을 알았다.

후미진 어느 화단에서 혹은 황량한 산비탈에서 강풍이 부는 날을 기다려 출가를 꿈꾸었을 박주가리.

그의 소망은 자신의 유전자를 담아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으로 보내고 싶은 애잔한 어미의 발상은 아닐까.

나름 저들의 세계도 우리가 함부로 제단 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세상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각자 주어진 삶의 길은 다르지만 거룩한 생명에의 길은 같을 것이다.

가족을 떠나 출가하는 동자승처럼, 성년이 되어 짝을 맞춰 신접살림을 차리는 우리네처럼 모두가 길을 찾아 나서는 한 무리의 구도자가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결코 부농은 아니지만 비교적 따사로운 집안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강 건너 산골마을로 시집을 오셨다.

바윗돌이 마당 가장자리를 점령한 빈농의 삼 대 독자에게 시집온 어머니는 밤마다 울었다고 한다.

도깨비가 나올듯한 산골 시집살이가 낯설기도 했지만, 홀씨처럼 날아온 시집살이는 순탄하지가 못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서울로 떠났다.

서당을 다니고 글 읽는 소리가 골목까지 들리더니만, 드디어 서울에서 공직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동네에서는 아버지 칭찬이 자자했다.

하지만 남편 없는 빈집은 공허했고 젊은 엄마에게 농사일은 벅찼다.

친정 마당에 손에 닿을 듯 샘솟든 박 우물은 호사스러운 옛이야기였다.

제대로 물동이 한번 이어 보지 않고 시집온 어머니는 사립문을 나가 배꼽마당까지 우물물을 길어올 때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고 했다.

거뭇한 우물가의 향나무는 거인처럼 서 있고, 동산의 부엉이는 밤마다 어머니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물동이에서 훔치는 물방울은 눈물과 섞여 뒤범벅이 되었을 것이다.

친구들과 쑥과 냉이 캐던 어릴 적 넓은 들판은 이제 어머니에게는 되돌아갈 수 없는 이상향 저편이었다.

척박한 정착지였지만, 어머니는 그 속에서도 뿌리를 굳건히 내렸다.

아이들이 하나, 둘 태어나고 어머니는 어느새 야생과 싸우는 전투사가 되어 있었다.

서울 간 아들이 행여 돌아올까 봐 빈 들녘을 하루에도 몇 번씩 내다보시는 할머니를 위해, 토끼처럼 커가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해 뜨면 들에 나가고 해가 지면 돌아오는 날이 빈번하였다.

까마귀골 돌무지에서 고사리를 뜯어와 마당 뒤쪽 너럭바위에 널어 말리는 젊은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나의 유년기의 수채화로 남아 있다.

어머니의 꿈은 박우물처럼 생명력이 넘쳤다.

여름이면 반복되는 심술궂은 강물의 범람도 어머니를 좌절시키지 못했다.

어머니의 야무진 꿈은 아이들만이라도 훗날 물 담지 않는 마을에서 밥이라도 제대로 먹게 하려면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삶터를 찾는 일이었다.

시집 들녘의 논밭을 하나, 둘 정리하여 강 건너 친정의 푸른 들녘으로 옮기는 계획은 적절했고 그 꿈은 하나씩 이루어졌다.

엄동설한에 강풍을 타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박주가리처럼 어머니는 그곳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삶의 여정은 살아있는 한 계속되는 것인지, 그곳에서도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합류한 어머니는 도회지로 나가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성장시켜 하나 둘 제 살 곳을 찾아 떠나게 만들었다.

또다시 정월이 돌아왔다.

오금을 절이는 한파도 곧 들이닥칠 것이다.

오늘도 아스팔트 갈라진 틈 사이로 거미줄 같은 서릿발이 쳐도 박주가리 홀씨는 어디에선가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것이고, 바람의 기척을 살피고 있을지 모른다.

나도 이 무렵이면 그 홀씨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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