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43
0
유리 절벽에 그가 심겼다
빛의 화살을 맞고 타는 맨몸, 화형당하고 있다
눈멀어 돌아본다
어둠을 뛰쳐나온 아픔이 유리문 꼭대기에 기어올라
끈적이며 뒤척인 길
길게 그어놓은 생(生)이 구불텅하다
꽁무니가 뱉아낸 체액,
번쩍이는 햇살의 계단 뜨겁겠다
무슨 저런 희고 빛나는 꼬리를
감추고 있었던가
어둠에 갇혔다가 끝내 빛에 갇힌 몸
어둠을 갈아, 힘주며
그어내린 한 획,
참 험하고도 확실하다
체액으로 쓴 상형문자, 숨겨둔 암호다
흘러내린 쉰 머리카락 한 올
참! 끈끈해 질기겠다
환한 어둠 속, 더듬이 왕관 높이 세운 칠흑 왕자
어둠을 먹는 벌레는 빛이 그리워
해오라비난꽃 심장을 따먹었지
어둠의 만찬은 꽃배만 불러,
꽃의 꿈은 훔칠 수 없었지
댕강, 모가지 부러뜨린 풀꽃 먹고사는
말 못하는 천사
집 없는 먼 길, 울음은 배 밑에 감춘 채
말을 모르는 말이 튀어나와
터지는 침묵,
이슬 먹은 흰 피 맑았지,
더듬이 춤추며
누더기 한 벌 입어 본 적 없는 살 뭉텅이
다리, 팔도 없이,
뭣을 먹을까 입을까 걱정 없이,
벗어도 부끄럽지 않던 벌거숭이는
헝크러진 꿈 그려내었지
검은 낙원에서 탈출한 민달팽이
타는 햇살에 찔려, 환희, 눕는다
관통하는 불볕, 스스로 다비한 몸
길고 흰 그림자 유리 절벽에 심고
날아오른다
날개를 달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