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4년 12월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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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또 누구를 위해 이토록 기를 쓰며 사는 것일까. 까닭 없이 정신의 밑바닥에 가 닿을 때가 많았다. 그 심해에서 헤맬 때면 문득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막연하게 궁금해지곤 했다. 그들도 나처럼 느낄까. 무수한 타인들 사이에서 갑자기 낯설고도 친숙하게 가슴을 후벼드는 이 외로움을.
생각의 꼬리를 스스로 잘라먹으며 길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찾은 곳이 바로 빛누리였다. 광명시 하안도서관에 속한 독서토론 동아리였다. 책 읽기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독서토론 모임에 참여한 것은 처음이었다.
짙은 초록색의 롱코트를 입고 조금은 긴장된 모습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꺼번에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순간 발걸음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생각했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마치 어느 회사의 워크숍을 방불케 할 만큼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놀랐다. 지금 이 분위기에 내가 적응해낼 수 있을까. 잘못 왔다고 말하며 나가버릴까?
그 짧은 순간에도 생각의 번민들이 곡예사가 되어 공중을 가르며 지나갔다. 니체는 춤추는 별 하나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래도 이건 너무…. 바로 그때 누군가 내 팔을 잡으며 자신의 옆자리로 잡아끌었다. 다행이다. 누군가가 나의 혼란스러운 궤적을 고스란히 의자에 앉혀주어서.
내 오른쪽에 앉은 사람부터 차례대로 자신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역사, 문화, 정치, 경제, 사회, 철학적인 인문학적 사유까지 누에고치에서 실이 나오듯 줄줄 엮여서 나왔다. 도대체 어느 한 사람한테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책의 줄거리는 기본이고 그에 더해 자신의 생각까지 깔끔하게 덧입혀 중심 가치관까지 피력하는 사람들을 보며, 문득 나는 엄마가 떠올랐다.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조간신문을 읽고 4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왔던 엄마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무음으로 해 놓은 핸드폰에 자꾸 빨간 불이 들어왔다. 가파르게 소식이 도착했다. 엄마가 위독하셔! 나는 그 자리에서 석고상이 되고 말았다.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얗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변했다. 오늘이 독서토론 첫 날인데 엄마가 위독하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급한 볼일이 생겨 가봐야겠다며 황급히 동아리실을 빠져나왔다.
그랬다. 생애 처음으로 찾아간 독서모임 날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큰 산 하나가 홀로이 무너져 내렸다. 장례식을 마치고 2주일이 지났다. 다시 그날이 왔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너털거리며 동아리실 문을 열었다. 또다시 일시에 나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갸우뚱하는 표정이었지만 누구도 쉬이 말을 걸지 못했다. 차례대로 이야기가 이어지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단단히 얼어붙어 있던 문장이 나도 모르게 눈물로 녹으며 흘러나왔다.
“여러분들을 처음 만난 그날, 엄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싸늘히 식어 있었어요. 자식들을 아무도 보지 못한 채 말이죠. 너무도 외롭게 별이 된 엄마를 보내드리고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이곳에 왔습니다.”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고 했던가. 나의 말이 끝나자 동아리실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아무 말 없이 어두워진 나를 별빛처럼 비추며 포근히 안아주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엄마가 되어 혹은 큰언니처럼 살갑게 다가와 직접 담근 김치나 장아찌를 주고 갔다. 냄새가 날까봐 여러 번 랩을 씌우고 그 안에 진심을 담은 편지를 전해 주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집으로 돌아와 허전한 가슴을 정으로 채워 넣기도 했다.
하얀 종이에 놓인 글을 읽기만 하던 나의 독서는 차츰 사람을 읽기 시작했다. 그들과는 지식과 정보만을 나누던 것에서 따뜻한 가슴을 공유하는 얘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책을 통한 작가의 의도에만 치중해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토론을 위한 토론을 했다면, 이제는 다소 주제에 벗어난다 해도 귀를 열고 그 순간을 함께 호흡할 만큼 서로를 읽어간다.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퇴직을 하고 몇 년간 몸이 불편하여 외출을 거의 하지 못한 분이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늘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잔혹한 사건과 혹독한 역사의 시간을 담은 책 앞에서도 인간 중심으로 사고를 했다. 가끔은 그녀를 보면 엄마가 생각났다. 그럴 때면 토론이 끝나자마자 처음 안겨 울었던 것처럼 그녀의 품속을 파고 들 때가 있다. 말없이 꼬옥 안아준다. 그날처럼…. 일 년 동안 읽은 20여 권의 책을 만져본다. 책을 한 권씩 읽어나가는 만큼 더 많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은 내 삶의 방식만이 전부라는 생각은 자취를 감추었다. 책꽂이에 쌓이는 책 그 자체보다 이들과 함께 나누는 소중한 일상이 추억으로 쌓여 인생의 궤적이 되어가는 순간들이 훨씬 더 뿌듯하다.
새로운 책을 펼칠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이 펼쳐진다. 이와 동시에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더 역동적인 실존적 인생도 함께 읽게 된다. 이러한 나의 독서는 오늘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다. 음악 도서를 읽고 난 후 함께 갔던 음악회와 미술에 관한 책을 읽고 난 후 다녀왔던 미술관 티켓들을 바라보면, 오며 가며 나누었던 각자의 사연들이 쌓여 삶의 책 한 권으로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지식이 높다 하여도 가슴 속에 따뜻함이 결여된 사람들만 있다면 독서가 인생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을 알아가고 가슴이 차갑게 식어갈 때쯤 찾아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또한 크나큰 행복이다. 나에게 있어 독서는 더 이상 지식을 쌓기만 하는 방편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난 길을 함께 걸으며 서로의 인생을 알아가는 여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