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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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 어디까지 왔나” “나는 무엇을 쓰고 있나”라는 질문과 마주하면, 나는 깊은 사유의 늪에 빠진다. 그 심저에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엎드려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그러나 나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나는 사유에 머무르지 않고, 사유를 글로 내려 기록으로 남기려는 습관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오늘의 표어는 이렇게 바뀐다.
나는 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I write therefore I am. / Ego scribo, ergo sum.).
나는 먼저, 매일 물밀 듯 밀려온 문장들과 씨름하며 건너온 시간의 두께를 가늠해본다. 아마 내 작품은 지금 강 중류에서 회오리치는 물살 같을 것이다. 상류의 냉기와 하류의 탁함이 뒤섞이는 구간, 돌출된 암반을 휘감다 어느 순간 뜻밖의 곡률로 굽이쳐 흐르는 구간쯤에서 표류하고 있을 것이다. 초고에서 솟구친 거친 말의 거품을 걷어내고, 살아남은 글귀를 남기려 밤마다 체의 촘촘한 눈을 센다. 서사는 인물들의 과거를 무너뜨려 현재를 세우고, 현재를 흔들어 미래의 균열을 엿보는 작업이다. 나의 책상 위에는 삭제된 페이지의 잔설이 쌓여 있다. 그 잔설은 패배의 기록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는 걸음의 기억이다. 지남철처럼 한 문장을 끌어당기는 단어의 흡인력, 지워진 흔적에 스며든 리듬, 그것들이 서서히 줄거리를 직조한다.
나는 죽는 날까지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싶다. 과장된 맹세가 아니라 나의 생리다. 누군가에겐 호흡이 자연이고 걸음이 습관이듯, 내겐 문장을 빚는 일이 생존의 반사다. 데카르트가 의심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얻었다면, 나는 매일의 쓰기를 통해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중심을 얻는다.
사유는 때로 공허하지만 ‘쓰기’는 구체다. 사유는 내 안에서만 왕래하지만, 쓰기는 바깥의 누군가에게 도착한다. 사유가 나를 증명한다면, 쓰기는 우리를 잇고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어디까지’보다 ‘어떻게’를 먼저 묻는다. 더디더라도 진실하게, 느리더라도 정확하게. 문장은 삶의 속도와 보폭,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소설은 달리기의 기록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걸음의 기억이다. 문장 하나를 확정하기 전, 그 문장이 지닌 도덕을 살핀다. 허위의 광택은 없는지, 타인의 상처를 무단으로 침해하지는 않는지, 서사의 쾌락을 이유로 인간의 존엄을 억압하지는 않는지, ‘무엇을 쓰고 있나’의 정직함은 여기서 드러난다.
나는 언어의 물성에 기대 산다. 자음과 모음 사이에 끼워 넣는 호흡, 조사 하나의 무게, 행과 행 사이의 침묵 그 미세한 차이가 인물의 숨결을 바꾼다. 노트북을 열어도 여전히 사전을 켠다. 낱말의 기원을 더듬어 뜻의 온도를 맞추고, 문장의 균형을 위해 쉼표를 옮기며, 의미의 곡선을 위해 마침표를 늦춘다. 언어는 내 소설의 뼈이자 혈이다. 그래서 가끔 중얼거린다.
“나의 피는 잉크로 채워져 있다(My blood is ink.).”
진단이 아니라 선언. 이 선언이 없으면 내 소설의 심전도는 이윽고 수평선이 될 것이다.
나는 때로 마감이라는 살아서 날뛰는 심장박동에도 구원받는다. 사유의 주저함이 바위처럼 가슴에 얹힐 때, 기한은 망설임을 허락하지 않는 칼날이 된다. 그 예리함 덕분에 문장은 제 몸을 얻고, 서사는 제 길을 찾는다. 무자비하지만 고마운 독촉 그 압박 속에서 오히려 자유로워진다. 중요한 것만 남기고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소설의 완성은 때로는 기적처럼 보이지만, 사실 기한의 리듬과 버려진 문장의 합이 빚어낸 필연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얼마나 위로 성장하고 앞으로 전진했는가. 나는 수치를 적는 대신, 페이지 맨 위에 이렇게 적겠다.
“나는 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 아래에 “I write therefore I am.”, 다시 그 아래에 “Ego scribo, ergo sum.” 이 세 겹의 문장을 매일의 서두에 새기며 오늘의 문장과 마주한다.
나의 소설은 아직 길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이 길의 끝은 도달하면 열리는 문이 아니다. 문은 계속 쓰는 나 자신의 내부에 있다. 쓰기 이전의 나는 미완, 쓰는 동안의 나는 진행형, 다 쓰고 난 나는 다음 작품을 부르는 벅찬 숨쉬기이다.
묻는다. 지금 어디까지 왔느냐고? 오늘 쓴 한 문장의 거리만큼 더 왔다. 무엇을 쓰고 있느냐고? 쓰지 않으면 곧 사라질 나를 쓰고 있다. 내게 존재는 현재진행형의 동사이고, 소설은 그 동사를 유지하는 호흡법이다. 쓰는 동안 나는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내일도,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