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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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가생활 50여 년 중 절반은 서울에서 교직과 더불어 동화를 써 온 콩나물 교실의 휴일이 창작의 산실이었다. 그러다가 교육정년과 함께 수도권 변방의 한 산자락에 펼쳐진 1만5천 평의 농원 한복판의 전원주택 한 채가 소설 창작의 후반기 산실이다.
1971년 이원수 선생의 추천을 받아 아동문학인 동화 창작을 교직과 함께 병행해 왔다. 인구 천만을 넘는 거대한 도시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것도 학급당 어린이 백 명이 넘는 콩나물 교실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60년대의 베이비붐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진적으로 늘기 시작했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인구 팽창과 더불어 서울은 만원이었다.
청와대 옆 효자동에 있는 C초등학교에 6학년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반 학급 재적수가 110명이었다. 그 후 서울 동부교육청 관하의 M초등학교에 재직할 때는 전교생 1만 명이 넘는 매머드 학교로 학생 수 많기로는 세계 1위였다. 1개 학년 19개 학급에 교실 부족으로 1일 3부제 수업을 했다. 그래도 수업 시간이 모자라 1주일에 하루씩 버스 대절로 현장 수업을 해 수업일수를 채웠다. 다행히 중학 진학은 은행알과 컴퓨터로 배정받는 무시험제라 교과서 공부보다 독서할 기회가 주어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시류에 편승해 출판사나 어린이 잡지 신문들은 아동문학 작품을 다투어 싣거나 단행본을 출판했다. 이에 따라 아동문학가들이 호황기를 맞았다. 나도 이 시기에 동화창작에 열을 올렸다.
아동문학, 특히 창작동화집 발간의 상승기류를 타고 공휴일이면 아이들이 없는 텅 빈 교실을 창작의 산실로 삼아 열심히 썼다. 이 시기에 쓴 짧은 동화로는 1주일에 한두 편씩이었고, 연재로 쓴 장편동화는 신아일보에 「덕구와 소쩍새」, 극동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어린이 세계』에는 소년소설 「파란 메아리」를 2년 만에 끝내고, 다시 「붉은 성의 유령들」을 2년 간 연재하면서 월간 『교육관리』지에 장편소설 「그 인생 덤으로」를 연재했다. 아동물은 연재를 끝내기가 무섭게 출판사로부터 교섭이 와 『파란 메아리』는 영진문화사에서 초판 발행, 이 후 청화에서 재발행, 『붉은 성의 유령들』은 안보교육협회에서 발행했다. 그 후 국방부의 전사편찬위원회로부터 장편 전사동화 2편을 청탁 받아 쓴 작품이 「초원에 잠든 별」과 「못다 부른 노래」였다. 이 두 작품으로 전국 초중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 독서감상문을 모집했다.
한국전쟁에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구국의 용사들에 대한 감사와 민주국가의 정체성을 청소년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한 행사의 일환이었다. 이에 응모된 독후감의 편수가 40만 편을 넘었다고 행사 주간처가 발표했다. 이에 독후감 입상자들의 시상식이 용산 국방부 지하벙커에서 있었고, 여기에 우리 부부가 초청되었다. 두 편의 전사동화를 저술한 공로로 국방부장관의 표창장을 육군 참모차장인 김종구 중장이 전수 수여해 영예롭게 받았다. 이어 많은 수상자들과 만찬도 함께했다.
반면에 작가들에게는 극히 드문 일이기는 하나 필화 사건도 생긴다. 나는 그 드문 일의 필화 사건을 겪었다. 그 사건의 전모는 이미 월간 『한국소설』(2019년 3호) ‘나의 인생 나의 문학’에서 밝힌 바 있어 생략하고, 다만 그때 심정의 글 중 극히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사건의 핵심은 ‘대통령 어록의 무단인용과 자구의 의미 수정’이었다. 그래서 저작권 침해는 물론 불경죄로 다스리겠다고 나를 앞에 세워 두고 청와대 비서실의 높은 관리는 호통을 쳤다. 나는 다행히 교사였기에 고위직의 학부모 덕택에 무사히 해결되었지만, 햄릿이 중얼거린,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였다. 그로 인해 1주일 동안에 3년 감수를 했다. 예나 지금이나 힘깨나 있는 공직자들은 ‘앞으로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하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는 게 한국의 관료들이었다. 그들은 쥐꼬리만한 권력을 잡아도 없는 자나 약자는 길바닥에 밟혀서 살아가는 질경이로 여긴다. 그때 나는 교사여서 학부모란 ‘빽’이 있었기에 다행이었지 그렇지 못했다면 모처에 끌려갔을 것이고, 그 결과는 「귀천」의 시인 천상병의 신세가 됐을지도 몰랐다. 물론 출판사는 문을 닫았을 테고. 그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런 짓거리를 했던 문공부의 관리나 청와대의 권력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세상/ 지붕 위를 거닐며/ 꽃구경을 하네.(일본 시인 하이쿠의 시 「一茶」를 읊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모든 인생은 위태로운 곡예인데, 탐욕적이고 전투적인 인간은 지옥의 지붕 위에서 광란의 탱고를 추고 있을 것인가.”(서지문의 뉴스쇼 책읽기에서)
위의 글대로 그들은 지금도 그때에 누렸던 영화를 생각하며 백일몽에 잠겨 있을까? 아니면 이미 저 세상 지옥에 가서 “너 지은 죄를 알렸다! ”는 고함 소리와 함께 염라대왕의 불인두 지짐을 당하고 있을까?
‘전화위복’ ‘새옹지마’라는 4자성어가 있다. 이 필화 사건으로 나의 저서 『오늘의 충효교육』은 인문학 교양도서로 중판을 거듭해 판매고를 올렸다. 문학사상에 실린 오영수의 소설 「특질고」의 필화 사건 또한 하루아침에 월 판매고의 몇 배를 올린 사건과 유사했다.
어쨌건 만원도시 서울에서 공휴일이면 텅 빈 반의 교실을 작품의 산실로 삼아 수많은 동화를 썼다. 이 시기가 작가생활 55년의 절반에 속하는 전반기의 문학의 산실이었다.
그 후 1999년 교직을 퇴직하면서 전원생활로 들어갔다. 비산비야의 땅 수도권의 변방 한 촌락에서 푸른 지붕으로 된 양옥 한 채가 내 후반기 소설 창작의 산실이 되었다. 그 해 5월 초 1만5천 평의 농지를 춘경해 놓고 꽤나 낡은 고택을 수리한 청기와 얹힌 양옥 뜰에 이삿짐 실은 트럭 두 대를 갖다 대었다. 살림도구 한 대, 책 한 대. 서울 창동 아파트는 문만 잠근 그대로 두고. 꼬박 이틀 동안 책과 살림살이를 대강 정리해 두고 봄 잔디 푸른 마당에 파라솔 꽂힌 테이블 앞에 우리 내외가 마주 앉았다. 5월 하루해가 수리봉 머리에 걸려 있었다. 뻐꾹뻐꾹, 비비뱃쫑. 전깃줄엔 뻐꾸기가, 그리 높지 않은 봄 하늘에는 종달새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멀리 건너다보이는 이웃 마을도 조용했다. 어쩌면 고요와 적막이 아내에겐 외로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주는 운치와 풍치가 함께 한 전원의 풍경은 감동적이었다. 내가 창작생활을 하기에 걸맞은 적지 적소였다. 이런 조용한 전원에서 낮이면 농사에 밤이면 글을 썼다. 주경야작(晝耕夜作)이었다. 글 쓸 주제는 가만히 앉아서도 인터넷, 전화, 신문, 라디오, TV, 꿈까지도 소환해 분석하여 취사선택해 노트북 좌판을 두드리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농촌 체험에서 얻어지는 창작의 소재와 주제는 넘치고 넘쳤다. 농민들의 애환, 귀농민과 이농민의 기구한 삶의 역경, 외국인의 이주 사연, 다문화의 갈등… 그 모두가 글감이었다.
또 하나의 장점은 만원의 도시에서 학생들에게 시달리다가 제대로 읽지 못했던 동서 고전을 마음 놓고 읽게 되었고 거기서 마음의 양식은 비워져 있던 지식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이런 고전의 독파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에 생각과 고민과 반성도 했다.
이런 전원에 해 지면 달 뜨고, 달 지면 별이 촘촘했다. 그 촘촘한 별을 이고 후커 후커, 밤새가 심심찮게 노래할 때 나는 소설을 썼다. 나의 곁저만큼에선 아내 역시 국내외에 흩어져 사는 아들, 손자, 며느리한테 편지를 쓰거나 수필을 쓰느라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가 실로폰 소리처럼 들렸다. LED 전등의 불빛도 밝았다. 벽에는 아동문학계의 거인 박경종 선생의 휘호 ‘人間自然復歸’의 액자와 이은상 총장의 시 「고향 길」에 서예가 배재식 교장의 글씨가 액자로 돼 같이 걸려 있다. 우리 부부의 삶과 잘 어울렸다.
작가 생활 후반기 25년은 서울과 수도권의 변방 전원을 오고가며 생활했지만 4반세기의 창작 산실은 주변 지역과 현장 모두 세월 따라 많이도 변해 상전벽해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