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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만 띄우고 노를 젓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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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백

책 제목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2024년 06월 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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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기다 이런 쓸데없는 공부를 할 때면 꼭 나의 공상 능력은 두 배로 좋아져 그보다 더 쓸데없는 공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곤 한다. 나의 경우에는 과학 과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유명한 과학자들이 증명했다고 하는 나로서는 확인할 방법 없는 과학의 이야기들은 내가 직접 본 것도 해본 것도 아닌데 그럴듯한 말로 나를 납득시키려고 강요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특히 눈 앞에 펼쳐진 식판만 한 참고서에 나오는 광활한 우주에 대한 이론적 서술들은 전혀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블랙홀이 이렇다 저렇다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시험공부를 하며 나는 마치 그 블랙홀에 빛처럼 빨려 들어가 보이지 않는 힘에 맞서 싸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중간고사라는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 강력한 인력과 척력에 맞서며 탐험을 하는 우주비행선의 조종사가 되어 한참을 떠돌아다니는 상상을 했다. 마음속 우주에는 유혹이 가득했다. 공부라는 현실 세계로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 블랙홀 속을 탈출하는 열쇠를 찾아야 하지만 언제나 그 열쇠는 내 손에 잡힐 듯 말 듯, 시선을 피해 다른 곳으로 숨어 버린다. 나의 방은 마치 이 블랙홀 한가운데 있는 작은 행성과도 같았다. 책상 위에 펼쳐진 참고서는 보물지도를 연상시키지만 그 지도는 너무나 복잡하고 어렵기만 하다. ‘공부좀해야지’하는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마다 강력한 척력이 그 생각을 밀어내는 것만 같다. 엄청난 힘의 중력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나의 경로탐색기를 다시 조작해야 되지만 이미 희미한 별빛도 닿지 않는 우주의 구석으로 목적지가 설정된 채 망가져 버린 것만 같았다. 모험은 때때로 다른 행성들로 나를 이끌기도 한다. 냉장고 행성을 탐험하는 것에서부터, 다른 조종사들의 근황을 알 수 있는 휴대폰 행성까지 고유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각각의 행성들은 나를 유혹하며 본래의 목적지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 이 매력적인 행성들 사이에서, 시간은 빛의 파편이 공간 속으로 분해되듯 사라진다. 블랙홀에서 말하는 시간의 왜곡이라는 것이 이런것일까 공부를 할 땐 느리게 느리게 흐르는 듯한 시간이 딴 생각을 하니 빠르게 빠르게 지나갔다.

겨우 정신을 차리니 이미 해가 어둑어둑 지고 있었다. 우주에 대한 단원에 더 머물러 있으면 더 이상 공부를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아 재빨리 다음 단원으로 넘어갔다. 이번엔 전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한 30분 쯤 공부했을까? 참고서 구석의 토막상식에 나온 내용에는 콘센트에 젓가락을 꽂으면 감전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문구를 보자마자 호기심의 전류가 마음속 회로를 타고 질주했다. 문구 옆 삽화에는 분명 나만해 보이는 소년이 젓가락 두 개를 콘센트 구멍 두 개에 꽂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쪽 구멍에만 젓가락을 꽂으면 어떻게 될까?

한쪽에만 젓가락을 꽂더라도 감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당시 나의 짧은 과학적 지식으로는 한쪽에만 전류를 가하면 감전되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냈었던 것 같다. 나는 콘센트 구멍에 넣을 만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샤프 펜슬에 달린 클립에 자석이 달라붙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샤프 펜슬에 달린 클립을 뽑아서 손에 들고는 고민했다.‘얼른 그것을 넣어줘’마치 버려진 고택의 비밀 통로처럼 콘센트 구멍은 나에게 속삭였다. 그 안에는 알려지지 않은 경험과 전율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탐험심은 괴물처럼 점점 자라나 나를 콘센트 쪽으로 이끌었다. 클립을 손에 쥔 나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콜럼 버스처럼 조심스럽게 내 손을 내밀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경계선을 넘나드는 위인들의 심정이란 이런 것일까? 나는 클립을 살며시 콘센트 가까이 대고 마침내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행히 예상대로 아무런 일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그저 물결만 일렁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내 심장의 떨림도 콘센트 속으로 사라졌다.

시시해진 나는 다른 샤프의 클립 하나를 더 떼어 와서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양쪽으로 번갈아 클립을 꽂아보기로 했다. 양쪽 날개를 펄럭이는 독수리처럼 두 개의 클립이 양쪽으로 번갈아 콘센트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정말 다행히도 여전히 감전되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전율과 밀려오는 흥분의 파도는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콘센트의 두 눈을 마주하며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나는 인간 세상과 전류들이 사는 세상을 연결하는 가교를 놓고 있고 두 세상 사이의 외교관이 되는 것이지. 전류들은 나를 환영하듯이 반짝이고 나는 클립을 통해 편리함을 주는 전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거야! 이런 상상 속에 빠져 한껏 들뜬 마음으로 나는 실수로 클립 두 개를 동시에 콘센트에 꽂아버렸다. 순간 콘센트가 나에게 강력한 반격을 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전류들의 세상에서 나는 불청객이었나 보다. 나는 전쟁터에서 무방비로 적의 포화를 맞은 것 같은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가시덤불 같은 전류가 주는 격통은 겨울 전선처럼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죽는 순간이 되면 주마등이 보인다는데 내 인생의 파편들이 태풍에 휘날리는 빨랫감처럼 허공 위에 펼쳐졌다. 행복과 후회가 교차하는 순간들을 지나 책보다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저 꿈만 꾸는 예술가가 되어 뗏목만 띄우고 노를 젓지 않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마지막 숨결을 모아 기도했다. “주님, 살고 싶어요!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엔 클립 대신 펜을 잡고 공부를 하겠어요! ”놀랍게도 그 순간 나는 감전에서 벗어났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사와 경외의 마음,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곧장 남은 시험공부를 마쳤다.

그 일 이후로 나는 한동안 제법 성실하게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여전히 나는 게으르고, 곧잘 딴 생각에 잠기곤 한다. 하지만 이젠 나태해질 때마다 감전의 충격과 조물주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전보다는 조금 더 열심히, 적당히 하기 싫은 공부도 해가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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