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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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이재명 정부가 자주 거론하는
자주는
주권국가가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요소로
자기 발로 설 수 있는 능력이다.
자주는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이며,
남과 협력하기 위해
자신의 조건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자주는 누군가를 향해 등을 돌리는 자세가 아니라
남에게 끌려가거나 기대지 않고
당당히 홀로 서는 것이다.
자주는
국제질서와 한반도의 이해관계를 함께 살피는 것으로
그 모든 선택의 중심에
한국의 국익, 국민의 안전과 존엄이 있어야 한다.
자주는 당연히
외로운 길이기도 하다.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고
강대국의 요구를 거절할 때
그 뒤에 놓인 위험을 감당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미국의 모든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것.
미중 갈등 관계에서
한중 교역 등을 추진할 때의 부담을 감당하는 것.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군비경쟁의 끝없는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는 것.
국익을 주장하면서
국제적 약속과 국격을 지키는 것.
그 모든 것을 함께 합당하게 해내는 일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가야할 길이다.
자주는 홀로 서는 능력이지만
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동맹은 함께 서는 약속이지만
한쪽이 다른 쪽의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진정한 자주는
협력할 때 협력하고,
반대할 때 반대하며,
그 어느 경우에도
민주주의 방식이어야 하고
국민 앞에서 판단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자주를 말하기 전
연이어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먼저 촛불을 들었고,
어둠 속에서 민주주의 후퇴를 확인했으며,
권력이 국민의 위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의 한복판에서 선언했다.
그리고
다시 시민들은 빛을 들었다.
그 빛은 한 사람의 승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권력이 헌법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못하도록,
정치가 공익보다 사익을 앞세우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책임을 묻기 위한 빛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새벽이 밝았다고
모든 어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거리에서 무너진 권위가
다른 곳에서 새로운 권위로 되살아날 수 있고,
개혁의 이름으로
또 다른 기득권이 자라날 수도 있다.
시민이 권력을 바꾸었다면
그다음에는 권력이 시민을 대하는 방식이
민주주의에 맞게 변해야 한다.
정권의 교체는 민주주의의 끝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 이후에 시작된다.
외교의 성과와 비용이
국민에게 투명하게 설명되는가.
한미동맹의 이익과 부담을
국회와 시민이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가.
남북관계의 변화가
정치적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 군사적 위험을 줄이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혁명은 과거의 기억으로 남고
새로운 변혁을 위한 몸부림이 시작될 것이다.
반대로 시민의 감시가
제도를 바꾸고,
제도가 권력을 통제하며,
권력이 국민의 삶을 개선한다면
그 빛은 거리의 구호를 넘어
국가의 운영원리가 될 것이다.
대통령의 자주외교 역시
그 빛 아래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미국 앞에서
얼마나 강한 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한국이
실제로 무엇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는가.
북한과
얼마나 자주 대화했는가가 아니라
한반도의
전쟁 위험이 얼마나 줄어들었지
교류협력, 평화통일의 대장정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그것이 시민이 물어야 할 질문들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두 개의 깃발을 들고 서있다.
왼손엔 자주.
오른손엔 동맹.
두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같은 방향으로 펄럭이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전작권을 임기 내에 반드시 환수하겠다."
그리고 말한다.
"한미동맹은 더욱 굳건히 하겠다."
두 말이 같은 입에서 나온다.
그 입이 어느 쪽을 먼저 향하는지
지켜보는 눈들이 있다.
워싱턴에서.
평양에서.
베이징에서.
도쿄에서.
자주가 어느 방향으로 작동하는지를
모두가 보고 계산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이 보고 있다.
가장 가까이에서 냉정하게
그렇다면
21세기 한국의 자주는 어떤 형국인가.
한반도는 오랫동안
늘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고
태평양 너머
워싱턴의 계산에 의해 주도되는
동맹이라는 구조가 강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미국은
미 군사력의 한국 배치를 권리의 이름으로
70 여년 간 해오고 있으며
주한미군은 치외법권적 특권 속에
미 본토 수호를 위한 작전을 최우선해 왔다.
주한미군은
겉으로는 북쪽을 막는 군대였으나
실제로는 더 큰 대륙 나라들을 상대로 한 전쟁의
전진기지이자 감시망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향한 작전은
공식의 언어에서 숨겨졌고,
한국 국민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동맹’, ‘평화의 사도’, ‘은인’이라는 말만 배워야 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알아야 시작되는데,
알 권리는 자주 동맹의 벽 앞에서 멈췄다.
이것이 바로
주한미군이 누리는 비밀주의의 본질이다.
안보라는 이름으로 비공개되고,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며,
국민의 알 권리는 충족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의해
유사시 한국 땅이 전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대만과 서해와 동중국해의 긴장이 전쟁으로 비화하면
그 불똥이
한반도에 번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 오래, 오늘날에도 역시 침묵하고 있다.
그 침묵은
정부의 국민에 대한 헌법적 책무가 이행되지 않은
직무유기 성격이고
한국 민주주의 공간이 좁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 기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경제, 군사 선진국이라는데
자주는 후진국 신세다.
이는 국민을 개돼지로 본다는 비판을 자초한다.
미국은 2차 대전종전 이후
한반도를
한국의 미래만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미 본토를 수호하는
최전방 저지선이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일본을 지키는 방패였고,
태평양을 지키는 방벽이었다.
그러니 주한미군의 존재는
미국 세계전략의 장치이면서
한국 안보의 약속이라 했다.
한국 정부도 같은 목소리로 따라하고 있다.
지난 70 여 년 동안.
이 기만적 구조 속에서
한국의 자주를 설명해야 하는 쪽은
제대로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주한미군 사령관은 말했다.
“한국은 중국을 겨누는 단검이다.”
또 어떤 날은
“떠 있는 항공모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말이 아니었다.
70년 전부터
이 땅은 이미 거대한 항공모함이었고
수많은 산맥과 강들은
냉전의 활주로가 되어 있었다.
오산의 하늘에는 보이지 않는 전파가 흘렀고
군산의 활주로에서는 밤마다 완전 무장한
전략폭격기가 출동 태세로 대비했다.
주한미군의
레이더는 북녘만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그 눈은 압록강, 서해를 너머
중국의 산둥과 연해주,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군항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국은 2006년
노무현 정부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해
중국과 러시아, 아태 지역을 상대로
수십년간 비밀리에 펼쳐왔던
주한미군의 군사 작전 태세를 공식화 했다.
미국은 이어 2016년 경북 성주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를 배치해
중국, 러시아에 대한
정찰, 감시 기능을 공공연하게 대폭 상향 조정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내 주한미군기지를 향해
일단 유사시 타격하기 위한 미사일 공격태세를 강화하면서
두 나라 합동 군사훈련을
동서해상에서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한국이 강대국간의 군사적 힘겨루기 과정에서
전쟁에 휩쓸릴 위험이 높아지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그에 대해 국민에게 설명한 적이 없다.
국민의 정치머슴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현실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헌법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진다.‘에 저촉된다.
그러나 역대 정부가 그랬듯이
이재명 정부도 한미동맹에 의해
주한미군에 대한 것은 비밀로 한다는 협약에 묶여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법리를 들이대고 있다.
정부가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직결된
동맹군의 비밀 군사행동에 대해
국가간 협약을 앞세워 정부의 헌법적 책무를 저버린다?
이런 나라는 21세기 지구상에서
한국밖에 없다.
국민보다 동맹을 우선하는 정치가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재명 정부가 빛의 혁명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오늘날 한국인은 여전히 주한미군의 역할이
“북한 방어”라는 한 문장만을 들으면서
미국을 천사와 같은 은인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고
주한미군 주둔비를 부담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서사만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세계의 장군들이나 국제전략문제 연구소들은
70 여 년 전부터
주한미군이 미 본토 수호를 위해 수행하는
세계전략을 주시하면서
중국과 러시아, 한반도와 태평양 지역에서의
강대국간 핵전략을 이야기했다.
이재명은 언젠가 말했다.
“기득권의 반발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칙과 특권을 걷어내는 개혁을 추진하겠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오래된 정부의 반칙과 특권을 걷어낼 때다.
주한미군의 70년 비밀주의.
국민이 알아야 할 진실을 감춘 채
‘대북 방어’라는 이름으로
대중국 전진기지를 운영해온 역사에 대해
이제는 국민 누구나 알아야 한다.
한반도는 누구의 항공모함인가.
누구의 단검인가.
누구의 전략기지인가.
그리고 동시에 물어야 한다.
주한미군에 대한 비밀주의가 지속되는 것은
한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것인데
한국의 민주주의를 말 할 수 있는가?
금수강산의 주인은 주한미군과 한국민 어느 쪽인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동맹의 비대칭성 속에
분단의 겨울은 지속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미완성일 것이다.
이제는 모두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동맹은 누구의 안전을 보장하는가.
국제법은 누구에게 먼저 닿는가.
미국은 한국에서 자국의 법치로 국익을 챙기는데
한국은 왜 법치조차 생략하고 침묵하는가.
국제법은 침략을 금지하고
주권의 평등을 말하지만,
현실의 질서는
그 문장을 왜 비켜가야만 하는가.
미국은 법을 말하며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으로
한국을 침묵하게 만들고 있는가.
그래서 한반도의 현대사는
전쟁사이면서 동시에
국제법의 실패사이기도 하다.
이재명 정부가 말하는
자주, 국민주권과 평화공존은
바로 이 실패를 넘어야 하는 과제다.
전작권 전환이 단지 군사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복원이라는 사실,
동맹의 현대화가 단지 효율화가 아니라
누가 지시하고 누가 따를 것인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이제는 숨기지 말아야 한다.
주권은 선언이 아니라 실천이고,
평화는 구호가 아니라 구조여야 한다.
이 땅의 미래는
비밀 속의 안전이 아니라
공개된 주권 위에 세워져야 한다.
동맹이 유지해야 한다면 종속은 끝내야 하고,
비밀이 강요되는 불합리는 타파해야 하며,
평화는 말하되
그 평화를 누가 비용으로 떠받치고 있는지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
분단의 선을 평화의 길로 바꾸는 일,
비밀의 군사질서를 공개의 민주질서로 바꾸는 일,
주권을 외교의 장식이 아니라
정치의 중심으로 돌려놓는 일을 더 미룰 수는 없다.
혹시 색깔공세에 시달려
권력 장악에 실패할 것이 두려워
선거에 악재가 될 만한 것은 절대 공론화하지 않는
정치공학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땅은 이미
너무 오래 비극을 배워왔다.
이제는 비극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비극을 해체할 차례다.
21세기 한반도 상황이
자주와 더 멀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어 시간이 급하다.
미국이 새로운 한반도 전략을 제시하면서
21세기형 분단 체제를
힘의 논리를 앞세워 새로 만들려는
조짐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는
북한의 핵, 미사일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고 있다.
“관리 가능한 긴장”이라는 이름 아래
핵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다는 식으로 시사한다.
트럼프는
북한 핵보유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북미수교가 될 경우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해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미 본토 수호를 위한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미국익에 최상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대북 매파 빅터 차마저 말했다.
“대북 방어체계 킬체인은 북한의 핵발사를 부를 뿐이다.
이제는 전쟁 억지로 가야 한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미국이 더 이상 한반도 비핵화를 원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의미라 한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가져도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미국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제시된다.
하지만 김정은은 어떤가?
둘은 몇년 전 싱가포르, 하노이에서 만나 협상했지만 결렬됐다.
그 후 세상이 바뀌면서
우크라이나가 증명했다.
핵을 포기하면 침공당한다.
이라크가 증명했다.
핵이 없어도 침공당한다.
리비아가 과거에 증명했다.
핵을 포기하면 지도자가 죽는다.
북한은 오늘날 북러, 북중 관계를 활발히 전개하며
국력을 키우고 있어 급할 게 없다.
그러나
이란 전쟁 실패를 덮으려는 트럼프는 급하다.
향후 트럼프가 먼저 연락하고
김정은이 천천히 답할 것이라 한다.
핵 동결, 부분 군축, 상호 인정이 거래될 때
서울은 아마도 기다리거나 통보받는 입장이 될 것이라 한다.
미국은 외교국방 정책에서
언제나 미국의 국익을 맨 먼저 계산한다.
그것은 미국의 권리다.
그렇다면 한국도
한국의 국익을 계산해야 한다.
그것 또한 한국의 권리다.
미국의 대통령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 관련 거래의 조건을 높인다면,
한국의 대통령은
국민의 부담을 따져 그 조건의 한계를 물어야 한다.
동맹을 지키기 위해
국민의 삶을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는
언제나 검증되어야 한다.
동맹은 강자의 자비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는 약속이어야 한다.
이제 한국은
자주 확보를 위해
세 개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첫 번째 문턱은 워싱턴에 있다.
그 문을 넘기 위해
한국은 동맹을 지키면서
자주 확보로 자신의 권한을 넓히려 한다.
그 과정에서 전작권 전환의 조건을 명확히 하고,
대미 투자와 안보 협상의 상호성을 확보하며,
주한미군의 역할과 역외 작전의 범위를
한국의 국익에 맞게 협의해야 한다.
두 번째 문턱은 휴전선에 있다.
그 문을 넘기 위해
한국은 군사적 억제력을 유지하면서
대화의 통로를 복원하려 한다.
지뢰와 총성이
정치적 오판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고,
북한의 군사적 행동에는 원칙 있게 대응하되
평화의 가능성까지 봉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 번째 문턱은 서울에 있다.
그 문을 넘기 위해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개혁은 공정해야 하고,
정책은 설명되어야 하며,
외교의 비용은 공개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한다면
어떤 외교적 선언도
국가적 합의로 굳어지기 어렵다.
세 개의 문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그 열쇠는 결국 하나다.
국민의 신뢰.
그 신뢰가 있어야
대통령은 미국과 협상할 수 있고,
북한과 대화하면서도 교류협력의 문을 열 수 있으며,
평화통일의 장기적인 전략이
정권의 임기를 넘어 지속될 수 있다.
한 나라의 미래는
정상회담의 악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철책 앞의 병사,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집값을 걱정하는 가정,
국회의 회의실에서 법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권력을 감시하는 시민의 손이
함께 그 미래를 만들어 간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자주가 환하게 빛나는 새벽이 올 것이다.
그러면
전작권 전환이 이루어지고
한국군이 한반도 방위의 책임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미국과 한국이
서로의 권한과 책임을 존중하는
성숙한 동맹을 만들어 갈 수도 있다.
북미가 협상 테이블에 앉아
핵과 제재, 안전보장과 평화체제를 논의하고,
남북이 총성 없는 접경을 향해
조심스럽게 첫걸음을 내디딜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의 길도 열려 있다.
전작권 전환이 지연되고,
대미 투자 부담을 둘러싼 갈등이 커지며,
북한의 핵무력이 고도화되고,
남북의 철책이 더 높아질 수도 있다.
국내 정치가 외교의 일관성을 흔들고
국가적 과제가 정파적 대립에 갇힐 수도 있다.
역사는 어느 한쪽의 소망만으로
길을 열어 주지 않는다.
의지에는 능력이 필요하고,
능력에는 제도가 필요하며,
제도에는 국민의 신뢰가 필요하다.
대통령이 자주를 말한다면
그 자주는 국민의 삶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동맹을 말한다면
그 동맹은 상호 존중의 약속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평화를 말한다면
그 평화는 선언문이 아니라
총성이 줄어드는 국경과
불안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으로 나타나야 한다.
강한 군대를 가지면서
전쟁을 피할 지혜도 가진 나라.
권력을 바꾸는 데 성공한 시민들이
권력의 작동 방식까지 바꾸어 가는 나라.
그것이 우리가 아직 도착하지 못한 곳,
그러나 끝내 도달해야 할 곳이다.
자주란 홀로 서겠다는 외침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이다.
평화란 적이 없다고 믿는 환상이 아니라
위협을 직시하면서도
전쟁 이외의 길을 찾아내는 용기다.
국격이란 세계의 강자 앞에서
큰소리치는 모습이 아니라
힘의 차이 속에서도
자신의 원칙과 책임을 지키는 태도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한 번의 승리로 완성되는 기념비가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권력을 나누고, 잘못을 고치며,
국민의 존엄을 지켜 내는
약속이다.
한반도의 밤은 아직 깊다.
태평양 건너에서는
거대한 나라들이 지도를 펼치고,
휴전선 너머에서는
철책과 지뢰가 침묵하고,
서울의 거리에서는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부딪힌다.
그러나 그 밤의 한가운데서
작은 불빛 하나가 꺼지지 않는다.
그 불빛은 대통령 한 사람의 것도 아니고,
어느 정당의 소유도 아니며,
어느 강대국이 허락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오래된 열망의 불빛이다.
그 불빛을 지키는 일.
동맹을 넘어 굴종으로 가지 않고,
자주를 넘어 고립으로 가지 않으며,
안보를 넘어 공포에 갇히지 않고,
평화를 넘어 환상에 빠지지 않는 일.
그 어려운 균형을
국가의 원칙으로 만드는 일.
그것이 오늘의 과제이며
내일의 역사다.
새벽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는 조건을 협상해야 하고,
누군가는 철책을 지켜야 하며,
누군가는 권력을 감시해야 하고,
누군가는 서로를 향한 증오 속에서도
대화의 문을 닫지 않아야 한다.
그 모든 노력이 모일 때
한반도의 밤은 조금씩 옅어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강대국의 지도 위에 표시된 작은 반도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하나의 나라로서,
전쟁의 기억을 평화의 지혜로 바꾸고
의존의 역사를 상호 존중의 질서로 바꾸며
분단의 철책 너머로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는 나라로서,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새벽을 맞이할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동맹은 약속이어야 하고,
자주는 책임이어야 하며,
평화는 포기할 수 없는 미래여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2026년 10월 현재 이재명정부는
집권층 내부 균열이 심각하고 야권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외치는 내치의 연장이라는 공식이 적용될
입지가 좁아지는 형국이다.
야당이 기세를 올리면서 윤석열 내란이후 벌어졌던
지지율 격차가 줄었다.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하겠다 했지만
국민이 고개를 저었다.
검찰 개혁을 놓고
내부에서 총질이 이어졌다.
강경파가 반발하고 대통령이 SNS에 썼다.
"능력도 안 되면서 큰 자리 요구하고."
그 말이 불씨가 되면서
내부가 흔들리는 가운데
DMZ 지뢰 폭발,
북한군 포로 비밀송환을 둘러싼
우크라이나와의 갈등이 겹치면서
야권의 색깔 공세가 거세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주를 향한
이 대통령은 외교 줄타기를 하고 있다.
높은 곳에 걸린 줄 위에서
자주와 함께, 동맹, 평화를 달성하려 한다.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두 번의 탄핵을 이뤄낸 국민이다.
대통령 두 명을 민주주의 이름으로 심판하면서도
오늘날 프랑스 시위처럼
폭력, 약탈, 방화 등은 한 건도 없었다.
시민의식, 평화적 혁명 역량은 세계 최첨단인
국민 지켜보는 가운데
이 대통령의
줄타기가 계속될 것이고 그 끝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하다.
줄을 끊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다.
내부의 균열이다.
내부가 버티면 줄이 버티고.
내부가 흔들리면 줄이 끊어진다.
그것이 지금 이 정부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가장 작은 것이면서
가장 큰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
전작권 환수 서명식이 있을 수도 있다.
한국 대통령이 한국군을 지휘하는
헌법 74조가 마침내 이행되는 될 수 있지만
또 다른 연기 통보가 있을 수도 있다.
새로운 조건이 추가될지, 골대가 또 이동할지 알 수 없다.
어느 쪽이 될 것인가.
그것은
워싱턴이나 평양 또는
베이징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서울이 결정한다.
서울의 정치가 서울의 국민이
두 번의 탄핵을 이뤄낸 그 국민이
언제든 다시 광장에 나올 수 있는 그 국민이 결정한다.
그 국민의 눈이
지금 줄타기하는 사람을 보고 있다.
얼마나 당당하게 걷는가.
얼마나 두려움 없이 걷는가.
어느 방향으로 걷는가.
그 걸음이
아직 쓰이지 않은 역사의 장에 쓸
문장을 향해 가고 있다.
언젠가
자주 속에 철조망 위에 진달래가 피고
판문점의 콘크리트 위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흐르는 날,
그날 비로소
한반도는
자주를 공기 속 산소처럼
모두가 당연시 하면서
누군가의 전략기지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땅으로
지구촌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을 것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