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당선작 2024년 12월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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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교시가 끝날 무렵, 하품을 하다가 무심코 운동장을 봤다. 먹구름이 꿈틀대며 하늘을 뒤덮더니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뭐야! 오늘 비 안 온다고 했는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내리는 비는 진짜 싫다.
‘친구 엄마들은 또 현관 앞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겠지?’
엄마는 한 번도 우산을 들고 학교에 온 적이 없다. 한숨을 푹 쉬며 실내화를 갈아 신고 있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라온아!”
새하얀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물결치는 파마머리를 한 할머니. 얇은 금빛 안경테 너머 동그랗고 큰 눈동자.
‘누구지?’
“이거 네 우산 맞지? 엄마가 갖다주라던데? 한번 휴대폰 봐봐.” 정말 우산대에 내 이름이 쓰여 있다.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단 미니 마우스가 큼직하게 그려진 내 우산이 맞다. 휴대폰을 보니 엄마한테 문자가 와있다.
-할머니 편에 우산 보내줄게!
“누구세요?”
‘나는 할머니가 없는데 누구지?’
“난 엄마랑 아주 친한 할머니야.”
“전 할머니 처음 뵙는데요?”
“너 어릴 적엔 자주 봤는데, 내가 이사 가는 바람에. 오늘 엄마 만나러 왔거든.”
“아∼ 네.”
“학원 안 가는 날이지? 너 좋아하는 와플 먹고 갈래?”
“아니요. 괜찮아요.”
“엄마가 비 오는 날엔 항상 미안하대. 한 번도 학교에 우산을 갖고 오지 못했다고. 간식이라도 먹여서 집에 보내주라던 걸?”
‘엄마도 미안한가 보네.’
나는 쭈뼛거리고 서 있었다.
“내가 너한테 해줄 얘기도 있어.”
“저한테요?”
“응. 아주 잠깐이면 돼. 나도 시간이 별로 없단다.”
원래 내 성격이라면 모르는 할머니랑 같이 있는 게 어색해서 괜찮다고 얼른 도망갔을 거다. 그런데 오늘 처음 만났지만, 낯설지 않은 이 친근한 분위기는 뭘까? 엄마가 보낸 문자도 있고, 나는 할머니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할머니는 무지개 우산을 쓰고 나보다 앞장서서 걸었는데, 우산에 가려서 할머니 어깨 아래부터 뒷모습이 보였다. 작고 아담한 키에 연하늘색 원피스, 하얀 플랫슈즈를 신고 가볍게 걷는 할머니는 한눈에 봐도 딱 멋쟁이 같았다.
‘나한테도 이렇게 멋진 할머니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엄마 대신 나를 데리러 학교에 와 줬을까? 친구들처럼 할머니한테 용돈 받았다고 자랑도 했을까?’
빗방울이 내 운동화 코를 토도독 두드린다. 할머니도 엄마랑 내가 자주 가는 와플가게를 잘 아는지 자연스럽게 노란 간판의 ‘달콤달달’ 와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셨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았고, 할머니는 와플과 핫초코를 들고 오셨다.
‘내가 와플 먹을 땐 꼭 핫초코랑 같이 먹는 걸 어떻게 아셨지? 엄마가 말해줬나?’
“할머니는 안 드세요?”
“나는 괜찮아. 어서 먹어.”
“잘 먹겠습니다.”
“내가 뜬금없이 와서 좀 놀랐지?”
할머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진짜 아는 얼굴 같은데, 설마 외할머니?’
얼굴에 주름은 있었지만, 뽀얗고 고운 얼굴이었다.
“너 요즘 엄마랑 사이가 별로 안 좋지?”
“엄마가 그래요?”
“엄마한테 남자 친구 생겼다며?”
“네. 그래서 우리 엄마 엄청 바빠요.”
난 괜히 뾰족하게 말했나 싶어서, 할머니를 힐끗 보며 와플을 한입 깨물었다.
“라온이는 엄마의 남자 친구가 싫은 모양이구나?”
“싫은 건 아닌데요. 이제 엄마는 저한테 관심이 없어요. 남친이랑 꽃님이밖에 몰라요.”
‘내가 왜 처음 보는 할머니한테 내 생각을 술술 다 말하는 걸까? 참 이상하다.’
“꽃님이가 많이 아프다지?”
“할머니도 꽃님이 아세요? 진짜 속상해요.”
“라온아! 엄마가 널 어떻게 키웠는지 내가 얘기해 줄까? 아빠 이야기 도?”
“우리 아빠도 아세요?”
난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가 같은 고아원에서 자란 건 알고 있지?”
“네. 엄마랑 같이 몇 번 가본 적 있어요.”
“엄마는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좋아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용사가 되었어. 아빠는 공부를 참 잘했는데, 사정이 어려워 뒤늦게 대학교에 들어갔단다. 엄마 뱃속에 라온이 네가 생기자, 둘은 더 열심히 살았지. 아마 꽃님이도 그때쯤 너희 집에 왔을 거야.”
“꽃님이는 아빠가 데려왔다고 하던데요?”
“그래. 아빠가 밤늦게 집에 오는데, 하얀 강아지가 비를 맞고 바들바들 떨고 있더래. 벚꽃잎을 머리와 등에 잔뜩 붙인 채 말이야. 작은 꽃잎을 떨어낼 힘조차 없었던 거지. 아빠는 떠돌이 강아지가 안쓰러워서 집에 데리고 왔단다.”
“그래서 이름이 꽃님이구나!”
“엄마와 아빠는 꽃님이랑 같이 널 만날 준비를 했단다. 항상 즐겁게 살라고 ‘라온’이라는 순한글 이름도 아빠가 지어줬지.”
‘김라온. 아빠가 지어준 내 이름.’
“아빠는 네가 태어나자 학교를 휴학하고, 엄마를 대신해서 널 키웠어. 밤에는 또 몇 푼이라도 더 벌려고 대리기사도 하면서 가장 노릇을 했지.”
“아빠가 절 키워요?”
“그럼. 나이도 어린 엄마 아빠가 발 동동거리며, 얼마나 널 애지중지 키웠는지 몰라.”
‘그래서 엄마가 야단칠 때마다 맨날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러는구나!’
“네가 자다 깨면, 엄마 아빠를 대신해서 제일 먼저 달려가는 건 꽃님이었단다.”
“꽃님이가요?”
“그럼, 꽃님이도 널 돌봤지. 기저귀도 가져오고, 딸랑이도 찾아오고. 네가 첫걸음 떼는 걸 처음 본 것도 꽃님이란다.”
“그렇군요. 제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기억 속에도 꽃님이는 항상 있었어요.”
“라온이는 아빠 얼굴 기억해?”
“아뇨. 사진으로만 봤어요. 기억 안 나요.”
나는 갑자기 콧등이 찡해졌다. 언제나 가슴 한구석이 시린 이유. 보고 싶은 아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라온이가 막 말을 시작해서 한창 예쁜 짓 많이 할 때였지. 아빠는 라온이가 잘 먹던 고기만두를 갖고 오던 길이었는데 그만…”
할머니는 울먹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래서 엄마가 고기만두를 안 먹는구나.’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한텐 진짜 너하고 꽃님이밖에 없었단다. 엄마 혼자 널 키우기 얼마나 힘들었겠니? 그래도 악착같이 일해서 지금은 번듯한 미용실도 차리고, 너도 이렇게 잘 키웠잖아.”
“저도 알아요. 그런데 꽃님이랑 엄마, 저 이렇게 셋이 잘 살고 있는데, 누가 끼어드는 게 싫어요. 그냥 우리끼리만 살면 안 돼요?”
“라온아! 엄마는 이제 서른넷밖에 안 됐어. 엄마도 남자 친구 한 명 있으면 좋잖아?”
“그 커피 볶는 집 아저씨, 좋아요. 그런데 아빠가 되는 건 싫어요.”
“아빠 자리를 뺏는 것 같아서 그러니? 엄마도 너에게 아빠를 만들어줄 생각은 없단다. 그런데 엄마가 그 아저씨와 친해지게 된 이유가 뭔지 아니?”
“엄마가 좋아하는 커피를 매일 미용실로 가져다준 것 때문에요?”
“뭐, 아저씨의 그런 정성도 한몫했지만, 그 전에 그 아저씨 이름 혹시 아니?”
“이름은 몰라요. 전 커피 아저씨라고만 불러서요.”
“우연일지 모르지만, 그 아저씨 이름도 아빠 이름이랑 똑같아. 김지훈…”
“정말요?”
“엄마도 아빠랑 이름이 똑같은 그 아저씨가 신기하고 반가워서 관심을 갖게 된 거야. 엄마도 친구가 필요해. 커피 아저씨는 엄마랑 이야기가 잘 통하는 친구야. 너랑 성재처럼… 영화도 같이 보러 가고, 자전거도 같이 타는.”
“어떻게 제 친구도 아세요?”
“나는 다 알고 있지. 너와 네 엄마에 관해서라면 모두 다.”
“어떻게요?”
“다 아는 수가 있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와플에 핫초코까지 다 먹었더니 몸이 나른해졌다.
“어머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라온아! 엄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걸 말해주려고 내가 온 거야. 넌 똑똑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엄마한테 맘에도 없는 말로 상처 주지 말고!”
엄마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쭉 생각했는데, 제 외할머니죠? 그렇죠?”
“나는 너한테 할머니도 되고, 이모도 되고, 친구도 된단다. 이제 일어나야겠다.”
나도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났다.
“할머니, 또 오실 거죠?”
할머니는 말없이 나를 꼭 안아주셨다. 할머니의 품은 내 방 침대의 이불처럼 포근하고, 아주 익숙한 향기가 났다.
‘우리 집이랑 똑같은 섬유 유연제를 쓰시나?’
“그럼, 엄마를 잘 부탁한다.”
와플 가게를 나왔더니 비는 그쳤다. 할머니는 내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그 길로 접힌 무지개 우산을 들고 멀어져 갔다. 그런데 할머니 뒷머리 하얀 머리카락 위에 꽂힌 분홍 꽃핀이 보였다.
‘어? 저 핀은?’
그 순간 우르릉 쾅! 우르르 쾅! 천둥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서 눈을 움찔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할머니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비가 또 오려나?’
나는 곧바로 집으로 뛰어갔다. 아파트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더니, 엄마 신발이 보였다.
“엄마! 이 시간에 왜 집에 있…?”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방이랑 신발주머니를 내동댕이치고 안방에 들어갔다. 엄마가 꽃님이를 안고 있었다.
“라온아! 꽃님이가, 꽃님이가. 오늘 아침 너무 힘없는 모습이 맘에 걸려서 손님 없을 때 잠깐 와보니까, 자는 거야. 그런데 내가 들어왔는데도 꼼짝을 안 해. 그래서 이상해서 안아줬는데도 전혀 움직이질 않아. 눈을 안 떠. 눈을 안 떠. 어떡해.”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꽃님이 나이 열여섯 살, 사람 나이로 여든이 넘은 셈이다. 병원에서도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가버리다니. 어제도 내 방 침대에서 같이 잤는데.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라온아, 엄마는 꽃님이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 널 혼자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꽃님이가 있었기 때문이야. 우리 꽃님이 어떡하니?”
엄마와 나는 꽃님이를 얼싸안고 한참 울었다. 꽃님이가 없는 우리 집은 상상도 못 할 것 같다. 꽃님이가 금방 눈을 뜨고, 내 무릎 위로 올라올 것만 같았다. 울다가 지쳐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도 울어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엄마 품에 안겨 잠이 든 꽃님이를 찬찬히 바라봤다. 고불고불 하얀 머리털에 달려 있는 분홍 꽃핀. 나는 분홍 꽃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꽃님이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고 또 불렀다. 창밖에는 꽃님이가 꽃잎 달고 오던 그날처럼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