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신라문학대상 당선작 발표 2025년 01월 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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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를교 중간 즈음이었다. 사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교한 안젤리나 졸리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데생화를 막 지나쳤을 때였다. 당신의 실루엣. 영어로 적힌 입간판 옆으로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걸음이 멈췄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거리의 예술가가 보인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구불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멋들어지게 묶은 동유럽계 남자였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앞에 앉은 손님을 관찰하더니 무언가 캐치했다는 듯 아! 하고 손가락을 튕긴다. 우아한 손짓으로 종이를 꺼내들어 반으로 접고는 이내 가위로 거침없이 잘라나가기 시작한다. 손놀림이 춤을 추는 듯 경쾌하다. 쓱싹쓱싹, 연극적인 동작으로 가위질을 마친 거리의 예술가가 오려낸 종이 사이에 검은색 속지를 끼워 넣는 순간이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일제히 오, 하고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다만 그림자였다. 거기에는 눈이나 코, 입 같은 건 없었다. 당연히 눈썹이나 눈동자의 색깔, 눈가의 주름, 입술, 피부색 같이, 그 사람을 그 사람이라 규정짓는 대부분의 것들 또한 없었다. 그저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그 그림자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그 사람이라 수긍할 만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감탄을 연발하는 관광객들 중에는 당했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과장되게 치는 서양인도 보였다.
“화제성이 있네. 장사하겠다.”
내 중얼거림에 인교가 한번 해볼래? 하고 권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격이 10유로라 적혀 있었다. 해봐, 내가 선물할게, 거듭 권하는 그에게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선물? 그럼 돈으로 줘, 차라리.”
그러자 인교가 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너 어쩌다 이렇게 됐냐….”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던 거리의 예술가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가위를 집어들었다. 곧 그의 손이 거침없이 종이 위를 누비기 시작한다.
인교와의 재회는 체코 프라하에서였다. 뜻밖의 만남. 어색한 공기. 5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의 부재를 확인이라도 하듯, 위태로운 침묵을 깨고 그는 내게 말했다.
“이정이 넌 그대로구나.”
그건 너무 오랜만이라 무슨 말로 대화의 물꼬를 터야할지 모르는 관계에서 주로 꺼내는 관용구였다. 까를교까지 함께 걸어오면서 우리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잘 지냈냐고 안부 한 마디 물을 법도 한데 어째서인지 둘 다 하지 않았다.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것인지 아니면 아예 없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적당한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거리의 예술가가 경쾌한 가위질을 멈추고 가위를 내려놓는 기척이 느껴졌다. 짧은 상념에서 깨어나 닿은 시선 끝에는 그림자가, 내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빨간 그림자였다.
“Merry Christmas.”
흰 종이 사이에 검은색 대신 빨간색 속지를 넣어 완성한 그림자를 건네며 거리의 예술가는 빙긋 웃는다.
뜻밖의 빨강에 구경하고 있던 관광객들이 술렁였지만, 정작 프라하까를교에서의 추억을 선물하고 10유로짜리 지폐를 내어준 인교는 별다
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적당히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정말 이정이 너 같네.”
인교는 색맹이다. 정확히는 빨간색이 전혀 인식되지 않는 적색맹(赤色盲). 그림자로 남기엔 너무 강렬한, 이토록 선명하고 뚜렷한 빨강이, 지금 내 눈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돌진해오는 이 저돌적인 빨강이, 그에게는 채도와 명도를 잃고 두 날개가 꺾여 바닥 언저리를 맴도는, 스산한 잿더미의 빛깔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블타바 강을 따라 걸었다. 까를교에서 나와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구 시가지를 뒤로 하고 우리는 그냥 걷기만 했다.
내 옆에서 인교는 보통 사람처럼, 보통의 속도로 걷고 있었다. 의족에 잘 적응한 그의 모습에 안심이 되는 것과 별개로 그의 걸음걸이가 낯설게 다가오는 건 사실이었다. 왼쪽 다리 일부가 없어진 그와 보냈던 시간보다, 두 다리가 모두 있었던 그와 함께 한 시간이 길었고, 그리고 우리는… 그 두 시간을 다 합친 시간만큼 헤어져 있었다.
이따금씩 그와 나 사이로, 아무 말 없는 우리의 걸음 사이로 블타바 강변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12월다운 바람이었다.
“눈은 왜 그래? ”
문득,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인교가 묻는다. 재회한 순간 이미 알아챘을 테지만, 이정이 넌 여전하구나, 했던 건 인교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 사이에 놓인 간격이기도 했다.
“백반증이래, 의사 말이.”
“백반증? ”
되묻는 인교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인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어딘가 좀 달라졌다고 느꼈다. 기묘한 위화감.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봐도 어디가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착각이었나,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오른쪽 속눈썹에 희뿌연 먼지가 내려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털어내려고 눈을 몇 번 비비고서야, 무언가 더해진 게 아니라 무언가 사라졌음을, 속눈썹에서 검은 색소가 날아가 하얗게 샌 털들만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원인이 뭐래? ”
“뭐라긴, 의사들이 잘 하는 말 있잖아.”
본래의 색을 잃고 하얗게 얼룩진 내 오른쪽 눈가에 우드등을 비춰보면서 의사는 백반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곤 말했다.
“자가면역질환 중 하나라는데 뭐, 정확한 원인은 아직 모른대. 원인이 무수히 많다나? 스트레스도 그 중 하나고. 알잖아, 의사들 스트레스로 적당히 퉁치는 거.”
“글 쓰는 거 힘드니? ”
인교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글을 뭐 내가 쓰나….”
그때 블타바 강변에서 한 차례 바람이 불어왔고, 그 바람을 맞으며 나는 덧붙였다.
“마감이 쓰는 거지.”
우리는 체코 현지인들이 즐겨간다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고심 끝에 체코 전통 가정식인 스비치코바와 토끼고기 요리, 코젤 맥주를 주문했다.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하며 간간히 지난 이야기를 곁들였다. 그와 나 사이에 미래가 없고 과거만이 남아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식사를 마쳐갈 때쯤 맥주를 한 잔씩 더 주문했다. 종업원이 새로 가져다 준 맥주 한 모금을 넘기고 나니 침묵이 자리한다.
“이거 말이야, 그림자가 빨강이라니… 좀 이상하지 않아? ”
나는 내 빨간 그림자에 시선을 주며 혼잣말 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제야 인교가 놀란다.
“아, 그게 빨간색이었어? ”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는 인교. 그런다고 갑자기 그에게 빨강이 보일리는 없다. 실루엣을 오려주던 까를교의 예술가는 내 한쪽 눈 주위를 잠식한 백반증을 놓치지 않았다. 빨강의 강렬한 그림자에 하얗게 빛바랜 속눈썹이 마치 작은 상처처럼 남아 있다. 그 아주 작은 부분이 내 안의 어딘가를 건드린다.
저녁식사 내내 우리는 빨강이 아닌 이야기들을 했다. 빨강을 교묘히 피해가며, 애초에 빨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담소를 나누었다. 이제, 빨강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였다. 나는 가만히운을 뗐다.
“인교야, 내 술주정 기억해? ”
한창 치기 어린 시절 술만 들어갔다 하면 나는 꼬인 혀로 술주정을 하곤 했었다.
“알아? 글을 쓴다는 게 어떤 건지! 내 안에, 그 여자가 살고 있다
고…. 눈물이, 아픔이, 다이아몬드가 되는 여자가….”
평소에는 좀처럼 울지 않는 여자. 하지만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이 다이아몬드로 변하는 여자.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그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내 안에 살고 있어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
지 못한 고통, 화석처럼 굳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 날뛰며 묵은 상처를 헤집어놓는 오래된 아픔, 그 기억들이 별안간 반짝이는 무언가로 변해가는 황홀한 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그 휘발성 짙은 찰나를 탐닉하며 글을 썼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눈물이 다이아몬드로 변하는 여자를 짝사랑하던 가난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용기를 내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그들은 결혼했고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날 바늘에 손가락을 찔린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전까지는. 그 후 남자는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 아내에게 채찍을 휘두르게 된다.
“그뿐인 줄 알아? 그 여자와, 그 여자를 때려서 다이아몬드를 얻으려는 그 망할 놈이 둘 다, 내 안에 살고 있다고…! ”
소설 합평을 마치고 동기들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술집에서 나는 술에 취해 숱하게 흑역사를 남겼다. 당시 그 술집에서 아르바이트 를 하고 있었던 인교는 내 치욕스러운 과거를 수도 없이 목격한 장본인
중 하나였다.
“아아, 그럼. 당연히 기억하지. 그걸 어떻게 잊겠어? ”
아무 저항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가 다음 순간 아차 싶었는지 인교가 내 눈치를 보며 얼른 덧붙인다.
“내가 먼저 꺼낸 거 아니다. 너가 먼저 꺼낸 거야.”
“그래, 뭐라고 안 해.”
“너 그때 진짜 웃겼는데. 스물 몇 살짜리 여대생이 어지간한 아저씨들보다 더 했다니까.”
그때가 생각나는지 인교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참동안이나 웃어댔다. 잠시 후 인교의 웃음이 잦아들었고 곧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서 위태롭게 타오르고 있는 촛불 너머로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때렸니? ”
인교가 떠난 뒤, 그게 항상 궁금했었다.
인교도 나를,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휘두른 채찍이 너의 등을 찢고, 아물지 못한 상처를 할퀴고, 핏물이 흐르고… 고통으로 얼룩진 너의 눈물을….
“그걸 내가 다이아몬드로 취했니? ”
*
5년 전, 인교는 내게 말했다.
“독일에 가야겠어.”
내가 독일? 하고 반문하자 그는 서른 이하면 독일에서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때 그는 딱 만 서른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셈이지.”
그러면서 한 가지 조건이 더 있다고 했다.
“미혼이어야 한대.”
인교는 독일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무엇보다 독일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심지어 그냥 아는 사람도.
사실 한국이라고 그에게 뭐 대단한 연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두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생사도 모른다고 했다. 그를 키워준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그의 유일한 연고는 나였다. 미혼이어야 한대, 그러니까, 하면서 그는 내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인교가 왼쪽 무릎 아래로 다리 일부를 절단했을 때, 그는 스물일곱의 건강한 청년이었다. 다리를 잘라내기 전, 그는 키 178센티미터에 70킬로그램이 나갔다. 이따금씩 몸무게가 움직이긴 했어도 그래봐야 1, 2킬로그램 정도였다.
한쪽 다리를 잘라내자 한순간에 다리 무게만큼이 그에게서 증발해버렸고, 그 무게만큼 살을 찌우거나 근육을 키울 순 있어도 다시 다리의 형태로 복구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당시 느꼈을 상실감은 잘라 낸 다리의 무게만큼은 분명 아닐 것이다.
한동안 인교는 내가 예상하는 방식으로 절망하고 상심했다. 그럼에도 하퇴의지를 착용하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는 주치의의 소견도 있었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그의 의지 또한 굳건했다.
인교는 매일같이 붕대를 갈면서 절단단을 단련시켰고 근력강화 운동에도 열심이었다. 실제로 3개월 후 하퇴의지를 착용했다. 경과는 매우 좋았다. 거칠고 서툰 걸음이었지만 인교는 다시 걷는 데 성공했다. 우리 사이도 괜찮았다. 어쩌면 전보다 더 끈끈하고 견고해졌는지도 몰랐다. 그 해 겨울, 우리는 결혼한다.
한동안 평온하고 무탈한 일상이 이어졌다. 어느 날 인교가 자신의 왼쪽 다리가 돌아왔다고 말하기 전까지.
“뭐라고? ”
그건 비유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잘려나간 다리가 살아 있으며 기적처럼 자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고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서 있는 나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인교는 허공을, 그의 주장대로라면‘다리’를 쳐다보며 뭔가에 홀린 듯 말을 이었다.
“아아, 빨강이야…! ”
그 후 인교는 의지(義肢)를 착용하는 걸 꺼려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허공의 어느 지점을 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뭘 보고 있냐고 물으면‘다리’를 본다고 했다. 어떤 때는‘빨강’을 보고 있다고 대답하
기도 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어, 빨강이 이런 색일 줄은.”
다리가 보인다는 건 둘째 치고, 태어나 단 한 번도 빨간색을 본 적 없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그게 빨강이라 확신한단 말인가!
나는 그를 비웃고 싶었다. 실제로 비웃기도 했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사라진 신체에 대해 나타나는 일종의 유령현상일 뿐이라고 그를 다독여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수술한 병원을 찾아가 이미 한참 전에 의료 폐기물로 소각한 다리를 돌려달라고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처음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인교를 데려오던 날, 불현듯 그의 사고 소식을 듣고 응급실로 달려가던 순간이 떠올랐다.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고막을 자극하는 그 긴 파장이 되살아나 내 귓가에 메아리치고… 그래,
빨강이었다. 그 상황 자체가 내게는 빨강이었다. 빨강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섹스는 없었다. 열정도, 정열도, 사랑도 모두 사라져갔다. 인교는 그 뒤로도 다리가 살아있다며 병원에서 여러 번 소동을 일으켰고 성치 않은 몸으로 여기저기를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면 글자들에게로 도망쳤던 건 나의 방식이었다.
숨구멍을 꽉 틀어막고 있는 무언가를 토해내듯 나는 단어와 문장들을 쏟아냈다.『빨강』은 그렇게 완성됐다.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그게 내 얘기라는 걸, 더 정확히는 인교의 이야기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채곤 했다. 얼마 후 뜻밖에도 수상 소식이 날아들었다.
상을 받자 나는 바빠졌다. 무엇보다 술자리가 늘어났다. 그날도 술에 잔뜩 취해 현관문을 열었다. 식탁에 앉아있는 인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건『빨강』이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야.”
나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며 말했다. 인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며칠 후 말했다. 독일에 가야겠어. 그리고 이혼 서류를 내밀었던 것이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 발급 조건에는 서른 이하여야 한다는 나이 제한은 있었지만 어디에도 미혼이어야 한다는 조항은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정리하고 나눠야할 재산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함께 한 6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인교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한테는 글이 있잖아.”
그리고 잠시 후 이렇게 덧붙였다.
“나한테는 다리가 있고.”
그랬다. 말하자면 우리 사이에는‘빨강’이 놓여 있는 셈이었다.
*
“너의 고통을, 너의 눈물을… 내가 다이아몬드로 취한 거니? ”
마주 앉은 테이블 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인교는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더니 그만 일어나자고 말했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왔던 길을 되짚어 우리는 다시 블타바 강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사위는 온통 깜깜했다. 어둠속에서 환한 조명을 밝힌 유람선 한 척이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강물에 영롱하게 맺힌 불빛들이 검은 물결을 타고 너울너울 번져나간다.
“지금도 다리가 보이니? ”
내 물음에 인교가 걸음을 멈추고 날 돌아본다.
“다리는, 여전히 빨강이니? ”
아주 잠깐의 침묵, 흔들린 사진의 한 장면 같은 찰나가 스쳐 지나갔을 뿐, 인교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 내게 묻는다.
“춥지 않아? 이만 트램을 탈까? ”
하얀 입김이 올라와 그의 얼굴을 가린다.
인교의 언어는 늘 괄호의 영역에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거울에 비친 내 오른쪽 눈가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인교를 떠올렸다. 백반(白斑)이 지나간 자리, 본래의 색깔을 잃고 하얀 흔적으로 남은 그곳, 홀로 다른 시간 속을 거닐고 있는 그곳처럼 인교도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나 겨울 언저리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는 이런 사람이었지. 딱히 대답을 듣길 바란 건 아니었으므로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다. 대신 그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인교야, 내 눈 말이야. 의사들은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지
만, 실은 나는 알고 있거든. 이렇게 된 이유를.”
우리는 트램을 타지 않고 다시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인교가 독일로 떠나고 다음 해 여름이었다. 나는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 소설은 도입부에서부터 제자리걸음이었다. 노트북 화면의 하얀 바탕 위 하염없이 깜박이는 커서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될 정도였다. 다른 이의 글을 읽는 것도 힘들었다.
심장을 툭 치는 뜻밖의 단어도, 행간에 몰래 숨어있는 가슴 시린 문장들도 그때의 나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집을 나서서 그냥 무작정 걷는 날이 많았다. 그날도 목적지 없이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불현듯 바로 전날 지인과 나눴던 통화 내용이 생각났다. 그는 며칠 전 사주를 보러 갔다 왔다
면서 그 할아버지가 어찌나 잘 맞추던지 아주 사찰당하는 줄 알았다고 한참동안이나 떠들었다. 나에게도 꼭 한번 가보라고 거듭 말했다.
아무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발길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내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된다.
“혹시 사주 보러 오셨어요? 할아버지 오늘 안 나오셨어요.”
놀이동산으로 향하는 길목은 대단히 번잡했다. 단내 풀풀 풍기는 솜사탕과 아이스크림, 다양한 캐릭터가 그려진 알록달록한 풍선들을 매달아놓은 노점상을 지나쳐 사주 보는 할아버지를 찾아 한참 헤매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붙여왔다.
“독감 걸리셨대요. 어제부터 자리를 비우셨어요.”
막 중학생이나 됐을까, 햇빛에 솜털이 비칠 만큼 마냥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그곳에서 사람들의 캐리커처나 초상화를 그려주는 길거리 화가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어차피 헛걸음을 한 참이었고 마침 소년이 네다섯 살 안팎의 사내아이 둘을 앉혀 놓고 그림을 그리기 직전이라 나는 구경삼아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소년이 비어 있는 하얀 종이 위에 순식간에 윤곽을 잡아나간다. 나는 내심 감탄했다. 뜻밖에도 솜씨가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소년의 꼬마 손님들이었다. 아이들은 대단히 활달해서 좀처럼 자리에 앉아있질 못했다. 참을성을 시험 당하던 아이들의 엄마는 결국 길바닥 한복판에서 교양을 잃고 말았다. 엄마의 고함 소리에 한 아이가 덜컥 울음을 터트리자 다른 아이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그 정신 사나운 와중에도 소년의 손은 쉼 없이 종이 위를 누비고 있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소년이, 더 정확히는 소년의 그림이 무언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특이점을 발견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림을 받아든 아이들의 엄마도 놀란 얼굴로 중얼거린다.
“세상에, 어쩜…. 나도 가끔 헷갈리는데….”
아이들은 일란성 쌍둥이였다. 가끔 헷갈린다는 엄마의 말이 수긍이 갈 정도로 일란성 쌍둥이 중에서도 특히 더 닮은 케이스였다. 사실 닮았다는 말조차 어폐가 있었다. 두 아이는 완전히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년의 그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소년의 손끝에서 탄생한 두 아이들은 분명히 쌍둥이였고, 또 둘은 완전히 똑같았다. 그런데 동시에 달랐다. 전혀 달랐다. 순간 나보다 내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아이들의 엄마가 쌍둥이를 데리고 사라지자마자 나는 소년에게 물었다.
“아까 그 쌍둥이….”
소년이 날 돌아본다.
“어떻게 구분했어요? 내가 봤을 땐 아주 똑같던데.”
질문을 던지면서도 딱히 명쾌한 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경험상 이런 경우 의도했다기보다 대부분이 우연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에게서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똑같긴요, 그 아이들은 전혀 다른 색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
소년은 색(色)을봤다.
“색? ”
“네, 색깔요.”
이건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결이나 분위기 같은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소년은 사람에게서 색상을 봤다. 쌍둥이 중 한 명은 노랑, 다른 한 쪽은 보라색이라고 했다. 서로가 서로를 그림자 삼아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는 절묘한 색상 조합이었다고도 했다. 그 말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소년이 말을 잇는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아이들의 발랄함이 지나쳐 그 엄마는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지만 소년은 오히려 좋았다.
“아이들 얼굴에 생동감이 넘쳐서, 색이 뭉클뭉클 올라왔거든요.”
나는 소년의 맑고 순진무구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다음 손님이 왔다.
교복 차림의 세 명의 여고생이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소풍이라도 온 모양인지 잠시 기웃거리던 학생들 중 한 명이 얼마냐고 물었고 소년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셋이 달려들어 오천 원을 깎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격 협상이 끝나자 가운데 서 있던 여학생이 간이의자에 앉는다. 소년은 이젤 위에 종이를 고정시키고 파스텔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때 뭐랄까, 소년의 그림에서 무언가 엄청난 것이 폭발하기 바라는 마음이 한쪽에, 전혀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다른 한쪽에 놓여 있었고 각각의 마음에 양쪽 발을 하나씩 딛고 정확히 그 중간 지점에 서 있었다.
첫 번째 선이 하얀 도화지 위에 피어올라온다. 선이 모여 점차 면과 형체를 만들었다. 소년이 그어놓은 선들은 한동안 무의미하게 제자리 걸음 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서너 걸음을 성큼 걸어갔다. 그렇게 얼굴에서 콧대가 솟아나고 눈동자에 초점이 생기고 두 뺨이 부풀어 오르고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흩날렸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누가 봐도 잘 그린 그림이었다. 하지만 평범해보였다. 지극히 평범한 수작(秀作). 그런데 무심코 그림의 모델이 된 실물에 눈길이 닿은 순간이었다.
어? 나는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으로 그림을, 다시 여학생을, 또 다시 그림을 번갈아보았다. 옆에 서 있던 두 친구들도 내가 하는 행동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야, 이거 뭔가 개 신기해! ”
“왜, 설마 못생겼냐? ”
“몰라, 근데 그림이 너보다 더 너 같아. 아, 존나 너 같아! ”
어느덧 태양의 강렬함은 수그러져 있었다. 놀이동산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늘어서 있던 노점들도 점차 모습을 바꿔 갔다.
솜사탕과, 풍선들, 아이스크림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자 놀이동산 특유의 알록달록함이 사라져갔다. 붉은 장막을 친 포장마차들이 백열전 구를 켜기 시작했고 소주와 막걸리가 팔려나갔다. 더 이상 손님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년은 하루 장사를 마치고 화판과 그림 도구들을 주섬주섬 정리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소년의 말을 믿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날 나는 소년의 마지막 손님이 되었다.
소년이 가방 속에 집어넣었던 파스텔과 색연필을 도로 꺼내들었다.
나는 소년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정말 사람에게서 색이 보여요? ”
소년은 접어두었던 휴대용 이젤을 세우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언제부터 색이 보였어요? ”
호기심과 의심이 반반씩 섞인 내 질문에 소년은 불쾌한 기색 없이 빙긋 웃는다.
“아마도 태어난 순간부터? ”
이 세상을 눈에 담기 시작한 직후부터, 최초의 기억이 생겨난 순간부터 소년은 모든 생명에게서 색깔을 보아왔다. 그건 소년에게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살아 있는 건 다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지니고 있어요.”
소년이 손을 움직여 내 모습을 스케치하기 시작한다.
“딱 한 사람….”
쉼표를 찍은 그곳에서 소년이 말을 멈춘다. 의외로 침묵이 길어졌다.
움직이고 있는 소년의 손을 따라 쓱쓱, 따뜻한 질감의 소리만 이어질 뿐이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싶었을 때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요.”
소년의 눈앞에는 항상 온갖 색깔들이 정신없이 뒤엉켰다. 사람이 많은 곳이면 색은 더더욱 쉼 없이 밀려들었다.
그날도 그랬다. 소년은 친구 병문안을 간 길이었다. 병원 전체를 헤엄치고 있는 수많은 색상들 사이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구석진 곳에서 홀로 금지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색(色)이없는사람.
그것이 첫인상이었다. 그녀에 대한.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녀는 소년의 눈에 색으로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색이 있다면, 그건 아마 빨강일 거예요.”
그 순간 소년이 발음하는 빨강이, 빨강처럼 강렬하게 나를 헤집고 들어온다.
“왜냐하면… 저는 빨강이 보이지 않거든요.”
자연스럽게 적색맹인 인교가 떠올랐다. 혹시 색맹이냐는 내 물음에 소년은 담담히 고개를 젓는다.
소년은 색맹이 아니었다. 소년은 빨간색을 볼 수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레드뿐 아니라 크림슨(자주)도, 스칼렛(진홍)도, 마젠타(심홍)도, 버밀리온(주홍)도 소년은 볼 수 있었다. 또한 비비드라든가 스트롱, 페일, 라이트, 다크, 딥 등의 더 세부적인 레드도, 미처 이름 붙여지지 않는 그 사이사이의 빨간색들까지도 모두 소년에게는 있었다. 다만 소년의 빨강에는 어딘가 구멍이 나 있었다.
무수히 펼쳐진 빨강의 스펙트럼 가운데 어느 한 지점, 어느 한 곳에 홈이, 아주 작은 틈새가 있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곳은 빨강으로, 혹은 그 어떤 색으로도 인식되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그 색을 지녔을 거예요. 내가 결코 볼 수 없는 색.”
소년이 나를 보며 말했다.
커다란 눈. 어떻게 봐도 어린애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마주했던 소년의 눈빛이 검고 깊어서였을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소년이 더 이상 어려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수십 년을 살고 이제 소년의 얼굴을 가지게 된 사람 같기도 했다.
사위는 점차 어둑해져 갔다. 소년이 가스램프를 꺼내 불을 올린다.
어스름해져가던 주변이 위태롭게 밝아졌다. 부탄가스가 피워내는 노르스름한 불빛 위로 소년의 목소리가 부질없이 흩어져 갔다.
“난 도저히 그녀를 그릴 수가 없어요. 어떤 경우에도 색이 없으면, 그건 진짜 그림이 아니니까.”
그 뒤로 소년은 극도로 말이 없어졌다. 온 신경을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소년의 눈.
어린애 같이 커다란 눈. 그 눈이 나를 본다.
불현듯, 긴장이 몰려왔다. 소년의 말대로라면 소년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색인가를 뿜어내고 있을 거였다. 나도 모르는, 나만의 고유한 색을.
소년의 눈이 나를 훑어본다. 찰나지만 샅샅이. 나는 발가벗겨지고 있었다. 소년의 손이 점점 박차를 가하며 막바지를 향해 달려간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해야 할 시간이.
째깍째깍, 어디선가 시계초침 소리와 함께 어떤 순간이 나를 긴박하게 쫓아온다. 나보다 더 나다운 나, 가면을 벗고 나체로 선 나를 오롯이 대면해야 할 순간이 조여 오듯 시시각각 간극을 좁혀오고 있었다.
“자, 잠깐만! ”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지갑을 뒤져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내려놓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한 볼일이 있었는데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내 말은 누가 들어도 어설픈 변명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등 뒤로 나를 부르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커다란 눈. 그게 대체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그때 나를 쫓아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그토록 다급하고 초조해졌던 것일까. 단지 그림이었을 뿐인데.
내가 다시 소년을 찾아간 건 여름이 완전히 끝나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낙엽이 흐드러진 길을 따라 걸었다. 이젤과 그림 도구들이 어지럽게 놓여있던 그 자리에, 그러나 소년은 없었다. 그곳에는 감기가 다 낫지 않았는지 연신 기침을 해대며 사주를 봐주고 있는 할아버지뿐이었다.
“어르신, 말씀 좀 여쭐게요. 여기서 그림 그리던 아이는 오늘 안 나왔나요? 중학생쯤 되어 보이고 눈이 큰 앤데요.”
할아버지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난 모르오.”
어쩐지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소년이 자리에 없을 경우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처자가 이 사람이요? ”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동안 근처를 서성이는 나를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던 할아버지는 잠시 후 끙, 하고 자리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신문지로 꽁꽁 싸맨 그걸 받아드는 순간, 그때 찾아가지 못한 내 그림이라는 걸 알았다.
며칠 전 소년이 그 그림을 가슴에 안고 헐레벌떡 뛰어와, 자신이 당분간 나오지 못할 것 같으니 혹시 그 사이 그림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거든 전해달라며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갔다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나도 그게 마지막이었소.”
*
어느새 다시 까를교였다. 인교와 나는 까를교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거리의 예술가들은 전부 철수했지만 야경을 즐기는 사람들로 카를교는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다리 난간 너머 강 저편으로 프라하 성(城)이 보인다. 밤이 되어 창마다 빼곡하게 불을 밝혀놓은 프라하 성은 어둠속에서 마치 성 전체가 황금색으로 불타오르는 듯했다.
“이정이 넌 무슨 색이었어? ”
“글쎄….”
나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림을 보지 못한 거야? ”
그렇다. 나는 결국 내 그림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볼 수 없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할아버지에게서 건네받은 그림은 창고 속에서 며칠간 방치되어 있었다. 창고에서 꺼내 감싸고 있던 신문지를 뜯어내고 그림을 마주하는 데 왜 용기가 필요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그림은 뒤바뀌었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림이 그 여자, 소년이 말했 던 그녀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봤다.
왜냐하면 그 그림은 빨강이었으므로. 소년이 볼 수 없어서, 그릴 수 도 없다던 그녀, 빨강.
엄밀히 말해서, 그림에 사람의 형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우리가 빨간색이라고 부르는 빨강 또한 거기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 그림은 빨강이었다. 그림을 마주한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빨강이라고. 이건 빨강 그 자체라고.
나는 소년이 어떻게 그 빨강을 만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림을 건네받으며 혹시 소년이 언제쯤 돌아오는지 아느냐고 물었을 때 할아버지가 툭 내뱉은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난 이미 충고했어, 그 여자를 조심하라고.
쯧쯧, 그게 다 제 팔자지 뭘 어째.”
분명히 한순간에 그려졌을 빨강. 누군가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우연히 남은 흔적에 가까운 빨강. 걸작의 경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경지 너머에 있는 빨강.
소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소년의 빨강을 보고 있으면 설령 무슨 일이 생겼더라도, 그 아이는 내가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일을 불행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곤 했고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평소보다 유심히 빨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림이 뭔가 달라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는 그곳에서 섬광처럼 소년을, 소년의 마지막 뒷모습을 목격했다.
이름 모를 천재화가가 그려낸 한 장의 크로키처럼, 소년의 뒷모습은 하나의 꿈틀거림, 어떤 반짝거림으로, 거칠게, 그러나 선명하게 내 각막으로 새겨져 들어왔다.
그 순간 어쩌면 빨강은 그녀가 아니라 오히려 소년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고 그렇게 직감했던 찰나, 어둠속에서 야수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불쑥 고개를 들은 빨강이 허공으로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요란한 폭죽 소리와 함께 불꽃이 쏘아 올려졌다. 프라하 성을 배경으로 불꽃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올라가던 불꽃은 어느 순간 방사형으로 펼쳐지면서 까만 밤하늘을 형형색색 수놓았다.
화려하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한 광경에 여기저기서 함성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그때였어.”
날아오르던 빨강이 내 오른쪽 눈에 스치듯 닿았던 것은. 나는 반사적으로 눈가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내 손을 피해 슬쩍 몸을 튼 빨강이 다시 한 차례 날아올랐고 이내 아득히 멀어져갔다.
그날 이후였다. 빨강이 머물다간 자리, 내 오른쪽 눈가에 이렇듯 하얀 상흔이 남게 된 것이다.
뒤바뀐 그림을 돌려주기 위해 나는 여러 번 놀이동산을 찾아갔다. 소년의 자리는 늘 비어있었다. 연신 마른기침을 터트리는 할아버지만이 혼자 바둑을 두거나 가끔 사람들을 상대로 손금이나 사주를 봐주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마저 그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내 오른쪽 속눈썹과 눈 주위에서 색이 사라져버리고 하얗게 바래버린 것에 대한,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이야기 말이다.
양각(陽刻)만이 조각의 기법은 아닐 것이다. 선(線)을 그어 지금 여기 눈이, 눈동자가, 그 사람 특유의 코끝의 형태가, 입술의 휘어짐이 있다
고 말하는 대신 그림자로, 다만 하나의 실루엣으로 누군가를 그려내기도 하듯이, 모든 말이 꼭 명쾌한 선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내 이야기가, 아무렇게나 그은 듯한 이 이야기가 저 멀리서 하나의 실루엣이 되어 온전히 그에게 가닿기를 바랐다.
“너에게 다리는 여전히 빨강이니? ”
내 물음에 인교는 이번에도 답이 없었다. 하지만 겨울의 시린 흔적 대신 그의 얼굴에 깃든 건 잔잔한 웃음이다.
한때 우리는 색약 검사지를 넘기며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내 눈엔 이토록 확실하게 보이는 숫자와 그림들이, 적색맹인 인교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점들의 나열일 뿐이었다. 정반대의 검사도 있었다. 색맹인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이미지 말이다. 내가 아무리 쳐다봐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그곳에서, 인교는 늘 무언가를 봐냈다. 대체 무엇이 보이냐는 내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 나를 보고 가만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때 그 미소와 똑같은 웃음이 인교의 입가에 맺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따스한 색을 가진, 고요하고 평온한 웃음이다.
다시금 폭죽이 터진다. 불꽃놀이는 이제 절정에 달한 듯 까만 밤하늘에 수많은 색상의 불꽃들이 동시에 퍼져나간다. 그중에서도 빨강은 어김없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 어떤 색깔보다도 강렬한 빨강, 더없이 화려하고 다채로운 빨강들이 사람들을 향해 뜨겁게 소리를 지르며 온 세상을 빨강으로 물들인다.
크리스마스의 빨강, 축제의 빨강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열기와 흥분 속에서 나는 그 순간, 조금 다른 빨강을 만나고 있었다.
오롯이 나체로 남은 빨강, 빨강의 숨결, 빨강의 속살을 느끼며 잠시 그렇게 그 순간을, 프라하의 밤을 만끽하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