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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휘

책 제목 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월 6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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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1월-01.창작의산실-권오휘시
/

지게

꽃 피는 계절이 돌아오면
겨울 동안 벽에 걸려 있던 지게는 바쁘다

그시절상동마당
백년도 훌쩍 넘은 세월 간직한
어둠이 내리고
모기의 성가심이 시작되면
아버지는 짚과 풀로 모깃불을 피우시고
별은 반딧불이와 함께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낮이면
아버지는
상동 뒷산 소풀을 지게 가득 싣고
지게 끈으로 질근 묶는다
달랑대는 끈 꼬리를 잡은 나는
지게 진 아버지 뒤를 따르며 마냥 해맑았다

지금도 그 끈을 잡고 내 삶의 방향을 잡으려 애쓰지만 
산처럼 든든했던 아버지는
그림자마저 볼 수 없고 
홀로 남은 내 등 뒤로
공기처럼 투명한 햇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산영에 비친 얼굴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다

벽에 걸린 낡은 지게 하나
기억과 아련함에 눈감으면
지게를 지탱하던 그 작대기가
긴 그림자를 만들며 나를 위로해준다

소풀과 삭정이와 나락으로 이루어진 
아버지의 짐
세월 지난 지금 나는
삶의 무게에 휘청이는 짐을 메고 
쓰러지지 않으려
두발을땅속깊게박는다

매일 지게에 건져 올리는
아버지의 시간들은
땀내 가득했지만 오리나무향이 났다 
투박한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담 구석의 지게와 작대기 
아버지의 낡은 삶들은 오늘도 
나의 버팀목으로 남아 있다

이미 지나간 것과의 작별법을 익히며

보리암에서
바람 앞에 잔을 들고
내 눈과 마주한
부처의 손끝에서 심연을 본다

하늘로 솟은 솔잎을 보며
집 떠나오며 정리한
이미 지난 것에 대한
작별법을 익히며 일배를 한다

무릎 굽힐 때마다 들리는
주머니 속 작은 돌
어떤 계절에도 치우치지 않겠노라
무게 같은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고집스레 중심각을 거부하면서
가끔 내게 부는 바람의 무게와
손을 내미는 따스한 악수마저 잊기 위해 
조약돌들이 서로 다른 주머니에서
부딪히며 짤랑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밤이 길다
내게로 온 봉인된 사람을, 사랑을 
바람 잔에 띄워 보낸다

오리나무의 꿈

오리나무에 달린 열매
지나가는 새들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래도 눈꽃으로 피고
바람이 불면 눈이 부시다

세상에 그림자 없는 나무가 있겠냐만 
나무도 너무 오래 한 곳에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플까
그림자가 먼저 구부러져
바닥에 자리한다

새들이 물고와 준 세월이
오리나무 열매에 앉아
그 무게에
바람도 마르고 물소리도 마른다

새들에게조차 버림받는
오리나무 열매는 소매자락 흔들며
산문 밖으로 어깨를 내어준다

눈꽃으로 눈이 부신 찰나의 아름다움이 
좀 더 오래갈 수 있도록
혹은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그 마음을 어루어주듯
오리나무는
흔들리며 새길을 만들고 있다

기도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가 나를 이해하지 않고
타인이 나를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커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보고 싶은 사람보다
볼 수 없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가 걱정하는 일들이
나도 모르게 내 옆에서 찾아온다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웃음이 줄어들고
내 주변을 돌아보기가 두렵고
새로운 아픔이 내 기억의 공간을 채우는 일이다

이런 날
나이가 들더라도
아끼고 간직하고 싶은 것 하나 쯤 떼어 
기억에게 주고 가늘게 타오르는
촛불 하나 사르고 싶다

침묵

사랑이 떠나갈 때 할 수 있는 것
피는 꽃과 지는 꽃을 보며 할 수 있는 것
아파하고 죽음을 보고 할 수 있는 것
나를 멀리 두고 떠나는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억지를 부려도 할 수 없을 때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것
아무리 급해도 서두르지 말고 편하게 할 수 있는 것
가끔 흐르고, 가끔 생각하고, 가끔 꿈꾸며 할 수 있는 것
책을 보아도 볼 수 없을 때 실눈으로 할 수 있는 것
별마저 가슴에 품을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
더 큰 마음으로 하늘을 가슴에 품을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침묵 뒤에 가장 큰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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