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1월 693호
11
0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을 보내고, 중앙문단에 등단할 때까지 살았던 곳은 전북 부안읍 변두리에 자리한 작은 농촌 마을이었다. 내 나이 두 살 되던 해에 6·25를 겪었고, 아버지까지 일찍 돌아가셨으니, 혼자서 삼 남매를 구김살 없이 키워주신 우리 어머니의 희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리다. 두 오빠를 제치고 4년제 대학을 고집할 수 없어 나는 비교적 등록금이 저렴한 2년제 교육대학을 택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모교인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제대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학교 공부보다도 부모를 도와 논밭에서 일을 하는 일이 먼저였다. 어려운 형편에 하루 세 끼 밥을 찾아 먹는 게 더 중했고, 일주일에 한두 번의 결석은 흔한 일이었다. 그들과 생활하는 속에서 하루하루 생겨나는 사건들과 학교 안팎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그 아이들의 심리적 갈등과 언행들은 모두 나의 일기장에 기록되어 동화, 동시의 글감이 되었다.
더욱이 중학교 시절, 아동문학가 윤갑철 선생님을 만난 것도 그 영향이 적지 않았다. 선생님은 종종 문예반 친구들을 데리고 가까운 공동묘지 터를 찾아가 ‘부안의 명기 매창의 묘’라 하며, 무덤 앞에 들꽃을 꺾어놓고 ‘이화우 흩날릴 제’를 암송하게 했었다. 1971년 전북매일에 연재한 내 동화 「빨간 털구두」를 한국기독교아동문학에 공모하게 하여 유영희 목사의 심사로 당선시킨 것도 윤 선생님이었다.
1974년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제1회 신인상으로 동화 「안개」, 197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아기 참새」가 <고향의 봄> 작사자이신 이원수 선생님의 심사로 당선되었다. 내 작품을 당선작으로 올려놓고, 지도에서 내 고향을 찾아보셨다는 이원수 선생님은 심사 과정에서 이웃에 살고 있는 황순원 선생님과 최종선에 올라온 작품 4편을 돌려 보며, 의견이 일치되어 함께 손뼉을 쳤다는 뒷이야기를 에피소드로 들려주셨다.
이원수 선생님은 첫 번째 동화집 『아기 참새』에 붙이는 말에서 “최균희 씨는 아기참새의 똑똑새처럼 세상을 살아가며 옳은 생활을 위해 몸 바칠 사람이다. 그의 글이 리얼리티를 지니면서 유머와 재치가 넘치며 진실에 자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산과 들과 집이 다 우리의 것으로 나타나며, 우리들의 살림살이와 심리를 가장 잘 드러내는 동화 또는 소년소설이다. 이것은 작가의 정신과 기교가 함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기에 나는 동화작가로서의 자긍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1976년 1월 이원수 선생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곧바로 서울의 4년제 대학에 편입하였다. 중학교 국어교사로 전직한 후에도 동화는 계속 썼지만, 1992년 3월 초부터 1993년 3월 말까지 일요일만 제외하고 매일 원고지 7매씩 328회로 마감한 청소년소설 「꿈이 영그는 교정」을 중학생조선일보에 연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소설 쓰기에 돌입했다.
정년퇴임을 앞둔 해에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특례입학이 가능하다는 대학원 광고에 앞뒤 가리지 않고 박사과정에 도전했다. 문화예술학과에서 소설을 전공하며, 3년 동안 열심히 관련 서적을 구입하고, 온갖 자료를 모아 써낸 졸업논문은 1차에서 다섯 명 교수들로부터 우수하다는 평을 받으며 통과되었다. 그런데 2차 과정으로 논문과 함께 써온 소설을 첨부하면 되는 시점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유야 어쨌든 지도교수는 한 학기를 더 다니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박사학위가 뭐 대수냐며 교수실을 박차고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나의 자존감만은 끝내 지키고 싶었다.
『평양기생학교 스캔들』이란 제목의 이 책은 제19부로 나누어 쓴 300쪽이 넘는 방대한 장편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 경성과 평양이다. 주인공은 조선 유일의 기생 양성소인 평양기생학교 출신 권번 기생으로 신여성다운 열정과 끈기로 자신의 기예를 아낌없이 발휘한다. 주인공의 후원자인 기생조합장은 사진관을 운영하며 조선총독부를 도와 이윤을 취하는 인물이며, 주인공은 그의 아들과의 사랑으로 갈등을 빚지만 오로지 자신의 꿈을 살려 인기스타로 명성을 떨친다.
나는 이 소설에서 근대 연예인의 효시인 권번 기생의 문화예술이 현대로 계승된 전통예술임을 알리고, 주인공의 캐릭터를 통하여 조선시대 대중문화와 고전 예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절개와 지조, 덕망을 겸비한 권번 기생이 종합예술가로 평가받아야 함을 말하고 싶었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기생사진엽서를 제작, 배포하여 아시아를 넘어서 프랑스, 영국까지 조선을 ‘기생의 나라, 매춘의 나라’로 전락시킨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었다. 우리나라 전도에 기생이 춤추는 모습을 합성한 사진이 한 예이다. 이 소설을 읽어본 지인 중에서는 “이야기의 뒤가 궁금하여 무릎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면 좋을 것 같다”며, 감독 몇 분을 만나게 해준 일도 있었다.
정년퇴임을 하고 쉬어야 할 나이에 내 모든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소설이기에 아쉬움이 많아 제자가 운영하는 작은 출판사에서 서둘러 책을 낸 것도 나의 서투른 처사였다.
그 이후, 『한국소설』 등 잡지에 실린 소설 몇 편을 모아 파독여성인 친구 이야기를 다룬 소설과 함께 단편소설집 『라인강의 푸른 날개』를 펴냈다.
집필실을 마련하기 위해 전원주택을 찾아다니며 겪은 소재의 「선룸 카페가 있는 집」과 올해 2026년 『한국소설』 6월호에 실린 「황혼의 완행열차」, 최근에 돌아가신 큰 오빠를 주인공으로 하여 『계간문예』에 미리 발표한 「맨발의 노인」 등 단편소설 여러 편이 유튜브를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소설은 팩트와 픽션이 어우러진 작품이기에 모두가 현실이 아님을 밝혀두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부정할 수는 없다.
올해로 등단한 지 55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써낸 동화는 100여 편이 훨씬 넘지만, 창작 동화집 30권에 동시집, 소설과 글쓰기 지도서 등 개인 저서는 40여 권에 불과하다. 요즘은 동요와 가곡 노랫말도 계속 발표하고 있다.
고향 마을에서는 아무 때라도 귀향을 환영한다며 마을회관의 벽화에 내 사진과 약력 등을 새겨 놓고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미 여주시에 내 작은 마음의 쉼터를 정했기에 어쩌면 나의 여생은 이곳에서 지낼 것 같다.
앞으로도 독자들의 가슴에 긴 여운으로 남을 만한 동화나 장편소설을 계속 쓰고 싶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발간한 내 교육생애사 「교육과 문학, 두 수레바퀴를 굴리며」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끊임없이 노력하며 도전하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