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4년 12월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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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시어머니의 일을 마지못해 돕는 재스민을 보고 입을 대곤 했다. 그럴 때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잠이 많아서 빨리 못 일어난다. 잠 없는 우리 늙은이들과는 다른 신체를 가지고 있다며 너그러운 마음을 냈다. 나의 이 말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처음부터 습관을 잘 들여야 하는데 다음에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우려를 했다. 그래도 동요하지 않고 우리 며느리는 아직 22살밖에 안 됐다. 다음에는 일어나라고 잔소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 집안일을 척척해 낼 것이라는 말로 그들의 걱정을 밀어냈다.
“엄마, 나 밖에 나갔다 올게요.”
오늘도 예쁘게 화장을 한 며느리는 다문화가정 모임이 있어서 갔다 가 친구를 만나고 늦게 오겠다고 했다. 오늘 김장을 하려면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만들고 눈코 뜰 새가 없을 건데 재스민은 세상천지 모르는 한가한 소리만 했다. 며느리는 다문화가정 교육을 일 년 정도 받을 때도 언제나 집안일에 소홀했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그때는 화를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사람은 모름지기 밥값을 해야 하는데 너는 무슨 밥값을 하고 있는지 어디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라.”
대문 밖에서는 오늘따라 개들이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이곳저곳에서 짖어댔다. 오전에 나간 며느리는 밤 11시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들에게 재스민 친구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보라고 했다. 아들은 서너 개 적어놓은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여보세요. 재스민 남편입니다. 혹시 재스민 거기 있나요?”
아들의 전화를 받은 친구는 재스민이 2시간 전에 갔다고 했고 집으로 바로 간다는 말을 했음도 전했다.
조용하던 집에 갑자기 전쟁이라도 난 것 같았다. 30분 정도면 도착할 곳을 아직도 오지 않고 있으니 무슨 일이 났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서에 신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주변을 찾아봐야 했다. 재스민, 재스민,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마음이 불안하니 찾아보는 곳도 두서가 없었다. 코스모스 군락지를 좋아했던 재스민이 떠올라 혹 그곳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며 뛰어갔다. 아들도 억새들이 우거져 있는 곳을 플래시를 비추며 훑어갔다. 우리들의 급한 발걸음 소리에 개들은 더욱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거세게 컹컹거렸다.
밤 12시가 되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경찰서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경찰관은 연락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더 전화해보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밤에는 쌀쌀해서 재스민이 더 걱정되었다. 멋 낸다고 옷도 두껍게 입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발을 동동 구르고 가슴을 쳐야 하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얼마나 걱정이 됐으면 속옷만 입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집 안에서 기다려도 되지만 대문 밖에 있어야 그나마 빨리 올 것 같고 애도 덜 탔기 때문에 내일 드러눕는 한이 있어도 지금은 이렇게 밖에서 계속 기다릴 참이었다.
옆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들을 보니 갑자기 화가 올라 왔다. 요즘 왜 자꾸 싸우는지를 다그치며 팔을 세게 때렸다. 그리고 자신이 시어미로서 재스민에게 안 좋게 했던 게 있었는지도 떠올려 보았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속이 탔다. 지난 가뭄, 논에 물을 댈 수 없어 벼 이삭이 말라가는 걸 그대로 지켜봐야 했던 때보다 더한 심적 고통이 몰려왔다. 나는 앉지도 못하고 저 너머로 시선을 두고 애를 태웠다. 그 때 헤드라이트를 켜고 오는 택시 한 대가 보였다. 택시 안에는 재스민이 술에 취한 채 횡설수설이었다. 택시 기사는 주소를 잘못 말해서 여기저기를 헤매게 되었다고 했다.
아들은 요사이 싸운 것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술 취한 재스민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술을 먹은 며느리가 미워 야단을 치고 싶었다. 등짝도 몇 대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 나 술 먹었어”라며 미안한 기색을 보여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갔다.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친구들과 한잔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이며 위안했다. 그리고 속 쓰릴 재스민을 위해 아침에 북엇국을 끓일 생각을 했다.
재스민을 며느리로 맞이하기 전 아들 정만을 장가보내기 위해 28살이 되었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중매를 부탁했었다. 인연이 따로 있어서인지 아들이 좋다고 하면 여자가 싫다고 하고 여자가 좋다고 하면 아들이 싫다고 하여 성사가 잘 되지 않았다. 아들의 결혼이 힘들었던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과 결혼 후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여성들의 로망은 도시 남자를 만나 남편의 월급으로 편안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러니 농촌 총각은 아무리 잘 생기고 가치관이 뚜렷해도 순위 밖이었다. 아들은 국내 여성들과 중매로 여러 번의 선을 보면서 차츰 지쳐갔고 외국 여성들의 사진을 보는 것도 이제는 싫증을 냈다. 앞으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더 이상 선을 보지 않고 외국 여성의 사진도 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국제결혼정보업체의 전화를 받고 그런 마음의 둑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아들은 재스민과 12살이라는 나이 차가 있었지만 20살 30살의 나이 차도 극복하고 결혼생활을 잘한다는 다른 부부들의 이야기를 이미 들었던 터라 나이는 그렇게 문제 삼지 않았다. 필리핀의 재스민 부모도 아들을 마음에 들어 해서 결혼식을 빨리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재스민은 세상 물정 잘 모르는 21살이었기에 철없는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고 사랑으로 감싸주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시골의 아침은 보통 일찍 시작된다. 이른 아침인 5시에 일어나 농사일을 시작할 때가 많다. 하지만 잠이 많은 며느리 재스민은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아들 정만은 우리나라 여자와 선을 본 후 결혼할 기회가 단 한 번 있었 다.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생활하던 순애라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막내지만 책임감도 강하고 똑똑하다는 말을 중매쟁이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순애를 만나고 온 아들은 아가씨가 했던 말과 자신이 했던 말을 빠짐없이 전해 주었다. 아가씨가 아들에게 결혼을 하고 일 년 정도 부모님과 같이 살다가 도시로 나간다면 결혼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자신은 시골에서 농고를 졸업했기에 도시에서 직장을 구하는 게 힘들 뿐 아니라 결혼을 하면 부모님과 같이 살 거라는 약속을 이미 했기에 그거는 지킬 수 없다고 했다.
바로 앞집에 사는 38살 된 민호 총각도 몇 달 전에 도시에 사는 아가씨와 선을 봤는데 아가씨가 싫다고 했다는 말을 민호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결혼을 하면 부모와 합가하지 않고 이곳과 약간 떨어진 도시에 신접살림을 차려주겠다고 했는데도 거절을 했다며 속상해했다. 민호가 그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결혼을 시켰으면 했다는 말에서 민호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았다. 우리는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만은 부모와 합가를 하려는 마음이 확고했기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옛말에 자식은 내리사랑이라고 했지만 그 말과 상관없이 나는 막내아들의 타고난 기질이 좋았다. 한 뱃속에서 나왔지만 자식들의 성향은 모두 달랐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했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나의 마음에는 항상 막내아들인 정만이 자리하고 있어 형들과 달리 객지로 보내지 않고 우리 곁에서 농업고등학교를 마치게 했다. 난 아들과 순애의 결혼이 성사되지 않은 것에 대해 늘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아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더욱 농사에 재미를 붙였고 군 지원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농촌의 참된 일꾼이 되어 갔다. 아들은 이번에 우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사업 아이템이 좋아서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했다. 이제는 농사만 지으면 사는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아들이 굼벵이와 식용달팽이를 잘 길러 농가소득도 많이 올리고 어서 부자가 되었으면 했다. 아들은 우리의 바람을 잘 알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소득은 저절로 따라온다며 제법 믿음직스러운 말로 안심시키기도 했다.
아들은 몸이 약한 편이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할 때는 비록 그렇게 되지 않을지언정 듣는 순간만큼은 꼭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에너지 넘치는 아들의 목소리에 힘입어 올해 안에 결혼할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하자고 했다. 아들은 이제 고작 33살밖에 안 됐다는 너스레를 떨며 빨간 통에 든 장갑을 챙겨 들고 식용달팽이 사육장으로 갈 준비를 했다.
말 나온 김에 더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황토색 토시를 낀 정만의 팔을 잡고 빨리 외국 여자를 한 번 더 알아보자고 했다. 아들은 결혼하기 위해 꼭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마침 결혼정보회사에서 괜찮은 전화가 오는 바람에 마음을 다시 내보기로 했다. 아들은 들고 온 사진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 듯 했다. 비록 사진이었지만 아가씨의 얼굴에 해바라기 같은 웃음이 깔려 있는 데다 아주 상냥해 보이는 인상으로 인해 아들의 마음이 크게 움직였 다. 그동안 많은 사진을 보고 설명을 들었던 여자들과는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모두 인연은 따로 있다고들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결혼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생각에 아들과 함께 그렇게 필리핀으로 급히 날아갔다.
이웃집에서 그 어떤 말을 해도 나는 부족한 며느리를 감싸주는 말이 습관적으로 나왔다. 나의 말을 자기 방에서 듣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웃 사람이 가고 나면“난 엄마가 좋아!”라며 어깨를 주무르며 더 살가워지곤 했다. 아들이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을 때에야 재스민과 의사소통이 그런대로 되어 더없이 좋았다. 재스민이 한국말을 서툴게라도 구사를 하기에 요즘은 대화 자체를 재미있어한다. 농사일이 힘들어 지칠 때가 많지만 기분전환을 해주는 달달한 사탕처럼 재스민의 표정을 보면 그런 것이 해소되곤 했다.
“엄마, 된장찌개 진짜 마이따. 두 그릇 밥 먹을래.”
한 그릇을 다 비운 며느리가 밥그릇을 내밀며 애교를 부릴 때면“우리 며느리 많이 먹고 농사일도 좀 거들어주고 열심히 살자”는 말을 잊지 않고 했다. 아직 어른 눈치 보는 게 잘 되지 않는 며느리는 농사일하는 게 제일 싫고 도시로 나가고 싶다며 자신의 마음을 스스럼없이 전하곤 했다.
딸을 키우는 재미를 몰랐다가 재스민이 딸처럼 애교를 부려주는 게 좋아서 이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우리나라 며느리들은 시어머니 눈치를 보며 말조심 행동조심에 신경을 쓰지만 재스민은 그런 일 없이 해맑게 웃으며 엄마라고 부르고 예의도 무시한다. 남들 눈에는 거슬릴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난 그런 며느리가 좋아 굳어 있던 얼굴이 환해진다. 며느리로 인해 마음이 행복해질 때면 딸을 먼 이국으로 시집보낸 재스민의 부모를 생각하곤 했다.‘얼마나 딸이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머잖아 친정 나들이를 시킬 생각이었다.
재스민이 방으로 들어가고 마루에 앉아 마늘을 깔 때였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이웃이 열린 대문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이웃집 은실 엄마는 마늘 농사를 잘 지었다는 칭찬을 하며 주워들은 이야기를 약간 흥분조로 전했다.
“정만 엄마, 옆 동네 베트남에서 시집 온 며느리 알지요?”
“알다마다요. 그 집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가 좋아 매일 들에도 같이 가고 읍내에도 붙어 다닌다고 하던데요.”
은실 엄마는 그 며느리가 그저께 야반도주를 해서 집이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 난 속으로 부부싸움을 했거나 무슨 관계가 틀어져서 잠깐 어디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방에서 화장을 하고 있는 며느리가 걱정되었다. 아들 부부는 결혼한 지 6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자식이 없다. 재스민은 아이 고민도 없는 것처럼 친구를 만나러 나가면 밤이 늦어서야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은실 엄마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소심해졌다. 며느리에게 농사일을 거들지 않는다고 구박을 하면 고집 센 재스민도 어디론가 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잘 까던 마늘을 더 이상 깔 수 없었다. 어젯밤에는 또 아들과 싸우고 재스민이 울었던 일도 있었기에 그 불안이 더 가중되었다.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지면서 고민이 되었다. 얼마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으면 재스민이 방 안에 있다는 것도 깜박 잊고 혼잣말로“재스민이 오늘은 몇 시에 들어오려나?”라는 넋두리를 했다.
문을 여는 소리를 듣고서야 며느리가 방 안에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고 대체로 평화로웠던 어느 날 오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나를 재스민이 불렀다.
“엄마, 나 지금 나가요.”
또 어디 간다고 그러는지를 물었다. 재스민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 영어 수업을 해줘야 해서 빠뜨리면 안 된다고 했다. 수업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도리깨로 타작하듯이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겨울에는 해가 짧아 빨리 어두워진다는 말도 덧붙이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며느리를 배웅했다. 필리핀에서 자전거를 타 본 적이 없는 재스민에게 아들이 멀리 갈 때 자전거를 타는 게 편리하다며 타는 법을 알려줘 지금은 잘 타고 다닌다.
며느리는 페달을 시원스럽게 밟으며 마치 한 마리 새가 된 듯 시야에서 멀어졌다. 오늘따라 며느리의 뒷모습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재스민이 좋아하는 생선을 냉동실에서 급히 꺼냈다. 일을 끝낸 후 생선 굽는 냄새를 맡고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에 서 있었다. 난 이상하게도 며느리에게 밥을 해 먹이고 재스민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때마다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이냐며 자신을 나무라기도 했지만 그것이 왠지 싫지 않았다.
남편도 며느리가 생각대로 안 움직여 줄 때는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했지만 재스민이 옆에 앉아 애교를 부리면 웃음도 생기고 무뚝뚝한 얼굴에 생기도 돌았다. 아들만 낳아 길렀기에 딸은 부모에게 어떻게 하는 지를 잘 몰랐다가 이제 며느리를 통해 알 것 같다는 말도 했다. 남편은 처음 며느리를 맞이했을 때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거리감을 두었다. 그런데 식사를 할 때 서툰 우리말로“아버지, 아! 해 보세요”하고는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속에 넣어줄 때면 밥맛이 달라진다고 했다.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며느리의 순수한 행동에 마음이 열려 이제는 새처럼 입을 쪽쪽 벌려서 받아먹는다. 며느리의 행동을 통해 딱딱하기만 했던 남편도 이제 많은 변화가 되었다. 남편은“며늘아, 니도 많이 먹어라. 몸이 약하면 못쓴다”하고 밥상 앞에서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더욱 살갑게 굴었다.
남편은 재스민을 며느리로 맞이하고 이듬해부터는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끊었다. 주벽이 없어 술 먹는 걱정은 안됐지만 술값이 야금야금 나갈 때는 속상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을 느낄 때가 있었다. 꼭 읍내로 나갈 때면 서랍 속에서 뭔가를 챙겨서 들고 나갔다. 한 번은 내가 서랍을 열려고 하니까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뭐를 찾느냐고 역정을 냈다. 서랍에는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뿐인데 안을 뒤적거리고 있으면 예민했다. 앞으로는 자신한테 무엇을 찾는지 먼저 말해야 한다고 했을 때는 더욱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서랍 속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작은 손가방을 슬쩍 본 것 같기는 하지만 별다른 점은 없었다. 그런데 반응이 과해서 언젠가 자세히 보려는 마음을 먹었다.
벌레 먹은 콩을 이리저리 골라내고 있을 때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까치가 마당 주변을 맴돌았다. 재스민이 방송국에서 온 것 없느냐고 한 번씩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혹 그것에 대한 내용인가 하고 내심 기다려졌다. 까치가 떠나고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 우체부 아저씨가 우편물을 들고 왔다. 방송국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재스민이 매일 손꼽아 기다리던 게 이제야 온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들떴다. 마침 들에서 땀을 흘리고 돌아온 아들이 우편물을 뜯어보더니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재스민이 올해 안으로 필리핀에 가고 싶어 했는데 수기 글 채택이 안 돼 물거품이 되었다고 했다.
이 사실을 며느리가 알면 얼마나 속상해할까 싶어 마음이 쓰였다. 친정 식구들을 금방이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에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무엇보다 클 것이라는 생각도 올라와 절로 탄식이 되었다. 이번에도 못 가면 향수병에 걸려 더 우울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겹쳐졌다. 집을 떠나온 지 벌써 6년째가 아닌가. 남편과 아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좀 생각해 보자고 했다.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전답을 팔아서 며느리 친정도 좀 돕고 비행기 삯도 마련하면 되겠지만 그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생각을 해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안방에서 작은 손가방을 들고 나왔다. 아들과 나는 무엇인지 궁금하여 고개를 자라목처럼 늘렸다. 남편은 어느 날 주방에 물 마시러 나오다 며느리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필리핀에 가고 싶다며 친구들과 통화하는 내용을 듣고는 며느리를 자기 나라에 한 번 갔다 오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단다. 그리고 그날부터 술을 끊고 조금씩 저금을 했단다. 6백만 원이나 든 통장을 보면서 남편에게 저런 면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나에게는 맛있는 것 한 번 안 사주고 생일도 챙기는 일이 없었기에 며느리를 위해 돈을 모으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놀라운 대사건이었다.
재스민은 아무것도 모르고 과외를 끝낸 후에도 함흥차사였다. 아들은 부모님의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올 것 같아 다시 마음을 졸이는 것처럼 보였다. 며느리는 농사 안 짓고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고 읍내에 사는 친구의 삶을 늘 부러워했다. 그런 마음을 잘 알기에 티브이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큰 소리로 아버지, 엄마라는 소리가 들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문을 열고 빨리 오라고 반겼다. 매번 이랬다. 재스민이 늦게 들어온다고 불만이 가득했다가 며느리의 이상한 말투와 밝은 목소리를 들으면 뜨거운 물에 넣어둔 얼음이 녹듯이 금방 마음이 풀렸다.
다행히 멀쩡한 얼굴로 들어온 재스민에게 아들은 머뭇대다 이번에 방송국에 채택이 안 돼 필리핀에 못 간다고 했다. 재스민의 얼굴이 찡그려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 컸던 눈이 단춧구멍만해지면서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때 남편이 손지갑에 든 통장을 보여주며 올해 안에는 갈 수 있을 것이라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재스민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감정발산을 심하게 했다.
“우와, 아버지, 엄마, 이거 꿈 아니지요.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었는지 몰라요. 이제 몇밤 남은 거예요.”
며느리는 갑자기 시아버지의 목덜미를 감싸고 좋아하는 마음을 보였다. 남편은 무엇을 먹다 들킨 것처럼 계속 캑캑거리다 며느리에게 진심을 담은 마음을 전했다.
“그리 좋나 며늘아, 우리가 친정에 한 번 가도록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농사짓느라 바빠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며느리는 남편의 말에 감동이 되었는지 그동안 집에 늦게 들어와서 속상했을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앞으로는 잘할 테니 믿어보라는 말을 서툴게 이어갔다.
재스민은 그런 말도 모자라 나를 껴안으며 더욱 미안해했다. 아들은 어떤 말을 하려고 해도 재스민이 틈을 주지 않아 한 마디도 끼어들 수 없었다. 입만 금붕어처럼 벌렸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엄마하고 나하고 둘이 가는 거 맞지? 고향에 가기 전까지 집안일도 잘 도울게요.”
며느리 얼굴은 평소에도 밝았지만 이 일로 인해 더욱 밝은 보름달이 되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인근 텃밭에서 풋호박을 하나 따왔다. 호박국도 끓이고 볶음도 해서 재스민에게 먹일 생각이었다. 호박은 며느리가 감자와 같이 볶아주면 아주 좋아했다. 아침 준비는 여전히 내 차지였다. 재스민이 늦잠을 잘 때마다 젊은 사람들은 잠이 많다는 논리를 대며 올라오려는 불만을 누그러뜨렸다.
아들은 내가 부엌에서 바쁘게 오가는 것을 보고 재스민을 깨웠다. 재스민은 여전히“쪼끔만 더 자자, 난 아침 안 먹어”하고 손으로 이불을 더 꽁꽁 쌌다. 30분만 더 자게 두라고 했지만 갑자기 마음이 상한 남편은 우리 집에 상전이라며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아들은 며느리를 많이 사랑하고 있어 더 이상 일어나라는 채근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집 마당에는 털빛이 하얀 강아지 두 마리가 배가 고픈지 울음소리를 냈다. 재스민은 강아지 소리를 듣고 강아지 밥을 챙겨줘야 한다며 헝클어진 긴 머리를 고무줄로 묶으며 방문을 열었다. 사람이 먼저 밥을 먹고 강아지를 챙겨야 한다고 했지만 그 말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강아지 밥을 먼저 챙겼다. 우리 며느리가 고집이 너무 세다는 혼잣말을 하면서 아들의 표정을 살폈다. 아들은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말없이 밥상에 수저를 놓았다.
남편은 기침을 한 번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엄마, 강아지가 참 잘 먹는다. 이제 나도 밥 먹을 수 있겠어. 내가 살던 고향에도 강아지가 있는데 이 강아지보다는 못생겼어.”
남편은 강아지에 대한 재스민의 애교 섞인 말을 듣고“우리 며느리가 심성이 착해서 동물을 먼저 챙겨 준다”고 처음으로 대놓고 칭찬을 했다. 며느리는 호박볶음에 든 빨간 새우를 시아버지 입에 넣으며“아버지, 고향에서 먹었던 대하 먹고 싶어”하고 음식을 입에 넣고 어리광부리듯이 말했다. 이날 아침도 며느리 때문에 시끄러웠고 며느리 덕분에 웃음꽃이 피었다.
며느리가 먹고 싶어 하는 대하를 농사일이 끝나고 나면 꼭 먹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마당을 쓸고 있었다. 비질을 한다고 못 들었는데 마을 소식통인 은실 엄마가 또 큰일이나 난 것처럼 급히 불렀다.
“정만 엄마, 저번에 그 베트남 며느리가 이제 집에 돌아왔대요. 그동안 베트남에서 온 친한 언니 집에서 지내다가 그 언니와 함께 같이 왔대요.”
그 집 며느리가 집에 돌아온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 집 아들이 각시가 없어졌다고 식음도 전폐하고 매일 경찰서를 드나들며 찾아달라고 애원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슬펐다. 만약 우리 며느리도 베트남 며느리처럼 마음이 변해 어디론가 가버린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정말 조금도 생각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 집 아들이 50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자손도 빨리 봐야 하는데 또 어디서 다른 며느리를 구하겠어요. 서로 화해하고 같이 사는 게 최고이지요.”
“임신도 했다는 말이 있어요. 언니 집에 있으면서 입덧도 하고 임신 증세가 있었나 봐요.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아이가 생긴 것 때문에 다른 데로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것 같아요.”
그 마지막 말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둘 사이에는 아이가 있어야 해. 아무리 사이가 좋다 해도 서로를 이어주는 끈이 필요하지. 그래야 서로가 더 돈독해지고 어려움도 잘 이겨내게 되지.’
아들 부부에게 계속 아이가 없다면 재스민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아들 내외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은 되었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곧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다시 돌아온 저 집 며느리도 만약 뱃속에 아기가 없었다면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생김으로서 다시 돌아올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아들 부부에게 자식이 안 생기는 게 걱정이라는 말을 들은 은실 엄마는 잘하는 한의원을 소개해 줄 테니 한약을 한 번 지어 먹이라고 했다. 나는 돈이 수억이 든다 해도 손자를 볼 수 있다면 그것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고액을 들여 인삼과 녹용 등을 푸짐하게 넣은 한약을 지어왔다. 정말 큰마음 먹고 약을 지어 왔지만 며느리는 너무 쓰다며 먹지 않으려 했다.
“엄마, 한약을 먹고 나면 혀가 쓰서 다른 음식의 맛도 모르겠고 혀에 쓴맛만 계속 남아 있어서 싫어요.”
딸이라면 억지로라도 입을 벌려 먹게 할 수는 있겠지만 며느리에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며느리가 먹겠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될 것 같았다. 맛이 궁금하여 한 포를 잘라서 먹어 보니 달큰하고 먹는 즉시 좋은 기운이 올라왔다. 며느리가 먹지 않아 속상했지만 스스로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생각으로 일단 너그럽게 넘어갔다.
언젠가 며느리가 아들에게‘우리 아가를 입양해서 기르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난 재스민이 아이를 가질 의향이 없는 게 확실하다고 섭섭해했다. 며느리는 은연중에 우리들이 아이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마다 부담스러워했기에 그런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우연히 들은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은 은실 엄마가 재스민에게 아기 안 갖고 싶냐는 말을 넌지시 했었다. 그때 재스민은 하늘에서 아이가 똑 떨어지면 자기가 받아서 기르겠다고 했고 어디에서 아이를 훔쳐오고 싶다고도 했다.
며느리에게 지금까지 아이가 안 생기는 것은 아직 한국 문화에 적응이 힘들고 향수병으로 지쳐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곤 했다. 재스민은 마음이 우울할 때면 한국 남자와 결혼한 필리핀 지인들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면 고향에 있는 듯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 것 같았다. 입술이 뚝 튀어나와 있다가도 그들을 만나고 오면 손에는 꼭 그 나라 음식이 들려 있었고 말도 많아졌다. 시어머니와 사이좋은 호야노 이야기,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미얀미 이야기, 붙임성이 많은 자요스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나를 웃게 했다.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이처럼 기분이 콩콩새처럼 뛰었다.
며느리가 그동안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재스민의 친정으로 갈 수 있는 여비도 어느 정도 마련이 되었고 친정에 쓸 돈도 비축이 되었다. 한 달 후면 재스민이 그렇게 그리던 필리핀으로 출발을 하게 된다. 무엇을 사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마을에 소식을 잘 전하는 은실 엄마가 갓 삶은 고구마를 들고 왔다.
“정만 엄마, 요즘 며느리와 어떻게 지내요. 이제 철 좀 들었어요?” 은실 엄마는 이상하게도 나와 며느리를 이간질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뼈 있는 말을 던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고 며느리 입장을 이해하며 여전히 너그러운 울타리가 돼주었다.
“정만 엄마는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시어머니는 캄보디아에서 온 며느리가 게으르고 지저분하여 처음에는 아들을 새장가 들이겠다는 생각을 했대요.”
나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에 대해 수긍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뭐 그만한 일로 이혼시킬 생각을 했을까요. 숨겨진 다른 큰 일이 있었겠지요.”
은실 엄마는 그 며느리가 다문화가정 문화교실 같은 데서 컴퓨터도 배우고 민요도 배우고 그림도 배우고 하더니 똑똑한 며느리로 변하여 이젠 시부모의 마음이 180도로 바뀌었다는 말도 전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그런 똑똑한 며느리는 싫다고 했다. 은실 엄마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더욱 음성을 높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난 그것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남자들만 있는 집에서 웃을 일도 없었는데 애교쟁이 며느리가 들어와서 집안 분위기가 화사해졌고 무뚝뚝했던 영감도 이제야 웃을 줄을 아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돈 벌어오는 며느리보다 웃음을 만들어내는 며느리가 더 좋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아직 손주가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문제도 곧 해결될 것으로 여겼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배를 타고 또 버스를 타고 재스민의 고향에 도착했다. 재스민은 이곳에서 더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 친정엄마의 젖을 먹고 싶어 하는 어린 며느리에게 젖을 못 먹게 하고 그 오랜 시간 한국에서 젖떼기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난 말이 안 통하는 가족 틈새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며느리도 지금의 나처럼 처음에 말이 안 통하는 한국에서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처음으로 동병상련도 느꼈고 역지사지의 심정도 되었다.
재스민이 결혼하기 전에는 빈민촌에서 살았지만 아들과 결혼을 하면서 지참금 비슷한 명목으로 얼마의 돈을 주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가족들이 빈민촌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서 살림살이를 갖추고 그런대로 살아가고 있다. 며느리는 가족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자신이 우리 아들과 결혼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마워했다.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마음이 더 생겼다고 웃으며 말했다.
난 항상 고민이었고 걱정이었던 일을 안사돈에게 살며시 전했다. “아들 부부가 아이를 빨리 가졌으면 좋겠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안사돈은 오래전부터 아이가 생기지 않을 때 받으면 좋다는 필리핀 전통마사지를 권했다. 아이가 안 생기는 것은 아랫배에 독소가 차서 차갑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마사지로 독소를 빼고 몸을 따듯하게 해 주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이곳의 불임부부들이 이 전통 마사지를 받고 효험을 많이 봤다는 내용도 전했다. 한 가닥 희망이 생겨 그것을 받아보자고 했다. 마사지를 받던 며느리는 처음에는 아프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시원하다고 했다. 안사돈은“저도 옛날에 아기가 생기지 않아 이 마사지를 받았는데 그 덕분인지 7남매를 낳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갑자기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며느리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는 신에게 아기를 달라고 간절히 바라는 춤을 배워야 하는 곳이었다. 노련한 강사는 나와 며느리에게 동작을 따라 하게 했다.
“자, 저처럼 온몸으로 춤을 추면서 아기를 달라고 기원해야 그 정성이 통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어요. 손바닥은 이렇게 하고 손가락은 이렇게 하세요.”
강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와 며느리는 손바닥으로 배를 문지르며 신께 아이를 달라는 춤을 추었다. 그동안 며느리는 아이를 갖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포자기 상태였는데 나와 온몸으로 춤을 추고 나니 곧 아이가 생길 것 같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나도 며느리가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불만이었는데 아이를 갖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춤으로 나타내는 것을 보고 그동안 오해했던 것이 미안했다. 나와 재스민은‘산타클라라’라는 춤을 춘 후 서로의 오해를 풀었다.
나와 재스민은 해가 지는 바다를 보고 앉은 채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재스민은 나에게 그동안 잘못했다고 했다. 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연락도 안 하고 집에 늦게 들어온 것과 집안일을 거들지 않고 게으름 피운 것을 털어놓았다. 난 그때를 떠올리며 늦을 경우는 연락을 꼭 해줘야 하는데 그걸 안 하니 걱정을 많이 했다며 앞으로는 꼭 지켜 달라는 당부를 했다. 며느리는 이제 엄마 마음 알았으니까 잘하겠다고 했고 앞으로도 나랑 계속 살고 싶다고 했다. 며느리가 잘못해도 늘 예뻤는데 나와 계속 살고 싶다는 말을 하니 더욱 딸처럼 좋아졌다. 난 며느리의 착한 마음이 느껴져 두 팔을 벌리고 꼬옥 안아주었다. 며느리도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나에게 안겼다.
서로를 더욱 알아가는 중요한 순간에 며느리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저번에 안았을 때는 맡지 못했던 냄새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구역질을 했다. 재스민은
“엄마 임신했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나의 표정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며느리의 그런 말에 웃음이 나왔지만 무슨 말로라도 답을 해야 했다. 난 어설픈 연기자가 되어 순간적으로 하얀 거짓말을 해 버렸다.
“너에게 곧 아기가 생길 징조야. 그래서 대신 구역질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