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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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태평양은 넓다.
서울에서 워싱턴까지 거리가 멀지만
워싱턴에서 나온 한마디는
서울까지 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동맹이라면 함께해야 한다.”
그 말은 비행기보다 빨랐고,
군함보다 빨랐으며,
때로는 외교관보다도 빨랐다.
백악관에서 나온 말이
국무부를 지나고,
국방부를 지나고,
의회를 지나고,
신문사를 지나고,
텔레비전 화면을 지나고,
서울의 정치권과 관료사회를 지나
마침내 국민의 귀에 도착하는 데에는
하루도 걸리지 않는 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에는
처음의 말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미국이 요구했다.”
잠시 뒤에는
“동맹국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국이 협조하지 않으면
한미동맹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마지막에는
“한국이 선택해야 한다.”
처음에는 부탁이었던 말이
도착할 때쯤에는
강력한 요구로 변신해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 말했다.
“호르무즈가 위험하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세계 경제가 위험하다.”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석유 수송로를 지켜야 한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말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한국도
도와야 한다.”
서울은 잠시 침묵했다.
한국은
호르무즈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석유는 필요했고,
무역도 필요했고,
세계경제도 중요했다.
그러니 질문은 어려웠다.
호르무즈를 지키는 것이
한국의 국익인가.
그렇다면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가.
군함을 보내야 하는가.
병력을 보내야 하는가.
호위만 하면 되는가.
정보만 제공하면 되는가.
미국과 함께하면 되는가.
아니면
미국의 전쟁에
한국군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는가.
서울의 회의실에서는
수많은 문서가 펼쳐졌다.
헌법이 펼쳐지고,
국제법이 펼쳐지고,
파병 관련 법률이 펼쳐지고,
한미동맹 관련 문서가 펼쳐지고,
국익을 계산하는 보고서가 펼쳐졌다.
그러나 회의실 밖에서는
이미 다른 계산이 시작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질문이었다.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말했다.
“동맹국들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
그 말은 짧았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그 한마디를 해석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였다.
외교관들은 의미를 분석했고,
국방부는 군사적 의미를 분석했고,
경제부처는 경제적 파장을 분석했고,
정치권은 정치적 파장을 분석했다.
언론은 제목을 뽑았다.
“미국, 한국에 역할 확대 요구.”
다음 날에는
“한미동맹 시험대.”
그다음에는
“한국의 선택, 동맹의 미래 좌우.”
신문 제목은
점점 커졌다.
대통령의 말보다
신문 제목이 더 큰 목소리가 되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신문 제목을 통해
미국 대통령의 말을 알게 되었다.
미국대통령의 뒤를 이어
관료들이 등장했다.
국무부의 관리가 말했다.
“동맹의 책임분담이 중요하다.”
국방부의 관리가 말했다.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상원 의원이 말했다.
“동맹이라면 더 기여해야 한다.”
전문가가 말했다.
“미국은 동맹의 기여를
중요하게 평가할 것이다.”
한 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의 말이 이어졌다.
마치 합창단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휘자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 첫 음을 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해 노래했다.
그러자 미국관리가 평화를 강조하는 세탁작업을 벌였다.
"우리는 그냥 동맹의 역할을 강조할 뿐이다."
이 말은 겉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속으로는 "니들이 알아서 무서워하라"는 의미였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제국주의가
민주주의 가치를 앞세워 국익을 취하는 외교적 압박의 선순환 구조라 한다.
서울 사람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정책 토론처럼 들렸다.
그러나 오래 들으니
압박처럼 들렸다.
더 오래 들으니
경고처럼 들렸다.
마침내 어느 순간부터는
송곳 같은 질문처럼 들렸다.
“한국은 어느 편인가?”
그 질문은
참으로 이상한 질문이었다.
한국은 이미
동맹국이었다.
그런데 왜
매번 충성을 증명해야 하는가.
한국과 미국사이
태평양을 건너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었다.
언론이었다.
미국의 신문과 방송에서
한국에 대한 기사들이 나왔다.
어떤 기사는 한국의 소극적인 태도를 지적했고,
어떤 기사는 한미동맹의 부담분담 문제를 분석했으며,
어떤 기사는 한국이 미국의 전략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가운데에는
미국 정부와 전혀 관계없는
독립적인 기자의 기사도 있었고,
정치적 견해를 가진
칼럼니스트의 글도 있었고,
싱크탱크 연구자의 분석도 있었다.
모두가 정부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한 뒤에는
이 모든 목소리가 한데 섞였다.
“미국이 한국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언론은 다시 보도했다.
“미국 전문가들도 한국의 역할 확대를 주장한다.”
또 다른 언론이 받아썼다.
“워싱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러자 정치권이 움직였다.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는 것 아니냐.”
관료사회가 움직였다.
“미국의 다음 조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여의도가 움직였다.
“혹시 한미동맹이 흔들리는 것 아닌가.”
한국 정치와 언론은
한미동맹 아니면 한국이 존재할 수 없으며
미국의 한반도 전략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의도
거대 여야당 의원 거의 전부가 한미동맹을 합창하는 현상은
미국이
1945년 점령군으로 진주한 뒤
한국 지배층을 철저히 훈련시켜
세뇌상태가 세습화되게 만든 공작적 노력의 결과라 할 것이다.
이른바 검은 머리 미국인이 된 그들은
남북교류협력과 평화통일 노력도
미 국익에
비춰 판단하고 행동하는
미국의 한국 거주 애국자 역할을 하고
광화문에 태극기와 이스라엘기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배를 움직인다.
여론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를 움직인다.
미국에서 나온 한마디가
서울의 신문과 TV에 실리고,
인터넷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정치인들이 그 논쟁을 인용하기 시작하면,
처음의 한마디는
완전히 다른 힘을 갖게 된다.
그 결과 미국 정부가
직접 한국 국민에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 사람들이
서로에게 그 말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화났대.”
“미국이 한국을 문제 삼는대.”
“동맹이 흔들릴 수도 있대.”
“그러니 빨리 결정해야 한대.”
어느 날
워싱턴에서 청구서가 날아왔다.
서울은 봉투를 열었다.
첫 번째 항목은
방위비였다.
두 번째 항목은
투자였다.
세 번째 항목은
무역이었다.
네 번째 항목은
방산협력이었다.
다섯 번째 항목은
중동이었다.
여섯 번째 항목은
우크라이나였다.
일곱 번째 항목은
인도태평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항목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동맹의 책임
서울은 계산기를 들었다.
더하기를 했다.
또 더했다.
그러나 합계가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지막 항목에
가격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맹의 책임은 얼마입니까?”
서울이 물었다.
워싱턴은 대답했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러면 어디까지입니까?”
“필요한 만큼이다.”
“필요한 만큼이 얼마입니까?”
“동맹이라면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
서울은 다시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참으로 편리한 청구서였다.
가격은 없는데
지불기한은 있었다.
청구서의 다음 장에는
우크라이나가 적혀 있었다.
전쟁은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이름도
그 전쟁의 문서에 등장했다.
한국의 방위산업,
한국의 무기,
한국의 탄약,
한국의 생산능력.
누군가는 말했다.
“한국은 자유세계의 일원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한국도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또 다른 질문이 나왔다.
“역할이란 무엇인가.”
무기를 생산하는 것인가.
무기를 판매하는 것인가.
군수지원을 하는 것인가.
직접 병력을 보내는 것인가.
어디까지가 경제이고
어디부터가 전쟁인가.
어디까지가 동맹이고
어디부터가 참전인가.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워싱턴에서는 답이 간단했다.
“동맹국이라면
기여해야 한다.”
서울의 시민은 혼잣말했다.
“기여라는 말은
참으로 넓구나.”
그 말 속에는
돈도 들어가고,
무기도 들어가고,
군함도 들어가고,
병사도 들어가고,
때로는
한 나라의 외교정책 전체가
들어갈 수도 있었다.
동맹에는
두 얼굴이 있었다.
하나는
함께 방어하는 얼굴이었다.
전쟁이 나면
서로를 돕고,
침략이 발생하면
함께 대응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군사력을 협력하여
공동의 안보를 지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다른 얼굴이 있었다.
한쪽의 세계전략이
다른 쪽의 지역정책으로 내려오는 얼굴이었다.
백악관에서 시작한 동맹이
어느 순간 중동으로 가고,
중동에서 다시 유럽으로 가고,
유럽에서 인도태평양으로 돌아와
마침내
한국의 군사정책과 경제정책과
외교정책까지 연결되었다.
서울은 두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것이 진짜 동맹인가.
둘 다 동맹인가.
아니면
하나는 동맹이고
다른 하나는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청구서인가.
어느 날
한미연합훈련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이란 관련 태도를 문제 삼으면서
연합훈련 축소를 언급했다.
그 말은
한국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물었다.
“이란과 한미연합훈련이
무슨 관계인가.”
어떤 사람은 말했다.
“미국의 동맹정책이다.”
다른 사람은 말했다.
“동맹에는 대가가 따른다.”
또 다른 사람은 말했다.
“미국이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동맹이란 서로의 국익을 존중하는 관계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행동을 평가하여
혜택을 조절하는 관계인가.”
그 질문은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서울의 어느 관청 회의실에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외교관이 앉아 있었고,
다른 쪽에는
군인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경제관료가 앉아 있었다.
탁자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미국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국익도 생각해야 한다.”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국내 여론도 중요하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헌법적 절차도 필요하다.”
모두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워싱턴을 보았고,
한 사람은 국민을 보았고,
한 사람은 법률을 보았고,
한 사람은 전쟁을 보았다.
그때 회의실 벽에 걸린 태극기가
바람도 없는데
조금 흔들렸다.
누군가 창문을 확인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태극기를 흔든 것인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의도 국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모였다.
어떤 의원은
미국과의 동맹을 지켜야 한다고 외쳤고,
어떤 의원은
한국의 주권을 지켜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한쪽은 말했다.
“동맹이 무너지면
안보가 무너진다.”
다른 쪽은 말했다.
“주권이 무너지면
국가가 무너진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틀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동맹과 주권을
서로 적대적인 단어로 만들어버린
정치의 구조에 있었다.
동맹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하고,
주권은 동맹을
합리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존재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만들어졌다.
그 순간
동맹은 신앙이 되었고,
주권은 반역처럼 오해받았다.
미국에는
수많은 전문가가 있었다.
외교 전문가,
국방 전문가,
중국 전문가,
북한 전문가,
한국 전문가,
동맹 전문가,
핵무기 전문가,
인도태평양 전문가.
그들은 보고서를 썼다.
보고서는
정교했고,
자료가 풍부했으며,
문장은 전문적이었다.
서울의 관료들은
그 보고서를 읽었다.
언론은
그 보고서를 인용했다.
정치인은
그 보고서를 근거로 말했다.
국민은
신문을 통해 그 보고서를 알았다.
그러자 어느 순간
미국의 전문가가
한국의 정책논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전문가가
한국의 선거에 직접 개입한 것도 아니고,
한국 정부에 명령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한국 사회의 정책 선택지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들었다.
“이 선택은
워싱턴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압력은
언제나 손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더 강한 압력이었다.
미국 대통령이 말한다.
“기억하겠다.”
한국의 정치권이 긴장한다.
미국 국방부가 말한다.
“동맹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의 관료가 계산한다.
미국 언론이 분석한다.
한국의 언론이 다시 보도한다.
미국 전문가가 경고한다.
한국의 정치인이 다시 인용한다.
그리고 아무도
한국 정부에 직접 명령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정부의 책상 위에는
하나의 질문이 놓인다.
“미국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 질문이
정책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
외부의 압력은
내부의 판단으로 바뀐다.
바로 그때
보이지 않는 힘이
가장 강해진다.
서울에서도
목소리가 있었다.
“미국이 요구했다고 해서
모두 들어줄 필요는 없다.”
“동맹과 파병은
별개의 문제이다.”
“한국군의 해외파병에는
헌법적 절차가 필요하다.”
“국익을 먼저 따져야 한다.”
“동맹은 상호적인 관계여야 한다.”
이 목소리 역시
언론을 통해 퍼졌다.
미국의 요구를 비판하는 기사도 나왔고,
미국의 정책을 분석하는 학자도 있었고,
동맹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시민도 있었다.
서울의 밤이 깊어졌다.
뉴스에서는
또 새로운 속보가 나왔다.
“워싱턴에서
한국의 역할 확대를 요구했다.”
다음 뉴스가 이어졌다.
“미국 언론은
한국의 선택을 주목하고 있다.”
또 다른 뉴스가 나왔다.
“전문가들은
한미동맹에 미칠 영향을 분석했다.”
그리고 마지막 뉴스가 나왔다.
“한국 정부는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텔레비전이 꺼졌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새벽이 되자
다시 봉투 하나가 도착했다.
서울은 봉투를 열었다.
이번에는
아무런 항목도 없었다.
방위비도 없고,
파병도 없고,
투자도 없고,
무기도 없고,
훈련도 없었다.
종이 한가운데
딱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동맹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서울은
오랫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답을 적었다.
“동맹은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잠시 생각한 뒤
한 문장을 더 적었다.
“동맹은 복종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다음날
서울의 누군가 동맹의 가격표를 만들었다.
안보는 얼마인가.
평화는 얼마인가.
주한미군은 얼마인가.
방위비는 얼마인가.
미국 시장은 얼마인가.
대미투자는 얼마인가.
반도체 협력은 얼마인가.
군사정보는 얼마인가.
그리고
한국의 정책 자율성은 얼마인가.
사람들은 가격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항목에는 숫자가 없었다.
누군가 물었다.
“왜 가격이 없습니까?”
가격표를 만든 사람은 말했다.
“주권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말에
누군가 물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매번
주권의 일부를
다른 항목과 함께 계산하고 있는가.
태평양은 여전히 넓다.
워싱턴과 서울 사이에는
또 다른 바다가 있다.
그 바다 위로
대통령의 말이 날아오고,
관료의 발언이 날아오고,
신문의 기사가 날아오고,
전문가의 보고서가 날아오고,
정치인의 해석이 날아온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그 모든 말을 받아
다시 국민에게 돌려보낸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요구가
하나의 여론이 되고,
하나의 여론이
하나의 압력이 되고,
하나의 압력이
하나의 정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목소리가 너무 많을 때
누구의 목소리가
정책을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대통령의 목소리인가.
관료의 목소리인가.
언론의 목소리인가.
전문가의 목소리인가.
기업의 목소리인가.
동맹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국민의 목소리인가.
호르무즈의 바다는
오늘도 출렁인다.
우크라이나의 전선에도
밤이 찾아온다.
워싱턴의 회의실에서는
내일의 전략이 만들어진다.
서울의 회의실에서는
그 전략에 대한 답을 준비한다.
그리고 광화문에는
사람들이 오고간다.
그들은
외교전략이라는 말을 잘 모를 수도 있고,
동맹의 구조를
복잡하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가 실패해서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그들의 삶이 바뀐다.
평화가 깨지고
살육전 속에 생명이 꺼지면서
지형이 바뀌고
어떤 가족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의 이름이
가슴에 새겨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전쟁을 결정하는 말은
가벼워서는 안 된다.
동맹을 말하는 사람도
가벼워서는 안 된다.
국익을 말하는 사람도
가벼워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제 모두 질문해야 한다.
미국이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한국이 무엇을 원하는가.
미국이 한국을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아니라,
한국 국민이
자신의 국가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질문을 닫지 말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질문할 수 있는 동맹이
진짜 동맹이고,
반대할 수 있는 동맹이
건강한 동맹이며,
협상할 수 있는 동맹이
지속 가능한 동맹이고,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는 동맹이
비로소 동맹이기 때문이다.
강대국의 목소리가 아무리 커도
주권국가의 최종적인 대답은
그 나라 국민의 목소리여야 한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