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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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148번으로 등단 가입해 회원이 된 후, 반세기의 작품활동에서 그 절반의 기간을 동화 창작으로,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그려 왔다.
그런 동화에는 꿈과 희망이 가득한 미래 지향의 세계만을 담았고 어둠 없는 밝음이 가득한 인간의 참모습을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써냈다.
그 중 한 작품의 예를 들면 <파랑새와 아저씨> (KBS 1TV 방영. 전무송 주연)로, 집에 기르는 파랑새의 울음소리에 깬 금선이와 물건 훔치러 온 도둑과의 인연으로 얽힌 이야기지만, 정과 사랑이 넘치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이 같은 동화의 세계는 판타지거나 생활 속의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로 언제나 끝맺는 글을 써 왔다.
그러나 내 문학 후반기 30년간의 작품활동은 소설 창작과 수필 쓰기만으로 점철된다.
수리봉이라는 어느 한 벽지의 산자락에 있는 농지는 한 골짜기를 점유했고, 수리한 고택 외도 40평이 넘는 흙벽돌 창고 건물이 있어 나의 문학 기념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기념관은 수천 권의 장서와 내가 쓰던 물건이 소장되었지만,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해 독서의 장소로서는 그만이었다.
이곳은 인근 마을에서도 한참 상거한 외딴집.
여기에 낮이면 산새, 들새에다 까막까치가 모여들었고, 늦은 봄 앵두가 익을 무렵이면 종달새가 하늘 높이 날아 아지랑이 데불고 뱃쫑거렸다.
산그늘 기어오르는 산마루에 황혼이 흔들리면 수리봉 산허리에서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낙원 같은 전원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소설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그래서 노트북 좌판에다 세상에 존재하는 소설의 자료들을 소환하여 주제를 정하고 소재를 선택하여 플롯이 완성되면 손가락 끝이 부르트도록 두들겼다.
나는 어떤 경향성이거나 아류적인, 편향된 작품을 쓰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손창섭이 ‘개개비 인생’ 을 주로 쓰고, 오영수가 목가적인 소설로, 김경수나 이무영이 농민문학을 주로 했듯 그런 전문적인 특허를 낼 필요성이 없어서다.
『농민문학』 에 발표한 「당숙」 에서 주인공이 생을 마감하는 말년에 당숙 내외로부터 준혁이 농원을 이어받아 농사를 짓는 것으로 마감하지만, 그들은 어두운 시대에 권력에 밀려난 소외된 사람의 삶을 애써 썼고, 『월간문학』 의 「안개 속으로」 에서는 상생의 묵시를 저버리고 혼자만의 영광을 누린 자에 대한 단죄와 함께 자신도 자살하는 비극도 그렸다.
또 계간 『소설가』 에 발표한 「어떤 유산」 은 복권 당첨된 돈 때문에 아내마저 잃을 뻔했던 주인공 김백만은 결국 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이 소설은 금전만능 시대의 인명 경시 풍조를 비판했다.
그리고 전쟁이란 괴물은 인명이 총알받이로, 혹은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다.
이 작품 「이데올로기의 늪」 은 계간 『문학인』 에 발표했다.
나의 이 같은 각양각색의 주제를 갖고 쓰여진 소설들은 독자에게로 가게 되고, 작품 가치의 여부는 독자의 몫에 맡길 뿐이다.
다만 나의 소설에서 빼버릴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아 상실증에 걸려 고민하는 오늘날의 인간에게 비본연의 자태에서 본연의 자태로 돌아가게 하는 휴머니즘 이다.
인간 존중이며 사랑이다.
소설은 인간을 창조하고 리드해 간다.
더 나아가서 소설은 정서에 의한 인간의 심성을 다듬어 준다.
그럼에도 항간에 무식한 이들은 유식한 말을 쓴답시고 “소설 같은 소리, 소설 쓰네. 실패한 소설” 따위들로 “소설은 어디까지나 거짓말” 이라고 낯 뜨거운 말로 소설가들을 폄하하기도 한다.
세상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의 급진적인 발전을 가져오고 있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더불어 가져온 산업혁명 이후 기계문명의 발달은 컴퓨터 시대가 오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진적으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왔고, 이어 AI 시대로 진입을 시작했다.
여기서 인간이 창작한 소설은 AI가 도맡아 함으로써 소설가들의 설 자리는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려에 그칠 것이다.
그 이유로는 사람이 기르는 개가 아무리 애완동물로 사람과 동일시하거나, 그 위로 대접한다 하여도 개는 개로서 존재할 뿐, 이 세상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라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 이 아닌가!
AI가 아무리 좋은 소설을 지어낸다 한들 인간이 생명을 불어 넣은 소설에 비길 수 있겠는가.
소설은 역시 소설가가 써야 소설로서 존재가치를 지녀서 영원히 남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지금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에 밀려 종이책이 안 팔린다고 한다.
그래도 책을 보는 사람은 보고 있다.
책을 읽지 않겠다는 사람이야 자기 삶을 풍요롭게, 행복하고 향기 나는 삶을 포기한 사람이니 걱정해준들 무슨 도움 되랴.
흘러가는 유수가 아니라 전광과 석화처럼 변화하고 흘러가는 시대는 또 멀리 다가올 르네상스 시대 가 도래할 것임을 확신하고 쓰고 또 써야 한다.
한 편의 소설을 수많은 독자가 읽어 주기를 기대할 필요까지는 없다.
단 한 사람의 독자가 있어 준다면, 그 독자에게 자기 삶의 배나 더 살게 해준 셈이니까 창작의 보람과 자부심을 가져도 되리라.
나는 인간 삶의 구석구석을 유심히 관조하여 현실 사회의 비판과 미래 지향의 인간 창조에 언더라인 을 친다.
인간 사회에서의 굴곡 많은 삶을 누린다는 것은 짧은 인생에 지루함을 없애 준다.
한가하고 단순한 행복만으로 살아가던 에덴동산 의 아담과 이브에게 사탄의 선악과 선물 은 인간 사회의 다양하고 복잡한 삶을 누리게 하는 데 오히려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 세상을 살아감에 정과 부정, 참과 거짓, 선과 악, 빈과 부,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이 공존하는 세상살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함께 살만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이런 세상을 위해 작가들은 중단 없는 작품 활동으로 만인 앞에 등불이 되고 이정표가 될 작품만 생산하면 될 것이다.
세상의 작가들이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