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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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
충직한 사병처럼
맞아도 빗나가지 않고
제 방향으로
돌고 있는 옹골진 모습
때려도 쓰러지지 않는 채
차가운 빙판에서도
현란한 꿈을 간직한 채
지칠 줄 모르면서
돌고 도는 야무진 모습
잦아 올리는 회초리 끝
묻어나는 뜨거운 전율로
때리지 않아도
돌아가는 신기로운 끼
얼음 위에서
몇 번씩 혼절하다가
스스로 시험해 가며
설 수 있는 지점까지
버티어 나가는 저 결기
아무래도 예사 넋이 아닌가 보다
별에는
너무 멀리 다가갈 수 없어
쳐다보기에 눈 아린
저 먼 별에는
발돋움으로도 닿을 수 없어
누가 사는지 헤아릴 길 없으리
아마도 별에는
고조선시대 나의 할아버지
큰 별 되어 살고 있으며
그 옆 별에는
곱게 빛바랜 옥양목같이 눈부신
꽃다운 나의 어머니 살고 있으리.
훗날
내가 살다 간 자리에
돋아난 작은 별도
저리 아름다움 융숭히 빛내며
고조선시대 별과
푸른빛 감도는 옥양목 같은 별 되어
오순도순 이별 않고 살리라
동해 바다
고향집에서 오 리(五里)길
월포(月浦)리 파도 소리는 자장가였네
철들기 전부터 해거름 때 되면 알싸하던 허기로움
눈치 없이 나를 따라다니던 의아스러운 정체
숨겨온 태생적인 외로움의 시원(始原)이었으리
멀리서 우-우 하며 들리는 파도 소리에 잠 깨었네
아침이면 감미롭던 파도 소리에 잠 깨었네
맑은 날 수평선으로 떠오르는 해맞이 적
두 팔 벌리고 붉은 해 두 손으로 떠서
입 안에 넣어 오물거리다 통째로 삼키면
소원 이룬다던 전설 믿고 따라 했던 날들
겁 없이 이글거리던 뜨거운 해맞이로
눈부시고 찬란한 햇덩이를 몰래 삼키던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었던 당돌한 시절
내 속에 수많이 뜨거운 붉은 해를 품었으니
아직도 그 마그마는 내면 가득 차고 넘쳐
바다를 볼 때마다 출렁이는 나를 만난다.
누에의 여정
가도 가도 끝닿지 않는 길
한없는 초록 길 기어서 간다
앞도 뒤도 길 위는 온통 초록빛
벌거벗고 지나온 길은 지워져도
부끄러움은 골수에 남아 욱신거리고
되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지만
한 치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 멍울
노역의 일상 탈출할 수 없는 나날
목숨을 담보하는 힘겨운 반복으로
푸르른 휴식 얻기 위한 몸부림
가슴에 품은 하나뿐인 욕망
이루어 간다는 게 수월할 리 없지만
이제 한 맺힌 실 남김 없이 풀어 놓고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럽지 않은
빈 껍데기 나방으로 바람 따라 가리라.
거미의 집
그대 당차고 대단하여
한때 내 마음 빼앗긴 적 있었지
기골이나 몸집이나 생김새가 아닌
허공에 곡예하듯 거꾸로 매달려
검은 피 쏟아내어 줄 없이 줄 치고
지줏대 세우고 서까래 걸치며
햇살의 도움 마다하고 혼자 몸으로
험난하고 고된 노역(勞役) 마다않고
허허, 공중 넘나들던 담력 하나로
아흔아홉 칸 구중궁궐(九重宮闕) 보란 듯 지었네
험난하고 고된 노역이 안쓰러워
신기하여 문 앞에 얼찐거린 세월
새벽마다 영락없이 찾아온 이슬이랑
창들마다 은초롱 걸어 놓고 신선처럼
사방 드나드는 바람 껴안고 노닐며
흔들리지 않던 호걸 다음에 반한 한때
돌아서다 신묘한 재능 전수받을까
그 마음 사랑인 줄 모르던 눈먼 시절이
그립고 설렘이 허공에 그네 타며
기웃거리길 석삼년 세월 흘려 보냈네.
경주 남산 이야기
천년고도 경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내 고향에서 팔십 리 길
부산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 들으며
초등학교 사회책서 처음 만난 불국사
수학여행 때 석굴암 부처님 미소에 반해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도록 황홀했던
추억 하나 야무지게 갈무리하고 살았네.
전설 어린 서라벌 이야기는
포석정 휘감아 도는 흥겨운 바람결
오릉과 천마총 둘러보며 휘둥그레진 두 눈
백 년도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한 시간
세월 건너 천 년 전의 이야기였다니
혀 내두르며 탄성 내질렀던 날
어서 빨리 어른 되어 왕손으로
천년의 숨결 들으며 경주에 살리란
소망을 간직하며 살아왔었네.
[강정화]
경북 포항 출생. 1984년 『시문학』 등단. 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한국여성문인회 이사·한국문인산악회 회장·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시집 『우물에 관한 명상』 외 13권, 시선집 『세상 속 작은 일』, 산문집 『새벽을 열면서』 외 1권, 논문집 『청마 유치환 시의 구조 연구』 외 다수. 시문학상·한국시문학상 본상·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