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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종

책 제목제172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4년 12월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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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신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얀 웨딩드레스에 반짝이는 왕관을 쓰고 입장할 때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진한 감색 예복의 신랑도 역시 훤칠한 모습으로 신부를 바라보면서 연신 입이 귀에 걸렸다. 신랑 보다 어리게 보이는 사회자는 하객들이 즐거워하도록 익살스럽게 예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는 입장 후에 성혼서약문을 교대로 읽어가면서 낭독을 했다. 이어서 신랑의 아버지가 멋쩍게 두 남녀의 성혼을 선언하고 신부의 아버지는 행복하게 살라는 덕담을 해주었다. 신랑의 친구가 멋들어지게 축가를 부르고, 모든 하객들은 새 출발을 하는 신랑과 신부를 한껏 축하해주었다. 

화려한 결혼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식을 지켜보던 나도 신혼부부가 앞으로 펼쳐지는 삶의 무대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였다. 방금까지 남이었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맺어진 것이다.

얼마 있으면 결혼 40주년을 맞는 나는 아직도 남편의 도리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몰라서도 그렇고 어떤 때는 알지만 게을러서 그렇다. 남편의 역할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수행자가 인내를 가지고 득도를 구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결혼식에서 주례나 부모님이 전해주는 남편의 길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가슴으로 이해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 평생을 노력하며 걸어가야 하는 길일 것이다.

우리는 혼인하고 달포도 채 안 되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시절 초반에 학교를 다니면서 미흡한 어학 능력 때문에 수업이나 밀려 오는 과제와 씨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연히 아내를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처음 환전해 가지고 간 유학자금이 소진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학업도 중요했지만 빵과 우유를 살 돈이 필요했다. 바쁜 중에 시내 중심가의 백화점에 가서 저녁 일자리를 구하였다. 백화점이 문을 닫기 직전에 출근해서 낮 동안 손님들로 어지러워지고 더러워진 곳곳을 새 건물처럼 보이도록 쓸고 닦았다. 사층짜리 대형 백화점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바닥을 윤내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은 단순했지만, 육체적으로 만만하지 않았다. 자정이 넘어 작업이 끝나면 파김치가 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가 끊긴 밤거리는 적막하기만 한데, 가끔 희미한 불빛이 비치는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을 만나면 섬뜩하기도 했다. 그렇게 간간이 비추는 가로등을 세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시오리가 조금 넘었는데 무척 멀게만 느껴지곤 했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서는데, 아파트 옆 쓰레기장에 누군가가 폐기처분한 자전거를 보았다. 자전거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바람이 조금 빠졌지만 두 바퀴는 멀쩡하였다. 내 허리보다 높은 안장에 올라가 양발을 굴러보았다. 이런 횡재가 있나! 외형도 멀쩡하고 바람만 넣는다면 완벽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자전거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양쪽 브레이크가 모두 떨어져 나간 것을 알았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갈 수는 있었지만 쉽게 멈출 수가 없었다. 아내는 브레이크도 없는 자전거는 위험하니 타고 가지 말라고 말했다. 백화점까지 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된 몸으로 자정이 넘은 밤중에 돌아오는 것은 매번 힘이 들었다.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남자는 아내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보내고 자전거 위로 올라타서,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으며 슬며시 도로로 나갔다.

“여보!” 아내는 고집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내 뒷전에서 천둥 같은 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어 가느다랗게 떨리는 애잔한 목소리가 내 심장을 때렸다. “나는 당신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앞으로 구르는 자전거를 멈추기 위해 비틀거리며 발로 연거푸 땅을 딛고 나서 겨우 멈추고 뒤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그곳에서 거의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친척도, 친구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역만리 땅으로 날아온 철부지 젊은 부부였다. 신기루마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열사熱沙. 모든 것이 낯설고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들의 세상은 고독의 사막이었다. 우리는 매일 끝없이 펼쳐지는 그 사막을 걷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삭막함의 한가운데에서, 아내는 내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고 슬픔에 빠진 것이다. 나에게 오직 그녀밖에 없듯이, 나는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 평생을 살면서 아내를 편안하게 해주고, 미소 짓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주례 선생님의 당부를 깜박 잊고 있었다.

자전거를 다시 쓰레기장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아내를 껴안아 주었다. 한참이 지나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니 행복한 미소가 아름다운 얼굴에 가득 차 있었다. 아내의 미소를 보고 나서 백화점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뿐하였다. 그 여름 초저녁에, 나는 남자에서 남편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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