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4월 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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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물의 영장에서 우주의 쓰레기로 전락한 인간
“아,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공허하며, 더러움에 가득 차 있는 것일까? 인간이란 도대체 괴물 같은 것이 아닌가? 진기하기 이를 데 없고, 무슨 괴물, 무슨 혼돈, 무슨 모순에 가득 찬 것 등이 무슨 놀라운 일들인가? 모든 것의 심판자이면서도, 어리석은 흙 속의 지렁이에 불과한 것, 진리를 맡은 자이면서도 불확실한 오류의 시궁창, 우주의 영광이면서, 우주의 쓰레기이다”고 한 건 파스칼이다.〔「팡세(Pensees, Thoughts)」〕
문명이 발전하고 학문이 고도화될수록 인간의 범죄 역시 점점 정교화되어 잔혹해지면서 현대 지구는 온통 복마전을 닮아 가고 있대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이 점점 황폐해져 이기주의적인 동물처럼 추락하자 에리히 프롬은 “신은 멀리 있는 ‘우주’라는 주식회사의 사장”으로 변한 시대가 되어버렸다면서, 이런 세태를 악마가 지옥에 있지 않고 지상에서 성업 중인 시대라고 개탄했다. 권력·돈·섹스·명예 등을 성취하려고 인간들은 저마다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악마에게 영혼을 팔려고 공개 입찰해 둔 상태라고 현대사회를 냉소했다.
이런 인간 기계화 현상을 질 들뢰즈는 현대인이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동물이란 뜻에서 ‘욕망하는 기계(machine Desirante)’ 혹은 ‘추상 기계(abstract machine)’로 표현했다. 이런 이론이 현실화된 것이 바로 AI 시대가 아닌가. 인간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자 창출해 낸 인공지능이야말로 메피스토펠레스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온갖 죄악을 다 저지르며 욕망을 충족시킨 꼬락서니와 다를 바 없다.
어떤 석학이나 철학자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인류는 실로 공포스러울 뿐인 게 바로 오늘의 세계다. ‘욕망하는 기계’인 인간은 이제 자신이 못하던 짓을 AI로 대행시킬 수 있게 될 테고, 그러면 성능 좋은 AI를 소유한 부유층은 온갖 범죄도 그로 하여금 공공연하게 저지를 수 있을 때가 멀지 않을 것이다.
핵무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 공포스러운 세상! 과연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정의와 진리니 하는 모든 학문은 대체 무엇에 쓰일까. 그런 세상이 된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떳떳한 직업이나 가질 수 있을까?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괴테와 셰익스피어는 어지간한 대학 하나에 상당한다. 한 사람이 독서를 통해 시대를 체험하는 것은 과학과는 다르다. 과학에서는 최종적이고 명확한 성과만을 취할 뿐이지만 독서를 통한 체험은 함께 발을 내딛어 구불구불한 길을 가는 동반자와 같다”(「게르첸이 문학을 논함」)라는 달콤함은 이젠 지구 위에서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인가.
그래서 모파상이 문학의 역할에 대하여 “나를 위로해주오. 나를 즐겁게 해 주오. 나를 슬프게 해주오. 나를 감동시켜 주오. 나를 꿈꾸게 해 주오. 나를 웃게 해주오. 나를 두렵게 해주오.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해주오. 나를 사색하게 해주오”라고 애원조로 표현했던 시대는 영원히 사라져 버릴까?
이런 역사 앞에서 분단된 조국의 서울 한 모퉁이에 초라하게 살고 있는 한 평론가는 그래도 문학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희망을 추구하게 만든다고 감히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편안한 의자에 앉아 꿈꾸듯이 추구하던 창작 자세를 고쳐 이제부터의 창작은 전위적인 시선으로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하여 그 표현 역시 전위적인 기법을 써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인문학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된다고 감히 주장한다.
어, 전위주의라니! 그러잖아도 문학 독자들이 자꾸 줄어드는 판에 난삽하여 그 의미조차 파악할 수 없는 문장을 누가 읽겠느냐는 항의가 천둥처럼 울릴지 모른다. 전위주의란 게 어려운 것만이 아니다. 도리어 어려운 걸 쉽게 만들 수 있는 기법도 전위주의다.
2. 덕은 외롭지가 않아 유방은 두 개가 있다
전위적인 미학을 난해성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실험 미학, 현대인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전위성이란 오히려 훨씬 정감적이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아래와 같은 전위적인 시를 썼다.
(도입부) 내 여자는 갖고 있다. 산불의 머리칼/ 소리 없이 달리는 번개의 생각/ 모래시계의 몸뚱이/ (중략)/ 내 여자는 갖고 있다. 사암과 석면의 엉덩이/ 내 여자는 갖고 있다. 백조의 등 같은 엉덩이/ 내 여자는 갖고 있다. 봄날의 엉덩이/ 그라디오라스의 성기/ 내 여자는 갖고 있다. 금광과 오리너구리의 성기/ 내 여자는 갖고 있다. 미역과 옛날의 알사탕 성기/ 내 여자는 갖고 있다. 거울의 성기(A. 브르통의 시 「자유로운 결합」)
이런 시가 우연히 출현할 수 있었을까? 문학수업 시기에 그는 세계 난해시의 정상인 말라르메에 경도했으나 프로이트를 읽고, 아폴리네르와 교유하면서 전위운동에 투신,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도 동조하며, 삶과 세계를 동시에 변혁시키는 미학에 전력투구했던 게 이런 재미있는 새로운 시의 세계를 개척하게 만든 것이다. 이 시인은 자기 애인의 아름다움과 특성을 묘파하고자 지상의 온갖 동식물은 물론이고 지하의 광물들과 우주 허공의 별들까지 총동원하는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저 19세기의 시인들이 자기 연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려고 끈질기게 장미를 동원했던 기교와 비교하면 그 거리가 얼마나 아득한가.
유럽에서의 이런 사조가 일본에서 그대로 수입되었다. 프랑스의 로맹 롤랑과 앙리 바르뷔스를 통한 반전 평화 혁명문학론과 함께 각종 전위주의 문학도 유입됐는데, 그 중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의 시 한 편을 보기로 하자.
1.덕은 외롭지가 않아/ 유방은 두 개가 있다.
2.유방은 두 개가 있다/ 손바닥도 두 개가 있다.
4.유방은 손바닥을 위해 있다/ 손바닥은 유방을 위해 있다.
7.유방 하얀 날개/ 유방 붉은 입술의 비둘기.
8.유방 여자 육체의 기하학/ 유방 여자 육체의 밸런스.
18.유방 사나이의 처음 먹이/ 유방 사나이의 마지막 목마름.
19.유방 여체의 발코니/ 유방 정욕의 둥근 지붕.
(이하 생략. 23번까지 있음. 호리구치 다이가쿠, 「유방」
시 창작 강의를 할 때 나는 즐겨 이 작품을 제시하고는 24번부터 30번까지 보충하는 습작을 해보라고 권유하곤 한다. 그만큼 시(혹은 문학 전반)란 특별한 사람들만이 쓰는 어려운 것이 아님을 오히려 전위주의가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이 시를 쓰기까지 호리구치의 삶의 궤적은 어땠을까. 문필가에다 외교관이었던 그의 아버지 호리구치 쿠마이치(堀口九萬一)는 도쿄대학을 나온 수재였는데, 대학생 때 첫아들을 낳았다고 그 이름을 다이가쿠로 지었다. 외교관인 아버지의 첫 부임지가 한국에다, 첫 과업이 민비 시해(1895. 10. 8.)였다. 이런 큰 사건은 항상 역사에서는 정계의 거물들만 거론되지만 이때 쿠마이치가 책임을 맡은 분야는 장벽을 넘어 입실, 왕비를 죽이는 것까지였다고 한다. 외교적인 마찰로 추방당한 그는 이듬해에 복직, 브라질 근무 때는 러시아가 아르헨티나로부터 군함을 구입하려는 걸 저지시키고 도리어 일본이 매입하여 러일전쟁 때 동원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 두 사건은 바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는 우리에게는 철천지 한을 맺히게 한 외교 전략 때문에 출세를 거듭하여 중남미와 유럽 여러 나라의 외교관을 거쳤다.
이런 아버지 덕분에 아들 다이가쿠는 여러 나라를 체험할 수 있었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이 시인은 계모가 벨기에 여성이라 프랑스어를 반드시 익혀야 했기에 불문학도가 되었고,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중남미와 유럽 여러 나라를 떠돌았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베를렌을 비롯해 레미 드 구르몽에 심취했고, 마리 드 로랑생과 만나면서 아폴리네르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렇게 달콤한 전위주의라면 감히 도전해보고 싶지 않는가!
그러나 호리구치처럼 다양한 체험을 통해야만 전위주의를 체득할 수 있다면 누구나 욕심을 낼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예술이란 작품만으로 영혼의 교감이 가능하기에 식민지 한국에서도 이상과 같은 위대한 전위주의가 가능했고, 분단 한국에서도 박인환이나 김수영 같은 멋진 모험주의 미학이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대 미학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전위주의자 발터 벤야민은 이런 시대의 예술이란 전위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그 예로 카프카를 거론했다. 묻혀 있던 카프카의 재발굴자 역할을 수행한 그는 카프카의 산문을 비교적(秘敎的),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지닌 것으로 평가, 그의 작품을 심도 있게 독파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담아냈다.
인디언이 된다면 언제나 달리는 말에 올라타고, 비스듬히 바람을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짧은 전율을 느끼면서, 마침내는 박차도 내던지고, 왜냐하면 박차 따윈 있지도 않았으니까, 또 말고삐도 내던지고, 왜냐하면 말고삐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으니까, 드디어는 대지가 매끈하게 깎아놓은 황야처럼 보이자마자 말의 목덜미도 말의 머리도 보이지 않으리라(사라져 버리리라).(카프카, 「인디언이 되고 싶은 욕망」)
이 쌈빡하고 완벽한 한 편의 산문이야말로 전위적인 미학이 낳은 산문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작품이 AI 기술의 발전에 따라 펑펑 쏟아진다면 대체 문학은 어떤 운명에 처해질까?
그러나 전위주의가 다 이처럼 달콤한 건 아니다. 고도의 미학적인 기교에 도전하면서 상징주의의 전위였던 보들레르는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는데, 시집 『악의 꽃(The Flowers of Evil, Les Fleurs du mal)』(1857)의 서문인 「독자에게(To the Reader, Au Lecteur)」에서 신랄하게 비꼰다.
어리석음, 과오, 죄악, 탐욕이/ 우리 정신을 차지하고 육신을 괴롭히며,/ 또한 거지들이 몸에 이·벼룩 기르듯이,/ 우리의 알뜰한 회한을 키우도다.// (중략)// 우릴 조종하는 끄나풀을 쥔 것은 ‘악마’인지고!/ 지겨운 물건에서도 우리는 입맛을 느끼고,/ 날마다 한 걸음씩 악취 풍기는 어둠을 가로질러/ 혐오도 없이 ‘지옥’으로 내려가는구나.// 구년묵이 똥갈보의 시달린 젖을/ 입맞추고 빨아먹는 가련한 탕아처럼,/ 우리는 지나는 길에 금제의 쾌락을 훔쳐/ 묵은 오렌지처럼 한사코 쥐어짜는구나.// (중략)// 우리 뇌수 속엔 한 무리의 ‘마귀’떼가/ 백만의 회충인 양 와글와글 엉겨 탕진하니,/ 숨 들이키면 ‘죽음’이 폐 속으로/ 보이지 않는 강물처럼 콸콸 흘러내린다.// (중략)// 그중에도 더욱 추악 간사하고 치사한 놈이 있어!/ 놈은 큰 몸짓도 고함도 없지만,/ 기꺼이 대지를 부숴 조각을 내고/ 하품하며 세계를 집어삼킬 것이니,// 그놈이 바로 ‘권태’!- 뜻 않은 눈물 고인/ 눈으로, 놈은 담뱃대 물고 교수대를 꿈꾸지./ 그대는 알리, 독자여, 이 까다로운 괴물을/ -위선의 독자여,- 내 동류(同類)여,- 내 형제여!(보들레르, 김붕구 역, 「독자에게」)
미와 추, 선과 악, 호와 불호, 사랑과 증오의 장벽조차 허물어버린 혼돈의 세계를 보들레르는 이미 예시했다. 그래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변해도 이성과 감성은 영원불변이며, 그 중 문학은 감성에 기반한 서정성을 중시한다. 서정성을 헤겔은 「미학」에서 시와 산문의 차이를 들어 이렇게 적시했다.
시문학은 태양이나 산, 숲, 풍경, 인간의 외적인 형상, 피, 신경, 근육 따위가 아닌 정신적인 관심사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시문학은 그 안에 아무리 직관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요소를 띠고 있더라도 역시 정신적인 활동으로 머물며, 정신에 가까이 있으면서 구체적 감각성을 띠고 현상하는 외부 사물들보다 정신에 더 적합한 내적인 직관을 위해서만 일하기 때문이다.(헤겔, 두행숙 옮김, 「미학」 제3부 제3장)
따라서 시는 “어떤 사상(事象)이나 그 실제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로 이미지화하는 것”이라 정의하는 한편, 이와 달리 산문적인 것은 “원인과 결과, 목적과 수단, 그 밖에 한정된 사유의 오성적 범주의 관계에 따라 대체로 외면성과 유한성의 상태에 있는 폭넓은 실제 소재를 고찰한다”면서 아래와 같이 산문의 특징을 규정한다.
…일반적으로 산문적인 표상을 위한 법칙으로는 정당한 것, 뚜렷한 규정성, 명확한 이해 가능성을 내세울 수 있다.(위와 같음)
표현 방법에서 시가 이미지를 창조한다면 산문은 오성(悟性)에 바탕한 명징성임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서정성은 시와 산문에서 두루 적용된다. 정지용의 시 「향수」 중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이란 구절에서 감지되는 서정성이나, 양주동의 수필 「노변(爐邊)의 향사(鄕思)」에서 “머슴, 소배(少輩)들이 모인 곳이면, 신 삼기, 둥우리 만들기에 질화로를 에워싸 한창 분주하지마는, 팔씨름이라도 벌어지는 때에는 쌍방이 엎디어 서로 버티는 서슬에 화로를 발로 차 온 방 안에 재를 쏟아 놓기가 일쑤요, 노인들이 모인 곳이면 고담책 보기, 시절 이야기, 동네 젊은애들 버릇없어져 간다는 이야기들이 이 질화로를 둘러서 일어나는 일이거니와”라는 구상적 서정성은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그래서 서정성이란 겉멋이나 감정의 분비물이 아니다. 헤겔은 서정성의 특징을 이렇게 정의해주고 있다.
첫째, 내면이 자신을 느끼고 표상하는 내용.
둘째, 이 내용의 표현이 서정시로 형태화되는 것.
셋째, 서정시의 주체가 자기의 느낌과 표상을 드러내는 의식과 교양의 단계.(위와 같음)
이 말은 곧 서정성이 주관성에 바탕한, 고양된 주관적 감성에서 철저히 자기 발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정의와 상통하며 이걸 잘 나타내려면 전위적인 기법이 가장 공감대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3. 영혼의 방황과 구원
전위적인 창작은 작가 자신의 절박감에서 형성되는데 그건 모든 문학인이 가진 영감에서 가장 풍성하게 형성된다. 영감이 어떻게 오느냐를 가장 재미있게 입증해 준 예로는 차이콥스키가 있다.
“영감이란 첫 번째 부름에는 나타나지 않는 손님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예술가라면 일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팔짱을 낀 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법이 절대로 없습니다. 일할 기분만 기다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금방 무감각과 나태에 빠지고 마는 법입니다. …믿음과 인내가 저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 영감의 원천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요. 바로 이것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간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작품들을 만드는 능력을 제게 부여했습니다.”(폰 메크 부인에게 편지, 1878. 3. 5.)
폰 메크 부인은 쪼들렸던 작곡가에게 생활 걱정을 해결해준 스폰서였다. 부자들이란 이런 역할을 해야 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런 아름다운 전통이 없다. 어쨌건 차이콥스키는 이 부인에게 돈값을 하느라고 정성을 기울여서 “저는 창작 능력과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한탄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형식을 다룰 때면 언제나 미숙함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오직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일을 함으로써만 저는 어느 정도까지는 내용에 상응하는 형식을 완성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면서, “명성! 이 단어가 저의 가슴속에 얼마나 상반되는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지요! 한편으로 저는 명성을 바라고, 또 명성을 얻으려고 노력하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명성은 제게 역겹기만 하답니다”(폰 메크에게 편지, 1880. 8. 25.)라고도 했다.
그러나 영감이 떠오르는 데는 일정한 방법이나 경로가 없어서 다들 제각각이다. 나는 잠들기 전과 새벽에 눈을 떴을 때, 그리고 목욕 중에 제일 많은 상념이 번득이는데, 그렇다고 멋진 글 하나 제대로 쓰지도 못한 처지라 내세울 건 없다. 20세기 세계 최고의 작가인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안정효 옮김)에 나타난 고뇌는 세계인 필독의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동방교회의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신을 향한 기도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크레타 섬 이라클리온 출생인 그는 회교도인 터키 식민 통치 아래서 소년 시절에는 “대지와 바다, 여인, 별이 가득한 하늘이란 네 가지가 삶의 기본적인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했다. 그는 가장 형이상학적인 문제까지도 바다와, 흙과, 인간의 땀 냄새가 나는 따스한 실체의 형태를 취해야만 감동했다. “냄새 맡고, 보고, 만질 때 - 그때가 되어야 나는 이해한다”라면서 그는 말했다.
“현실을 바꿀 수가 없을 터이니 현실을 보는 눈을 바꾸자. 어렸을 때 나는 그랬고, 지금도 삶에서 가장 창조적인 순간들에는 마찬가지로 그렇게 한다.”
“참된 인간이란 아무리 곤경에 처했어도 신의 앞에서까지도 저항하고, 투쟁하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그리스 신앙의 성지인 아토스 산을 찾았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계룡산쯤이랄까.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신비의 향이 짙다. 온 산이 수도사들로 이뤄져 있기에 그 입구인 항구 다프니는 엄격히 통제하고 있어 선창가에는 천 년 동안 여자와 암컷 짐승까지도 출입을 금한 계율을 지키기 위해 남장 여자가 없는지 엄격하게 지키는 수사가 서서 감시했다. 나도 그리스 여행 때 그 산엘 가고 싶어 알아봤더니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꿩 대신 닭인 메테오라엘 갔었다.
카잔차키스는 밀수업자였던 루카스 신부의 안내로 수도사들을 둘러봤는데, 그 적나라한 신앙 행태는 가히 연옥에 다름없었다. 예사로 규칙 어기며 “고해를 하면 죄의 사함을 받으니까요”라는 루카스 신부는 가장 성스러운 ‘동굴의 마카리오스(Makarios)’를 보여 주었다. 어둠, 똥과 향의 냄새, 그리고 작은 항아리. 앙상한 두 팔이 보이며 “어서 와요!” 하는 숨찬 음성. 나는 아직도 악마와 싸우고 계시냐고 물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아. 지금은 늙었고, 악마도 나와 함께 늙었어. 악마에게는 힘이 없지…. 나는 신과 싸우는 중이야.”
“신과요!”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그럼 당신은 이기리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지고 싶어. 나에게는 아직 뼈가 남았는데, 뼈가 저항을 계속하지.”
수사는 마음에 새겨두라며, “지옥에서 벌을 받은 건 오직 하나, 자아이니라. 그래, 자아, 모든 저주가 거기 내릴 터이다”라고 말했다.
이그나티우스 신부는 움푹한 뺨에 갈아 놓은 밭처럼 깊은 주름살이 패이고 엄지발가락이 찢어진 구두 틈새로 비어져 나온 채 썩은 냄새를 풍기며 고백했다.
“내 마음은 신이 들어오게끔 열리지가 않았어요. 사탄이 문을 잠그고 열쇠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죠.”
대수도원장은 그를 테살로니키 부근 사유지 감독관으로 잠시 파견했다. 여름 수확기에 소작인들이 속이지 못하게 감시하는 직책이었다. 21년 만의 방면이니 20년 만에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여자를 보곤 어지러웠지만 성모 마리아라고 생각하고 경배했다. 그러나 결국 한 여인과 밤새도록 성애에 빠졌다가 깨어났는데, 그 순간 수도사는 비로소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했다.
“평생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살았지만, 그날 밤 부활했어요. (중략) 정말 처음으로 나는 신이 나에게 가까이, 두 팔을 벌리고 가까이 다가옴을 느꼈어요. 어찌나 감사하게 생각했던지 그날 밤은 동이 틀 때까지 기도를 드렸으며, 내 마음은 활짝 열려 신을 받아들였어요.”
여인은 기도나 단식, 은덕보다 강하다고 그는 말했다.
“주님을 내 방으로 데려온 사람은 여인이었어요! 30년인가 40년 전의 그날 밤 이후로 나는 항상 죄도 신을 섬기는데 필요한 방법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토스 산에서도 신의 모습을 못 느낀 카잔차키스는 3천 년 전 이집트로부터 히브리 사람들이 도망쳤던 길을 따라 시나이로 갔다.
7일째, 카잔차키스는 고향에서 어린 시절 골목을 떠들썩하게 하던 술집 가수들의 마차를 몰던 마부였던 요아힘이 신부가 되어 있어서 그에게 신의 존재를 묻자 엉뚱한 답이 나왔다.
“백 년을 산다고 해도 여자들을 즐기지 못하면, 그들은 당신이 잠들었거나 깨었거나 언제라도 찾아와 꿈과 영혼을 더럽히죠.”
그는 신보다 인간을 두려워한다며, 천사는 고상해진 악마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이어 그는 “속세로 돌아가요. 지금은 속세가 수도원이니, 그곳에서 성자가 되어야 해요”라고 잘랐다.
이후 그는 선진국들인 유럽을 방랑하며 새로운 메시아라는 레닌과 스탈린을 추가했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대로 카잔차키스는 혁명가들을 버리고 또 다른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다가 1957년 10월 26일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사망했다. 그리스 정교에서 파문당한 그는 신부들이 받아주지 않아 고향 뒷산에 초라하게 묻혔다. 유명한 묘비명(Heraklion 언덕 위)은 “I hope for nothing./ I fear nothing./ I am free.”라는 초라한 비가 서 있었다.
내가 처음 갔을 땐 나뭇가지를 꺾은 십자가를 세운 초라한 묘지였으나 몇 년 뒤에 가보니 너무나 정갈하게 잘 다듬어져 있어 카잔차키스 본래의 영혼의 안식처를 찾던 구도의 흔적을 느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영혼의 안식처를 추구하는 문학의 자세는 영원히 남아 있기에, 이와 같은 그의 진지한 구도를 향한 추구 정신에서 전위주의적인 걸작이 창출된다는 진리는 명백히 깨우쳐준다. 전위주의적인 글쓰기 자세란 이처럼 투철한 추구 정신을 전제로 한다.
문학인이란 그 목적이 어디든 자신이 정한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방황하면서도 멈추지 않는 영혼의 나그네가 아닐까. 이런 게 바로 전위주의적인 창작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임헌영]
경북 의성 출생. 안동사범, 중앙대 국문과, 대학원 석사 졸업. 경향신문 기자, 월간 『다리』 주간, 중앙대 출강. 1974년 유신 시기(1972∼1979)에 2차에 걸쳐 투옥, 특사로 출옥 후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도서출판 한길사 거쳐 참여사회아카데미 원장. 1998년 사면 복권, 민주화유공자로 인정(2006년). 중앙대 국문과 겸임교수(∼2010년). 세계문학기행 20여 차례, 해외동포문학 연구 및 세계유명 문인과 인문학자 유적 탐방. 2003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2026년부터 국립한국문학관 관장. 중요 저서 『임헌영의 유럽문학 기행』『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한국현대필화사』 외 단독저서 27권, 공저 3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