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2024년 09월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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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옥상에 서너 평 남짓한 텃밭을 만들었다. 새싹이 살포시 고개를 든다. 개나리 진달래가 필 무렵 나는 도시의 농부가 된다. 한약 찌꺼기를 발효시킨 거름을 섞어서 땅을 고른 후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하면 농약과 비료를 주지 않아도 튼실하게 잘 자란다. 봄 상추의 풋풋한 맛과 한여름 아삭한 고추 맛은 일품이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밭 가장자리에 버팀목을 세우고 울타리를 만든다. 버팀목에 끈으로 얼기설기 엮어나가다, 문득 어릴 적 고향 집 앞마 당 생각이 났다. 초가집 울타리 따라 노랑병아리 종종거릴 때 고무줄놀이로 마냥 즐겁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딸 일곱을 줄줄이 낳으면서 할아버지의 잔기침 소리에도 안절부절못하였다. 할머니와 엄마가 “우리 집은 아들만 있으면 걱정이 없다”면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맏딸인 나는 마루 끝에 앉아서‘왜 우리 집에는 아들이 없을까’답답한 마음이 뭉게구름을 따라가면서 어른들처럼 한숨을 쉬었다.
가을걷이한 벼를 멍석에 널어 말리고 있을 때였다. 마당 한편에서 우리들은 깔깔대면서 땅따먹기 놀이로 신났다. “저 가시나들이! ”할아버지의 불호령에 옴짝달싹 못했다. 호롱불을 켜놓고 그림자놀이로 조잘 거리면 마뜩찮음을 헛기침으로 나무랐다. 그럴 때마다 괜찮다며 쓰다듬으며 안아주는 할머니 품이 아늑했다.
드디어 수년 동안 애타게 기다리던 남동생이 탄생했다. 큰 경사가 난 날이었다. 아버지는 막걸리 턱을 수없이 내면서 우리들이 다니는 학교에 종을 선물했다. 무섭던 할아버지는 손자를 안고 웃음이 넘쳤다.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우리들도 덩달아 곱디고운 꽃송이가 되었다.
동생은 집에서는 물론이고 일가친척 동네 분들한테도 사랑을 독차지했다. 할아버지는 우리들에게‘족보’에 성과 본을 가르쳐주었다. 가끔 낡은『명심보감』을 펴놓고 부모에게 효도하라, 우애로운 형제가 되어라, 어른을 공경하라, 근면 성실을 실천하라는 교육을 받았다. 남동생은 축구선수가 꿈이라고 축구화를 신고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다녔다.
시골부자 일부자라고 했던가. 엄마가 돈 걱정을 하는 것이다. 늘 아들만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다더니 달라졌다. 웬일인지 연거푸 흉작이 들면서 아버지가 위장병을 앓기 시작했다. 병원비와 칠 남매 학비며 생활비로 형편은 기울어가고. 하는 수 없이 서마지기 논을 팔던 날, 그 한숨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나는 이십대 초반 중매로 사업을 하는 신랑과 결혼을 했다. 서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동동거렸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그 때 엄마가“그래도 부모 품이 따시다! 꾹 참고 이 고비를 잘 넘겨라”하 면서 시댁으로 가면 어떻겠냐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은 서울에 남고 아이 셋을 데리고 완행열차를 탔다. 장단을 맞추느라 몰아치는 비바람과 함께 시댁으로 들어갔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은 해맑은 얼굴로 할머니 품에 안겼다. 시부모님이 손주들을 안고 기쁨 반 걱정 반으로 등을 도닥였다.
사업 실패는 몽땅 내 책임으로 돌아왔고, 수군덕대는 소리와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당장 생활은 해결되었으나 여유는 없었다. 문득 할아버지의 가르침 중에 “슬기롭게 최선을 다하여라”던말 씀이 귓전에 감돌았다. 고민 끝에 읍내에 있는 수예점에 가서 일감을 부탁했다. 수예점 사장님이 흘낏 훑어보다가 털실 한 타래를 주었다. 한 땀씩 정성을 담아 방석을 완성해서 부업했다. 이런저런 일들을 방석에 담아서 수예점으로 보냈다. 덕분에 푼돈은 궁하지 않았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며 용기 주는 시부모님 시하에서 삼 년을 보냈다.
남편이 사업을 재개하고 온 가족이 모였다. 단칸 사글셋방이었지만 같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실패를 거울삼아 노력한 결과 물로 단독주택을 장만했다. 지금도 누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물으면 처음으로 집장만을 했을 때라고 말할 것 같다. 가족이 흩어져 반쪽으로 살았던 삼 년 때문일까!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입사 시험에 합격한 띠동갑 여동생을 데리고 왔다. 남동생 학비를 책임져야 할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이었다. 5년 동 안 월급은 고스란히 엄마에게 송금했다. 동생의 꿈은 축구선수에서 화가로 변했다. 미술대회에서 수상을 할 때마다 들르는 동생이 우리는 장 하다고 응원했다.
엄마는 안정된 직업을 찾으라고 사범대를 고집하면서 화가의 길을 막았고, 동생은 미술교사로 발령받은 지 몇 달 만에 사표를 냈다. 실망한 엄마와 함께 남동생도 고생길로 접어들었다. 어렵게 석사와 박사과 정을 마친 후 청년은 중견작가로 미술평론가로 성장했다. 지금은 연석산에 자리 잡은 ‘연석산 우송미술관장’으로 활동한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쓰던 방을 둘러본다. 추억 하나 꺼내 들면‘더 열심히 할걸’ 즐거움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어느새 성장하여 짝을 만나 제 몫을 다하는 사회의 일원으로 둥지를 떠났다. 매일 수많은 일 속에서 부대끼며 살았어도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었다. 그 자리를 남편과 가꾸면서 생활한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길고 짧은 것 높고 낮음의 조화로 균형을 이룬다. 순리에 따라서 현실을 직시하고 큰 욕심을 버리는 순간 평온이 찾아왔다.
저택도 아니고 넓은 정원도 아닌 자그마한 옥상 풍경이다. 뽕나무에 재잘거리는 오디와 방긋거리는 패랭이꽃이 사랑스럽다. 오늘은 온 가족이 합동으로 푸짐한 밥상을 차리기로 했다. 갓 따낸 푸성귀를 씻고 장어를 굽는다. 아들과 딸들, 손자와 사위들의 손길이 요리사인 양 능수능란하다.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 오순도순 정담이 오가는 울타리가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