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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집, 서창(西窓)이 달린 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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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제

문학평론가

책 제목 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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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서의 문학작품은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한 이는 엘리엇이다. 엄밀히 말하면, 독자를 위한 문학 비평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평에 대한 회의론(懷疑論)이나 무용론(無用論)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호론과 소통이론 등에 힘입어 가며 여전히 그 일을 해 오고 있다. 어차피 언어(문학언어)는 그 자체가 일정한 의미나 고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불변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유식한 서구의 지성이 지적한 것처럼 심지어 모든 언어는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거느리고 있을 만큼 복잡·미묘한 것이다. 과학이 언어의 고정적·수학적 의미에 충실할 때 문학은 오히려 언어의 상대적·화학적 의미에 몰두하여 풍요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던가. 이렇듯 난감한 언어의 숲 속에서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 길 위에서 쓴 글들 가운데 얼마를 추려 늦은 비평집을 낸다.

이 말은 나의 첫 문학비평집『한국 현대시의 정신 논리』(아세아문화사, 2002)의자서(自序)에서 뽑은 한 대목이다. 시골 출신으로 1970년을 전후한 때에 서울 소재의 대학교를 다닌 세대는 이른바 산업화와 민주화의 급변하는 상황적 시대 속에서 적잖이 혼란스럽고 불운한 젊은 날을 보내야 했다. 단칸방, 아니면 방 두 개의 작은 전세방을 전전하며 곤핍하게 산 것이 예사였다. 1970년대 후반 무렵 집값의 폭등(내 기억으로는 1000% 상승)으로 직장 초년생들의 가난한 내 집 마련의 꿈은 졸지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문학지의 편집과 대학의 강의를 하게 되면서는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등단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의 글쓰기는 주로 전동차 안에서, 기차 안에서, 혹은 고속버스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나의 창작의 산실은 오랫동안 길 위의 공간, 길 위의 집이었다. 1980년, 떠돌던 서울의 상도동을 떠나, 과천의 작은 주공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꿈에 그리던 내 집을 가지게 되었는데, 거실은 서재와 집필실을 겸했다. 과천에 거주하는 동안 시와 비평으로 등단하여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서울의 방배동으로 이사하여 몇 년을 보내고, 1993년 군포시 산본 신도시의 대림 아파트에 입주하면서는 무려 방이 네 개인 집을 가지게 되었다. 아들과 딸의 방이 생긴 것이고, 나의 독립된 서재도 마련된 것이었다. 나의 글쓰기는 이제 길 위의 서재와 산본의 태을산 아래 설악 콘도 같은 솔거 아파트 19층 서재‘태을산방(太乙山房)’에서 이루어졌다.

조합 주택에 가입하여 2008년 대야미동의 33평형 방 세 개의 아파트에 입주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수리산 옆 자락으로 반월호수와 갈치 저수지, 작은 시골 마을과 논밭이 시정(詩情)을 일으키는 곳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 정난종 선생의 재실과 묘지, 신도비 및 동래정씨가묘(東來鄭氏家墓)들이 산기슭에 산재해 있고, 서포(김만중)의 형이며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 선생의 재실과 신도비도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어 문기(文氣)의길지(吉地)라 할 만하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아들은 결혼을 하여 나간 터라, 안방과 서재, 딸의 방으로 정리가 되었다. 이때부터는 이 곳의 서재‘매현시실(梅玄詩室)’이 창작의 안정적 산실이 되었다. 서재는 늘어나는 책과 도자기와 1980년대에 탐석했던 수석(壽石)들로 채워져 갔다. 두어 해가 지나고 딸마저 시집을 가게 되자, 서창(西窓)이 달린 딸의 방을 집필실로 삼아 글 작업을 하고 있다. 서재는 차실(茶室)을 겸한 집필실로 쓸 예정이지만, 모름지기 한동안은 이 서창이 달린 골방에서 집필에 열중하게 될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은 골방에서 묵묵히 창작에 몰두해야 하는 바, 과천, 방배동, 산본 궁내동과 지금의 대야미동에서 그 때마다 점을 찍을 글을 써 온 추억이 내일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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