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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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세요. 여기는 119입니다. 여보세요!”
전화를 걸어 놓고 우는 소리에 놀라서 당황한 119 접수대원이 다급히 물었다.
“우리 엄마가 없어졌어요. 흑흑.”
“그곳이 어딥니까?”
“여기는….”
접수대원은 아이가 알려주는 위치를 받아 적었다.
“알았어요. 바로 출동할 테니 울지 말고 기다려요.”
비상 사이렌이 울리고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반장님, 그곳은 깊은 산속인데 아이가 장난 전화한 게 아닐까요?”
“거짓이든 장난이든 우리의 사명과 의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어디든지 달려가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도착한 곳은 깊은 산속이었고 도로가 좁아 힘들게 현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신고한 남자아이의 엄마는 산나물과 더덕을 캐어 내다 팔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틀이 지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반장님, 혹시 산짐승이나 나쁜 사람에게….”
“쓸데없는 소리! 길을 잃었겠지, 본부에 연락해서 헬리콥터 지원 요청해.”
“할아버지도 엄마를 찾아 산에 올라가셨어요.”
“아저씨들이 찾아볼 테니 울지 마라. 그런데 할아버지도 계시냐?”
“네, 119에 신고하자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왜 신고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119 소방관님들은 이런 일 말고도 힘들게 하는 일이 많다고 하셨어요. 엄마를 찾으러 가신 할아버지도 안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신고했어요.”
“잘했다. 평상시 어느 쪽으로 잘 다니시냐?”
“저 길로 올라가세요. 참, 할아버지는 다리 한쪽이 불편하세요. 목발을 짚고 다니세요.”
반장을 선두로 소방대원들은 산으로 올라갔다.
얼마 동안을 오르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산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곳에는 모자를 눌러쓴 한 할아버지가 목발을 짚고 힘겹게 나무에 기대어 애처롭게 서 있었다. 아이가 말한 할아버지가 분명했다.
“어르신, 119 소방관입니다. 저희가 찾을 테니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는 소방관이라는 말에 흠칫 놀란다.
“신고하지 말라니까 기어코 이 녀석이….”
할아버지는 작은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어르신, 몸도 불편하신데 저희에게 맡기시고 그만 내려가세요.”
할아버지는 아무런 대답 없이 모자를 더 눌러썼다.
2
두두두, 두두두. 이때 119 구조대 헬리콥터가 산 위로 날아왔다. 헬리콥터는 산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잠시 후, 반장의 무전기가 크게 울렸다.
“계곡 밑에 흰 물체가 보인다. 확인 바란다. 오버.”
소방대원들은 헬리콥터에서 말한 장소로 달려갔다. 과연 그곳에는 한 여인이 의식을 잃고 엎어져 있었다. 여인은 아이의 엄마였다.
소방대원 한 명이 엄마의 신음 소리를 듣고는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다리가 골절된 것 같습니다.”
소방대원들은 신속히 응급처치하며 다리에 각목을 대고 동여맸다. 물을 입에 대주니 힘겹게 몇 번에 걸쳐 넘기더니 겨우 눈을 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119 소방관의 옷을 보더니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엄마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저희 아버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머니를 찾으러 올라오셨는데 내려가시라고 했어요.”
“고맙습니다. 바위 아래로 떨어지며 정신을 잃은 것 같아요. 떨어지는 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한참을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이젠 안심하세요. 다리를 조금 다친 것 같습니다.”
소방대원들은 엄마를 구명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는 헬리콥터에서 내려준 구명밧줄로 단단히 연결하고 엄마를 안전하게 끌어올렸다. 엄마를 태운 헬리콥터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산 너머로 멀어졌다.
반장과 소방대원들은 헬리콥터를 보내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바쁜데 고생들 많았어요. 뭐 드릴 것도 없고 여기 산나물이라도 조금씩들 가져가십시오.”
할아버지는 어느새 산나물을 가득 담아 놓았다.
“아닙니다. 저희 할 일인 걸요. 아주머니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소. 수고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그때 반장은 할아버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흐릿한 기억 하나를 더듬고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을 감추고 있었지만, 옆모습과 귀에 많이 익은 목소리였다.
“어르신을 어디서 많이 뵙던 분 같고 목소리도 낯설지 않습니다.”
순간 할아버지는 당황한 것 같았다.
“산속에서만 살아온 촌구석 무지렁이를 어디서 보았겠소. 바쁜 분들이니 어서 가보세요.”
“아, 예. 똑 닮았던 분이 계셨는데….”
“안녕히 가세요. 고맙습니다.”
신고했던 남자아이가 힘차게 인사를 했다.
“그래, 건강하게 공부 열심히 해요.”
“정말 고맙소. 항상 몸조심들 하고 잘들 가시오.”
할아버지는 머리 위에서 양손을 맞잡고 하늘을 향해 힘 있게 세 번을 올리며 인사를 했다.
삐뽀 삐뽀. 사이렌을 울리며 한참을 달리는데 반장이 119 구급차를 세웠다.
“차 세워, 어서!”
“왜 그러십니까?”
“차를 돌려, 다시 그 할아버지 집으로 빨리 가자.”
“네? 다시 가요?”
소방대원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맞아, 틀림없어….”
반장은 혼자 중얼거렸다.
119 구급차가 산속 할아버지 집에 다시 들어섰다.
“아니, 뭣 빠진 게 있습니까?”
이때 반장은 할아버지 앞에 나서며 할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홍촌 반장님! 접니다. 그때 신입 대원이었던 박정명입니다.”
“아니, 무엇인가 착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할아버지는 얼굴을 돌렸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잊지 못합니다. 홍촌 반장님!”
반장은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렸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반장의 흐느낌만 들릴 뿐이었다.
하늘과 먼 산만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체념한 듯 반장을 일으켰다.
“이 사람, 참 기억력도 좋구먼. 세상 사람들이 다 잊은 옛날 이야기인데….”
할아버지는 희미하게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낯이 익은 분인데 하고 한참을 생각했지요. 그러다 반장님이 양손을 맞잡고 하늘에 세 번 올리며 마지막 인사하시는 모습이 떠오르며 기억이 났어요.”
“하하하, 습관이 무섭구먼. 그 버릇은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야. 나도 의식하지 못하고 하는 것이지. 불을 보면 지금도 긴장이 된다네. 이곳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나를 ‘불 할아버지’라고 부른다네, 불 조심하라고 강조하며 잔소리를 해서 말이야.”
“반장님이 저를 얼마나 아껴주셨습니까? 위험한 일은 반장님이 손수 하시며 앞장서셨지요.”
“자네도 이젠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군, 벌써 30여 년이 지났지. 그때 자네는 꽃미남 신입 대원으로 인기가 많았었지.”
지난 세월이 그리운 듯 눈을 감았다.
“자네가 잘 따라 주었어. 나와 행동을 늘 함께해서 친동생같이 사랑했었는데….”
“그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말없이 제 곁을 떠나셔서 한동안 바보처럼 멍하니 살았지요.”
“그래, 잠시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봄세. 난 세상 이야기를 다 잊으려 멀리했어.”
반장은 소방대원들에게 홍촌 반장님과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사람아, 지나간 쓸데없는 내 이야기는 그만두고, 자네 이야기나 들어보세.”
“아닙니다. 우리 대원들도 반장님의 이야기를 모두 교훈으로 삼고 있어요.”
119 소방대원들은 두 사람의 지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3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큰 화재 사건이 있었다. 다세대 주택에서 한밤중에 일어난 불이었다. 골목 안쪽이라 소방차가 접근이 어려워서 인명 피해가 많았다. 주민들은 대부분 잠옷 차림으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가족들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이때 젊은 여자가 소리쳤다.
“저 반지하에 새댁 가족들은 나오지도 못하고 있어요. 어떻게 해요?”
불을 진압하던 홍촌 반장이 이 소리를 들었다.
“뭐라고요?”
“저 반지하에 새댁과 아이가 있어요. 부부가 사는데 남편이 장애인이에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홍촌 반장은 서둘렀다. 이때 불은 순식간에 타올라 집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집이 무너질 듯 아슬아슬했다.
“저 지하에 사람이 있다. 빨리 구해야 해!”
“반장님, 이제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위험합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보고만 있겠단 말인가? 내가 들어가겠네.”
지휘하던 홍촌 반장이 망설임도 없이 앞장섰다.
“반장님, 위험합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들어온 지 반년밖에 안 되는 박정명 신입 대원이었다.
“자네는 위험하니 이곳에서 물을 저 지하 통로로 뿜어 주게나.”
홍촌 반장은 불길이 치솟고 있는 지하 통로로 뛰어들었다.
그때, 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밖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소방대원들과 주민들은 안타깝게 마음을 졸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얼마 후 불길을 헤치며 급히 빠져나오는 홍촌 반장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에는 어린아이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와아!”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때 사람들의 환호에 놀란 듯이 건물이 힘없이 주저앉으며 홍촌 반장을 덮쳤다.
“으악!”
“어머나!”
사람들의 환호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소방관들이 달려가서 건물더미를 헤집고 겨우 홍촌 반장과 아이를 구해냈다. 홍촌 반장은 큰 화상을 입었고 무너진 건물에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병원 응급실로 실려온 홍촌 반장은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하는 큰 수술을 받았다. 얼굴의 화상은 몇 번의 수술을 받았으나 너무나 큰 화상이었기에 원래의 얼굴로 돌아오지는 못하였다.
다행히 어린아이는 왼쪽 팔에 화상을 조금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 당시 어린아이의 엄마는 한쪽 팔로 두 살이 된 아기를 가슴에 꼭 품고 엎어져 있었다. 또 한 손으로는 장애인 남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은 이미 연기에 질식되어 숨을 거두었다.
아기 엄마는 달려 들어온 소방관을 보자 눈으로 팔에 안은 아기를 가리키며 잘 부탁한다며 희미한 미소를 보이고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기는 엄마의 품 안에 안고 있었기에 다행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아기 엄마는 아기만 안고 빠져나왔으면 함께 살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장애인 남편을 살리려다 함께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다.
4
어느 날 저녁 무렵이다. 병원 창문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강물이 반짝반짝 보석같이 아름답게 빛났다. 서쪽 하늘 끝에 잠시 머물던 해님은 물 위에 아름다운 붉은빛 물감을 뿌리면서 산 너머로 숨었다. 황홀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홍촌 반장은 서둘러 환자복을 갈아입었다. 그동안에 의족을 하였고 걷는 연습도 지속해서 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간호사들이 당황해서 오가는 발걸음이 바빠졌다. 입원해 있던 홍촌 반장과 어린아이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다음 날, 각 신문에서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였고 방송에서는 온종일 보도했다. 1년 전 큰 화재 사건으로 살신성인의 영웅으로 알려져 온 국민의 가슴을 울렸던 그 소방관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평소 바쁜 일정에서도 어렵고 불우한 이웃을 돕고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봉사 활동도 앞장섰다. 또 월급 일부를 장학금으로 소년·소녀 가장을 도왔다. 항상 긍정적으로 살며 누구에게나 웃음을 주고 친절했던 그 소방관이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목격자를 찾는다는 방송이 계속 나갔다.
며칠 후, 한 택시기사의 제보 전화가 걸려왔다. 당시 그 병원에서 어두워질 무렵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얼굴을 숙이고 아기를 안고 탔다 는 것이다. 그 아기 엄마가 위독하여 빨리 가야 한다고 해서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했다. 그때 그 남자가 모자를 쓰고 있었고 아기만 바라보고 있어서 얼굴은 자세히 기억 못하는데 목발을 짚고 있어서 걸음걸이가 매우 부자연스러워서 기억난다고 했다.
이 사건은 한동안 많은 사람 사이에 이야깃거리로 오르내렸다. 어린아이와 자살을 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었고 외국으로 이민을 하였을 것이란 말도 퍼졌다.
5
그로부터 30여 년이 흘렀다.
“궁금했습니다. 지금도 저희에게 반장님은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반장님을 만나려 휴가를 내면서 계실 만한 곳은 모두 찾아다녔어요. 어느 절에 비슷한 분이 스님으로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던 일도 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소식도 없이 살아오셨는지….”
할아버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아무 말이 없었다. 반장은 아픈 마음을 건드린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반장님, 죄송합니다.”
“아니네, 찾아다녔다니 미안하네.”
할아버지는 아끼고 사랑하던 후배가 미안해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때 그 어린 아기가 오늘 자네들이 구해준 사람이라네. 119에 신고한 저 아이의 엄마라네.”
“아, 그렇군요.”
“그 당시 외롭게 혼자 살았던 나에게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었지. 옆에 평생 있겠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몸이나 건강히 지내라고 위로해 주었어. 그러나 화상 입은 얼굴과 다리의 의족을 보고는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오는 횟수가 줄어들더군. 아무래도 가족들이 결혼을 반대한 것 같아. 나도 이런 모습으로 결혼은 생각도 안 했지만, 막상 찾아오지 않으니 미칠 것만 같더군.”
그때가 생각나는 듯 할아버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꿈은 다 깨지고 죽기로 작정했지. 병원을 빠져나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자고 생각했어. 그래서 어디인지도 모르고 지방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렸지. 한밤중에 아이를 업고 목발을 짚고 산에 올라갔어. 막상 죽으려고 하니 업고 온 아이가 마음에 걸리는 거야. 부모도 없는 이 아이를 누가 키울까 생각했어. 함께 죽으려고도 했지. 그러나 아이의 엄마가 불 속에서 죽어 가면서도 아이를 꼭 안고 나에게 부탁한다는 그 눈동자가 자꾸 떠오르더라고.”
반장과 소방대원들은 눈시울을 적시며 귀를 기울였다.
“아이의 아빠가 되어 아이가 클 때까지만이라도 살자. 우리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자. 그래서 이곳 깊은 산속으로 들어온 것이라네.”
아무도 없는 산속 생활은 적막하고 무섭고 외롭기도 했다. 하지만 농작물도 심고 산나물도 뜯으며 아이가 커가는 것을 희망으로 바라보았다. 저녁에는 아이에게 직접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10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아이는 홍촌 반장을 아버지라고 알고 자랐다. 딸은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과 절뚝거리는 모습, 그리고 자기 팔에 난 화상 자국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아버지, 오래전부터 궁금했는데 한 가지 여쭈어도 돼요?”
“말해 보거라. 무엇이든….”
아버지의 마음은 불안했지만, 말만은 부드럽게 했다.
“왜 아버지와 제가 이렇게 화상을 입었어요?”
아버지는 대답을 못 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일어나 보관하였던 오래된 신문을 가지고 왔다. 신문지는 색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그 당시 화재 사건을 자세히 보도한 신문이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소방관’이란 큰 제목이 달려 있었다. 언제인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여기고 소중히 간직해 온 신문이다. 딸은 신문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방문을 닫고 나오지도 않고 울고만 지냈다. 아버지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사흘째 되는 날 방에서 나왔다.
“죄송해요, 아버지! 목숨을 걸고 저를 살려주셨고 저를 위해 일생을 바치셨는데… 흑흑흑.”
“…….”
“그것도 모르고… 용서해주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딸은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딸을 얼싸안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딸은 오래도록 울었다.
6
그로부터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이 또 흘렀다. 딸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산속에 살고 있어서 외부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었다. 아버지만을 모시고 평생 혼자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효녀 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이때 산삼을 캐러 다니면서 가끔 들르는 심마니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심마니를 오랫동안 유심히 보아 왔다. 마음씨도 좋고 인물도 남자다웠다. 더욱이 아직 결혼도 안 한 노총각이었다. 혼자가 될 아버지가 걱정되어 결혼을 안 한다는 딸을 설득하여 심마니 총각을 사위로 삼아 함께 살았다.
이듬해엔 아들도 낳았다. 아들은 딸에게 웃음을 찾아주었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따뜻한 봄날이었다. 딸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았다. 사위는 심마니 생활을 오래 하여 일반인들의 통행이 금지된 곳도 가끔 들어가서 산삼을 캐왔다. 물론 군인들의 눈을 피해서였다.
그날도 통행금지 구역에 들어갔다가 묻혀 있던 지뢰를 밟아 그 자리에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딸의 슬픔은 매우 컸지만, 어린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하여 그 아이에게 의지하며 희망을 그리며 살았다.
“이틀 전이 바로 죽은 사위 제삿날이었네. 나에게는 말을 안 했지만, 남편이 죽은 그곳에 가서 술을 한잔 따라주고 자기 설움에 울다가 지쳤겠지. 그래서 서둘러 내려오다 발을 헛디뎠을 거야. 그 바람에 자네를 이렇게 만났지만 말일세.”
할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참 세월이 많이 흘렀어.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오늘 나를 만난 것도 내 살아온 이야기도 절대로 다른 곳에 가서 말하거나 기억해 두지 말아요. 만약 내 이야기가 회자되거나 알려진다면 그때는 내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세요. 내 성격 자네는 알고 있지? 부탁이네. 정말 미안해요. 우리 딸을 살려주어 고맙고.”
할아버지는 소방대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었다.
“나는 지금도 ‘소방관의 기도문’을 벽에 붙여놓고 가끔 읽어요.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 없는 외로운 직업이 소방관이죠.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존경받고 명예로운 직업으로 가장 선호하는 직업 1순위가 소방관이라고 합니다. 소방관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직업입니다.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사명감 하나로 희생을 하는 소방관들에게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환경을 개선하고 장비도 보완하여 처우 문제 등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강하게 힘주어 말씀하셨다. 그러나 안타까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바쁜 사람들인데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네요. 부디 몸들 조심하고 건강하세요.”
“그럼, 건강히 계십시오. 연락할 방법을 안 주시니 휴가 내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오지 말게나. 나는 30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야. 하하하.”
할아버지는 쓸쓸히 웃었다.
반장은 119구급차로 돌아오면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홍촌 반장에게 정부에서 준 훈장과 위로금이 있었다. 행방불명으로 일체 연락이 안 되어 지급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월 나오는 연금은 불우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주라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서명을 해놓고 자취를 감추었다. 인제 와서 반장님을 찾았다고 알리면 정말 홍촌 반장은 스스로 세상을 떠날 것이다.
반장은 답답한 마음에 하늘과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구름과 강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귓가에 바람소리인 듯 소방관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소방관의 기도」
—미국 소방관 스모키 린
신이시여!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저에게는 언제나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시어
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할 수 있게 하소서
저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케 하시고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시어
모든 이웃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지키게 하소서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
신의 은총으로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보아 주소서
시원한 물가에 나를 눕혀 주오
내 아픈 몸이 쉬도록 눕혀 주오
내 형제에게 이 말을 전해 주오
화재는 완전히 진압되었다고
신이시여!
출동 명령이 내려졌을 때
사이렌이 울리고 소방차가 출동할 때
연기는 자욱하고 공기는 희박할 때
고귀한 생명의 생사를 알 수 없을 때
내가 먼저 뛰어들게 하소서
신이시여! 열심히 훈련했고 잘 배웠지만
나는 단지 인간사슬의 한 부분입니다
지옥 같은 불 속으로 전진할지라도
신이시여!
나는 여전히 두렵고 비가 오기를 기도합니다
내 형제가 추락하거든 내가 곁에 있게 하소서
화염이 원하는 것을 내가 갖게 하시고
신이시여! 그에게 목소리를 주시어 내가 듣게 하소서
신이시여! 내 차례가 되었을 때를 준비하게 하시고
불평하지 않고 강하게 하소서
내가 들어가서 어린아이를 구하게 하소서
나를 일찍 거두어 가시더라도 헛되지는 않게 하소서
그리고 내가 그의 내민 손을 잡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