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읽히는 평론 쓰기를 위한 분투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봉군

책 제목 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조회수 119

좋아요 0

10월-01.창작의산실
/

다섯 번째 평론집 『문학 비평과 문예 창작론』을 상재한 지도 세 해가 지났다. 출판사에는 재고가 쌓여 있다. 앨번 커넌이 충격적인 저서 『문 학의 죽음』을 낸 것이 1990년이니, 시·소설·희곡은 물론 평론은 독자들의 관심권외에 방치된 지 오래다. ‘너도나도’의 수필은 보편적 속성 상 다소 읽힌다는 소식이다. 우리나라 문학 인구 1만 명대에, 그나마 노년층이다. 문학의 죽음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본디 시인이 될 작정이었다. 김남조 선생님의 격려에 고무된 나는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눈 오는 날의 보행」등을 응모했다. 결선 에서 탈락했다. 3년 뒤 『새시대문학』에시 「말씀」으로 김용호 시인의 추천을 받았으나, 1983년 『시와시학』에 「 구상 (具常) 시학에서의 현존과 영원」으로 등단하여 평론가의 길을 열었다. 이후 1990년『시조생활』에 신인으로 등단하여 시조 평론을 하고 시조를 쓰게 되었다. 지금은 시조 평론으로 시조시인들을 독려하며, 세계전통시인협회 회장으로서 세계 시인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시조 세계화를 위해 진력중이다. 한국, 중 국, 영국 총회를 거쳐 올 4월 중순에는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세계 11 나라 시인들과 제4차 총회를 열었다. 거대 담론으로 말하건대, 문화 교류를 통한 공공 외교(public diplomacy)의 일환이다.
학자의 길을 가기 위한 석사 학위 논문「한국 현대시의 원형성 연구 아니마 섀도우의 양상」과 박사 학위 논문「한국 소설의 기독교 의식 연구」을 비롯한 학술 논문 쓰기에 몰입하는 동안 문단은 먼 거리에 있었다. 더욱이 1980년대에는 군부와 운동권 학생들과의 격렬한‘전투 상황’에서 분투해야 했으니, 문단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당국에 갇힌 제자들을 구하러 다니다가, 얼토당토않게 ‘사상 의심 분자’로 낙인찍혀 교수직 파면 위협을 받기도 했다.
내가 한국문인협회와 국제PEN한국본부 등에 출입하며 늦깎이 문단 생활을 하게 된 것은 1990년대였다. 1961년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신 비평계의 원로요 진주고등학교 3년 선배 이유식 평론가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시끄러운 문단 소식에 상당한 혐오감이 있었던 나는 한 국문인협회 성춘복 신세훈 정종명 문효치 이광복 김호운 이사장님과 교유하면서 묵은 오해를 떨칠 수 있었다. 국제PEN한국본부의 손해일 김용재 이사장의 격려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다매체 시대 문학의 지평 열기』『문학 비평과 문예 창작론』등 나의 평론집 다섯 권은 이같은 문단 생활이 낳은 소중한 결실이다. 『월간문 학』과 『PEN문학』을 비롯하여 『문학사상』『현대문학』『문학저널』『문 예한국』『문예운동』등 여러 문예지에 부단히 평론을 쓰고, 문학상 심사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늦은 문단 생활은 풍요를 구가하며 신인 평론가도 등단시켰다. 두 단체가 베푼 조연현문학상과 시조문학상 수상 또 한 영예다. 한국문학비평가협회와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등의 회장으로서 문단을 살찌우는 데도 한 몫을 보태었다.
평론 쓰기가 본업이나 시업(詩業)에 대한 미련도 버리지 못했다. 미흡한 대로 공동 시집 『천년 그리움으로 떠 있는 섬』을 낸 것은 작은 위안이 다. 시집과 시조집은 내년 봄쯤 상재할 것이다. 최근에 여러 문예지에 발표했던 평론들은 여섯째 평론집으로 묶어야 하나, 그것이 읽히지 않는 ‘난해한 독백’, 나르스시시즘에 빠지는 허방다리가 아닐까 저어한다.
문학 현상론은 중요하다. 작가가 작품을 쓰는 것은 자유 영역에 속하지만, 읽히지 않는 경우 그것의 존재 이유는 소멸한다. 작가 작품 독자 간의 역동적 소통 문제에 착목한 것이 문학 현상론이다. 이 땅에 아직 1 만 명의 문학 인구가 있는데도 읽히지 않는 작품을 쓰는 행위는 무모하다. 세대를 뛰어넘어 먼 미래의 어느 시기에 비로소 읽히는 문제작을 쓰는 천재 작가는 예외다. 어느 평론가는 1분 이내에 읽히는 시를 쓰라고 조언한다. 「풀꽃」의 나태주 시인을 보라는 것이다. 한국시인협회장 을 지낸 유자효 시인은「짧지만 아름다운 시」라는 평문에서「동천」(서 정주), 「민간인」(김종삼), 「시인 4」(김남조), 「인생」(유자효) 등이 그렇노라 했다(『겨울 바다로 가신 시인 김남조』, 2024.). 읽히는 시를 위한 이 땅 시인 제위의 분발이 요청된다.
시가 이럴진대 평론은 명맥이 위태롭다. 모든 문학 장르 중에 제일 앞장서 죽게 된 것이 평론이다. 문학 평론은 예술과 철학이 융합된 장 르이기에, 철학을 외면하는 21세기 인류 중에 누가 지적 에너지의 극한을 요구하는 문학 평론 독자가 되려 하겠는가.
새삼 김남조 선생님 생각이 간절하다. 김 선생님은 1962년 시학 강의 시간에 뵙게 된 후 한때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전화를 하셨다. 시를 왜 쓰지 않느냐는 질책이었다. 21세기에 들어서까지 시쓰기를 권하셨다. 남의 시를 두고 잘 썼느니 못 썼느니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노심초사하지 말고 시를 몸소 써보라고 거듭 채근하셨다. “음악 다음으로 시 가 예술작품의 대종(大宗)이 아닌가, 악성(樂聖), 시성(詩聖)이라는 말을 모르는가”하고 질책하셨다.
10월 10일은 김남조 선생님 1주기다. 이 빙충맞은 제자 후배를 각별히 아끼셨던 그 사랑에 털끝만큼이라도 보답해 드리는 일은 작은 시집이라도 한 권 출간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제는 읽히는 평론집 한 권이라도 써야 한다. 대학 시절에는 김남조 선생님의 시학, 구인환 선생님 의 소설론 강의를 들었다. 비교문학론, 문예사조론 등은 이하윤 교수께 배웠다. 이하윤 교수님은 해외문학파로 문학사에 기록된 거인으로 국 제PEN클럽 한국 본부와 한국비교문학회 창립자이셨다.
1980년대에 내 문학 정신사의 변곡점을 이룬 것은 구상 시인과의 만남이었다. 우주 만유를 영원의 투영으로 보는 구상 시학의 구속사관(救 贖史觀)은 나의 정신사를 흔들었다. 내가 리얼리즘의 현실 고발 문학을 포월(包越)하는 영성(靈性, spirituality) 문학의 사도(使徒)가 된것은 김남조 구상 시인 덕이다. 필자는 구상론 전문가다. 
돌이키면 내 인생의 초년은 초라했다. 동기 동창생 12명밖에 안 되는 초미니 초등학교를 마쳤고, 왕복 16km 가파른 산고갯길을 왕복하며 동 기생 135명과 함께 면 소재지 중학교를 다녔다. 도서관조차 없는 학교였기에 초등학교 때 외운 고시조와『학원』잡지에 당선된 고등학교 학 생들의 시를 읽은 것, 교과서에 실린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시인의 작 품들을 공부한 것이 문학에 입문하는‘통과 의례’였다.
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서부 경남의 명문 진 주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충절의 도시요 예향(藝鄕)인 진주에는‘영 남예술제’(지금의 개천예술제)가 성황을 이루었다. 건국된 이듬해에 진 주 지성계의 거인 설창수 시인이 창설하여 개천절 대향연을 펼쳤다. 문 학 음악 무용 등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 각자의 기량을 과시한 이 잔치는 곤고한 선생 대한민국을 예술의 향기로 풍요케 하는 귀한 축 전이었다. 전라도 판소리 신예 안숙선 명창이 경상도 진주 청년과 백년 가약을 맺게 된 계기도 이 영남예술제였다. 시인 조향 이형기 박재삼 허유 강희근 양왕용, 시조시인 김정희 박대섭 김달호 천옥희 이인숙 이 동재 서관호, 소설가 김지연, 수필가 정목일, 평론가 이유식 김봉군 등은 이 예술제의 영향권에서 성장한 문인들이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과 민관군 6만여 명이 옥쇄한 제2차 진주성 전투 후에, 순국 여성 논개가 장렬히 최후를 마친 남강물은 진주인의 충절과 예술혼을 안고 유유히 흐른다. 진주에 외가로 둔 변영로 시인은 명시 「논개」에서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고 노래한 그 남강이다.
또 산청과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남 사람들은 남명 조식 선생의 서릿발 같은 지사혼을 이어받았다. 「단성소」로 문정왕후와 명종의 간 담을 서늘케 한 예언자적 지성 남명 선생의 경의(敬義) 사상과 애린(愛 隣) 정신도 계승했다. 삼성, LG, 효성 등 대기업을 진주 지수초등학교 출신 이병철, 구인회, 허만정 같은 거인들이 창건한 것은 우연이 아니 다. 우리나라 근대화 초기인 1980년대 전국 100대 기업인 중에 30인이 지수초등학교 출신이었다.
나는 이 같은 서부 경남의 정신사를 문학으로 잇게 된 것에 자부심을 품고 산다. 더욱이 나는 연산군 4년(1598) 무오사화 때 「조의제문(弔義帝 文)」을 사초에 올렸다가 참형을 당하신 김일손 어른의 17대 직손이다. 정론직필을 사명으로 아는 글쓰기, 내 평론의 뼈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벌써 인생 황혼녘, 일모도원(日暮途遠)이다. 미력이나 혼신의 힘을 쏟아 무너지는 대한민국을 일으킬 평필을 끝내 꺾지 않을 것이다.
아아, 인공 지능이 고도의 지능을 휘두를 이 디지털 문명 세계에서 문 학은, 평론은 무엇으로 명맥을 이을 것인가. 아프게 대토론회를 열어야 한다. 구상 김남조 시인과 그리스도교적 실존주의자 가브리엘 마르셸을 초대할 것은 두말할 바 없다. 성스러운 것의 내면에 잠복한 추악성, 추악한 것 속에 감추인 성스러움으로 충격파를 던진 프랑수와 모리아크도 정중히 모셔야 한다. 영성의 문학을 위하여.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