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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

책 제목제172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4년 12월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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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쉰 살을 한자어로 지천명(知天命)이라 한다. “하늘의 뜻을 앎”이라고 사전 정의는 되어 있다. 오십줄에 든 어느 날 문득 공자가 말한 나이 ‘50세 지천명’이란 단어가 나의 뇌리에 박혔다.
지, 천, 명. 성현이 말한 거창한 경지까지는 못 올라가더라도 그냥 소 시민으로 나의 소명은 무엇일까 하고 가볍게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공 자가 나이별 호칭을 붙였던 15세 지학(志學), 30세 이립(而立), 40세 불혹(不惑), 50세 지천명(知天命), 나이를 지칭하는 명사 의미를 사십 고개까 지는 골똘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는 것인데, 머리 아프게 나이별 의미를 새겨야 하나, 하면서 세속적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거리를 두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또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삶이 무엇이지? 삶과 죽음이 결코 멀리 있지 않구나? 하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거지? 의미 있는 하루는 어떻게 사는 거지? 하는 부조리로 가득한 인생철학 건더기들이 빨래를 걷다가 아니면 차 한잔 마시고 멍때리고 있을 때면 생각나는 것이었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아이들이 성장하면 다시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아직도 유연하지 않기에 나이 먹은 경단녀를 아량 있게 뽑아줄 리 없을 것 같다. 또한 요즘 젊은이들처럼 화려한 스펙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러면 내가 나를 채용하는 일을 찾아보자, 내 스스로 창업을 해보자. 그러다가 어느덧 고개 들어보니 인생 반 고개를 훌쩍 넘어 나이 쉰 살이 되었다.
20∼30대 시절에는 적성에 맞지 않아도 또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 기대와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을 가져 일을 했다면, 지금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있을 때 문득 학창 시절에 친구와의 만남이 생각났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는 큰 서점들이었다. 종로서적,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 앞이었다. 책을 보다가 친구를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지도 않고 그 시간에 책을 보고 있으면 바깥세상은 잠시 잊은 채로 책 속으로 빠졌던 기억이 있다. 그 막연히 좋았던 감정이 아련히 내 이마에 와 닿았다. 부드러운 녹색 서가에 격렬한 사랑 이야기, 사회정의를 쫓는 이야기, 아이 어른 모두가 읽고 싶은 서정적 색채의 그림책, 시인들 감성이 넘치고도 넘치는 시집 등, 한여름 밤 등에 땀을 짝 빼는 무서운 귀신 이야기, 상상만 해도 도파민이 마구마구 솟았다. 갑자기 그 생각을 하니 몇 개월 전에 앓던 우울증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책도 마음껏 보고, 책 좋아하는 사람들과 책방에서 하염없이 수다도 떨고, 생각을 교류하면서, ‘책 마당을 펼쳐 보이자’ ‘책은 새로운 시선을 만나는 것이다’ ‘책은 도끼다’라는 책에 얽힌 문구들이 이리저리 나를 뱅뱅이 돌리듯이 마구마구 내 머리에 박힌다.
오래 전에 봉하마을에 갔을 때도 벽면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시민이 항상 깨어있는 보루가 되어야 한다.’
늘 내 가슴에 맴도는 말이었다. 깨어 있기 위해서는 일단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 책방 문화가 매우 다채로워졌다. 참고서와 책만 팔던 책방들이 콘서트도 하고, 문화센터에서 할 법한 일일 강좌 등 다양한 행사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와인도 팔고, 수제 맥주도 파는 책방들이 들어섰다. 지역신문에서 우연히 우리 동네 책방에서 하는 인문학 콘서트 일정을 보게 되었다. 발 빠르게 책방 위치를 확인하고 방문 예약을 하였다. 그리고 보태니컬 그리는 색연필 수업도 참가해 보았고, 그림책 작가, 소설가, 시인들의 강좌 등 여러 행사에 열심히 참가도 해보았다. 점점 책방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이 일을 나도 재미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 남편이 퇴직할 즈음 나에게 갱년기 우울증이 슬며시 나를 엄습해 왔다. 심리극복 책을 우연히 읽던 어느 날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본인 스스로 재미있는 일을 찾아서 하다 보면 근심도 우울증도 사라진다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바로 책방이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멋지게 나만의 특색 있는 책방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드디어 마음을 다진 후 전국에 있는 특색 있는 동네 책방을 탐방하고 몇 시간씩 책방에 홀로 앉아서 책방의 일상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책방을 열어보는 것이었다.
“가장 재미나는 일을 하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 트로이아 전투에 나선 아킬레우스처럼 나는 무서울 것 없이 전진하였다. 핸드립으로 커피 내리는 방법도 배우고 멋지게 책방 인테리어도 꾸미고, 책방지기의 취향을 듬뿍 담은 서가도 개성 있게 꾸미고, 지금껏 내가 살아온 이력 중에 제일 빛나는 소명이 되도록 빌었다. 책방을 향한 내 열정이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게 유지해 달라고. 간절한 내 마음을 제물로 신들에게 바친다.
큰 뜻을 품고 안중근 열차가 어둠을 뚫고 하얼빈으로 갔듯이 나의 쉰 살에 이룬 나의 꿈이 아름답고 견고하길 바란다.
그해 책방은 한 살이고, 나는 쉰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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