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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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 학창 시절에는 문학에 무관심하였을 뿐더러 선생님으로부터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소위 문학청년은 아니었던 것이다. 늘 정적인 독서보다는 동적인 운동이 좋았고, 또 구기 종목은 무엇이나 잘하였다. 글짓기의 기쁨을 모르던 초등학교 시절, 지금은 내용조차 희미하지만, 위인전과 명작 120권을 읽어낸 것이 문학에 대한 유일한 위안이다.
1975년 충남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학보사 주관의 수필 공모에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우연히 응모하였다. 입상은 못하였지만, 선후평에 언급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나에게도 약간의 문학적 소질이 있나? 자문해 보면서 시간은 그렇게 또 흘렀다.
1994년 3월, 중부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잡고 나서야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선후평에 들었던 일을 떠올리며,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대학신문에 어쭙잖은 글이나마 투고하였더니 몇 번인가 게재되었다. 쏠쏠한 재미를 느꼈지만, 수필의 작법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하였기에 마치 기초가 부실한 건축물과 같이, 나의 글쓰기는 늘 불안하였다.
여하간 우리 대학이 자리하고 있는 충남 금산의 만인산 기슭 태봉골의 연구실은 어느덧 나의 창작 산실이 되었다. 틈이 날 때마다 습작 삼아 쓴 글이 20∼30편이 되었다. 수필가이신 선친(원종린 교수)께 염치를 무릅쓰고 수필(隨筆) 아닌 수필(羞筆)을 보여드렸다. 가능성이 조금은 엿보였는지 원고를 물리치시지는 않는다. 잘 다듬으며 더욱 열심히 노력해 보라는 말씀을 곁들이신다. 용기를 얻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고쳐 주신 습작을 보면서 수필이란 이렇게 쓰는 것이로구나 하고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나의 수필 공부의 전부였다. 사실 어쩌다 잘 썼다고 말씀하실 때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지만, 원고의 여백이 붉은 펜으로 거미줄처럼 첨삭이 가해져 있을 때는 글쓰기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4년 8월 월간 『수필문학』에 도시마다 특색 있는 가로수를 심어 보자는 「가로수」로 초회 추천을 받았다. 한동안 글을 못 쓰다가, 1년 후인 2005년 9월에 누구나 겪는 어머니와의 긴 이별을 그린 「사모곡」으로 천료하여 등단하였다. 지천명의 나이에 『수필문학』의 강석호 회장님을 통해서 수필계의 말석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2021년 8월, 28년간 재직하였던 대학을 떠나는 정년을 앞두고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난다. 나의 처지를 모르는 주위에서는 연구실이나 사무실을 따로 마련하라는 조언도 하였으나, 경제적 여력이 없을 뿐더러 굳이 새로운 창작실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비록 오래되고 크지 않은 아파트지만 혼자 쓰고 있는 지금의 이 아파트를 나의 창작 산실로 삼기로 하였다. 지기(地氣)가 건강에 좋다고 하여 선택한 저층에다 바로 아래층에 어린이집이 있어서 소음이 꽤 심한 편이었다. 고심 끝에 같은 아파트 단지의 꼭대기 층으로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둥지를 옮겼다. 새집같이 깨끗하고 편안한 데다 조용하고 전망도 좋아서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든다.
이제는 이곳 대전광역시 서구 내동 도솔산 기슭의 롯데아파트가 나의 새로운 창작 산실이 되었다. 지금부터는 비록 좋은 글을 창작하지 못한다 하여도 환경을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명작은 아니더라도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는 좋은 글을 남기고 싶은데, 아무래도 역부족인 것 같다. 그래도 최선의 노력은 기울여 봐야 하지 않겠는가!
[원준연]
월간 『수필문학』 등단(2005년 9월). 한국문인협회 감사, 대전문인협회 회장,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추천작가회 부회장, 원종린수필문학상 운영위원장, 대전청년문학상 운영위원장, 박용래시문학상 운영위원장. 수필집 『피아노 건반처럼』 외 4권. 제21회 한국문협작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