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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읽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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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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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한 달 보내기로 작정했던 것은 취업 때문이었다.
정말 별 볼 일 없었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을 하려 했지만 복학할 등록금이 없었다. 몰락한 집안 형편에 도피적으로 군대를 갔지만 복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저도 집안은 풀리지 않았다. 게다가 내 머리로나 체력으로나 나는 복학해 보았자 결코 공부로는 승부할 그릇이 못 되었다. 그래 취직이나 하자. 그러나 막상 직장을 잡으려니 대학 2년 중퇴라는 사실을 가지고는 웬만한 직장도 쉽지 않다는 것을 또다시 깨달아야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제주에서 한 달 떠돌며 진지하게 생각해 보리라.
그러나 앞날을 생각하기 위해 왔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제주에 머무는 날이 길어질수록 그 문제는 더욱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불안을 벗어나고자 시작한 것이었는데 도리어 압박이 되니 나중에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는 상태가 되었다.
열흘이 지났을 때는 이런 생각이 더욱 고조되어 여기가 어딘지 제주의 어디까지 왔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냥 길이 있는 대로 따라 걸었다. 그동안 해가 뜨면 걷고 해가 지면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는 그런 생활을 해왔지만 보름을 지나면서도 앞날의 문제는 결론이 나지 않았고 여전히 취업은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 『이방인』을 읽는 여인을 만났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강정(江汀)에서 외돌개까지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지치기도 하고 발도 아프기도 해 외돌개가 잘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잠깐 내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안녕하셔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시나요?”
그 목소리가 너무 맑고 고와서 나는 방송국 아나운서가 누군가를 인터뷰라도 하러 나온 것으로 생각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내 옆에는 분내를 분수처럼 쏟아내는 아름다운 여인이 웃으며 서 있었을 뿐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 누구세요?”
나는 그녀의 미모와 생전 처음 들어본 맑은 소리를 들으면서 불에 덴 듯 놀라 덤벙대며 물었다.
“네, 저는 제주에 살고 있습니다. 심심하면 곧잘 저 요트를 몰고 나옵니다. 때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오면 이렇게 건너오기도 한답니다.”
여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거기에는 그것만으로 그녀의 신분을 폭로하는 화려한 모습을 한 요트가 한 척 떠 있었다. 제주에서 저 정도의 요트를 부릴 수 있는 신분이라면? (혹 서울의 부자가 제주에 살러 온 것은 아닐까?) 이름마저 ROYAL FAMILY였다. 순간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그녀는 고급 선글라스에다 한눈에도 명품으로 보이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손에는 1950∼60년대나 읽었어야 할 까뮈의 『이방인』이 들려 있었다. 아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것도 문고본이라니?
“제가 마음에 드셨다고요? 저 같은 게 뭐 잘났다고 마음에 들어 건너오시나요?”
자존감을 갖고 있지 못한 백수에다 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여인의 태도가 몹시 의아해 반문했다.
“글쎄요. 왜 당신은 자신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고 않고 하는 것은 내 뜻이지 그쪽의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내 판단은 옳았습니다. 당신은 매우 겸손하고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유능한 분이십니다. 저는 당신은 지금의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고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녀의 말에 고무되어 나는 곧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나는 내 형편과 내가 안고 있는 고민을 그녀에게 조금씩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말 그녀가 도저히 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아 직설적으로 그녀에게 내 감정을 토해 놓았다. 딴은 그녀의 여행 같은 삶에 비해 비참한 내 처지가 우울했기 때문이었다.
“부러워요, 저 요트, 그리고 그쪽의 선물 같은 인생….”
“오로지 보는 것이 바다와 산과 바다, 파도 소리, 외로움은 또 어떻고, 그렇지만 누군가가 말했지요. 고독은 가장 인간이 성숙하게 되는 시간이라고. 외롭지만 요트 안에서 저 나름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요.”
그녀의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쏭달쏭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저는 도저히 심심한 많은 날들을 그 작은 공간과 하늘과 구름과 바다, 파도 소리 속에서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간단합니다. 그런 것밖에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고독하다고 생각하면 고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밖에 볼 수 없어서 꿈을 가진다면 그런 외로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우리는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의 말은 정말 이상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는 『이방인』을 들어 올리면서 조금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이유가 ‘햇빛이 눈부셔서’라는 말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요. 도의적으로, 현실적으로, 상황적으로 비난받을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 그것이 진실된 신념이라고 생각하는 뫼르소는 참 어떤 신인류인지, 한국 사회에서는 뫼르소가 어떻게 통할까요?”
“네?”
나는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표정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도 신인류 엄청 많아요. 우리나라가 정의롭지 못하고 살 만한 나라가 못 된다는 것처럼 떠벌리는 사람들, 우리나라를 폄하하고 비판을 해야 유식한 인간인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 또 그런 것을 즐겨 쓰는 작가들도 있어요. ‘헬조선’을 입에 달고 ‘한국이 싫어서’에 무척 공감한다고 댓글 다는 사람들도 엄청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 자유 대한민국의 가치를 쏙쏙 빼먹고 있는 것을 보면 얄밉기도 하지요.”
“네에?”
나는 더욱 황당해서 여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 결코 있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 없고 당장 밥을 먹고 살 일자리가 필요할 뿐인데….”
여자가 너무 황당한 이야기를 하길래 나는 그녀의 말을 끊을 양으로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곧 태도를 바꾸어 나를 위로하려는 것인지 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젊은 그대는 결국 일자리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나 보군요?”
“맞아요. 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일자리가 없어요. 그저 지금 작은 공장에라도 취직해서 꾸준히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 그립습니다.”
“그대께서는 지금 왜 일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성장이 폭발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그리고 그것이 일자리를 통해서 분배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한쪽이 삐걱거리는 것이겠지요.”
“눈이 높은 것은 아니구요?”
“노력해도 안 되니까 이렇지요. 정말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저같이 대졸자도 아니고 뚜렷한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닌 사람이 무슨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원하겠습니까? 그냥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일자리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했음에도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이번에는 또 다른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카페에 갔더니 사진 하나가 걸려 있더군요. 제주에서 유명한 작가 작품이에요. 사람은 사람인데 모두들 희미해요. 마치 그림자 인간 같아요. 게다가 사진을 흑백으로 찍어 희망을 잃은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었어요. 실루엣 같은 사람들은 방향도 없이 어느 곳으론가 가고 있어요. 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향해 가는지 알지 못한 채 그냥 가고 있어요….”
역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녀만큼 내 이야기를 또 했다.
“그런데 저는 아는 것도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습니다. 우리 그쪽께서는 정말 저를 잘 보고 계시지만 저는 그쪽의 말을 이해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한답니다. 그저 취직만 되었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무엇보다 급합니다.”
나는 다시 내 사정을 절박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내 말에 아랑곳없이 또다시 자신의 이야기만을 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시내 한 오름 극장에서는 베케트의 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공연되고 있어요. 작가는 이 극을 통해 현대 사회의 불안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였다고 해요. 극 속에서 절망과 혼돈, 그리고 불안의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배우들은 막연히 자신을 구원해 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무슨 뜻이지요?”
나는 별 관심 없었지만 그녀가 하도 진지하게 이야기하기에 그냥 한마디 했다.
“지금 님께서 느끼고 있는 것이 님만의 것이 아니라 많은 청년들이 그렇다는 것이란 말이지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언가가 막연히 있을 것이라고 기다리는 사람들, 그렇지만 당신은 매우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식이 없어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회란 언젠가 오는 것, 성공과 실패 모든 것이 자기 책임 아닌 것이 없지만 그래도 당신은 가장 큰 재산인 젊음이 있지 않습니까? 무얼 그리 고민하셔요? 어쩌면 더 좋은 일이 생기려고 지금 바닥에 있는 것은 아닌가요?”
여인의 그것은 옳은 소리였지만 대학 중퇴라는 내 학력에서 볼 때도 또 취직이 급한 내 형편에서 볼 때도 와닿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저와 연결시키는 것이 억지스럽네요. 지금 저와 그런 것은 상관이 없는 것 아닙니까? 저는 뫼르소란 말도 그렇고, 고도를 기다린다느니, 불안이니, 소외니, 이런 말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가 좀 짜증을 내자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화를 내고 있는 내가 귀여운 듯 빙긋 미소를 짓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그쪽께서는 정말 순수하게 생기셨어요. 19세기를 넘어 갓 현대로 넘어온 사람 같습니다.”
“아니 저를 비웃는 것입니까? 사람이 생긴 꼴과 잘 사는 것은 다릅니다. 남자에게 사는 데 인물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모르셔요. 저는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단지 지금 이 삶을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네, 그 말 이해합니다. 관상과 인상은 다른 것이니까요.”
“아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요.”
내가 항의하자 그녀는 급변하며 말을 바꾸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 않고 있는 문제도 바로 일자리와 관련 있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뭐든 항산(恒産)이 있어야 하는데, 항산이 있어야 연애도 하고 집도 사고 하는데 일정한 수입이 없는 지금 무슨 연애나 결혼 같은 생각을 하겠습니까? 결혼은 사치예요.”
“나라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 나라하고 일자리가 무슨 상관입니까? 나라가 앞서 나간다고 일자리가 생겨나는 것입니까? 나라가 해주면 해줄수록 국민의 기대는 커지고 안 해주면 욕하고 그럴 텐데, 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기업의 일자리입니다.”
“일자리가, 또 노동자가 표가 되는 시대 서로 상충인데 그게 쉽겠습니까?”
“어렵지요. 그래도 나라가 기업에 대해 좋은 정책을 쓰면 기업이 발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나라는 어렵게 일군 기업이 규제 탓에, 노조 탓에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누가 기업을 운영하려 하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 아까 이야기하였듯이 아마 고도를 기다린다고나 해야 할까요. 그러나 이것은 여사님께서 말한 현대인의 막연한 기다림과는 달라요. 저는 어디까지나 일자리에 대한 확실한 기다림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게 결국은 그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습네요. 우리 그쪽께서는 젊은 친구임에도 정부 탓을 하지 않는 것이 놀라워요.”
“민주주의도 좋고 정치도 좋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보다는 일자리가 당장 필요합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어서 나는 또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 심정이 그렇네요.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지만 무언가가 없다. 아니 모르겠어요. 왜, 무엇을 위해 기다리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직업이 없어 막연히 무언가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슬퍼요. 그런 불안이 가끔 떠오르기는 합니다.”
여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듣다가 무엇이 우스운지 이내 픽 웃었다. 그러더니 또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전혀 맥락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님을 보니 무척 외로운 것 같습니다. 인간 모두는 원초적 외로움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지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외로움은 동시에 기회입니다. 분발할 수 있는 역동적 시간입니다.”
여기서 외로움이 왜 나온다는 말인가? 또한 일자리가 없어 슬프기는 하지만 나는 전혀 외롭지 않은데, 여자가 말하는 외로움은 어떤 의미인 것일까? 그녀의 말은 마치 해독되길 기다리는 난해한 시 같았다.
“인생에는 각자에게 맞는 때라는 것이 있어요. 봄에 할 일을 가을에 해서는 안 돼요. 지금은 성에 낀 창을 통해 밖 풍경을 내다보는 것처럼 온전치 못한 경우가 많아요. 그냥 해가 뜰 때까지 좀 기다릴 필요도 있어요.”
“무슨 뜻인가요?”
내가 물었는데도 그러나 그녀는 받지 않았다. 나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시를 좋아하신다고 했지요. 지금이야말로 시를 쓸 때가 아닐까요? 등단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으실 것 같은데 먹고 사는 문제로 고통을 느끼다니? 오히려 이 많은 시간을 글을 쓰는 데 바쳐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결국 시간이 흘러도 오래 남는 것이 좋은 작품인 거예요. 아무쪼록 잘 포착해서 좋은 작품 캐내기 바랍니다.”
그녀의 말은 동문서답처럼 참으로 엉뚱했다. 그런데 그녀는 말을 놓기가 아까웠는지, 아니면 내가 좋았는지 흥미 없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살다 보면 사람에겐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책무 같은 것이 하나씩은 있더군요. 다만 자신의 환경과 현실 그리고 신념에 따라 시급하다고 여기는 것과 중요한 것이 다를 수 있지요. 우리 님께서 가지고 있는 우선은 무엇인가요? 님의 연산 법칙에서 괄호 안은 무엇?”
“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빤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만 보니 코끝에 살짝 검은 점이 있었다. 작은 귀걸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을 낼 때가 있었다. 앵두 같은 입술, 붉은 뺨, 오똑한 코,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그 입술을 꽈악 깨물어주고 싶었다. 아니 아무도 없는 지금 텐트를 쳐 놓았다면 그녀를 텐트 안으로 억압적으로라도 끌고 가고 싶을 정도로 섹시하고 자극적이었다.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아직 이런 것을 생각해 보지 못한 분 같네요. 그러면서 무슨 일자리를 가지려 하나요?”
“그런 거야 취업을 하고 나서 가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내가 대꾸했다.
“자기가 가는 곳을 알고 차를 타면 더 좋겠지요. 그렇지만 그런 것은 차후 생각하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좀 더 크게, 좀 더 화려하게 날아라, 날기를 포기해서는 안 돼, 청년아, 날아라. 날아라.”
앞의 말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지금 여인이 한 말은 문학적인 표현이었기에 내가 아는 척했다.
“그러니까 나도 아는 척 하나 할 게요. 인생이든 스포츠든 결과지요. 결과가 좋으면 모든 어둡고 사소한 것들이 사라져요. 나는 큰 미래보다는 당장 취직을 해 눈앞의 이 어둠을 거두고 싶다는 거예요.”
여자야, 좀 알고나 말해. 나는 여자의 뜬금없이 허황된 말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런데 여자는 내 말을 듣고도 조금도 무안해하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맞아요. 그러니까 대통령들, 해놓은 것도 없으면서 제발 기업 회장들 구속시키지만 마셔요.”
거참, 그것 역시 전혀 맥락에 맞는 말이 아니었다. 여기서 대통령이 웬 말? 나는 당장 일자리가 필요할 뿐인데.
“그냥 과중한 업무에 무례한 상사라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집을 사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에 대한 감정은 어떻습니까? 좌절감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으십니까?”
“아니오, 태어나 보면 불평등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괜히 그런 것에 핑계 대어 좌절한다거나 부러워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모든 것을 다 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나라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걸핏하면 입맛대로 빚을 낼 텐데, 저는 다만 지금 일할 일자리가 필요한 것뿐입니다.”
“그렇게 일자리를 원하는 것을 보니 자신보다 혹 가족 때문에, 혹 누군가를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보기에 딱 그렇게 느껴지는데, 가족을 위해 헌신하였건만 가족에게 무시당했을 때 인생이 무의미함을 느끼게 되고 무기력한 존재로 자신을 생각하게 되지요. 원망도 떠오르고 헛산 것이 아닐까 의문을 품게도 되고, 문학 속에서도 그런 인물 많아요. 그레고르 잠자나 이반 일리치 같은, 부조리의 감정에 빠져 나중에는 절망이나 자살에 이르기도 하지요. 그런데 님은 건전한 그 생각만으로 칭찬을 받아 마땅하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엥, 존경? 나 같은 걸?’
갈수록 뜬금없는 그녀의 말이 그녀조차 정말 의심하게 만들었다. 백수인 내게 여인이 다가온 것부터가 수상했다. 혹 간첩? 나를 포섭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여인의 긴 손가락과 가냘픈 손을 바라보다가 내 투박하고 거친 손을 바라보았다. 얼른 크게 자란 손톱의 내 손을 내렸다.
“제가 쓸모없는 것들에 대해 집요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 아닙니다. 여사님의 말은 고급스러워요. 다만 제가 이해 못할 부분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요. 그럼 쉽게 말할게요. 시내를 걷는데 웬 낯선 5층 건물이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소통이 잘 되었다고 건축상을 받았다는 제주 유명 건물이에요. 그런데 내가 보니 아래위가 균형이 맞지 않아요. 게다가 가운데를 어둡게 마감 처리해 누가 보기에도 답답하고 분리된 느낌을 주어요. 수상 내용과는 달리 오히려 소통의 부재를 느끼게 하더군요.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그 경계를 미숙하게 엮어낸 듯한 비균형적인 건물이 어떻게 소통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인지, 오히려 단절, 침묵, 소멸을 야기하는 것 같은데. 소통을 나타내려면 제대로 해야지. 초현실 건축을 나타내려면 더 많이 비틀던지. 에이, 아마추어 정치가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통 모르겠습니다. 뭐, 건축에서 소통이 안 된다고요? 어디가 위쪽입니까?”
그런데 그녀는 또 말을 바꾸었다.
“누군가를 미워하기에 인생은 너무 길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아요. 숨고 은둔하고 포기하기엔 젊음이 너무 아깝잖아요. 이왕 태어난 거 즐겁게 살다 가야지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애국도 하고.”
네에? 순간 나는 그녀의 사랑, 결혼, 아이라는 말에 후닥닥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속을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순간적으로 K를 생각하고 있었다. 비참해서 견딜 수 없었다. 취업도 못 하고 대학조차 못 나온 인간이 어떻게 명문의 K를, 무엇이 있어야 그녀를 대하든지 말든지 하지, 나는 그때 아예 K를 단념하고 피하고만 있었다. 그런데 한편 순간적으로 방금 여사의 그 말이 내가 생각한 그런 뜻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말이 워낙 추상적이고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은 뺏고 뺏기는 제로섬 게임이나 둘 중 하나만 살아남게 되는 치킨게임 같은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상식을 깨우는 게 상상력입니다. 사회에 대한 분노가 미래를 위한 전략이 될 수 없다는 거, 척박한 사막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화려한 문명이 나온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는 거 잊지 말아요.”
여자가 하는 말은 정말 선문답 같아서 와닿지 않았지만, 그러나 들어갈수록 열린 결말처럼 묘한 여운을 주었다.
“일자리가 아쉽다고 하셨죠, 그렇지만 부족함이 아까 그쪽이 말한 선물 같은 것이라면?”
“네, 청년들 일자리 문제 정말 심각합니다. 대통령만 모르고 있어요.”
“그런데,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님께서도 일자리 때문에 분노나 화풀이로 은둔, 자살 같은 생각을 가졌을 때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그러는 여사님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번아웃이 와도 우울증이 와도 어떻게 해서든 버텨야지요. 버티면 이깁니다. 어쩌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없잖아요. 이젠 오르는 일만 남았잖아요.”
“그렇지만 일자리가 없는 저는 지금이 불행하다고 여길 뿐입니다. 아니, 불행을 선물로 여기는 사람이 세상 어디 있습니까?”
내가 다시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그녀가 웃었다.
“어느 권투 선수가 한 말, 강한 자와 싸우기 위해서는 평범하게 싸우면 이길 수가 없어요. 어마어마한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이길지 고민하고 비상식적인 승부수를 던져야 합니다. 이건 사람이나 선거나 다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게 무엇입니까?”
그녀가 다시 웃었다.
“혼자서 생각해 보셔요. 오직 그대만이 그대를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즈음 청년층을 중심으로 자포자기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던데 뭐, 이생망이라나, 뭐 N포 세대라나. 그렇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요. 젊음도 그렇게 많은 것 아니에요. 우리 조금 나이 든 청년들, 빨리 ‘쉬었음’에서 빠져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네에.”
나는 말끝을 내리며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지금 취직 못 했다고 해서 무엇을 바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요, 찬스 같은 게 있어야 바라기라도 하지요, 흙수저일 뿐인데. 저는 다만 일자리가 있으면 그곳에 가서 죽도록 일하고 싶을 뿐입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우리 기성세대들 좀 뻔뻔해요. 나는 더 받고 너희 청년들은 더 내고, 그걸 연금 개혁이라고 내놓는 꼬락서니라니? 아니, 모두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들지는 않고 미래를 꺼내 쓰려고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미래를 긍정적으로 본다고 하여도, 지금 청년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못 살게 될 가능성이 많아요. 게다가 정년 연장이라니? 그 사람들 평생 좋은 직장에만 있었던 것 아니에요. 그걸 더 연장하려고? 그렇다면 청년들은 어떻게 하라고?”
그녀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러다가 또 엉뚱한 방향으로 끌어갔다.
“인간의 삶이란 결핍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인데, 그 모자람이 결국 성공도 만들고 신분 상승도 만든 거지요. 지금 자신이 모자란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대는 정말 훌륭한 청년입니다. 그렇지만 결핍을 모르는 청년들, 위로 올라갈 사다리 없어요. 개천에 용 없어요.”
“…….”
“그렇지만 과녁은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늘 그 자리에 어떻게든 붙어 있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여인은 잠시 하늘을 보다가 다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래간만에 말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 훈감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지.
그러다 나는 또 일자리를 생각하였다. 지금 내 앞이 코가 석 자인데 무슨 외로움이니 소외니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당신 같은 고상한 사람에게나 해당되지, 나 같은 밑바닥 흙수저인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여인과 다르다는 것으로 편을 갈랐다. 그래, 당신은 고급스러운 인물이야, 금수저야, 나 같은 건 감히 넘볼 수 없는… 나는 당신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금 이 심정을 무얼 알겠어?
“나 같이 볼품없고 평범하고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무슨 좋은 일자리를 찾겠습니까? 그런 것은 실력 있는 사람이나 가능한 것이지, 저 같은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오를 수 없는 나무는 아예 처음부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밥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한 것뿐입니다. 그쪽의 말에 관심 없습니다. 청년 문제를 더 말하고 싶어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여자는 웃으며 또 비틀었다.
“맞아요, 청년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관심 사항이 무엇이고 대학의 학번이 어떻고 고독이 어떻고 이런 말이 사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해합니다. 그래도 그 시절에 누려야 할 다양한 감정과 경험을 하면서 살아야지요. 그래야 인생이 풍부해지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서 또다시 그녀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무의미한 모습과 좌절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참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는 공염불에 불과하였지만 여자에게는 사뭇 진지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불과 나보다도 서너 살 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그러나 실제 나이를 알 수는 없었다. 훨씬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통하지 않다니? 그녀와 나는 전혀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내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생각대로 받아 말하고 있었다. 여자는 내 관심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서로 이해할 때가 있었다. 그때면 내가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당장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제주에서 한 달 살기로 하고 목포에서 배를 탔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여전히 취업에 대한 걱정으로 부글부글합니다. 그대처럼 한가하게 외로움이나 이야기할 처지가 아닙니다. 나는 당장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백수입니다.”
나는 솔직히 당신이 생각할 만큼 그렇게 똑똑하지도, 시대의 비극을 생각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여자에게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도 여자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기에 나중에는 ‘여자가 왜 이리 머리가 나빠’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 다시 웃으며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지요? 화끈한 묘책은 없어요. 처음부터 청년들 기대에 맞는 일자리가 어디 있겠어요. 그냥 일자리가 있으면 우선 일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외로우면 도약하는 거예요. 고독은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을 극복하며 개개인을 창조적인 삶으로 이끄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부자든 가난하든 실업자든 사는 것이 재미있잖아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외로움은 뭐고, 갑자기 또 고독은 무엇인가? 여자와의 대화가 유리창 안과 밖에서 서로 입술 모양만을 보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일단의 관광객이 우리 주변으로 왁자지껄하게 쏠려왔다. 그들은 말투가 거칠었다. 여행을 처음 온 것 같은 행동을 했다. 그 바람에 우리의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가, 그들의 한때 소란이 지나자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정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 때,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떤지요? 시인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죽하면 신조차 외로움에 눈물 흘린다고 했겠습니까?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고독에는 못 미칠지라도 혼자 있다는 것을 견디기는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여인은 열심히 자기가 느낀, 아니,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나는 다시 따로 내 일을 생각하고만 있었다. 머릿속으론 제주 지도를 그리면서 내가 하루 평균 얼마나 걸었고 내일은 어디까지 걸어야지 하고 계산하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생각에 빠져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마치 떠날 것처럼 말하였다.
“인생은 길어요. 미운 것, 마음에 안 드는 것, 모든 감정 쓰레기, 여기 제주 바다에다 두고 가는 것 잊지 마셔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곰곰 생각해 보니 지금껏 여사의 말은 엉뚱한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정해진 결론을 위한 하나의 요식 행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그녀가 소문으로만 듣던 청년 일자리를 핑계로 전도한다는 그녀가 아닐까? 그러면서도 그 정해진 결론이 무엇인지는 아리송했다.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마셔요. 일제 강점기 사범학교는 조선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였어요. 그런데 그들이 왜 그들의 머리만큼 성장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찰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졸업하자마자 발령을 받으니 제대로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있었겠어요. 지금 쉬고 있다고 괴로워하지 마셔요. 직업을 갖고 있지 않는 지금이 바로 당신을 위한 성찰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셔요. 한 번밖에 없는 인생, 한번 큰 생각을 가지고 도전해 보셔요.”
우리가 헤어졌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석양이 지는 외돌개를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이젠 헤어질 시간이 된 것 같군요.” 하고 말했다. 그것이 다였다. 나는 그녀가 떠나간 줄도 몰랐다. 내가 내 생각에 젖어 잠시 한눈파는 사이, 그녀는 소리 없이 바람처럼 사라졌고 나는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옆을 돌아다보았는데 그녀가 없었다. 그녀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방금까지 있었던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올 때도 그렇게 왔고, 갈 때도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마 그녀는 다시 그녀, 아니, 그들만의 세계인 화려한 요트로 돌아갔으리라.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다시 걸어야 했고 텐트를 칠 만한 곳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조차 굶었기 때문에 배도 고팠다. 어서 자리를 잡고 라면을 끓여야 했다. 걸으면서 방금 전의 일을 떠올려 보았지만 여인이 말한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도 몰랐다. 당장 눈앞의 취직을 걱정해야 하는 나에게 여인의 형이상학적인 대화는 피상적일 뿐이었다. 여인은 나와 달리 매우 지적인 여인이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대화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는 지금 당장이 급했다.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은 취직이었으며, 여인이 말하는 현대인의 고독, 소외, 불안, 정치, 성찰 어쩌구저쩌구 하는 그런 말이 내게는 공허할 뿐이었다.
그 후 제주에서 건너온 나는 광양의 한 기업체에 현장 사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다루는 것이 기계이다 보니 여인이 살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치고받고 싸우는 매우 거칠고 드라마틱한 세계였다. 그러다가 이태쯤 지나 직원들과 함께 제주 여행을 가게 되었다. 제주 생활에 익숙해 있는 내가 안내를 맡았고, 여행 일정도 내가 짰다. 외돌개를 방문 코스에 넣은 것은 물론이었다. 외돌개 앞에 서자 나는 외돌개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다. 외돌개는 내가 처음 보았을 때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여전히 있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대했던 그때의 요트와 그 『이방인』을 읽는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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