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한효

책 제목제175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5년 9월 175호

조회수801

좋아요1

5월이면 감나무 잎이 반들거린다. 갓 닦은 구두처럼 매끈한 잎 사이로, 감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종이학을 펼친 듯한 네모난 감꽃.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이맘때면 나는 어김없이 산청 누님의 단감 농장으로 향한다. 감꽃을 솎는 일은 매년 조금씩 다르지만, 일주일 안에 마무리해야 하는 건 언제나 같다.
단감 농사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네 해. 작년부터는 본격적인 수확이 이뤄졌다. 지리산 자락, 해발이 제법 높은 산중턱에는 500여 그루의 단감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나는 사다리를 들고 나무 하나하나를 살핀다. 선 채로 가능한 가지도 있지만, 높은 곳은 사다리에 올라가야만 한다. 브이자 형태의 감나무들이 마치 네일 아트를 기다리는 손님처럼 가지를 길게 내민다.
올해 새로 난 가지에는 꽃이 대여섯 송이 피어난다. 그중 단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떨궈야 한다. 첫잎에 맺힌 꽃은 감이 작고, 하늘을 향한 꽃은 골고루 익지 못한다. 가지 끝에 달린 꽃 역시 미련 없이 솎아내야 한다. 감이 자라 무거워지면, 그 위치에 따라 큰 가지가 통째로 부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면 주먹만 한 감이 어디에 매달릴지를 미리 그려야 한다. 보름달처럼 둥글게 영근 감이 주렁주렁 달린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탐스럽다. 단감은 한 가지에 단 하나의 열매만 남겨야 비로소 제값을 받는다.
솎는 방법도 섬세함을 요한다. 옆으로 비틀면 꽃은 끊어지지 않으려 버틴다. 하지만 종처럼 생긴 꽃대를 밑에서 위로 밀면, ‘툭’ 하고 떨어진다. 가지를 다치지 않게 떼어내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가지는 너무 여려 조금만 힘을 잘못 주어도 쉽게 꺾인다. ‘뚝’ 하고 가지가 부러지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민망함을 감추게 된다.
가지에 매달린 꽃송이들은 줄지어 선 어미 오리와 그 뒤를 따르는 새끼들 같다. 대봉감은 때가 되면 감또개를 스스로 떨궈내지만, 단감은 끝까지 꽃을 품으려 한다. 미련이 많은 걸까, 아니면 모성애가 유난한 걸까. 나는 가지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인다.
“가장 좋은 하나를 위해선, 나머지를 내려놓아야 해.”
산들바람이 지나가고, 단감나무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감꽃을 떼어내다 문득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나는 불필요한 감정과 관계를 제때 잘 솎아내며 살아가고 있을까. 이미 끝난 일에 매달려 헛된 미련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놓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움켜쥐고 있지는 않을까. 내 마음의 가지에도 여전히 솎아내야 할 것들이 많다.
요즘 꿀벌 개체 수가 줄어 과수 농가의 걱정이 크다. 더구나 해발이 높은 누님의 농장에는 자연 벌이 거의 없어, 양봉장에서 벌통을 들여온다. 꿀은 양봉업자의 몫이지만, 벌들을 데려오는 수고 없이는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단감 농장주도, 양봉업자도, 꿀벌도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졌지만, 이곳에서는 한 뜻으로 연결되어 있다.
꽃을 솎다 보면, 벌이 꽃에 머무는 순간이 있다. 머리를 꽃 속에 파묻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분주히 움직이는 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손을 멈춘다. 어렵게 초대한 손님의 밥상을 치우는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해진다. 벌이 다녀간 감꽃은 하루가 다르게 색이 바뀌고, 그제야 열매 맺을 준비를 시작한다.
한 그루의 감꽃 솎기를 마치고 나면, 땅 위에 널린 꽃들을 바라보게 된다. 나무에 달린 것보다 훨씬 많은 꽃들이 풀 위에 조용히 누워 있다. 이런 희생이 있어야 올곧은 결실을 맺는다는 말, 그것은 자연의 섭리라기보다 인간이 만든 기준일지도 모른다. 감꽃을 솎는 동시에 전지 작업도 함께한다. 감꽃조차 피우지 않고 하늘로만 뻗은 가지는 과감히 잘라낸다. 영양분을 독차지하기 때문이다.
며칠에 걸친 감꽃 솎기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잘했는지의 평가는 열매가 달릴 때가 되어야 알 수 있다. 사람의 눈길과 손길이 한 번 더 머문 뒤에야 비로소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뜻밖의 선물도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일하던 어느 날, 아프던 어깨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벌침을 맞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치료비라도 내야겠다”며 누님과 한바탕 웃었다.
감꽃 솎기는 단순한 농사일이 아니다. 선택과 결단, 미련과 이별을 감내해야 하는 시간이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떨궈야 할지 빠르면서도 바른 결정이 필요하다. 보기 좋아 남겨둔 꽃 하나가, 결국 가지 전체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으니까. 버림을 통해 더 큰 결실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 나는 그 믿음을, 감꽃 솎기에서 배운다.
나도 단감처럼 꽃을 떨구지 못한 채, 헛된 감정들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키워야 할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감꽃을 떨구며, 내 마음의 가지도 함께 살펴본다. 남길 것과 버릴 것을 스스로 구분하고, 이제는 망설임 없이 솎아낼 용기를 가져야겠다.
내년에도 나는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땐 감꽃을 솎기 전에, 내 마음부터 먼저 들여다보기를. 감꽃처럼, 마음도 때를 놓치지 말고 솎아야 한다. 버림은 상처가 아니라, 더 나은 결실을 위한 시작이니까.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